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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선 그대가 꽃이다 - 시들한 내 삶에 선사하는 찬란하고 짜릿한 축제
손미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손미나씨의 책을 읽어봐야지 하는 마음을 먹게된 건 늦은 밤 우연히 보게 된 TV를 통해서였다. 정확히 어떤 프로그램이였는지는 기억나진 않는다. 그저 책과 그림에 대해서 얘기하는 프로그램이였던 것과 그때 게스트가 손미나씨였다는 것만이 기억날 뿐이다. 그때 손미나씨는 몬드리안의 그림에 대해서 얘길 했는데, 몬드리안 그림에 얽힌 눈동자 이야기와 그녀의 말투, 태도, 분위기 모든게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뚜렷한 주관을 갖고 깔끔하고 똑부러지게 말을 하는 사람의 책을 읽어보는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엔 손미나씨의 책들 중에서 끌리는 책이 없었다. 스페인 여행기는 이미 꽤 세월이 지난 뒤였고, 그녀의 소설책에는 끌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미루고 미루다 만난 손미나씨의 책은 바로 이 책이 되어버렸다.
손미나씨의 전작들을 읽지 않았으니 그녀의 여행책이 어떠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책을 여행서로 분류한다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여행보다는 프랑스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와 첫 싹을 띄운 소설가로써의 고뇌에 방점이 찍혀 있는 에세이니까. 사실 나는 이 책이 손미나씨의 파리 생활기 정도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집어 들었다. 아마도 전작들처럼 여행기의 연장선상에 있는 에세이겠지, 라고 지레짐작을 했던 것이다. 물론 일부는 내 짐작이 맞았으나 상당부분은 내 예상과 달랐다. 그녀가 여행작가를 넘어서 소설가로써의 데뷔를 마친, 이제는 어엿한 작가라는걸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탓이다. 책의 제일 첫 페이지에 써 있는 편집자의 말처럼 그녀의 책은 이제는 어엿한 글쟁이로써의 무게감을 뽑내고 있었고 손미나씨 본인의 성숙한 자아까지 더해져 그냥 가볍게 읽고 넘길 수 없는 책이 되어 있었다.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다 본 중년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여성이 삶에서 얻은 깨달음이 담겨져 있었다고 하면 손미나씨에게 너무 실례되는 표현이려나.
한국인의 정신을 정이라고 한다면 프랑스의 정신은 똘레랑스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 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라는 이 정신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이기적인 성향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타인에 대해서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손미나씨를 비롯해 이 책에 나오는 많은 프랑스 이주민들은 파리를 몰인정한 도시, 시도때도 없이 흐려졌다가 맑아졌다를 반복하는 날씨처럼 변덕스럽고 정이 안가는 도시라고 말한다. 하지만 똘레랑스의 또다른 정신들은 그들에게 파리가 매력적인 도시임에는 틀림없다는 인정을 끌어내기도 했다. 우리네 정이라는 개념도 그렇지 아니한가. 사람냄새가 풍기는 따스한 감동을 줄때도 있지만, 지나친 관심으로 사람을 지치게 만들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똘레랑스 정신이 스며들어가 있는 파리 사람들은 비록 손미나씨의 글을 통해 간접체험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참 멋지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물론 모두 멋지고 부러웠던 것은 아니다. 나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일을 도전하고 또 마음껏 할 수 있는 사회적인 분위기와 마음껏 사랑하고 본인의 열정을 생이 다하는 날까지 불태울 수 있는 노인들의 모습이 참 부러웠다. 하지만 세계 제일의 화장품 문화와 패션계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본인들은 개성을 중시한다고 하호하는 그들의 모습은 불편했다. 가면 뒤에서 낄낄거리는 것 같은 위선이 느껴졌다. 그들이 진심으로 개성을 중시하고 본연의 아름다움을 중시한다고 해도, 지금 세계의 단일화된 미적기준의 시발점 중에 한 곳이 파리라는걸 그들도 부정은 못할테니 말이다. 때문에 유일하게 이 책에서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내용으로 화장품 회사 인터뷰 에피소드를 꼽아본다. 한 10년쯤 전에 한국의 획일화된 미의식에 대해 읽었다면 좀더 신선하게 받아들여졌을지 모르겠지만, 허구언날 해외에서 험담하듯 떠드는 내용을 다시 또 손미나씨의 책에서 읽게 된 것은 그저 지루한 뒷담화로 밖에 느껴지지 않아 유감스러웠다.
손미나씨는 책의 말미에 이르러 진정한 여행이란 변화를 가져오는 여행이라고 말한다. 문득 예전에 손미나씨가 어느 방송에 나와 스페인으로 떠나게 되면서 자기 인생이 바뀌게 됐다는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났다. 이 책에서도 손미나씨는 프랑스 여행을 통해서 자신의 변화된 부분을 자주 언급한다. 내 경우에도 그런 여행이 있었나, 곰곰히 생각을 해봤다. 처음에는 그런 여행은 없었던 것만 같았다. 하지만 좀더 깊이 생각해보니 여행을 통해 넓어진 시야라던지, 싸구려 물건은 사지 않게 됐다던지 하는 아주 작은 변화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들이 마침내 나를 다시 여행으로 이끌었다는 것도 깨닫게 됐다. 내 생각에 여행은 계기가 되는 것 같다. 내가 바뀔 계기. 변화는 그 이전에 이미 일어나고 있었지만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새로운 장소를 만나 자신의 변화를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책 한권을 통해서도 진정한 여행을 할 수 있는 셈이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 책은 나에게 꽤 많은 영감과 동질감을 줬고, 나의 사소한 부분이나마 변화 시켰으니까.
이 책에 한가지(앞서 언급한 화장품 회사 인터뷰를 제외한다면) 아쉬운 점은 책의 후반부분에 교정이 제대로 되지 않은 부분이 눈에 띈다는 것이다. 손미나씨는 이 책에서 소설을 집필할때 뒷심이 부족했다는 것을 슬쩍 언급하는데, 아마 그 뒷심이 이번 책에서도 제대로 발휘가 안된게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후반부가 급속히 마무리 된다는 느낌도 있고. 그렇지만 이런 아쉬운 점을 상쇄하고도 남을만큼 매력적인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즐거웠다. 손미나씨의 책을 읽는 계기가 된 몬드리안의 이야기를 이 책속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반가웠다. 앞으로도 손미나씨가 본인이 만족할 수 있는 집필활동을 이어나가길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