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국기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책이 아닌 애니메이션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년도 더 전, 방대한 세계관으로 유명했기에 한번 봐보자,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시작부터 왕따문제와 그에 소극적으로 동조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주인공 요코로 인해 물없이 고구마를 먹은 듯한 답답함에 짓눌려야 했다. 물론 이것은 훗날 사이다를 코로 뿜어낼 정도로 아주 시원하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해주는 클리셰였지만 사이다 맛을 느낄때까지 기나긴 고난의 행군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때 맛본 사이다 맛을 잊지 못해 홀리듯이 책까지 구입해 읽으며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매력, 다른 스토리를 지니고 있는 십이국기 이야기에 본격적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십이국기 소설시리즈는 현재 일본에서는 약 12권까지 나온 상태로써 1권은 92년에 출간되어 이후 2001년까지 시리즈를 계속해서 출간되었으나 그 이후로는 중단되어 오랫동안 공백이 있었다. (향간에는 작가가 본업에 충실하느라 그랬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쓸 만큼 썼고, 이후 시리즈에 대한 구상을 안해두셨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대로 미완으로 끝나는것은 아닌가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독자들의 요청에 의해(?) 작년부터 시리즈의 신작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십이국기의 팬인 김소형님이 인터넷으로 번역하여 올리신 것을 조X세상이라는 출판사에서 판권을 따다가 그대로 출간한 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전문번역가가 아니다보니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고 조악한 표지나 드넓은 행간 등등으로 인하여 팬들의 원성을 샀었으나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니 구하기 힘들어졌다. 십이국기의 일본내 재출간에 맞춰 라이센스 된 소설이 출시된다는 소문은 언젠가부터 꾸준히 돌았지만 너무 오랜 시간 소문만 돌고 돌아 팬들은 거의 포기 수준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때 드디어 엘릭시르에서 정식 출간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이번에도 헛소문 아니냐며 우사미 눈을 하며 상황을 주시하며 있었는데 오오, 정말 착착 출간이 진행되어 소사소사 맙소사, 드디어 가제본 판이 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새로 번역하신 추지나님의 번역은 일부 고유명사를 제외하고는 흠잡을 곳이 없다. 소설 배경 자체는 중국풍인데 일본어로 쓰여있다보니 중국풍->일본어->한국어로 번역하시는 과정에서 머리를 싸잡고 고민하셔야 했을 부분이 많을 것 같은데 번역이 정말 매끄러웠다. 단지 번역의 완성도는 약 60%이며 고유명사등은 독자들의 의견을 반영할거라던 엘릭시르측에서 가제본판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을 얼마나 반영할런지 의문이 들 뿐이다. 고유명사에 대한 독자들의 황망한 반응에 엘릭시스측에선 저자 오노주상한테 고유명사부분에 대해 허락을 받았다며 해명에 나섰는데 오노주상의 기준은 황희정승의 다 옳다시는 마음씀과 다를바 없다는게 팬들 사이에 널리 퍼진 통설이니 앞으로 출간될 시리즈의 고유명사들도 그다지 기대가 안되는게 사실이다.
십이국기 소설의 백미는 십이국이 있는 이세계의 배경에 대한 독특한 설정이다. 하늘이 십이국에 기린이라는 자비로운 생물을 주어 왕을 선택하게 하고, 그 왕은 불로불사로 어질게 나라를 다스려야하며, 정도(正道)에서 벗어나게되면 하늘에서 벌이 내려 실도(失道)의 병에 걸린 기린이 죽게되고, 자신을 왕으로 선택한 기린이 죽게 되면 왕 또한 죽게 된다. 한마디로 죽기 싫으면 알아서 잘해라 하는 시스템인데 책을 읽는 내내 우리나라에도 저런 시스템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물론 이 시스템의 폐해도 만만치 않긴하다. 죄없는 백성들이 왕과 기린의 애정 싸움 때문에 나라가 파탄나 쌩고생을 하게 되는 일도 생기니까.
어쨋거나 이런 세계관을 만든 오노주상에게 치얼스! 방대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만든 이야기로만 치자면 영국에 해리포터, 미국의 얼음과 불의 노래와 견줄만 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문학적으로 앞선 두 작품에 비해 부족한 점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부디 이번에는 오노주상이 시리즈 끝까지 마쳐주길 바랄 뿐이다. 오노주상 건강관리 잘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