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 시오리코 씨와 기묘한 손님들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1부 1
미카미 엔 지음, 최고은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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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에 대한 책 이야기를 좋아해서 인문학부터 수필, 소설에 이르기까지 책에 대한 책 이야기라면 가리지 않고 읽는 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것은 실존하는 책들을 가지고 책에 대한 책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다. 수필은 아무래도 개인적인 독서 이야기에 치중하다 보니 취향이 나와 맞지 않은 경우 읽는 재미가 덜할 수밖에 없고 인문학 역시 비슷한 경향을 지니지만, 소설은 등장인물 별로 다양한 책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경우가 많아 책에 대한 스펙트럼도 넓힐 수 있고 새로운 정보도 습득하게 되는 등 여러모로 더 즐겁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아한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 소설은 고서를 취급하는 비블리아 고서당을 배경으로 세월이 쌓인 다양한 책과 책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책들 중 내가 읽어본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고작해야 나쓰메 소세키와 다자이 오사무, 두 작가의 이름과 대표 작품 정도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사실들이 이 책을 읽는 장벽으로 작용하진 않았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 속의 주인공 고우라 다이스케가 책에 대해선 문외한이라 모든 책에 대한 정보가 그의 시선에 맞춰 꼼꼼하고 담백하게 제공되기 때문이다. 덕분에 막힘없이 수월하고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고우라와 함께 소설을 지탱하는 주인공은 비블리아 고서당의 주인장인 시노카와 시오리코다. 고우라의 고용주이기도 한 그녀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책은 그 자체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고서에 정통한 고서점 주인답게 어느 책이던 손에 들어오는 즉시 책의 이력을 파악해내고 특유의 통찰력까지 발휘해 책에 얽힌 사연을 단번에 유추해낸다. 책을 읽는 동안 그녀의 모습에서 셜록 홈즈가 연상되곤 했는데 고우라 역시 왓슨처럼 시오리코의 손과 발이 되어 열심히 움직이니 이런 인상은 책의 끝 부분으로 갈수록 강해졌다. 물론 둘은 우정과 신뢰를 기반으로 한 홈즈 왓슨 콤비와 달리 서로에 대한 이성적 호기심이 기반이 된 남녀 콤비라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지만 말이다. 이 묘한 콤비 외에도 솔직하고 당찬 시노카와의 여동생 아야카라던가 감초처럼 등장하는 고서전문 판매자 시다까지, 확실한 개성을 지닌 캐릭터들이 감초처럼 등장하여 이들의 이야기를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책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책을 읽기 전 라이트 노벨이라는 특성상 스토리가 빈약할 거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반은 예상대로였고 반은 아니었다. 스토리 라인은 전체적으로 기승전결이 있고 긴장감도 놓치지 않아 흥미진진했다. 짜임새와 구성도 꼼꼼하고 탄탄했으며 여러 책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와 그에 얽힌 이야기는 작가가 정말 책을 좋아하고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는 걸 여실히 보여줬다. 하지만 라이트 노벨 특유의 간결한 문체와 감성이 중간중간 튀었던 것은 예상대로였다. 특히 결말을 위해 스토리 군데군데를 부자연스럽게 틀어버린 것이 눈에 거슬렀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같은 반 아이가 준 생일선물을 거절한 게 나쁜 놈으로 찍힐만한 일인지 모르겠다. 개인 정보를 생판 남에게 알려준 건 욕먹을만한 짓이긴 한데 선물은 받기 싫으면 안 받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한일 정서상의 차이라 할 수도 있지만 나에겐 너무 억지처럼 느껴졌다. 

 

오래간만에 책에 대한 애정이 듬뿍 보이는 소설을 읽을 수 있어 즐거웠다. 작가의 필력과 스토리가 시리즈 뒷 권으로 갈수록 좋아진다니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도 기대된다. 남은 시리즈들도 찬찬히 읽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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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안녕, - 제1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이종산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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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제1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공모전에서 하상훈의 <아프리카의 뿔>과 공동으로 당선된 작품이다. 책 끝 부분에 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서 심사위원 네 명의 심사평과 두 당선 작가의 당선 소감 인터뷰가 실려 있다. 보통 심사평은 딱딱해서 안 좋아하는데, 심사평과 당선 소감도 본 소설만큼 괜찮았다. 내가 이 소설을 읽게 된 건 드라큘라 남자와 관 짜는 여자의 짝사랑 이야기라는 말을 들어서였다. 트와일라잇을 시작으로 뱀파이어부터 늑대인간, 심지어 좀비에 이르기까지 각종 이종족 남자와 인간 여자의 러브 스토리가 대세를 넘어 클리셰까지 되어버린 참이였지만 한국작가가 집필한 작품은 접한 적도 읽어본 적도 없었기에 식상할 수도 있는 소재가 되려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동안 한국작가가 집필한 이종족과의 러브 스토리가 별로 없는 것에 대해 막연히 문화상의 거리감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이 책의 뒷부분에 실린 소설가 윤대녕의 <아프리카의 뿔> 심사평을 읽고 무릎을 탁 쳤다.

 

"또 하나 마음에 걸렸던 점은 바로 시점의 문제였다. 이 소설은 서사의 주체가 소말리아 해적이면서 동시에 17세 소년(모하메드 이브라힘)이 화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 소설 양식에서 이야기의 주체는 본질적으로 모국어를 하는 작가이다. 말하자면 주체의 확보를 통해 통해 비로소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납치된 동일 13호의 선원들이 서사의 주체가 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 평소의 내 소설론적 믿음이었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한국작가가 집필했는데 외국인이나 서양문화를 배경으로 한 주인공이 등장하면 아무래도 받아들이는 독자 입장에선 어색할 수밖에 없다. 집필하는 작가 역시 해당 문화를 배경으로 한 작가보다 더 자연스럽게, 더 그럴듯하게 집필하긴 힘들 거고. 그동안 한국 작가나 일본 작가가 서양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들에 이질감과 거부감을 느꼈던 것도 다 이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소설은 드라큘라 남자와 관 짜는 여자의 사랑 이야기가 주요 스토리이긴 하지만, 크게 보자면 동물원의 명물, 말하는 코끼리가 살해당한 사건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각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동물원 사육사 민구는 관 짜는 마리를, 마리는 백 년 묵은 드라큘라를, 드라큘라는 자신을 드라큘라로 만든 미라를 좋아한다. 진심인 듯 진심 아닌 딴청 피우는 말들로 서로 밀당하는 것을 보면 드라큘라도 마리를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비 맞은 미라를 주워온 민구를 보면 민구가 미라를 좋아하는 것도 같다. 이처럼 무엇 하나 뚜렷해 보이지 않는 애매모호한 인간관계와 무의미해 보이지만 의미 있고 센스 넘치는 대화가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다. 대화가 쓸데없이 끝나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지론을 아주 모범적으로 지키고 있다는 심사평에 적극 공감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드라큘라가 마리에게 보낸 편지였다. 참 별거 아닌 담담하고 서툰 내용이었는데 그 담담함과 서툼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새삼 소설을 읽는 동안 킥킥거리느라 까먹고 있던 이 소설의 정체성(러브 스토리)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을 살아온 드라큘라를 통해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의 한국사회 문제들을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내고 작가 본인의 따스한 시선으로 풀어낸 것도 인상 깊었다. 작가 당선 소감 인터뷰를 보면 본인 나름대로는 구조를 치밀하게 짰다고 자부하던데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 구조가 후반부에 가서 무너진 것은 아쉬운 점으로 남지만 말이다.

 

전체적으로 가능성 있는 작가의 데뷔작이라 기분 좋게 읽었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이 새로운 스타일의 출연이라고 평가하던데, 과연 어떤 작가로 성장할지 기대된다. 

 

인상깊은 구절 ▼

 

그는 편지를 주고 돌아갔다. 잠이 안 와서 편지를 읽었다.

 

마리에게

 

안녕. 아주 오랜만에 글을 써봐. 아마 백년 만일 거야. 편지는 처음인지도 몰라. 옛날에 잡지에서 편지 쓰는 법을 읽었어. 안부와 날씨 이야기로 시작하면 되지. 세즈부스. 여기는 날씨가 좋아. 그곳은 어때?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도서관 이야기를 마저 해볼까. 도서관은 발각됐어. 모래를 담아둔 상자만 겨우 가지고 나올 수 있었어. 건물은 정부 소유로 넘어갔어. 나는 지쳤어. 그리고 한없이 무료했어. 한동안은 자기만 했어. 계속 그렇게 지낼 수는 없었어. 다시 미라를 찾아나섰어. 나는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지금 내가 정말 뭔지도 몰라. 그 여자가 미라인지 무엇인지도 왜 날 떠났는지도 몰라. 깨어 있는 시간을 뭘 하면서 견뎌야 할지 몰랐어. 미라를 찾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너에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지 않아도 됐어. 이야기가 끝나는 게 두려웠어.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네가 날 닮았다고 생각했어. 이제 이야기가 끝났는데 생각보다 괜찮네. 아주 막막할 줄 알았는데 별로 그렇지도 않아. 할 일이 있어서일까. 이걸 다 쓰면 널 깨우고 너랑 바보 같은 농담을 할 거야. 유치할수록 좋을 것 같아. 네가 했던 거짓말들이 농담이라는 걸 알아. 시간을 때우기에 농담만큼 좋은 건 없으니까.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석대로 할게. 시작은 날씨 이야기로 하고 끝은 이렇게 하는 거지. 이만 줄일께. 잘 지내.

 

ps. 네가 만든 관은 정말 마음에 들어. 이건 진담이야.

 

서툰 편지였다. 그러나 너무 지루한 밤이어서 편지를 읽고 또 읽는 수 밖에 없었다.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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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모메 식당 디 아더스 The Others 7
무레 요코 지음, 권남희 옮김 / 푸른숲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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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카모메 식당의 감독 오기가미 나오코가 영화 제작에 앞서 작가 무레 요코에게 의뢰하여 탄생하게 된 소설이다. 영화제작이라는 목적을 두고 집필된 소설이니만큼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이나 등장인물들의 성격 등이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은 영화에 비해 많이 부족한 완성도와 도둑 에피소드 정도다. 엄밀히 말하자면 영화도 연출과 미장센이 좋았던지 스토리가 매력적이었던 건 아니라 스토리적인 면에서 소설로서의 부족한 부족이 눈에 더 확 들어오는 것 같다. 

 

소설 분량도 책 한 권으로 엮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중편 정도의 양이다. 무레 요코 본인의 아이디어로 집필한 소설이 아니어서 그런지 끝 부분에 이르러선 소설 구조조차 흔들린다. 일전에 읽은 무레 요코의 소설 <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은 심심하긴 하지만 그 심심함과 일상성이 괜찮았던 소설이었는데 이 소설에선 그렇지 못하다. 글의 밀도조차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집필된 시놉시스에 더 가깝다. 그렇다고 소설이 아주 형편없다는 것은 아니고, 영화와 무레 요코의 기존 작품들을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아쉬움이 남는다는 말이다.   

 

소설에 무레 요코 특유의 일상성과 유머가 배어 있는 것은 좋았다. 등장인물들의 대화나 캐릭터들의 관계성도 재밌었다. 토미의 경우, 영화보다 소설 속 모습이 더 마음에 들었다. 이야기 속에서도 더 유기적으로 얽혔고. 하지만 분량을 억지로 늘린 게 역력해 보이는 후반부 도둑들 에피소드는 뭐라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서로 사과하고 사과받는 아주 단순한 내용으로 두 페이지를 날려버리기까지 해서 이전까지 제법 재미나게 읽었던 글의 내용이 희미해질 정도다. 만약 이 후반부 내용이 필수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에피소드였다면 영화처럼 카모메 식당의 매개인 오니기리로 에피소드를 이어나가는 편이 나았을 텐데. 쓰고 싶은 소설이 아니라 써야만 하는 소설의 한계였던 걸까 싶기도 하고.

 

영화의 여운을 느끼기에 과히 나쁜 소설은 아니다. 그렇지만 영화가 한국에서 인기를 끌지 않았더라면 출간은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다음번에 무레 요코의 책을 다시 읽게 된다면 영상매체의 인기에 힘입어서 가 아니라 그녀의 소설 그 자체가 좋아서 이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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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품은 맛있다
강지영 지음 / 네오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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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영의 소설이 재밌단 소문을 듣고 읽게 됐다. 담담한 문체가 첫눈에도 마음에 들었는데 책장을 넘길수록 드러나는 이야기의 흡입력 또한 대단했다. 소문에 솔깃하여 책을 선택했어도 크게 기대는 안 했다가 뜻밖에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책을 읽다 멈춘 동안에는 뒷이야기가 궁금해 머릿속이 온통 이 책에 대한 생각뿐이었고, 책을 읽는 동안에는 자꾸만 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이야기에 역습에 역습을 당하느라 휘청거렸으며 미리 스포일러 당하지 않기 위해 시야 안에 들어오는 다음 페이지를 애써 무시하느라 부처님 가운데 토막인양 참을성과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단언컨데 올해 읽은 책 중 재미만으로 따진다면 으뜸일정도로 재미있었다. 

 

살인사건 현장 청소 아르바이트생 박이경은 어느 날부터 자신과 정반대로 재력, 미모, 학벌 등 모든 걸 갖춘 연예인 지망생 단아름다운의 몸속에 들어간 꿈을 꾸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 그녀 역시 자신에 대한 꿈을 꾼다는 걸 눈치채게 된다. 다른 것은 박이경이 꾸는 꿈이 단아름다운의 6개월 전 과거라면, 단아름다운이 꾸는 꿈은 박이경의 하루 뒤, 즉 미래라는 것. 이 반년간의 차이와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 그에 얽힌 살인사건으로 인해 동화처럼 아름답기만 하던 꿈은 점점 악몽으로 변해가고, 급기야 꿈을 통해 서로의 몸과 시간을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사건은 점점 급박해져 간다.

 

꿈으로 한 몸을 공유한다는 설정은 다른 창작물들에서도 몇 번 본적 있었지만, 반년이라는 시간차와 전화를 통한 시간의 편집이란 규칙이 곁들여지자 상당히 독창적인 설정으로 재탄생 한다. 강지영은 서로에게 보이면 안 되는 비밀을 감추고 서로를 자신의 의도대로 조종할 수 있게끔 하는 이 규칙을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소설의 미스터리 한 분위기와 긴박감을 한껏 고조시킨다. 덕분에 읽는 사람은 강지영이 쳐놓은 함정에 걸려 이야기의 늪 속으로 점점 깊게 빠져들어 버리고 만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이의 삶을 동경하고 부러워하곤 한다. 잘 나가는 지인을 부러워하고,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연예인들을 동경하기도 한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심리에서 출발하여 구운몽과 비슷한 도착점을 갖는다. 모든 것을 가졌다고 부러워하고 동경했던 삶이 막상 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허울뿐이더라는 진리를 보여준다. 하지만 구운몽이 꿈에서 깨어나 모든 것을 돌릴 수 있었던 반면 이 소설은 꿈에서 깨어나도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는 현실로 이어진다. 이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의 후반부와 결말이 약간 아쉬웠다. 주인공이 구운몽처럼 꿈에서 깨어나 진짜 본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후반부에 들어 이야기의 전체적인 조임이 살짝 느슨해진 것도 아쉬웠다. 

 

강지영의 소설을 읽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이 소설이 아주 재밌고 짜임이 좋긴 하지만 <심여사는 킬러>라는 작품에는 못 미친다고 한다. 이 소설만으로도 충분히 감탄하고 즐겁게 읽었는데 이보다 더 나은 소설이면 대체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낼런지 궁금해진다. 오래간만에 재미난 한국소설을 읽을 수 있어서 아주 즐거웠고 앞으로도 강지영의 소설을 쭉 찾아 읽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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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국기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책이 아닌 애니메이션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년도 더 전, 방대한 세계관으로 유명했기에 한번 봐보자,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시작부터 왕따문제와 그에 소극적으로 동조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주인공 요코로 인해 물없이 고구마를 먹은 듯한 답답함에 짓눌려야 했다. 물론 이것은 훗날 사이다를 코로 뿜어낼 정도로 아주 시원하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해주는 클리셰였지만 사이다 맛을 느낄때까지 기나긴 고난의 행군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때 맛본 사이다 맛을 잊지 못해 홀리듯이 책까지 구입해 읽으며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매력, 다른 스토리를 지니고 있는 십이국기 이야기에 본격적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십이국기 소설시리즈는 현재 일본에서는 약 12권까지 나온 상태로써 1권은 92년에 출간되어 이후 2001년까지 시리즈를 계속해서 출간되었으나 그 이후로는 중단되어 오랫동안 공백이 있었다. (향간에는 작가가 본업에 충실하느라 그랬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쓸 만큼 썼고, 이후 시리즈에 대한 구상을 안해두셨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대로 미완으로 끝나는것은 아닌가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독자들의 요청에 의해(?) 작년부터 시리즈의 신작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십이국기의 팬인 김소형님이 인터넷으로 번역하여 올리신 것을 조X세상이라는 출판사에서 판권을 따다가 그대로 출간한 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전문번역가가 아니다보니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고 조악한 표지나 드넓은 행간 등등으로 인하여 팬들의 원성을 샀었으나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니 구하기 힘들어졌다. 십이국기의 일본내 재출간에 맞춰 라이센스 된 소설이 출시된다는 소문은 언젠가부터 꾸준히 돌았지만 너무 오랜 시간 소문만 돌고 돌아 팬들은 거의 포기 수준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때 드디어 엘릭시르에서 정식 출간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이번에도 헛소문 아니냐며 우사미 눈을 하며 상황을 주시하며 있었는데 오오, 정말 착착 출간이 진행되어 소사소사 맙소사, 드디어 가제본 판이 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새로 번역하신 추지나님의 번역은 일부 고유명사를 제외하고는 흠잡을 곳이 없다. 소설 배경 자체는 중국풍인데 일본어로 쓰여있다보니 중국풍->일본어->한국어로 번역하시는 과정에서 머리를 싸잡고 고민하셔야 했을 부분이 많을 것 같은데 번역이 정말 매끄러웠다. 단지 번역의 완성도는 약 60%이며 고유명사등은 독자들의 의견을 반영할거라던 엘릭시르측에서 가제본판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을 얼마나 반영할런지 의문이 들 뿐이다. 고유명사에 대한 독자들의 황망한 반응에 엘릭시스측에선 저자 오노주상한테 고유명사부분에 대해 허락을 받았다며 해명에 나섰는데 오노주상의 기준은 황희정승의 다 옳다시는 마음씀과 다를바 없다는게 팬들 사이에 널리 퍼진 통설이니 앞으로 출간될 시리즈의 고유명사들도 그다지 기대가 안되는게 사실이다.

 

십이국기 소설의 백미는 십이국이 있는 이세계의 배경에 대한 독특한 설정이다. 하늘이 십이국에 기린이라는 자비로운 생물을 주어 왕을 선택하게 하고, 그 왕은 불로불사로 어질게 나라를 다스려야하며, 정도(正道)에서 벗어나게되면 하늘에서 벌이 내려 실도(失道)의 병에 걸린 기린이 죽게되고, 자신을 왕으로 선택한 기린이 죽게 되면 왕 또한 죽게 된다. 한마디로 죽기 싫으면 알아서 잘해라 하는 시스템인데 책을 읽는 내내 우리나라에도 저런 시스템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물론 이 시스템의 폐해도 만만치 않긴하다. 죄없는 백성들이 왕과 기린의 애정 싸움 때문에 나라가 파탄나 쌩고생을 하게 되는 일도 생기니까.

 

어쨋거나 이런 세계관을 만든 오노주상에게 치얼스! 방대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만든 이야기로만 치자면 영국에 해리포터, 미국의 얼음과 불의 노래와 견줄만 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문학적으로 앞선 두 작품에 비해 부족한 점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부디 이번에는 오노주상이 시리즈 끝까지 마쳐주길 바랄 뿐이다. 오노주상 건강관리 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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