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중고상점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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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북스 서평단 선정으로 『수상한 중고상점』을 받았습니다. 지난번 신간 『용서받지 못한 밤』이 출간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빨리 다음 작품이 나와서 처음엔 놀랐는데요. 알고 보니 2011년에 『가사사기의 수상한 중고매장』으로 출간 후 절판되었다가 독자들의 요청이 쇄도하여 『수상한 중고상점』으로 재발간된 작품이라고 합니다. 띠지에 적힌 '일본 문학상 글랜드슬램 달성 작가의 경쾌하고 다정한 힐링 드라마' 라는 문구가 정말 딱 맞는 것 같아요. 프로필에 나온 것처럼 '의도적으로 경쾌하게 쓰인 작품으로 등장인물들의 마음 따뜻한 활약이 두드러 진다'는 말에도 공감하고요. 술술 읽히지만 그 바탕에 깔려 있는 따스함에 어느새 미소를 지으며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되는 소설이었어요.

봄, 까치로 만든 다리

여름, 쓰르라미가 우는 강

가을, 남쪽 인연

겨울, 귤나무가 자라는 절

역자후기

차례

소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중고상점에서 일어나는 사계절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어요. 각 장의 서두는 가사사기 중고상점의 동업자인 히구라시가 매번 사찰 오호지의 주지에게 얼토당토 않은 물건을 떠맡아 오는 것으로 시작해요. 아, 마지막 겨울만 빼고요. 마지막 장에 이르러 스님에 대한 히구라시의 태도가 '깡패같은 땡중'이라고 중얼거리는 것에서 '사랑스러운 사람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처럼' 스님을 부르는 변화가 있지만 그 또한 반전이 살짝 가미됩니다.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은 스님이랄까요. 하지만 마지막 장에서는 훈훈함을 자아내는 최종 보스같은 느낌이었어요. 전체적으로 추리소설의 진지함과 무거움보다는 추리를 골조로 하되 위트와 재치가 잘 버무러져 있는 따스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머피의 법칙』은 몇 번을 읽어도 배워야 할 내용이 바닥나지 않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실패의 예, 그것들을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는 재주꾼들의 말로 완벽하게 망라해놓은 게 바로 이 책이야. 인생에서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일단 실패란 무엇인가를 샅샅이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히구라시."

봄, 까치로 만든 다리중에서_P.13

가사사기 중고상점의 사장인 가사사기는 손재주가 있는 히구라시를 설득, 영입해 중고상점을 시작합니다. 그가 늘 몸의 일부처럼 지니고 읽는 책은 『머피의 법칙』이고,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홈즈를 자청하며 사건을 해결하고자 합니다. 물론, 가사사기의 추리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히구라시의 숨은 노력이 필수였지만요. 가사사기를 천재라고 믿는 여중생 나미를 위해서라도 히구라시는 가사사기가 추리를 할 수 있도록 돕고 물밑에서 사건을 해결해 나갑니다.

"인간은 매일매일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하고, 여러 가지를 동경하며 구부러지는 법입니다. 누구든지 그래요. 그렇게 흐르는 동안은 어디에 다다를지 모르죠. 제 생각에 구부러진다는 건 중요한 일이에요."

여름, 스르라미가 우는 강_P.143

나는 지금 이 자리를 떠나기가 정말로 아쉬웠다.

아쉽다는 것은 분명 잊고 싶지 않다는 뜻이리라. 소중히 하겠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언젠가 추억에서 꺼내서 자신의 힘으로 삼기 위해, 마음속 어딘가에 간직해 두겠다는 뜻이리라. 나는 사치코도 이 순간을 아쉬워하기를 딱히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자신이 공방에서 보낸 2년을 아쉬워했으면 좋겠다. 지금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언젠가, 어디선가, 아쉬워했으면 좋겠다. 추억에서 끄집어내 자신의 힘으로 바꾸었으면 좋겠다. 나는 사치코라면 반드시 그렇게 하리라 믿었다.

여름, 스르라미가 우는 강_P.145

히구라시는 때떄로 가사사기의 엉망진창인 추리를 위해 밤샘작업도 마다하지 않지요. 그리고 사건을 해결했다고 의기양양해진 가사시기의 뒤에서 히구라시는 조용히 사건의 진면목을 풀어내 도움의 손길을 건넵니다. 어려움에 처했거나 상심한 이들을 위해 최대한 티내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말이죠. 상대방을 위하는 따뜻한 배려 덕분에 이야기가 끝날 때 쯤에는 마음이 훈훈해지고, 다음 장의 이야기를 기대하게 되는 것 같아요.

"볼드리지의 법칙. '무슨 일에 말려들지 사전에 알고 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히구라시, 인생에 첫 번째로 필요한 건 행동력이라고."

가을, 남쪽 인연_P.158

가을에 이르러 가사사기 중고매장에 매일 와서 살다시피 하는 여중생 미나미 나미의 속사정이 드러납니다. 나미를 낙담시킬 수 없다고 되뇌는 히구라시의 마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는데요. 이마저도 마지막 장에서의 나미의 태도를 보자면 이미 진짜 사건을 해결하는 건 히구라시 임을 나미도 알고 있다는 걸 독자들은 눈치채고 맙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요. 앞에 나서서 의기양양하게 사건을 해결하는 가사사기나, 그런 가사사기를 천재라고 치켜세우는 나미나, 가사사기의 사건 해결이 성공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 애쓰는 히구라시나, 제가 보기엔 그저 웃음이 나오는 따스한 풍경인걸요.

달빛이 비치는 정원에 서서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는 동안, 가슴 속에서 미나미 씨 집안의 장래를 비관하는 마음이 점점 작아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아질 것이다. 리호와 나미도 다시 리본으로 서로를 꼭 묶는 날이 언젠가 반드시 온다. 애당초 별자리를 만든 것은 자연이나 신이 아닌 인간이다. 나미와 리호도 언젠가 반드시 자신들 사이에 튼튼하고 아름다운 리본을 그리리라. 꼭 둘이서 할 필요는 없다. 나랑 가사사기도 있다. 고조도 반드시 되돌아온다. 모두 함께하면 된다.

가을, 남쪽 인연_P.241

마지막으로 겨울이야기에서는 오호지의 주지 스님에게 매번 팔지도 못할 물건들을 엄청난 가격에 매입해 늘 지갑에 돈이 없던 히구라시에게 처음으로 지갑에 돈이 있는 날이 옵니다. 늘 팔지도 못할 물건을 실어 나르던 미니 트럭에는 아무것도 실려 있지 않지요. 이번에는 주지 스님에게 물건을 팔고 돈을 받았거든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주지스님에게 귤을 먹으러 오라는 전화를 받기 전까지만해도 분명 두둑한 지갑에 기쁨에 찼던 히구라시였건만, 절에 가서 귤을 수확한 다음에 판도가 바뀌었지요. 역시나 히구라시는 스님께 당할 수밖에는 없는 처지인가 봅니다. 후훗!

쳐다보자 가사사기는 콧물 두 줄기를 흘리며 울고 있었다. 한가운데만 붙은 입술 양옆이 실룩실룩 떨렸고, 그 곁으로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자 나도 갑자기 콧속이 찡해져서 바로 얼굴을 돌렸다. 가사사기가 눈물을 터뜨린 이유도, 내가 울고 싶어진 이유도 명확하게는 모르겠다. 모르지만 나는 어쩐지 오늘 여기에 오길 잘했다 싶었다.

"모두 가지각색이구나."

겨울, 귤나무가 자라는 절_P.278

'주인공 가사사기와 히구라시가 운영하는 중고상점은 늘 적자에 허덕이지만, 행복과 감동은 모자라지 않는 수상한 곳이다. 독자 여러분도 행복하지 않을 때, 행복하고 싶을 때 이곳을 찾는다면 다정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 역자의 말처럼 읽고나면 가슴 한 켠에서부터 따스함이 물씬 차오르는 소설이었어요. '이 세상에서 일어는 다양한 일들이 최대한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는 방향으로 흘러가면 좋겠다'는 작가의 바람에 저 또한 같은 마음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희로애락이라는 가사를, 트릭이라는 멜로디에 얹어 독자에게 선사'한다는 미치오 슈스케의 이야기를 앞으로도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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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기찬 노년과 빛나는 죽음을 맞으라 - 헬렌 니어링이 뽑아 엮은, 나이듦과 죽음에 관한 지혜의 말들
헬렌 니어링 엮음, 전병재 옮김 / 빈빈책방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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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빈책방의 서평단 선정으로 헬렌 니어링이 뽑아 엮은 『활기찬 노년과 빛나는 죽음을 맞으라』 를 받았습니다. 타이틀의 부제처럼 '나이듦과 죽음에 관한 지혜의 말들'이 가득 담겨 있어요. 헬렌 니어링이 날짜와 원전을 세밀하게 추적하는 과정을 거쳐 삶과 죽음에 대한 글들을 발췌해 엮은 책입니다.

책머리에

1부 훌륭한 노년

2부 어떻게 죽을 것인가

3부 죽음, 굉장히 좋은 일

역자의 말

찾아보기

목차

우리는 우리 자신의 깨달음에 깊이를 부여할 수 있으며, 우리 삶의 각 시기에 배운 것들을 남들에게 나눠줌으로써 우리 자신을 충만케 하고 남들에게 보탬이 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 완성될 수 있다.

책머리에 중에서

훌륭한 노년은 경험의 극치요, 한 생애의 걸작이다. 우리 안에는 좋든 나쁘든 우리를, 그리고 세상을 발전시키고 변화시킨 행동과 생각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어떠한 목표를 향해 왔는지 우리의 내적 자아는 알고 있다. … 여기 이 글들은 잃어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들이다. 사람들은 인간의 궁극적 운명에 대해 오랫동안 깊이 생각해 왔다. 그들의 생각으로부터 무언가 배울 수는 없을까. 좋은 말은 한데 꿰어진 진주알과도 같기에 소중하게 품어야 한다.

책머리에 중에서

이 책의 의도는 책머리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먼저 살아간 이들의 지혜를 나눠주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잃어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소중한 글들을 진주알을 꿰듯 엮어내어 읽은 이로 하여금 삶과 죽음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1부 「훌륭한 노년」에서는 누구나 만나게 되는 죽음을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글들이 수록되어 있어요. 우리는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지만, 어떻게 살아내야 아름다운 노년을 맞이하여 궁극적인 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 생각하게끔 합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삶을 배우지도 못한 채 이 세상과 이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살고 사랑하며, 성장하고 나아가기 위해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맥스 프리덤 롱, 『살아 있는 신비한 과학』, 1949 _ 본책 P.54


2부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는 1부의 연장선 상에서 죽음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잘 준비해야 하는 것임을 일깨우는 글들이 담겨 있어요. A.D 180년에 쓰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부터 비교적 최근의 도서들에 이르기까지 발췌한 도서의 목록도 무척 방대합니다.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정수만 뽑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을 텐데 '내가 깨달음과 영감을 얻었듯이 독자들도 그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바친다'라는 작가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어요. 그런 마음으로 이렇게 좋은 글들을 발췌해 낼 수 있었겠지요.

바로 다음 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매 순간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언제라도 죽음이 닥쳐올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두려워하지 말고 침착하게 살아가야 한다.

아널드 토인비, 『죽음에 대한 관심』, 1968 _ 본책 P.94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웃음과 평화를 간직하고 지나온 세월과 우리 자신의 용기에 고마워하면서,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올라프 스테이플던, 『최후의 인간과 최초의 인간』, 1930 _ 본책 P.101

삶은 여름 꽃처럼 그리고 죽음은 가을 낙엽처럼 아름답게 만드십시오.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길 잃은 새들』, 1917 _ 본책 P.106

당신은 배를 탔고 항해를 했다. 이제 해안에 닿았으니 배에서 내려야 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A.D. 180 _ 본책 P.118

3부 「죽음, 굉장히 좋은 일」에서는 우리가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죽음이 과연 정말 나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 해답을 제시합니다. 삶과 죽음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지요. '죽음은 무대의 끝이지 여정의 끝이 아니'라는 오리버 로지 경의 글처럼 죽음은 끝이 아니라 어쩌면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한 가지 사실은, 이 세상에 머무는 것은 더 큰 과정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멜컴 머거리지, 『반쯤ㅈ 죽음을 사랑하며』, 1970 _ 본책 P.145

강과 바다가 하나이듯 삶과 죽음도 하나이다.

칼릴 지브란, 『예언자』, 1934 _ 본책 P.161

이것은 죽음이 아니라 탄생, 즉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또한 잃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 즉 어둠 뒤에 오는 햇살이다.

마거릿 캐머런, 『일곱 가지 목적』, 1918 _ 본책 P.166

하루살이가 아닌 영원을 향한

배움이 될 글을 단 몇 줄만이라도

매일매일 읽는 것은 참 좋은 습관이다

랠프 월도 에머슨, 「지성의 찬양」, 1871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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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잊지 말아줘
알릭스 가랭 지음, 김유진 옮김, 아틀리에 드 에디토 기획 / 어반북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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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반북스 북클럽 <디어리더> 1기에 선정되었습니다. 어반북스에서 처음 선보이는 그래픽 노블, 『나를 잊지 말아줘』의 두툼한 양장 도서를 받았어요. 표지를 본 순간 순식간에 하늘이 노을빛으로 물드는 것처럼 마음에 먹먹한 그리움이 스며들었습니다.

『나를 잊지 말아줘』는 알츠하이머 할머니(마리루이즈), 미혼모이자 싱글맘인 엄마(발레리) 그리고 레즈비언 딸(클레망스)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머니는 줄곧 살아왔던 집을 떠나 요양원에서 지내지만, 증상이 심해지자 어린 시절의 기억속에 머물게 되면서 요양원에서 자꾸 탈출하려는 시도를 벌입니다.

할머니가 가고 싶어하는 곳은 다름 아닌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바다 근처, 절벽 위의 작은 집이었어요. 계속되는 탈출 시도에 요양원에 불려간 엄마와 딸은 할머니에게 안정제를 투여해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집으로 모셔 올 수 없는 처지라서 엄마는 화학요법에 동의하고 말아요. 그런 엄마를 보고 딸 클레망스는 엄마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하는 마음과 그만해! 엄마가 옳아, 하는 양가적인 감정을 갖습니다. 다음 날 할머니를 보러 간 클레망스는 다분히 충동적으로 요양원 사람들 몰래 할머니를 모시고 탈출합니다. 할아버지가 몰던 낡은 차에 태워서 말이죠.

클레망스는 앞으로 남은 시간을 요양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될 할머니가 가엽습니다. 자신이 할머니의 집에서 보낸 유년 시절을 떠올리며, 할머니 역시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체감해요. 그래서 할머니의 옛집으로 모셔다 드리고 싶었지만 그곳으로 가는 여정은 결코 쉽지 않았어요. 이야기는 클레망스가 할머니와 떠난 마지막 여행을 사건을 담당한 경찰들의 질문을 통해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할머니와 함께한 여행의 끝이 어쩐지 짐작이 가서 뭉근한 슬픔을 안고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습니다. 긴 여정의 초반부에 클레망스는 할머니와 함께 보라색 꽃을 따서 차에 장식해요. 할머니와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꽃을 던지고 놀던 찰나의 기억은 클레망스가 두고두고 떠올릴 소중한 장면이 아닐까 싶어요. 그 보라빛 꽃은 나를 잊지 말라는 꽃말을 지닌 물망초였습니다.

할머니는 클레망스가 누구인지 잊어버기도 하고, 한밤중에 집을 찾아 밖으로 나가기도 해요. 머물러 있던 모텔에서의 짧은 만남으로 클레망스는 갖고 있던 전재산을 탈탈 털려요. 기름값이라도 벌기 위해 할아버지에게 배운 손기술로 주사위 게임을 하다 싸움이 일어나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클레망스는 순간순간 소중한 기억들을 떠올려냅니다. 늘 바쁘게 일하던 엄마가 유일하게 일찍 돌아왔던 수요일. 일주일에 가장 좋아했던 그날의 기억과 언제든 돌아오라며 자기 편이 되어주었던 할머니의 모습 같은 소중한 기억들을 말이죠.

우여곡절 끝에 클레망스와 할머니는 바다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할머니는 잠시나마 온전한 기억을 찾고는 바다에 데려와 준 클레망스에게 고마움을 표현합니다.

클레망스, 그 어느 때보다 살아있는 것 같구나

마리루이즈 할머니의 말_P.161

잊어버렸다.

내가 정신이 나갔구나.

그런데 더 나쁜 건,

기억이 돌아올 때야.

마리루이즈 할머니의 말_P.174

할머니의 집까지 이제 얼마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클레망스는 무리해서 운전을 감행해요. 그리고는 할머니의 말처럼 '너무 늦은 때'는 우리의 생각보다 일찍 찾아오는 것을 몸소 깨닫게 되지요. 자동차 사고로 다친 할머니를 업고 한참을 걸어간 클레망스는 드디어 할머니의 옛집에 다다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유년의 기억부터 현재까지 할머니와의 여행으로 여러 개의 기억을 터널을 지나온 클레망스. 조사를 마치고 나온 클레망스가 엄마를 꼭 껴안고 무슨 말을 건넸을지 저는 알겠더라고요. 집에 돌아온 클레망스가 우체통에서 발견한 것은 할머니의 엽서였어요.

※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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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트 베니핏 - COST BENEFIT
조영주 외 지음 / 해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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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성비를 주제로 한 엔솔러지, 『코스트 베니핏』의 서평단에 선정되었어요. 지난 번에 읽었던 『환상의 책방 골목』의 조영주, 이진, 정명섭 작가가 또 의기투합했네요. 가성비를 주제로 다섯 명의 작가가 펼치는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단편은 조영주 작가의 「절친대행」입니다. 소설의 맨 앞장 타이틀 아래에 '당신의 친구가 되어드립니다'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요. 소설의 주인공인 재연은 학창시절부터 '늘 누군가와 함께'였지만 삼십대가 되자 편하게 만날 상대가 없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지만 '언제든지 불러낼 수 있는 친구, 이른바 절친'은 없었지요.

어느 주말 홀로 노천카페의 4인 좌석을 차지하고 있던 재연의 눈에 일수 명함 사이에 떨어져 있는 '절친대행' 명함이 들어옵니다. 외로움을 참다 못해 방문했던 네일아트의 요금보다 저렴한 금액에 망설이다가 명함을 챙겨 가방에 넣어두지요. 재연은 주말마다 만났던 명혜와의 연락이 뜸해지자 조바심을 냅니다. 연예인 덕후인 명혜의 끝도 없는 자기 자랑과 덕질이야기는 듣기 지겹지만 그마저도 없다면 혼자 있는 주말을 견뎌야 하니까요.

친구가 없는 건 쓸쓸하다고 생각하며 버스에서 내리는 할머니를 바라보던 재연은 정류장에서 할머니를 기다리는 친구를 발견하고 이내 시야가 뿌예집니다. 이를 계기로 절친대행을 해 주는 (주)프렌드엔코 강남점에 방문해 친구 명혜가 가입한 서비스를 확인하지요. 명혜와 똑같이 등급제로 운영되는 절친 서비스 중 가장 비싼 요금인 '천만절친'을 신청한 재연은 절친의 첫 만남을 위해 때 빼고 광을 냅니다. 하지만 제일 상위 등급의 절친인 선희는 등산복을 입은 '아줌마'였어요. 실망은 잠시뿐, 재연은 이내 선희에게 빠져들게 됩니다. 이 절친 대행의 끝은 예감하시는 대로 희극과는 거리가 멀지요. 절친 대행은 그저 절친 '대행'일뿐 사원인 선희도 (주)프렌드엔코의 최절친 대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그저 돈벌이의 수단으로밖에 여기지 않는다는 게 여실히 드러납니다.

'고독을 잊게해 줄 누군가'를 바라는 이들에게 '친구를 빌려준다'는 매력적인 서비스, 혹시 이용해 볼 의향이 있으신가요?

갑자기 당신의 혼자력은 안녕하신지 궁금해집니다.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시나요? 잘 못 지내고 계신다고요? 그렇다면 제가 좋은 서비스를 소개해 드려야겠군요. 절친대행이라는 서비스가 있는데……

작가의 말_ 당신의 혼자력은 안녕하신가요 중에서_P.44

소설을 읽지 않았을 때라면 모를까, 워워~~ 저는 작가님의 제안을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


두 번째 단편은 김의경 작가의 「두리안의 맛」입니다.

코로나를 뚫고 태국 여행을 하는 파워블로거 강윤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요. 여행 블로거라기 보다는 맛집 블로거에 더 가깝지만 파워블로거 팸투어에 초청되어 책도 출간했던 경력으로 태국 팸투어 기자단에 선발되었어요. 코로나 시국에 태국이 얼마나 안전한지를 보여주는 것이 목적인 여행에서 윤지는 틈나는 대로 인스타에 소식을 업데이트 합니다. 여행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담아 올린 게시글에 일용직 노동자로 보이는 스파이더맨이 댓글을 달아요. 처음엔 불쾌하기만 했던 그의 댓글은 점점 윤지에게 스며들어 그의 생활을 들여다보게 만듭니다.

문득 여행이란 멋진 풍경을 낯선 사람들과 함께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리안의 맛 중에서_P.58

SNS에는 좋은 기분과 의도된 연출만 올리는 윤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만은 않았지요. 피와 진물이 나는 코끼리 등에 올라타야 하는 코끼리 트래킹과 자꾸 치근덕 거리는 털보, 그리고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듯 보였던 무테안경의 갑작스런 풀빌라 침입에 공포심을 느낍기도 하지요.

그래도 눈앞의 노을은 태어나서 본 그 어떤 노을보다 아름다웠다. 윤지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어쩌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아름다움일지도 모르니까.

두리안의 맛 중에서_P.87

단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했던 공짜 여행, 윤지는 여행에서 돌아오며 스파이더맨의 SNS에 이런 댓글을 답니다. '여행하는 동안 SNS에 올린 첫 진심'이었지요.

공짜 여행 별로였어요

두리안의 맛 중에서_P.88

윤지는 방콕행 비행기에 오를 때만 해도 '가성비 갑' 여행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하지만 블로거로서의 정체성과 맞바꾼 고가의 태국 여행은 스스로를 '블로거지'라고 느끼게 만들었으니 오히려 가성비 마이너스 여행 '가성비 을' 여행이 되어버렸다.

작가의 말 중에서_P.89~90


세 번째 단편은 이진의 「빈집 채우기」입니다. 수록된 단편 중 가장 공감이 많이 되는 이야기였어요. 빈집 채우기는 말 그대로 결혼을 앞둔 커플이 빈집을 채우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가성비에 걸맞게 최대한 가격 비교를 하고 혼수 품목을 정하며, 꼭 필요한 것들을 효율적으로 구매하려고 애씁니다. 주인공은 결혼해서 남부럽지 않게 잘 살고 있는 친구의 집에 가서 이것만은 꼭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게 있느냐는 질문을 하지요. 친구는 비장한 표정으로 "식기세척기"라고 말합니다. 사건의 발단은 혼수 품목에 없었던 식기 세척기를 사느냐 마느냐로부터 시작해요. 식기 세척기보다는 플스를 들이고 싶은 남친과 실랑이를 하게 됩니다.

'최신형 게임기를 살 수 없다면 식기세척기도 살 수 없다'는 남친을 두고 주인공은 심각하게 고민을 합니다. 그 고민은 결혼을 진행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까지 뻗어나가요. 즉석 떡볶이와 떡볶이의 차이를 알면서도 취향을 고려하지 않는 등의 사소한 문제에서 비롯된 서운함까지 떠오르면서 감정의 골은 점점 깊어가지요. 그러던 어느 날, 백화점의 카페에서 완벽하게만 보였던 친구 가족의 모습을 목격합니다. 떼쓰는 아이와 방관하는 남편, 사람들의 수근거림에 수치심으로 달아오르는 친구의 얼굴을 보며 주인공은 아무것도 사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필요했지만 남친밖에 떠오르지 않던 주인공에게 때마침 남친이 등장합니다. 주인공이 그렇게 먹고 싶어했던 즉석 떡볶이를 고등학교 앞 단골 가게까지 가서 사 온 것이지요.

어쩌면 이 모든 졸렬하고 궁상맞고 불평등한 조건들을 무릅쓰고 결혼을 하고 마는 이유는 겨우 그거 하나뿐인지도 모른다. 친구도 그랬을까? 다들 그러고 사는 걸까? 나만 바보같이 속고 있는 건 아닐까?

빈집 채우기 중에서_P.130

모르겠다며 일단 떡볶이가 담긴 비닐 봉지를 받아 들이는 주인공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는 건 비단 저뿐만이 아닐 거예요. 사소하게 여겨지는 일상속에서 감정의 변화무쌍함을 솔직하게 드러내 준 작품이랄까요. 결혼을 앞두고 갈팡질팡하는 주인공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되는 소설이어서 더 즐겁게 읽었습니다. 『환상의 책방 골목』 에 수록된 「모노크롬하트를 찾아서」도 참 따스했는데요. 그 때는 일상적인 책방이라는 공간에 들어온 판타지가 제 마음을 끌었다면, 이 작품은 현실 세계의 디테일에서 충분히 공감이 되는 이야기였어요.

그 어떤 타인과도 교류하지 않고 온전히 혼자 힘으로만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어떤 경지에 도달해야 그럴 수 있을지, 소설 주인공으로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오래 산 집의 장판이 들뜨고 식탁이 흔들거리는 것은 제대로 된 물건을 사지 못해 일어난 불상사일 수도 있지만, 살아온 세월을 생각하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가성비를 추구하지 못했을 때의 분한 마음도, 가성비를 획득할 때의 짜릿한 희열도 모두 인생을 조금이나마 덜 외롭게 꾸며주는 것이라고, 요즘은 그렇게 생각하려 합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_P.132


네 번째 단편은 주원규의 「2005년생이 온다」입니다. 한얼고등학교 1학년 1반의 사적 공부 모임 '2005년생이 온다'가 공식 출범하게 되는데요. 멤버는 그 모임의 주체자인 '자유주의'와 장차 게임 업계의 혁명가가 될 거라는 '조병수', 학구열이 넘치는 '유혜리'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공부의 목적은 단 하나야.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조기 은퇴.

뭐?

우리, 학교와 인생을 조기 은퇴하자고. 그게 우리 모임 '2005년생이 온다'의 정확하고도 간결한 모임 취지야.

2005년생이 온다 중에서_P.145

모임의 목적도 목적이지만 자유주의가 하는 말들과 행보는 갈수록 그가 싫어하는 '꼰대'와 같아집니다. 결국 모임은 와해되고 말지요.

태어난 것 자체가 가장 우수한 성능을 장착한 것일진대, 그게 아니라 자라면서 경쟁하고, 비교하고, 비교당하면서 점점 한 개인이 상품이 되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씁쓸한 마음을 한 편의 소설에 담아봤습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_P.166

작가의 말에 담긴 것처럼 제게도 이 소설은 참 씁쓸하고 유쾌하지 못한 이야기였어요.


소설집의 마지막 단편은 정명섭의 「그리고 행성에는 아무도 없었다」입니다.

「그리고 행성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짐작하시는 대로 애거사 크리스티의 대표작 중 하나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모티브로 한 작품입니다.(중략) 그래서 저는 미래에도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미래가 무조건 낙관적이고 장밋빛일 리는 없으니까요. 가성비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단편이지만 독자 여러분에게 긴 여운을 남겼으면 좋겠습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_P.214~215

작가의 바람처럼 소설은 제게 짧은 이야기지만 긴 여운을 남겨주었어요. 한 편의 SF 영화를 보는 듯한 감각이었지요. '비상 탈출 캡슐을 타고 낯설고 외딴 행성으로 비상 착륙' 하는 열 명의 인물들을 카메라가 비추듯이 보여줍니다. 그리고 외딴 행성으로 무사히 착륙한 그들에게 어디선가 노래가 들려오지요. 이후 상황은 그 노래의 가사와 딱 맞아떨어집니다. 각기 다른 범죄를 가졌으나 처벌 받지 않은 열 명의 인물들이 맞는 최후는 그리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리고 행성에는 아무도 없었다'라는 재부팅 암호가 주는 여운, 그리고 암호와 동일한 제목은 모티브에 아주 충실하게 여겨졌습니다.

가성비에 관련된 다섯 개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는 이 소설집은 조영주 작가님이 기획한 세 번째 엔솔러지라고 해요. 기획력도 기획에 맞는 이야기를 꾸려 내는 능력도 탁월하지 않나 싶습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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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지 못한 밤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놀 / 2022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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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표 문학상을 휩쓸었다고 하죠. 미치오 슈스케의 신간, 『용서받지 못한 밤』을 읽었습니다. 서평단에 선정되어 책을 받았어요. 띠지에 적힌 '내 딸이 아내를 죽였다'는 자극적인 문장에 궁금증이 일었는데요. 네 살배기 딸이 어떻게 엄마를 죽이게 되었는지를 작가는 프롤로그에서부터 툭 던져놓습니다. 우연히 일어난 사고로 인해 아내를 잃은 유키히토는 딸 유미를 지키기 위해 경찰과 상대 운전자에게 사건의 경위를 비밀로 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아내는 세상을 떠났지만 홀로 딸을 키우며 나름대로 평온한 나날을 보내는데요. 사건이 일어난지 15년이 지난 어느 날, 유키히토의 가게로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부터 미스터리 소설의 진면목이 시작됩니다.

-비밀을 알아.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싸늘해졌다.

-자세히 말하면 내 정체도 들통날 테니 간단하게 말하자면, 사고를 친 건 당신 딸이야. 당신은 그걸 알면서도 감췄고. 지금까지 쭉.

그리고 남자는 마치 비장의 카드를 내밀듯 이렇게 말했다.

-엉겅퀴를 키운 것도…… 난 다 알아.

제 1장 평온의 종말과 협박중에서_P.31

의문의 전화를 받은지 사흘 후, 유키히토는 가게의 손님으로 찾아온 남자가 전화를 건 사람인 걸 알아챕니다. 스트레스로 인해 잠을 자지 못하던 그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아요. 병원에서 과로라는 진단을 받고, 가게와 붙어 있는 집으로 돌아온 날 유키히토는 누나 아사미와 딸 유미에게 '여러모로 지쳤어. 잠깐이라도 떠나자'고 이야기 합니다. 협박 전화로부터 일단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겠지요. 이때, 유미가 평소 존경하던 사진 작가의 작품을 꺼내 들며 그 사진의 배경이 된 곳을 가고 싶다고 해요. '존경하는 사진가가 찍은 사진과 똑같은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면서요. 밤하늘을 수놓은 하얀 별과 그 위를 지나는 별똥별이 찍힌 사진의 장소는 30여년 전 아버지와 유키히토 남매가 도망치듯 떠나온 고향, 하타가미 마을이었습니다. 유미의 기말고사 작품 사진(말사)을 위한 여행이라는 표면적인 이유 아래에는 30여년 전 유키히토 가족에게 일어난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싶은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어요. 어찌보면 아내를 죽인 네 살배기 딸 아이와의 사건은 유키히토의 원가족에게 생긴 사건을 밝히기 위한 페이크였을지도 모르겠네요. 비밀, 딸 그리고 엉겅퀴라는 중첩된 소재를 통해 이야기는 점차 과거의 이야기와 맞물리기 시작합니다.

30년이 지났지만 혹시나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유키히토와 아사미는 변장을 하고 프리랜서 작가가 되어 포토그래퍼 유미와 함께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취재를 합니다. 사건의 전모는 잡힐 듯 잡히지 않아요. 죽은 자는 말이 없지요. 몇 달 전 뇌출혈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살아있었다면, 그래서 터놓고 얘기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이야기는 30년 전 마을에서 해마다 열리던 산울림제의 전날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동네에서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유키히토의 어머니는 산울림제에서 마을 사람들과 나눠 먹을 버석국(버섯국)을 만들기 위해 신사로 차출되지요. 그리고 그날 밤 어머니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넙니다. 아내를 잃은 아버지는 복수를 꿈꾸고, 1년 뒤 산울림제 날 버석국을 나눠먹던 시간, 신사에 벼락이 내리칩니다. 그 벼락을 직격으로 맞은 아사미는 한쪽 귀의 청력을 잃고 온몸에 흉한 흉터를 지니게 되지요.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유키히토도 측면으로 번개를 맞아 부분적으로 기억을 잃고 맙니다. 그날의 사건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어요. 마을의 유지로 갑뿌(갑부)라 불리던 네 명의 남자가 버석국을 먹고 병원에 실려 옵니다. 그 중 두 명은 죽고, 두 명만 살아남아요. 유키히토의 아버지는 사건의 유일한 용의자로 지목을 받지만 증거가 충분치 않았고, 아사미의 증언으로 혐의를 벗어나게 됩니다.

쫒기듯 고향을 떠나올 때 차에 오르는 아버지의 말을 유키히토는 똑똑히 기억합니다.

난 틀리지 않았어.

제 2장 기억의 붕괴와 공백중에서_P.92

고향을 떠나 새로운 터전에서 새출발을 하려는 아버지에게 아사미는 "아빠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일갈하고는 분가를 해서 따로 지냅니다.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경찰에게 거짓말을 한 아사미.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개선되지 못하지요. 하지만 정말 아사미가 아버지를 지킨 것일까요? 누가 누구를 위해 희생했는지, 누가 누구를 지킨 것인지는 이야기가 흘러 흘러 마지막 장에 이르러야 알 수 있어요.

"왠지는 모르지만 지금도 아주 뚜렷이 기억나는 일이 있어."

감정에 떠밀리고 현실에 농락당하고 기쁨과 슬픔 사이에서 피가 날 만큼 입술을 꽉 깨물지만, 그래도 행복만 꿈꾸며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를 어디선가 보고 있는 존재가 있을까. 아버지가 한 일. 누나가 한 일. 나와 기에가 한 일. 하지 않은 일. 15년 전 그날, 어린 유미가 아빠에게 베푼 다정한 마음씨. 꺼져버린 목숨.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후회. 그걸 전부 보고 있는 존재가 어딘가에 있을까.

"같은 꽃인데 키우는 곳마다 키가 다른 게 신기해서 고모한테 물어봤었지."

분명 아야네의 말대로일 것이다.

"그랬더니 해님을 보면 쑥쑥 클 거라고 가르쳐줬어."

이 세상에는 어떤 신도 없다.

에필로그 뇌신중에서_P.422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다 마지막에 가서야 수수께끼가 풀리는 소설, 『용서받지 못한 밤』이었습니다. 다 읽고 나니 마지막 문장에 여운이 많이 남아요. 과연 이 세상에는 어떤 신도 없는 것일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그 반대인 건지, 아니면 둘 다인 건지는 받아들이기 나름이겠지요. 과거의 사건을 기조로 하여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야기. 오랜만에 읽은 일본 소설인데 매우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엎치락뒤치락 한 기분이랄까요. 작가 스스로 "이 작품이 앞으로 내가 쓰는 작품들의 막강한 라이벌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 책인 만큼 미스터리 물을 좋아하신다면 봄밤에 읽기 좋은 소설이 아닐까 싶습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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