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의 미친 여자
샌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지음, 박오복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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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대하고 나는 군중을 품는다‘라는 시로 확장해갔고 ‘나 자신을 축하하며 나 자신을 노래할 수 있었으며 《풀잎》의 모든 개정판에서 확신에 차 자신의 이미지를 재생산했던 휘트먼과 대조적으로, 에밀리 디킨슨은 자아 망각의 과정을 밟아나갔다.
점점 더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거의 먹지 않으며, 방 하나에 자신을 가둔 채 사람을 점점 더 멀리했다. 1861년에 그녀는 ‘나는 아무도 아니다!‘라고 썼다. 여성은 자신의 이름으로부터도 소외당했다. 여성의 이름은 아버지, 계부 또는 남편에게 얻어온 것이니 말이다. - P16

《다락방의 미친여자》의 기본적 주장에 대한 그들의 공격은 단순하고 그저 애처로운 두가지 진술로 요약할 수 있다.
‘남자도 고통받는다‘ 그리고 ‘내 아내는 그런 식으로 느끼지 않는다!‘ - P41

《율리시스》에서 스티븐 디덜러스가 말했듯, 부권 개념 자체는 ‘합법적 허구‘, 믿음까지는 아니어도 상상력을 요구한다. 남자는 자신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감각이나 이성으로 확인할 수없다. 자기 아이가 자신의 자녀라는 것은 그 아이의 존재를 자기 자신에게 설명하기 위해 되뇌는 말일 뿐이다. 그런 이야기속에 내재한 불안은 (가부장적 남존여비를 암시하는) 남성의 우월함에 대한 재확인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사이드가 묘사한 계보적 형상화가 구현한 허구처럼 말씀으로 보상하는 허구를 필요로 한다. - P76

모든 괴물 여자와 연관되어 있는 성적 혐오는 왜 그토록 많은 여자들이 스스로 바꿀 수 없는 여성 신체에 대해 혐오감을(또는 적어도 불안감을) 끊임없이 표현해왔는지 설명한다. 예술 작품이 되도록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치장하고 꾸미고 열광적으로 거울을 보는 일, 냄새와 노화 걱정, 항상 너무 곱슬거리거나 너무 반듯한 머리카락 걱정, 너무 야위거나 너무 뚱뚱한 몸 걱정)은 여성이 천사가 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여성 괴물이 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음을 입증한다. 더 의미심장한 것은 여성의 변덕이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남몰래 품고 있던 여성에게는 위압적인 훈계의 이미지로 다가왔다는 사실이다. - P122

인간이라는 동물의 욕구 가운데 가장 거대하고 강렬한 것은 자신의 생존, 쾌락, 자기주장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어린 소녀가 교육받는 각각의 ‘과목‘도 특정한 방식으로 병들게 할 것이다. 소녀는 아름다운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배우면서 자기 몸에 대해 불만을 (아마 혐오감까지) 학습한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은유적인 거울과 실제 거울을 강박적으로 들여다보면서 소녀는 자신의 몸을 문자 그대로 ‘축소시키기‘를 갈망한다. - P152

흥미롭게도 최근 몇몇 페미니즘 비평가들은 남성 (기원의) 문화와 여성 (식민화된) 문학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프란츠 파농의 식민주의 모델을 활용했다. - P183

문학적 부권 은유에 대한 논의가 암시하듯, 독자는 작가는 문학적 여성들은 모두 유일한 아버지 신을 모든 것의 창조자로 정의하는 가부장적인 원인론에 의해 오랫동안 위협받고 ‘당황‘해왔다. 또한 그런 우주적인 작가만이 지상의 모든 작가에게 유일한 합법적 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두려워해왔다.  - P361

이브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남성적 낙원에서 소외감을 느낀다. 이런 소외감을 가장 극적으로 상징하는 요소 중 하나는 자신에게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브는 남성 창조주의 이미지를 따라 만들어진 남자의 이미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녀의 전례 없는 여성성은 단지 결함 있는 남성이자 괴물의 비인간적인 육체 같은 기형으로 보일 뿐이다. - P450

브론테는 성경이 정당화하는 듯 보이는 여자에 대한 착쥐가어떻게 상업 자본주의를 영속화시키고, 상업 자본주의가 어떻게 인간성과 육체의 본성에 대한 경제적인 통제를 영속회시키고 있는지 폭로한다. - P677

사실 소설들이 진전됨에 따라 여성들은 파괴적인 가부장 사회의 구속을 내면화하고 이로써 점차 도피가 어려워진다. 여성들은 자신 안에 갇힌 채 출발 시점부터 패배하는 것이다.  - P699

따라서 남성 낭만주의자들은 ‘보이지 않는 삶‘을 존재론적으로 미화하지만, 브론테는 집 없음, 가난, 육체적인 매력 없음, 성차별, 여성에게 스스로 보이지 않음을 강요하는 전형적인 사고와 같은 세속적 사실을 탐구한다. 아널드 같은 남성 시인들은 좀 더 타당한 내적 자아를 경험하고자 하는 갈망을 표현하는 반면, 브론테는 단지 사적인 영역에만 머물도록 제한받는 여성들의 고통을 묘사한다. 이런 여성들은 보이지 않는 자아를 추구하고 찬양하는 대신, 그런 보이지 않음 때문에 자신이 희생되었다고 느낀다. 여성들은 세상에서 자신들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기를 갈망한다. - P702

음악회의 예술은 박물관과 교회 예술과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것이든 성스러운 것이든 내적 힘이나 도덕성이 결여된 가부장적인 형식을 지속시키는 잘못된 신화를영속화한다. - P734

가부장제 사회에서 마녀나 수녀가 되지 않은 여자들은 루시처럼 마녀와 수녀 모두에게 시달린다.  - P751

여자들은 자신을 대상으로서 경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죽음에서 깨어날 필요성과 깨어날 수 있는 능력을 둘 다 이해한다. - P764

이는 동시에 여자들이 전통적으로 ‘무대 뒤의‘ 역할을 맡아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자신들이 접근할 수 없는 공적 영역에 살고 있는 남자들과 가정생활을 하면서 공적인 주장과 사적인 현실 사이의 괴리를 독특하고 풍자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음을 드러낸다. - P777

모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 및 성령과 동일시되는 반면, 모든 여자의 머리는 육체와 동일시되는 만큼 가려야 하기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1장] 여성들은 퍼다[내실]의 장막처럼 베일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수치를 인정하고 복종한다.
베일을 쓰지 않은 살로메는 남자를 저주하고 파괴했지만, 성모 마리아는 베일을 쓴 여신으로 남았다. 성모 마리아의 순수성은 가리기 편하려고 머리를 박박 깎는 독실한 유대교 여자들과(결코 그리스도의 아내로 강등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영원히 베일을 쓰는 수녀들에 의해 공유된다. - P820

여성의 ‘성취‘ (분명 20세기 사상가들이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새롭게 정의한 19세기 개념)를 강박적으로 비판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여성의 시를 찬미할 때는 일반적으로 그 시가 ‘여성적‘이기 때문이고, 반대로 비난받을 때는 그 시에 ‘여성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놀랍지도 않다. - P924

최근까지 에밀리 디킨슨은 어디에선가
‘에밀리‘였고,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은 누군가에게 ‘브라우닝 부인‘이었다. 이름을 부르는 이 두 형식 모두 이름을 불리는 사람이 이례적인 상황에 있음을 강조한다. 둘 다 여자임을 강조한다기보다 숙녀임을(말하자면 여성 시인의 사회적 의존성, 결혼의 결과로 얻게 된 지위나 상처받기 쉬운 ‘처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 P954

...18세기말과 19세기의 거의 모든 여성 작가는 ‘미친 여자‘라는 씁쓸한 자화상을 자기 소설의 다락방에 은닉시켰던 반면, 에밀리 디킨슨은 스스로 미친 여자가 된 것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디킨슨은 (의도적으로 미친 여자로 분함으로써) 아이러니하게 미친 여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아버지 집의 방에 갇힌 무력한 광장공포증 환자가 됨으로써) 정말로 미친 여자가 되었다. - P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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