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진실한 허구를 생산한다면, 철학은 ‘허구적인 진실‘을 보여 준다. 여기서 허구는 문학적 창조와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 허구는 진실에 도달하려는 야망을 가진 담론이 취하는 수많은 전략에 기반한다. 여기서 글 쓰는 주체가 자신을 구성하고 스스로에 대한 재현을 변형시키게 해 주는 심리적 몰입이 일어나는데, 이는 주체의 주관적 책임을 유보시키고 그만큼 그를 좀 더 쉽게 허구적으로 재배치할 수 있게 해 주는 언어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 P162

사상가는 자기 개념들의 힘에 연루되는 동시에 그 개념들에 의해 정의된다. 따라서 그는 어떤 개념의 소유자일 뿐만 아니라 그 개념의 소유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단어나 주장이 그를 규정하여, 그가 마음대로 생각하고 존재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따라서 때때로 그는 그에게 재갈을 물리는 이 개념으로부터 자유를 되찾음으로써 사상의 자유를 지키려 노력한다. 사색의 에너지는 그러한 자유를 촉발시키고 또 동결시키는 단어들과 투쟁해야만 한다. 이처럼 사상가들은 등대 개념을 수정해 가면서 자신의 자율성을 주장한다. 때로는 그 개념을 초월한다는 구실하에 포기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 P199

어떤 개념의 문체적 기능을 관찰하는 것은 그것을 평가절하하거나 이론적 타당성을 과소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떤 철학자의 ‘언어‘에 관심을 갖는 것은 문체가 장식이 아닌 언어 질료임을 알게 해 준다. 사상은 합리적 논리를 따르면서도 정서와 상상계를 가지고 그 언어 질료에 참여하고 그것을 드러낸다. - P226

작가 철학자의 자아는 투명하지 않으며 인격과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 독자들은 이 지점에서 기만적이라고 느끼게 된다. 반대로 심지어 이론적 언어에서도 다중 인격이 드러날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독자에게는, 거짓말은 곧 글쓰기의 무대에서 자아를 분열시키고 확대하는 주체의 유연성이 될 것이다. 소설이든 고백록이든 편지는 철학 개론이든, 그것을 쓴 사람 역시 문을 열고 커튼을 걷은 뒤 가면을 착용한 채 무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가 무대 뒤로 사라지는 한 명의 등장인물이다. - P261

가명은 저자의 가면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정말로 그 저자이다. 그와 무관하면서 동시에 그와 거리를 둔, 다시 말해 모든 가능태들,
그이면서 그가 아니고 그일 수도 있는 인격들의 긴장 속에 독특한 방식으로 있는 저자인 것이다. 그는 이들을 통해 자기 삶의 진실을 말할 수 있다. - P275

하지만 보관되어 구성된 자료나 사후 찾아낸 사실이, 저자가 자기 삶에 대해 스스로 발언한 것보다 더 많은 진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진실은 외부의 시선으로 작성되었기에 분명 다른 성격을 지닌, 실존의 다른버전일 뿐이며, 진실의 특정한 개념에 묶여 있기 때문에 "이게 바로 재확립된 진실" 이라느니 "저자의 여러 이야기 중 이게 진짜 진실"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글 쓰고 사유하는 자기의 흩어짐에 대해 우리가 분석해 온 바에 따르면, 삶은 오히려 담론과 실천 사이의 긴장에서 구축되며, 진실은 거짓말을 통해 말해진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다. 이론과 삶의 명백한 모순은 허구, 사상, 이미지, 개념 속에 스스로를 투사한 의식의 다중적 삶의 일부다. 사후 발견된 사실들의 진실을 갖다대며 거짓말을 규탄하는 것은 유혹적이지만, 우리는 거짓말이스스로에 대해 말하고 언어적 존재로서 실존하는 한 방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른바 일상적 삶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이론적 삶‘ 또한 실제 삶에 속한다. 그것이 잠재적이라는 점은 그것을 무효로 만들지도, 거기서 어떤 현실을 제거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사상이 담긴 책을 낳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픽션이든 이론서든, 책은 실존의 확장이자 실제 체험한명제이며, 진실의 지위를 획득한다. - P296

추상적 단언의 심리적 동기에 관심을 가지면, 그 주장을 일상적 사유 행위와 관련짓게 되고, 저자의 ‘삶‘에서 진술의 역사적 · 개인적 맥락과 그 상황을 관찰하게 된다. 물론 삶이니 인격이니 저자니 하는 단어들은 여전히 매우 모호하며, 세부사항이 더 필요하다. 이 단어들은 실제로 확인 가능한 어떤 현실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구성물에서 생겨난 것들이다. 인생은 선험적인 통일성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이야기를 통해 연속성을 창조하는 전기와는 다르다. 모순되는 단편과 해석으로 구성되는 삶이 보여 주는 것은 개인적 진실보다는 체험과 담론 사이의 유기적 결합이다.
-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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