만일 (신의) 진리가 인간이 가진 재현의 수단을 통해드러날 수 없다면, 이에 대해서 화가들이 취할 수 있는 입장에는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진리를 그리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진실한 화가들은 회화를 통해 진리에 접근하려 하지만, 만일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면 그들은 그리기를 포기함으로써 자신들의 진실됨을 표현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중세 성상파괴주의자들이 화가들에게 강제했던 바였다. 화가들이 더 이상 그리지 않았던 것은 진리가 그려질 수 없다는 각성 때문이었다.  - P47

진리는 지식의 강박증적 한계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히스테리적 방황의 여정 속에서 발명되는 것일 수 있다는, 진리에 대한 중세적 전통의 수립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 P71

진리는 실존하는 것이아니라 부재하는 것이며, 부재의 형식 속에서 도래할 시간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기에 이처럼 도래할 진리를 예고하는 이미지는 우리에게 답을 주는 대신 질문을 던진다. 오직 질문하는 자만이 현재의 고정관념을 의심하고 그에 저항하며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때문이다.  - P84

서구인들은 모든 것을 알고자 했으며 알 수있다고 자신했다. 모든 강박증자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은 스스로가 구축한 지식의 한계 안에서 자신들의 세계가 폐쇄되고 있음을 인식할 수 없었다. 그들은 하나의 사물을 이해한다는 것이 이해를 구성하는 지식의 틀 속에 사물을 유폐시키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했다. 이미지를 선명하게 그려내는 행위란 결국 선명함의 틀 안에 이미지의 감각적 자유로움을 가두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르네상스-근대의 서구인들은 자신들이 구축한 바벨의 지식에 스스로 갇히는 신세가 된다. 바벨탑은 출구를 알 수없는 거대한 미로가 되어 서구인들을 가두고 당황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모든 강박증자들이 그러하듯이 인간은 그와 같은 미로를 탈출하기 위해 더욱더 강박적으로 변했지만, 그럴수록 미로는 더욱 협소해지며 그들을 조여왔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20세기의 양차세계대전은 바벨탑이 무너지는 결정적 계기였다. - P89

20세기 자본주의 기술 문명의 한가운데서 다시 중세가 시작되었다. 신이 죽었다는 단 한 가지 사실만 제외하고 중세는 그렇게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이제 서구 문명과 그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게 된 아시아 문명은 바벨탑과 교회 신전의 첨탑이 동시에 무너진 폐허의 한가운데에서 새로운 중세를 살아가야 하는 숙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 P90

라깡이 [세미나 21]에서 과학과 정신분석 담화를
동일시하려고 했던 프로이트에게 던졌던 이 명제, 즉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는, 고정점을 갖지 못한 사유의 숙명을 설명하고 있었다. 환상을 거부하고 꿈에서 깨어나려는 노력은 분명 진실한 태도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전략은 주체를 더욱 끔찍한 환상과 다름없는 우울증으로 내몰 수 있기 때문이다.  - P103

그런 의미에서 공백이란 우리 문명이 가장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마지못해 허용하는 역설적인 욕망의 대상인 것이다. 공백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는 주체는 현실적인 그 어떤 욕망의 대상에도 만족하지않을 것이며, 계속해서 현실 지배적 패러다임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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