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깊은 철학 50 - 세계의 지성 50인의 대표작을 한 권으로 만나다
톰 버틀러 보던 지음, 이시은 옮김, 김형철 감수 / 흐름출판 / 201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출판사 측의 배려로, 신간인 철학 개론서를 받아 볼 수 있었다. 제목은 다소 도발적인 <짧고 깊은 철학 50>, 기본적인 개론서 볼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처음에 철학 책들을 볼 때 느낀 점은, 접근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었다. 그래서, 좋은 안내자를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나는 개론서나 안내서를 보는 것을 싫어했었다.
 
그러나 솔직하게 생각해서, 그것은 나의 오만이었다. 어쨌든, 개론서라는 것은 그 분야를 입문할 때 가장 탁월한 책임에는 분명하다. 좋은 개론서의 요건은 이 책의 제목이 말해주듯, 짧아야 하고, 나름 중심 논제를 벗어나지 않아야 하며, 주제에 관해서는 되도록이면 깊이 있게 다뤄야 한다. 그러나 시중에 나온 인문 교양서들은 이런 좋은 조건을 갖춘 책을 만나기란 드물다. 그저 상업적인 인문학 붐에 이끌려, 영혼 없는 말들을 보기 좋게 포장한 책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책은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좋은 안내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 장점이겠다. 철학이란 학문, 특히나 여러 사상가들의 논의를 짧은 글로 표현하기란 솔직히 내공이 필요하다. 나 역시도 여기에 나온 저자 중, 이마누엘 칸트, 헤겔, 하이데거의 책을 생각 없이 봤다가 멘탈이 급격하게 붕괴된 경험이 있다. 따라서 이 책을 볼 때, 내가 과문해서 이해하지 못한 사상가들을 중점으로 봤었다.
 
일단 이 책은 부담감이 없어서 좋다. 철학이라는 아주 난해한 학문을, 부담 없이 서술하려는 저자의 노고가 엿보였었다. 서술 자체에서 최소한의 전문 용어를 쓰기 위해 노력했고, 부득이한 철학 용어들은 맨 뒤에 단어를 설명하는 부분으로 보완했다.
 
책의 구성은 50명의 철학자들을 소개함과 동시에 그 철학자들의 저서 중 1권을 집중적으로 이야기한다. 대체적으로 철학자의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진 저서들을 소개하곤 했었다. 그리고 뒷부분에는 '또 다른 철학의 명저'라고 하여, 지면상 다루지 못한 다른 철학자들의 이름과 저서를 짤막하게 다뤄준다. 50명의 철학자와 그 철학자들의 저서를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고, 나머지 50명의 철학자들과 그들의 저서는, 짧게 다루고 있다. 즉 토털 100명의 사상가를 다루고 있다고 봐야겠다.
 
 내가 봤을 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현대의 철학자들까지도 포함해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예를 들어보면, 놈 촘스키, <정의란 무엇인가>로 돌풍을 일으켰던 마이클 샌델, 검은 백조 이론으로 예외성에 대한 주장을 제기한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그리고 최근 노벨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 등등의 현세를 살아가는 철학자들까지도 다루고 있다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나 역시도 사실 철학이라 하면, 고대와 근세를 가장 중시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데, 이 책에서 다룬 여러 근대와 현대 철학자들의 사상을 파편적으로나마 볼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고, 특히나 내가 알지 못 했던 근현대의 사상가들에 대해서 흥미 유도와, 몰랐던 현대 철학자들의 저서들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는 점이 있었다. 실제로 이 책을 보면서, A.J에이어, 대니얼 카너먼 등의 저서를 위시리스트에 넣어 뒀다. (사견을 달자면 카너먼의 명작 <생각에 관한 생각>에 경우, 번역이 아주 발 번역이라고 한다. 원서를 볼 것을 추천한다.)
 
그리고 책의 구성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이 함께 읽을 책이라는 부분, 각 테마별로 철학자의 저서 이야기가 끝나고, 함께 읽을 책이 나오는데, 그 추천 책들 역시도, 이 개론서에 소개된 책들로만 구성됐다. 따라서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보는 것도 좋겠지만, 함께 읽을 책을 따라가면서 필요한 주제, 테마를 정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보통 추천 독서나 같이 읽을 책들의 경우, 너무 많은 책들을 열거해서, 같이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게 만드는 것이 추천 도서 목록인데, 그런 부분에서 이 책의 제시 방법은 아주 합리적인 구성이라고 느껴졌다.
 
좋은 점을 굳이 더 꼽자면, 이 책의 맨 첫 부분, 감수의 글의 내용이 아주 좋다. 철학이란 학문은 그냥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배우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봐야 하는 학문인데, 특히 이 감수의 말은 철학을 배우려는 초학자들에게 아주 좋은 글이라고 생각했다. 김형철 교수가 쓴 감수의 글인데, 왜 철학을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으니, 굳이 꼭 따를 필요는 없더라도 참고하길 권해본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몇 가지로 단점을 이야기해보자면, 일단 철학의 계보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점이다. 어쨌든 이런 계보에 대한 부분은 초학자가 보기엔 다소 흥미를 잃을 부분이긴 하겠지만, 무시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예를 들어, 이 책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편을 보고, 느낌이 와서 <순수이성비판>을 무턱대고 사서 보면 사실... 이 개론서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어렵다. (물론 칸트의 저서는 전문인이 봐도 내용 자체가 어려운 책이지만... 일단은 철학의 계보에 관해서 예시를 들고자 하니 이 부분에만 집중해주길 바란다.) 왜냐면 칸트의 저서를 보기 위해서는 데카르트의 저서를 데카르트의 저서를 보기 위해서는 중세는 건너뛰더라도 플라톤의 대표 저서를 봐야 한다. 특히 서양 철학은 이런 '계보' 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다소 이런 부분에서 일반 독자들이 어려움을 느끼겠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계보는 알려주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한다. 헤겔을 읽으려면 칸트를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하고, 쇼펜하우어 역시도 칸트를 알아야 함은 마찬가지다. 잘 요약되고, 잘 설명하고 압축한 것은 좋지만, 세부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철학의 숲을 조감을 한 번 해 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아님 적어도 책의 뒷부분에, 최소한의 철학의 계보를 좀 알려줬으면, 어땠을까?라는 부분, 물론 이런 부분은 철학사와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겠지만.... 아쉬운 부분이다. 마치 가지만 깊고 짧게 알려주려고 노력했지, 나무에 대한 조감은 이뤄지지 않았다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두 번째, 책 제목을 서양 철학이라고 명명하면 어땠을까 한다. 저자는 동 서양의 사상을 밝혔다곤 하나, 동양의 철학자와 철학서가 소개된 것은 공자와 <논어> 뿐이다. 이 부분에서 굉장히 아쉬움을 느꼈다. 서양인의 입장에서 저술된 개론서라서, 서구의 저서가 많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지만, 이 부분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양의 철학이 물론 오늘날에 공헌한 것이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양 철학이 서양 철학보다 못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런 부분에서 이 책은 기존의 서양인들이 가지고 있는 우월주의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어쨌든 책 뒷면을 보니 저자는 이와 비슷한 류의 개론서를 테마별로 많이 출간했다. '내 인생의 탐나는 심리학 50' , '내 인생의 탐나는 자기계발 50' , '내 인생에 탐나는 영혼의 책 50' 등등... 그 광고 문구들을 읽어보니, 철학 고전들이 영혼에 책에 속하는 것도 많았고... 분류에 대한 모호함이랄까, 아무튼 그런 느낌도 들었다. 이 책은 제목을 달리해서 나온 것이지만, 사실상 '내 인생의 탐나는 철학 50'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그래도 예전에 가지고 있다가 되팔아버린 <절대지식 ~ > 시리즈 개론서보단 훨씬 좋다. 비교해보자면 절대지식 시리즈는 무슨 백과사전과 같은, 딱딱함이 느껴졌는데, 이 책은 그런 딱딱함은 없었고, 가볍다는 점 역시도 돋보였다.
 
아무튼 나름의 한계가 있더라도, 괜찮은 철학의 안내 서적이 나온 것 같다. 부담 없이 선현들의 사상을 볼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 본 리뷰는 흐름출판 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리뷰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양 고전과 역사, 비판적 독법
천쓰이 지음, 김동민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특정 출판사를 개인이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령, 비슷한 시리즈의 문학 전집을 모으고 있다는 이유라거나, 자신에게 딱 들어맞는 책의 표지를 만들어 낸다거나, 좋은 내용의 양서를 많이 낸다거나 등의 제각각의 이유가 있다. 나 역시 사람이라서, 편향된 마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내가 주목하는 출판사는 다름 아닌 '글항아리' 출판사다.

 

글항아리 출판사는 인문과 고전, 역사에 대한 출판사로 문학동네의 하위 출판사다. 다소 높은 가격 때문에 사실 대중화되진 않은 출판사지만, 이 출판사를 주목하는 이유는, 이 출판사의 이름으로 달고 나오는 책들이 하나같이 다, '돈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좋은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출판사이니 어느 정도의 상업적인 부분을 배제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기호에만 편향된 책을 펴내지 않고, 정말로, 좋은 양서들을 펴 내려고 노력하는 출판사기 때문이다.

 

그런 출판사의 책이라서 더욱 믿음이 갔던 책이다. 이 책 <동양 고전과 역사, 비판적 독법> 역시도 아주 좋은 내용과, 흠잡을 곳 없는 논의 전개 등이 돋보였던 책이다. 책이 나온 지 한 달이 다 돼가는데도, 이 책에 대한 짤막한 서평이 없다는 부분이 애석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과문하지만 내가 이 책에 대해서 느낀 점을 몇 자로 추려내볼까 한다.

 

책의 주제는 고전과 역사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에 대한 저자 천쓰이의 관점이 담긴 책이다. 저자의 책이 범상치 않다는 것은 서문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죽도록 책만 읽거나, 죽은 책을 읽거나, 책만 읽다가 죽지 마라'

 

말장난 같은 경구로 시작되는 서문이지만, 깊이 음미를 해 볼 만했고, 나 역시도 여러 가지를 돌아 볼 수 있었다. 이 간단한 경구를 통해 독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서문부터 비판적 독법에 대한 개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책을 읽는 이유, 근본적으로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서, 저자가 생각하는 것은 '책을 읽는 이유란, 생활과 인생을 변화시키기 위해 읽는다.'라는 다소 의도적인 관점. 그 관점을 통해 독서에 대해서 설명한다.

 

딴죽 걸 마음은 없다만, 모든 책을 삶과 인생의 변화를 목적으로 읽는 것은 아니다. 책이라는 것에게서 교훈을 얻는다는 것만 주 목적으로 생각하고, 의미를 둔다면, 그것은 독서의 방향의 획일화라고 생각한다. 그럼 문학이 표현하는 모든 미사여구와, 아름다운 수식어는, 결국 어떻게 보면, 그런 통일된 획일적 가치관을 표현하기 위한 목적성을 띄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본연적이고 순수한 아름다움의 표현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독자의 입장에서도, 책이라는 것을 교훈적 가치에 입각하여 볼 수 있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독서 = 좋은 것이라고 인식된 것에는 어쩌면 이런 의도적인 교훈성만을 내포하고 있고 그것에 대한 대중의 무비판적인 수용을 나타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책을 읽는 것이 의도적인 교훈을 얻기 위한 목적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독서의 독법에는 그런 부분이 크겠지만 그것 외에도 재미적인 부분이나 단순한 흥미를 위해 책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 저자의 독서 논점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부분은 이 부분이었다.

 

아무튼 저자의 논의는 서문에서 밝힌 것과 같이 이런 교훈적 독서를 하기 위해서는, 고전과 역사서를 비판적으로 봐야 함을 설명하고 있다. 가장 표현이 좋았던 부분은 이 부분이었다.

 

'책 읽기와 사람 읽기가 동시에 이뤄져야 하고, 역사 읽기와 현재 읽기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는 부분.'

 

책만 보다 보면 간과하기 쉬운 것이 바로, 책의 지식들만 머리에 가득 차서, 현재와 현재를 살아가는 세속을 보는 눈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이다. 책의 담론과, 세속의 속성을 비교해보자면, 책이라는 부분이 훨씬 더 이상적인 논의가 많다. 이것은 아무리 현실론적인 책이더라도, 실제 현실과 현실성이 높은 책, 두 가치를 놓고 비교했을 때는 누가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하더라도, 그것이 실제로 현실론적인 책이더라도, 실제 세속보다 더 현실적일 순 없다. 그러나 많은 독서가들은 이를 묵과한다.

 

천쓰이는 말한다. 독서 (교훈을 얻기 위한)의 가장 중요한 점은, 이론화된 책의 내용을 어떻게 현실에서 잘 구현을 하느냐, 그것이 바로 올바른 독서라고 설명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책을 볼 필요성도 있지만, 세상과 세속을, 인간 읽기가 수반되지 않은 독서는 죽은 독서이고, 세상을 통한 독서가 아닌 독서를 위한 독서가 되어버린다면, 그 독서는 결국 생명력을 잃는다는 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깊이 있게 공감을 했다.

 

깊은 논의의 고전들을 읽었을 때, 우리는 감동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전 독서는 그 감동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다. 그것을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가는 생각하지도 않는다. 몇 차례 습작에서 이야기를 했듯,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한다. 좋은 책을 읽었다는 것, 그 이상으로 투자를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좋은 내용을 어떻게 내가 현실화를 시켜서, 어떻게 '나만의' 지식으로 숙성을 시켜야 하는가, 사실 책을 읽고 나서, 이런 사색의 시간이 더 중요하다. 특히 고전이나 역사서를 읽을 때는 이런 사색의 시간이 좋은 책일수록 길어질 수밖에 없다.

 

책 제목인 <동양 고전과 역사, 비판적 독법>이라고 하지만, 사실 예시로 들고 있는 주제들이 동양 역사와 고전에 대한 것일 뿐, 본질적으로 동양 고전이나 서양 고전을 읽는 방법에는 차이가 없다. 그래서 책은 동서양의 고전과 역사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독서 비평서'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 특유의 비판적 감성으로 독서에 대한 담론을 이어나가며, 기존 역사에 대한 부분들에서 진실이라는 과정을 어떻게, 캐내고 비판하며 볼 수 있는가, 역사라는 텍스트를 통해 어떻게 현세의 부분을 볼 수 있는가에 대한 내용, 그 내용이 바로 이 책의 주제라고 할 수 있겠다.

 

책은 3 부분으로 나뉜다. 1부 고전 진리의 해체적 독법, 2부 역사 진실의 재구성 독법, 3부 역사 현장에서 발견한 작은 비밀, 이렇게 3가지로 이뤄졌는데, 그냥 제목으로 보면 1부는 고전을 읽는 방법, 2부는 역사를 읽는 방법, 3부는 작은 비밀이라는 떡밥으로 독자의 관심을 야기하는 구성을 가졌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내가 책을 조감하고 읽어본 결과, 책의 모든 핵심은 1부에 다 담겨있다. 즉 이 책을 읽을 때는 처음 부분인 1부를 읽을 때 가장 집중을 하고 봐야 한다. 1부에서 천쓰이는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고, 고전을 어떻게 읽어야 하고, 심지어 역사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이론을 다 말한다.

 

뒤이어지는 2부와 3부의 경우는, 앞서 말한 1부의 생각에 입각한 천쓰이 만의 비판적 독법에 대한 담론을 담은 것으로 특히 2부 역사 진실의 재구성 독법에서는 <사고전서>에 대한 내용과, 죽림칠현에 대한 내용을 가지고 어떻게 비판적 독법을 수행하는가를 저자의 관점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다소 실망을 했었다. 독서법이나 비판적 독법에 대한 원론적인 설명을 기대하고 책을 샀는데, 책의 앞부분만 그 내용이 담겨있고, 2,3장은 저자가 역사적 사실을 보며 비판적 독법을 한 독서록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2,3장을 찬찬히 살펴보며, 저자 천쓰이라는 사람이 앞에서 말한 비평적 읽기의 원론을 어떻게 적용하고 있고, 어떤 부분에서 역사가 감춘 진실 들을 캐내는 것인지에 대한 사고 과정의 흔적을 볼 수 있었으며, 특히 3장에서는 독서를 통해 썩은 현실에 대해서 조감하는 독법, 그 사유의 흐름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음미할 수 있었다.

 

즉 말하자면 1장이 <원론>이라고 보면 되고 2,3장이 저자의 비판적 독법의 <예시>라고 보면 되겠다. 수학으로 말하면 1장이 공식이 담긴 부분 2,3장이 연습문제 응용문제를 선생님이 풀어 놓은 모범 답안지.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물론 천쓰이의 모범 답안지 독법이 독서의 궁극적인 답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가 책 곳곳에서 보여주는 비판적 견해, 작은 것도 지나가지 않는 부분 등을 볼 수 있었고, 그런 부분에서 나는 저자의 비판적 독서법에서 많은 부분을 배웠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사고전서>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정말로 탁월했다. <사고전서>라는 문화적 사업 뒤에 숨겨진 사상적 탄압이라는 해석, 정말로 신선했다. 이 부분은 내가 지식이 없는 부분이라 올바른 판단은 할 순 없었지만, 저자의 사고 과정을 지켜보면서, 저자의 칼날 어린 비평적 주장에 대해 어쩌면 카타르시스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만큼 흥미 있었던 챕터였다.

 

수능 언어영역에서 비문학 독해 읽기 능력의 측정은 여러 부분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사실적 독해와, 비판적 독해 부분이다. 비판적 독해의 전제조건은 사실적 독해에 있다. 책이 전달하는 것들을 왜곡 없이 사실적으로 읽어 내는 것이 바로 사실적 독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실적 독해가 잘 이뤄져야지 그것을 토대로 비판적 독해를 할 수 있다.

 

그런 부분에서 본다면 이 책은 독서 초보자에게 권하고 싶은 책은 아니다. 다만 어느 정도 독서가 익숙하고, 자신의 독서를 뒤돌아보며, 발전을 갈구할 때, 이 책은 많은 통찰을 주는 것 같다. 비단 동양 고전뿐만이 아니라, 서양 고전이나 여러 논설문 문장들을 볼 때, 비판적으로 봐야 할 때, 이 책이 생각날 것 같다.

 

책의 예시가 꽤나 깊은 곳까지 들어간다. 따라서 일반인들이 가까워하긴 힘든 '중국'의 예시들, 따라서 사실 책 자체가 대중성이 있는 책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것이 이 책의 아쉬운 한계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예시가 좀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려운 예시의 거부감을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다면, 이 책은 많은 것을 주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저자 천쓰이 선생은 이 책으로밖에 만나지 않았지만, 굉장히 겸손한 분이신 것 같았다. 그가 쓴 책의 서문은 '한국어판 서문'이라고 나와 있었고, 자신의 이 작은 책이 한국에 소개돼서 더없이 영광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책 역시도 개인의 저작이고 볼품없는 책에 지나지 않지만 관심 갖는 사람이 설령 없더라도, 자신의 마음과 생각과 희망을 고민한 서적이기 때문에 아무런 여한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그의 서문에서, 나는 겸손함을 볼 수 있었다.

 

아무튼 여러 가지를 느낀 책 중 한 권이고, 어느 정도 고전과 역사에 내공이 있다면 강추하고 싶은 책이다. 좋은 양서를 만났을 때 느끼던 기분, 기분 좋은 만남이 주는 즐거움, 그런 즐거움을 물씬 느낀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힘내라 브론토 사우루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 스티븐 제이 굴드 자연학 에세이 선집 3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 현암사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한 마디로 압도당했다. 한 인간의 지성으로 인해 이렇게까지 내면이 흔들린 적은 정말 오래간만이라 할 수 있겠다. 그 대상은 바로 이 책의 저자 스티븐 제이 굴드. 책은 굴드가 썼던 자연학 에세이에서 35편을 모아 책으로 엮어 낸 책이라 할 수 있겠다. 다소 에세이라는 장르가 주는 가벼움과, 과학이라는 장르가 주는 무거움이 상호 작용이 이뤄지지 않을 것 같지만, 굴드는 이 두 미묘한 관계를 적절한 글 솜씨로 풀어나가며 전개하고 있다.

 

일단 솔직하게 고백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사실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있다. 그것은 전반적으로, 그가 주장하는 과학 이론에 대한 무지라고 할 수 있겠다. 인문 사회 철학 쪽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이런 자연학이나 과학 등이 쥐약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저자가 주장하고 풀어 내고 있는 다양한 이론들에 대해서, 솔직하게, 부분적으로 이해를 할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그런 과학에 대한 무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그가 주장하는 사실을 떠나, 과학적 이론을 떠나서, 글을 전개하는 방식에서 매력을 느꼈으며, 두 번째 이유는 그의 박학다식한 모습에서 큰 놀라움을 발견했다.

 

과학자들이 쓴 글을 많이 보진 않더라도, 사실 여러 작품은 아니더라도 몇몇 유명한 작품들은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가령 <코스모스> 라던가 <이기적 유전자> 등등의 책들을 봤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관심을 가지고 다른 책들을 찾아봤는데, 솔직하게 말해서 비전공자가 보기에는 장벽이 너무 컸었다. 그래서 사실 과학이라는 주제는 내 독서 생활에서 아킬레스건이었음을 솔직하게 밝힌다.

 

이따금 나는, 여러 인문 편향적인 독서가들의 글들을 봤는데, 항간에 논란이 된 고승덕을 비롯한, 홍정욱 등의 저명한 인사들이 쓴 글에서 '저도 과학이라는 주제에 대한 글을 피합니다.'라는 구절을 발견했었다. 그때의 안도감이란, 나만 어려웠던 것이 아니었구나,라는 안도감에 지금까지 과학을 외면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 책은 그런 나의 과학에 대한 무지에 반성을 들게 해 준 책이었으며, 그 옛날 어린 초등학교 시절, 과학 전집을 처음 받았을 때, 흥미롭게 봤던 그 추억을 떠올리게 만든 책이었었다. 통속적인 과학 저술들이 주는 어려움 속에서, 과학을 멀리하게 됐는데, 굴드는 이 책의 서문에서부터 대중 저술에 대한 긍정성을 이야기하며 책을 시작한다.

 

"그렇지만 설령 대다수가 형편없고 자기 잇속을 차리는 서적들이라 하더라도, 대중 저술이라는 장르 자체를 무효로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 아무리 '싸구려 연애' 소설이 범람했어도, 위대한 소설가들이 다룬 사랑이라는 주제 자체가 배척된 적이 있었는가."

 

캬~ 멋진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래, 지금까지 과학이 대중에게 어렵게 인식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너무 어려운 개념을 현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대중 저술을 내세운 이 책은 쉬운 책일까 과연? 굴드의 이 책은 보통 독자들이 보기에 버겁지 않을까? 솔직히 이 책도 내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부분들이 있었다. 하지만 시중의 무서운 책들에 비해 굴드의 글은 친절하다. 책을 읽으면서 과학에 대한 흥미를 느끼게 됐다.

 

굴드의 과학 에세이가 가장 돋보이는 것은 서술 방식에 있었다. 가령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작은 이야기들을 이야기하며 에세이는 시작한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걸까 하는 관심과 함께 굴드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이야기는 이야기를 낳고,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맨 처음 시작했던 작은 이야기는 잊히기 마련, 그런 찰나에 굴드는 중심적인 논제를 주장하면서 작은 이야기와 이어왔던 이야기들, 그리고 중심 논제에서 공통된 속성을 뽑아내며, 왜 이렇게 이야기를 진행했는가를 설명한다.

 

정말이지, 과학자들이 자신의 이론을 설명할 때, 보이는 그 딱딱함이 굴드의 글에는 없었다. 그래서 거부감 없이 몰입할 수 있었었다.

 

또 한 가지는, 아까 말했듯 그의 글에서 통용되는 이야기들이 굉장히 다양하다. 자신의 전공인 과학(진화론)을 비롯한 문학, 신학, 스포츠, 사회현상, 교육, 음악, 예술, 그리고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언어학에 대한 지식. 과학자라는 직업은 편견상 자신의 전문 분야에만 몰두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굴드는 그런 과학자라는 모습을 여김 없이 깨버린다. 다양하고 박식한 지식, 내가 알고 있는 개념들, 인문학 지식들을 이용해 논의를 전개해갈 때, 그의 글을 읽어나가며 정말이지 지적 희열을 느꼈던 것 같다.  

 

 신기한 생물들의 이야기, 내가 가장 흥미롭게 본 이야기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동물 이야기였다. 특히 20번째 에세이 - 어쩌지, 잘 못 해낼 것 같아 - 의 주인공, 새끼를 위 안에서 키우는 개구리, 이야기에서 그 옛날,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곤충이 변태 되는 과정을 담은 그림책을 보던 동심의 어린아이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굴드가 스스로 가장 잘 썼다는, 21번째 에세이도 흥미로웠다.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부분, 두 부분을 상징하는 과학자들의 엇갈린 운명이 흥미진진하게 서술됐다. 비전공자가 봐도 이해하기 되도록 쉽게 쓰려고 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어렵긴 했다...)

 

그리고 나는 무엇보다도 첫 번째  에세이가 재미있었다. 내가 아는 역사적 지식을 통해, 진화론에 대한 설명, 그리고 나아가 우연이라는 요소의 중요성으로 확장하는 그의 글쓰기에서, 박학다식함과 매력적인 전개에 그야말로 감동했었다. 일전 <정약용 평전>을 리뷰하면서 때론 역사가 배출하는 인간 중에서 필요 이상으로 다방면에 박식한 사람을 낸다고 했고, 그런 사람이 정약용이라고 했는데, 굴드 역시도 그런 사람임을! 책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었다.

 

책의 제목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 역시 공룡의 명칭에 대한 논쟁적인 이야기를 다룬 에세이로, 공룡을 좋아했던 나(아마도 모든 사람이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역시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그다음 에세이인 공룡 광풍을 보면서 굴드는 공룡 광풍에 빗대어 미국의 과학 교육 과정에 대해 통렬히 비판한다. 놀라운 점은, 그는 이상적인 과학 교육에 대한 나라로 한국을 예로 든다.

 

'한국은 교육, 특히 수학과 물리과학에서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뉴욕타임즈>>는 한국의 과학 교육을 다룬 기사에서 9세 소녀를 인터뷰하면서 그녀의 개인적인 영웅이 누구냐고 물었다.'

 

등등 한국의 과학 교육에 대해 굉장한 칭찬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나온 시기는 1991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2014 년이다. 그 사이 과연 우리의 과학 교육은 발전했는가? 나는 이런 의문에 부정적인 답변을 할 수밖에 없다.

 

이유는 저주의 (나는 이렇게 명명하고 싶다.) 7차 교육과정의 시작부터라고 할 수 있겠다. 종례의 6차 교육과정에서는 수능 시험에 계열을 불문하고 사회탐구와 과학탐구를 모두 시험을 봤었다. 국사와 공통과학은 필수 영역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7차 교육과정에 오면서, 문과 학생들은 사회 탐구만 시험을 보고, 이과 학생들은 과학만을 시험에 본다. 즉 전문화를 이루겠다는 국가의 방침인데, 이런 세부적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은 대학에서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7차 이래로 우리나라의 학구열을 나날이 높아지지만 우리는 그만큼 더 무식해졌다. 자연계는 국사 공부를 하지 않아서,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 무지하게 됐고, 인문계 학생들은 과학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조차 없다. 나 역시 이런 7차 교육과정 이후 세대라서,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내 개인적인 관점이긴 하지만, 고등학교까지는 그래도 기초적인 지식에 대해 균형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분화와 전문화가 이뤄지는 것은 대학에서 추구를 해야 할 일이지, 그 결과로 국민은 더더욱 무식해진 게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지금 수능 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편해서, 이과 학생들도 사회탐구를 시험 봐야 하고, 문과 학생들 역시도 과학탐구를 시험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이렇게 글 쓰면 지금 수능 준비하는 엄청난 학생들에게 몰매를 맞겠지만...)

 

굴드가 과연 지금의 우리나라 과학 교육을 보고도, 저런 칭찬을 할까?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 같다. 아무튼 에세이를 보면서 이런 우리나라의 교육 제도에 대한 생각도 해 봤었다. 하긴 중고등학교 시절에, 과학 시험 성적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과학을 싫어하고 두려워하게 된 건지... 그게 교육과정 탓만 있는 건 아니겠지, 나 자신에게도 문제는 있겠지

 

어쨌든 이 책은 나에게 있어, 반성의 마음을 들게 한 책이다. 편향된 독서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말로만 항상 다짐했는데, 이 책을 보면서, 과학에 대한 흥미가 생겼고, 앞으로 편독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의 진화론에 대해서는 지식이 없어서, 글을 읽어나가며, 스마트폰을 검색해가며 읽어서 뭐라 말은 못 하겠다. 어느 정도 과학 지식이 생긴다면, 다시 한 번 비판적 독서를 해 보고 싶은 책이다. 

 

아무튼 다소 버거운 책이고 무려 800여 쪽에 가까운 과학 책이지만, 과학에 대한 흥미와 더불어, 스티븐 제이 굴드라는 인물의 박식함을 유감 없이 경험한 기분 좋은 독서였었다. 이런 친절한 과학의 안내자를 만나다니!! 책을 다 읽고, 굴드의 다른 자연학 에세이들도 검색해서 위시리스트에 올려놨다. (그의 자연학 에세이를 모두 구매할 예정이다.)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 역시도, 매일 밤 자기 전 다시 에세이들을 차근차근 재독해봐야겠다. 저자의 말로는 자기는 글을 쓰면 쓸수록 필력이 늘어나는 것 같다고 하니 (이 책은 지금까지 써 온 글들 중 건방지게 보이겠지만, 가장 잘 쓴 글들만 추렸다고 한다.) 이 책 이후의 에세이들도 꼭 봐야겠다. 글에서 풍기는 마성 같은 매력. 정말 추천하는 책이고, 책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지적인 쾌감을 유감 없이 느꼈던 독서, 더불어 나의 좁은 세계관의 시야가 좀 더 넓어졌음을, 느꼈던 독서였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4-06-13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격하게 공감합니다 ! 짝짝짝 ~~

리군 2014-06-13 17:23   좋아요 0 | URL
오옷 반갑습니다, 저도 발님의 신선한 서평 항상 꼼꼼하게 잘 챙겨보고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4-06-14 23:4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저도 굴드 책 읽으면서 항상 느끼는 게 굴드 참 글을 맛깔나게 쓴다는 점입니다. 도대체 저 비유와 그가 설명하려는 과학적 사실이 어떻게 연결이 되지 ? 전혀 다른데... 하다가 결국 기가 막히게 딱 맞아떨어지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굴드 찬양을 하게 됩니다. 풀하우스'라는 책도 좋고, 무엇보다 사회학에 관심이 있으시다니 < 인간에 대한 오해 > 를 추천해드립니다. 과학과 사회가 이렇게 만날 수 있구나 싶습니다.

리군 2014-06-15 21:11   좋아요 0 | URL
오옷... 좋은 양서 추천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제목 꼭 기억해서 꼭 읽어보겠습니다 ^^

누룽지 2014-08-06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서평때문에 책이 이렇게 끌리기도 쉽지 않은데...
확! 끌리는데요 ^^*

리군 2014-08-10 16:03   좋아요 0 | URL
앗 ^^;; 개인적인 사견이 들어간 리뷰이니 참고만 해 주세요 ^^ 끌려서 구매하신다면 적극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다산 정약용 평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다산 정약용 평전 - 조선 후기 민족 최고의 실천적 학자
박석무 지음 / 민음사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월호 사태를 비롯하여 관료들의 모습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런 시기, 주목받고 대두되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정약용'이 아닐까 싶다. 특히나 그의 지방자치를 다룬 책 <목민심서>가 주목받고 있으며, 총체적인 행정 쇄신론을 다룬 <경세유표> 역시도 떠오른다. 

 

이 책은, 그런 시기에 적절하게 나온 정약용의 평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박석무 선생으로, 다산에 대한 연구를 오랫동안 해 오고 다산에 대한 책을 많이 쓴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그가 다산에 대한 평전을 출간했으니 당연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책은 대체적으로 다산에 대해서 서사적인 인생의 흐름을 잘 표현했다. 그리고 다산의 업적과, 공직생활, 그리고 청렴함과 강직한 모습 등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정선 목민심서>를 리뷰했을 때, 느꼈던 것, 굉장히 꼼꼼한 성격이겠구나라는 느낌을 평전에서 다시 받았다. 공을 이루고도, 오히려 자신에게 공을 치하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이야기, 아들들에게 훈계하는 이야기 등을 봤을 때 다산은 정말로 맑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내가 몰랐던 부분은, 귀양살이를 하면서 경제적인 부분은 어떻게 충당했는가? 란 물음이 있었는데, 역시나 다산의 친가와 외가는 기득권 층의 양반가였고, 다산의 처가 역시도, 양반가였다. 특히나 처가에서 다산에게 마련해 준 땅은 긴 유배생활을 했을 때, 다산이 경제적인 부분으로부터 큰 도움이 됐다는 설명을 했는데, 이 부분은 몰랐던 부분이었는데, 새롭게 안 사실이었다.

 

세상에는 참으로 재능이 다방면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가끔 존재하는데, 조선 초의 정도전이 그랬다면 조선 중기에는 율곡, 조선 후기에는 다산이 그렇다고 할 수 있겠다. 책의 뒷부분에서 다산의 업적을 이야기하는데, 경학 사상(유교 사상)과 경세 사상(치국), 문학 사상(시에서 나타난 부분), 과학 기술 사상 등의 논평은 대체적으로 다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과학 기술 사상으로, 조선조는 유학이 발달된 인문학적 인프라가 강한 국가였는데, 여기서 다산은 <경세유표>라는 저서를 통해 말한다. 온 국민에게 수학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과, 기술의 중심은 수학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조선의 여러 위인들이 대체적으로 거국적인 국가의 도리와, 유교적 도덕주의를 외칠 때 다산은 한 발 더 나아가, 실용 기술, 즉 과학에 대한 부분까지도 이야기하고 있었다. 물론 이 부분은 다산만 그런 것이 아니라, 류성룡과 같은 학자들도 주장했던 부분인데, 다산은 그러한 부분들을 수용하여 더욱더 강조했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인문학의 시초는 철학이라고 생각되고, 자연 과학의 시초는 수학이라고 생각한다. 동양 문화권에서는 제자 백가의 사상적 논쟁을 통해 철학이 깊이 있게 발달했던 반면, 서양에서는 자연 과학의 수학과 이성적인 철학이 동시에 발전한다. 서양은 그 수학적 지식을 발전시켜서 근대화와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됐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동양보다도 더 발전할 수 있던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 부분에서 인문학적 유교적 사상에 젖은 국가 조선에서 기술을 발전시키고 기술의 중심에 수학이 있다는 그의 통찰력이 돋보였었다. 실제로 그는 말뿐만이 아니라 수원 화성 축조를 효율적으로 완성한 예도 있었다.

 

문학적인 부분에서 돋보였던 점은, 한국적인 시어를 많이 사용했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 우리나라의 시 풍토는 중국의 것 만을 최고로 치고 잘 모방한 시일 수록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다산은 한국적인 색채의 시나, 한국적 고사를 인용하기를 주장했다. 이런 부분에서 다산의 주체적인 부분이 보였었다.

 

어쨌든 여러 방면으로 다재다능했던, 다산은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권력의 핵심으로 나아갔지만 반대파들의 모함과, 천주교 문제로 인해서, 긴 세월 유배의 시기를 보낸다. 불우했던 그 시기를 다산은 낙담하지 않으며 여러 경전들과, 저서들을 집필하여, 자신의 재능을 사장시키지 않으려 노력했었고, 그러한 진지한 학문적 탐구에, 당파가 다른 문인들 역시도 관심을 가지며, 서로 간에 상호 비판과 우애를 다져나가기도 했었다.

 

흔히 물이 너무 맑다면, 고기가 살 수 없다고 하는데, 다산은 정말 맑은 솔향의 인간이었다. 스스로에게 엄격하며, 빼어난 재능을 스스로 다스리며, 매사 분발하는 그의 모습은 숭고했으며, 나의 나태한 인생에 깊은 반성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점은 환경에 대한 중요성이다. 다산의 <목민심서>와 <흠흠신서>를 지은 배경에는 환경을 무시할 수 없었다.

 

다산의 아버지는, 지방 관직을 두루 거쳤고 다산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행적을 보고 스스로 느낀 바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스스로 외직에서 고을을 다스려 폐단을 수정했으며, 암행어사를 훌륭히 역임하며, 지방 행정에 대한 경험론을 바탕으로 쓴 책이 <목민심서>라고 했다. 거기다 <흠흠신서> 역시 그가 실제로 재판을 진행하며 명 판결 등을 내린 경험에서 쓴 책이었고, <경세유표>는 뒤틀려버린 조선을 획기적으로 개혁하는 방법에 대해 쓴 책. 모두가 다산이 경험했던 부분이었고, 그 경험은 다산이 처한 환경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다산과 같은 학자는 분명 우리나라에는 드물 것이며, 유네스코에서 지정했듯, 정말로 뛰어난 자랑스러운 우리의 선조다. 책은 그런 다산의 모습을 한껏 치하한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책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이 책은 사실 굉장히 편향적인 책이다. 나는 여러 평전들을 살펴봤지만, 이 책은 유독 내가 싫어하는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평전을 보는 이유는, 그 사람의 일대기만을 보는 것이 아닌 그 일대기를 바탕으로 저자의 분별 있는 평을 보는 것 역시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은 그 평이 열에 아홉은 칭찬으로 덮여있다. 물론 다산이 위대한 위인임은 알고 있고, 다산이 뛰어난 사람임은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의 서문을 보면서 놀라웠던 점이,

 

저자가 다산의 평전을 쓰며 부끄러운 점이 책이 칭찬 일색으로 덮인 것 같아서, 부끄럽다 하면서도 변명으로 내미는 것이, 조선 시대의 선비들은 대체적으로 문인을 평가할 때 칭찬을 주로 하기 때문에 이런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견해를 밝힌다.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그 시절의 선비들이 평가가 그랬다 하더라도, 평전이라는 것은 현세를 살아가는 사람이 내리는 평론이다. 그런데 저자는 대체적으로, 다산에 대해 칭송만 하고 있고, 딱 두 부분에서만 다산을 비판하는데 그 첫 번째 부분이 윤선도와 다산의 시를 비교하며 비교적 윤선도의 글이 더 한국적 색채가 있는데 후학인 다산은 이런 부분을 계승하지 못한 점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홍경래의 난에 대해서 다산이 민란이라고 규정하자, 다산 역시도 지도층의 부분이라, 그들의 고충보다는 왕권을 대변하고 있다는 부분으로 비판을 한다. 그 세세한 비판 외에는 책은 칭찬 일색이다.

 

내가 국내에 나온 이순신 평전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 너무 칭찬을 하고 있어서, 이순신이 과연 나와 같은 사람인지, 신인지 착각하게 만드는 서술이 대부분이다. 이순신이란 위인은 좋아하지만, 그를 다룬 국내의 책은 거부감이 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최근 읽고 있는 책 <동양 고전과 역사, 비판적 독법>, 이 책의 첫 장이 바로, 고전이라는 책을 엎드려 숭배하며 읽는 세태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렇게 숭배하며 읽는 고전은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도 없다. 책을 읽으며, 감동을 느껴 책을 존경하는 것이지, 무턱대고 존경하며 책을 읽는다면, 똑바르게 책을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역사적 인물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올바른 평전은,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 잘한 점은 칭찬하고 잘 못한 점은 비판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위인이라는 사람들은, 일개 범부에 비해 결점이 적을뿐, 결점이 없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대체로 잘 알려진 위인들의 평전을 보면, 유독 이 결점을 없애려고 하며, 장점만을 부각시키려는 부분이 보이는데, 이 책도 전형적으로 이런 서술을 보이고 있다.

 

(여담이지만 <동양 고전과 역사, 비판적 독법>은 굉장히 좋은 책이다. 관심이 있는 분들께 일독을 강추하고 싶다.)

 

역사적 인물 역시도 우리와 같은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이고, 그런 인간이라면, 결점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다산이라는 인물의 결점을 찾는 일은 힘든 일이겠다. 그렇지만 적어도 박석무 선생이라면, 다산에 대해서 깊이 연구를 한 사람이라면 이런 부분에서 올바른 비판을 할 줄 알고 믿었었는데 그런 부분이 보이지 않아서 매우 실망을 했었다.

 

따라서 좁은 소견이긴 하나, 내가 본 다산에 아쉬움을 열거하고자 한다.

 

책의 204쪽에 나오는, '서울의 생활이 지겹고 고향의 아름다운 강산이 그리워 다산은 조정의 허락도 받지 않고 훌쩍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달려간다.' 즉 공무를 하다, 자기 맘대로 고향 생각이 나서 낙향했다는 것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 나는 의외의 다산의 모습을 발견했다. 물론 이 이후로는 이런 부분은 없었는데, 이런 부분은 어쨌든 원리와 법도에 준하지 않다고 본다. 그런데도 이 책에선 그런 다산의 행동에 대해 슬쩍 넘어가며, 놀러 가서 형제들과 쓴 시의 아름다움만 칭송하고 있으니, 아쉬운 부분이었다. 아무리 일이 고단하고 고향을 가고 싶다곤 하나, 이런 식으로 처세를 한다면 안 그래도 임금의 총애가 깊은 다산을 공격할 명분을 찾는 반대파들에게 반감을 살 행동이 아닌가 싶었다.

 

그 외 다른 부분은, 솔직히 책의 서술이 칭찬 일색이라서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글들을 봤을 때, 저자는 진보적이고 날카로운 비평 정신이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평했고, 나 역시 여기에 동의하지만 한편으로는, 다산의 글에서 보수적인 부분도 보였었다. 특히 아들들에게 내린 글들에서 신분적인 것, 사대부의 법도 등을 강조하는 모습 등에서, 어쨌든 아쉬움을 느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보며 느낀 점이,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회의적인 감정. 임진전쟁을 겪고 그렇게 국난을 경험하고도 조정은 정신을 못 차리고, 당파 싸움에 연연하는 부분, 이런 환경을 이어나간 조선의 모습이 참으로 한심하게 느껴졌다. 정약용과 같은 인재를 내치고, 유배를 보내는 어이없는 당파싸움, 썩을 대로 문드러진 조선의 모습,

 

얼마 전 느낀 것이 <고선지 평전>을 읽으며 느꼈다. 고선지는 당나라의 장군으로 안서도호부를 총괄한 도독이었다. 그 당나라의 안서도호부를 점령한 사람이 우리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점 그 부분이 놀라웠는데, 문뜩 그런 생각도 했다. 한반도의 영웅들 역시, 세계의 영웅들과 비교해보면,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분들이 많다. 조선만 해도 이순신을 비롯한 여러 무장들, 그리고 문신들 역시도 정도전이나 정약용, 류성룡, 율곡, 퇴계 등등 세계적 위인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국가를 발전시키는데 자신의 능력을 쓴 것이 아니라... 썩어진 국가를 바로 세우는데 능력을 썼다는 점이다. 조선만 해도, 그렇다. 태종과 세종의 찬란함은 200년을 이어지지 못하여 국가는 썩을 대로 썩었고, 율곡과 같은 위인이 경장을 외쳐도 당파 싸움에 실현되지 못 했다. 그 결과 임진전쟁으로 국가가 쑥대밭이 되고, 이순신과 여러 영웅들 덕으로 사직을 보전했지만 억지로 그들의 능력으로 국가를 세웠지만, 반성하지 않고 발전하지 못 했다. 왜 우리는 이런 위인들이 재능을 다 썩어진 국가를 바로 세우는 쪽에서만 사용해야 했단 말인가? 왜 다른 제국들처럼 국가가 팽창하고 발전하는데 사용하지 못했단 말인가?

 

조선 말, 정약용과 같은 재능을 지닌 사람은 한술 더 떠서, 재능을 꽃피울 기회마저도 국가가 박탈한다. 도대체 왜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우리나라는 이렇게 정부가 부패하는데 가속도가 붙는단 말인가? 정말 책을 보며 아쉬웠다. 당나라로 간 고선지는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당 제국의 영토를 넓히고 안서도호부를 총괄한다. 정약용을 비롯한 여러 영웅들 역시 세계의 석학들과 뒤질 것 없는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나라의 환경은 그들을 올바로 쓰지 못 했다. 과연 고선지가 조선에 태어났다만 이런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을까? 왜 우리는 그런 재량들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아서, 훗날 일제의 지배를 받는 나약한 민족이 됐단 말인가? 이런 부패의 토양을 만든 조선이라는 국가 자체에 굉장히 회의감이 들었다. 꽃이 아무리 좋은 종자인들 땅이 척박하다면 꽃피울 수 있겠는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도 크게 돌아봐야 할 부분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가장 중심점을 잃은 부분. 남도에 대해서 시를 읊고 아름다움을 표현했다는 부분.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 딴죽을 걸 마음은 없지만, 갑자기 무등산을 읊은 시에서 뜬금없는 광주라는 도시의 자랑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 부분은 전혀 다산과 관계가 없는 부분인데 이런 식으로 저자의 정치적인 해석을 곁들여 쓴 부분에서 솔직하게 거부감을 느꼈다. 광주가 물론, 역사적으로 민주적으로 의미가 있는 도시임에는 인정하지만, 이 책은 지금 그런 것을 논하는 것이 아닌, 다산이라는 인물의 평전이다. 이런 부분은 사실 말하지 않더라도, 다 아는 사실인데 구태여 '다산'이라는 평전에 이렇게 직접적으로 강조를 할 필요가 있을까? 포인트가 너무 어긋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어쨌든, 다산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소상하게 잘 밝혀놓은 책이다. 저자 박석무 선생의 다산에 대해 과도한 사랑이 있어서 아쉬운 부분이 보이지만, 청렴했던 다산의, 맑은 인생 다산의 일대기를 보기엔 더없이 좋은 책이다. 문체 자체도 평이했으며, 글 자체도 어려운 부분은 없어서, 청소년들이 읽기에도 부담이 없는 서술이 돋보였다. 박석무 선생이 다산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신 분이라 책의 기대가 많았는데, 기대한 만큼 아쉬움도 많은 책이었다.

 

이런저런 자잘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다산은 정말 맑은 사람이다. 나는 다산의 저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와 <정선 목민심서>에 대한 리뷰를 남겼다. 그 글들 만으로도 정말 깐깐하고 대쪽같은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이렇게 그의 인생을 담은 책을 찬찬히 보니, 그의 맑음이 부러웠다. 소신 있고 바른 가치를 위한 그의 신념은 후세의 귀감을 주기에 충분했었고, 지금의 공직자들이나, 정치인들이 부디 다산을 본받았으면 싶다.

 

더불어, 책의 말미에는 <역주 목민심서>라는 책을 설명하며 <목민심서> 완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그 책은 '절판' 상태다. 나는 이 아쉬움을 <정선 목민심서> 리뷰에 소상히 밝혔다. 정선 목민심서는 편역본이고 <역주 목민심서>는 완역본이다. 출판사 창비 출판사에 <역주 목민심서>를 다시 재판해달라고 문의를 했는데 계획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더불어 <흠흠신서> 역시 번역본 1권이 절판된 상황이다. 학자들의 다산학 논의도 좋지만, 중요한 일은 다산의 대표 저서인 1표 2서 완역본은 국민이 쉽게 볼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 <여유당전서>가 발간됐는데, 솔직히 학자 외에 그 전집을 구매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정작 대중은 다산의 대표작 1표2 서 완역본을 보지 못하는 이 사태가 안타까울 다름이다.

 

아무튼 2014년 6월 4일, 선거일, 다산과 같은 정치인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책을 다 읽고 아쉬운 마음으로 서평을 남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언급된 책 리뷰는 알라딘 서재가 아닌 개인 블로그에 담겨 있는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
송복 지음 / 시루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독서계가 고전에 대한 부분이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 동양 고전,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중국 고전들을 번역하고 그 고전들의 교훈을 밝히는 책들도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다.

 

좋은 일이다. 문화적으로 조명 받지 못한, 고전들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한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작업이고, 다양한 사상을 국내에 소개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동양 고전이라 하면, 중국 고전을 생각하고, 중국의 사상만을 생각한다. 물론 중국의 사상과 학문은 우리의 학문, 동아시아의 학문은 주도했었다. 그러나 그 동아시아 사상을 바탕으로 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다. 우리는 한족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독자적인 색이 가미된 고전 역시도 경시할 순 없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중국의 고전만을 동양 고전이라 칭송하고 앞세우고 있으며, 깊다고 이야기한다. 우리의 고전, 그리고 일본의 고전은 비교적 중국에 비해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문화적인 부분, 고전의 부분에서도 사실 편파적인 부분이 보인다.

 

 조선은 늘 그랬다. 의미 없고 맹목적인 교조화된 의명주의, 한족의 속국을 자처하며, 그들의 울타리에 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조선은 언제나 변방이었고, 오랑캐였고, 동이였다. 중국의 한족, 즉 명나라가 우리를 그렇게까지 자식의 국가 신하의 국가로 대우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이 책은 그런 우리의 고질적인 의존증과, 안일함, 나태함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책이다. 책에 나오는 류성룡은 아마 잘 알려진 위인이다. 그는 임진전쟁 때 전시 체제의 조선을 이끈 지도자였으며, 바다에서 이순신이 분골쇄신 분발했었다면, 육상에서 류성룡은 혼신의 힘을 다해 조선을 이끌어나가며 전체 전선에 대해 종합적으로 조감하며, 관리했었던 재상이었다.

 

나는 얼마 전 율곡 이이의 평전을 보고 리뷰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율곡이 외치고 피 토하며 외치던 요지를 읽었었는데 느끼는 바가 많았다. 율곡의 말은 정말이지 신하가 군주에게 할 수는 없는 말들이었다. 이 책의 첫 장에서도 나오는데

 

'200년의 역사의 나라가 지금 2년 먹을 양식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

 

'지금 국가의 저축은 1년을 지탱하지 못 합니다. 이야말로 진실로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

 

 

나라가 나라가 아니다... 이보다 더 수치스러운 상소가 있을까?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백성(국민)들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게끔, 행복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것이 존재 이유다. 그런 것을 할 수 없다면, 국가로서 존재할 필요가 없다.

 

조선은 썩어 있었다. 말도 안되는 문치주의의 만연, 무를 괄시하기 시작하면서, 전쟁에 대해 깊은 성찰을 가진 장군도 없었다. 군대는 기강이 빠졌고, 조세는 탐관오리의 만연으로 인해 국고는 바닥나고 군량은 없었다. 비교적 현실적인 사상에서 나왔던 성리학의 신진사대부들, 집권한 사림은 타성에 젖었으며, 쓸데없는 공리공론만을 외치고 있었다. 지방의 군관들은 매관매직으로 관직을 사며, 비공식적이지만 합법적으로 백성들을 수탈했었다.

 

근대 이전에는 국가의 가장 기본은 경제력과 군사력이다. 돈(곡식)이 있어야 백성들을 먹여 살릴 수 있으며, 국방이 튼튼해야 자강을 할 수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알법하다. 그러나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나라 조선은 그러지 않았다. 자강을 생각하지도 않았고, 문약한 문치주의에 빠져서, 군사력은 별 볼 일 없게 떨어졌었다. 이런 나라이니, 이웃 나라가 삼키려고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않겠는가?

 

임진전쟁은 절체절명의 위기였었다. 이 시기에 우리에게 위인이 있었으니, 바로, 류성룡과 이순신이 그들이었다. 타성에 젖은 대부분의 관료들과, 왕 선조에게는 조선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그랬다. 그들은 우리의 백성을 버렸으며, 의병을 등한시하고, 조선군을 믿지 않았으며, 오로지 명, 명나라만을 칭송하고 우대했다.

 

이순신의 발탁과 파격 승진, 문신인 권율의 무관 등용 등 파격적 인사를 한 배경에는 류성룡이 있었다. 국가 비상 위기에 가장 중심이 되어 국난을 책임져야 할 왕은, 도망가기 바빴으며, 그 뒤처리와 책임은, 류성룡이 전면적으로 도맡았다.

 

관료들과 왕은 우리나라를 버리고, 명으로 입조하려 했었다. 그러나 류성룡만이 홀로 끝까지 반대했다. '우리 영토를 벗어나면 절대 안 된다.'라는 말을 외치며, 죽더라도 한반도에서 죽을 것을 고집했다. 그의 저지 덕분에 우리는 지금까지 한글을 쓰고 있으며,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하는데 정말로 수긍했다.

 

백번 이해하려고 노력해봐도 이해할 수 없는 조선의 두 왕 '선조'와 '인조', 그들에게는 왕권과 왕좌만의 전부였었다. 조선조 모든 왕들이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것은 알고 군주국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안다. 생각을 했다. 태종과 세조에 선조에 대해서, 태종 이방원 역시 강력한 권력의지와 왕권 주의가 있던 군주다. 그러나 그는 대외적으로 사대를 하며 대내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키고 국방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그의 왕권 속에는 백성이 있었다. 찬탈한 왕조였지만, 백성을 생각하고 근본으로 생각하는 마음으로 권력을 사용했던 군주다. 자신과 사적으로 아무리 친한 신하더라도 비리 감찰이 보인다면 가차 없이 칼을 휘둘렀던 군주다.

 

세조는 태종과 성향은 같지만 그의 왕권의 속에는 개국 공신과 자신의 야욕만 있던 군주다. 그럼 선조는? 선조의 왕권 속에는 오로지 명과 자신의 생존만 있었다. 그에게 있어 조선 백성과 관군은 불신의 대상이었다. 임진전쟁이 끝나고 폭동이 일어날까 봐 명나라 군사를 주둔시키길 '자청' 했던 군주다. 정말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자국의 병사와 백성보다도 명이 더 소중했단 말인가? 그런 그가 과연 조선의 임금이라 할 수 있는가?

 

그런 군주와 그런 그가 이끄는 조정에서, 돋보이는 영웅이 있었으니, 해상에서는 조선, 아니 이순신의 군대와 일본군, 양 군이 호남을 걸고 사투를 벌였다면, 육상에서는 류성룡이 포악스러운 명나라의 군대에 군량을 대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비교적 이순신의 행적만을 자세히 알고 있는데, 실제로 류성룡의 군량 전쟁도 굉장히 큰 의의가 있다.

 

썩어 빠진 조선 관군들을 가지고는 현실적으로 평양과 한성 탈환이 불가능했고, 어쩔 수 없이 명의 군대를 들였는데, 조선이라는 나라는 그 명나라의 군량조차도 지급하기가 힘들었다. 우리가 힘이 없어서 외세를 들였고, 그 외세가 요구하는 필요 이상의 물자를 감당하는데, 그 몫은 모두 류성룡의 몫이었다. 가슴이 아팠다. 우리의 역사는 매번 이런 식이다. 외세의 격돌, 그것은 300년 뒤인 청일전쟁, 러일전쟁, 그리고 중국군과 미군의 전투 등, 모든 부분에서 그랬다.

 

명은 이런 우리를 국가로 취급하지 않았다. 대놓고 무시했고, 조선의 장군과 재상들을 가축 다루듯 다뤘다. 그런 명의 장군들을 선조는 머리 굽혀서 높였다. 그에게는 국가란 없었다. 그에게는 오로지 왕권만이 있었다. 오로지 그 왕이라는 지위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명나라가 행하려 했던 만행, 광해를 왕으로 내세워 조선을 분할하여 역치하려는 주장도 용인했고, 심지어는 조선을 직할 통치하려고 한 명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려고 했었다.

 

<군주론>에 이런 말이 있다. 마키아벨리는 정벌하기 어렵고 통치하기 쉬운 국가에 대해서, 국왕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기 때문에 점령하긴 어려워도, 점령 후, 왕을 제거하기만 하고 기존의 법도를 존중하기만 하면 통치하기가 쉽다. 조선은 오랜 세습 국가였고 전형적으로 이 형태에 속한다. 명의 입장에서는 조선을 직할령으로 하기엔 더없이 좋지 않겠는가? 같은 유교 문화권에 문화적 사대주의가 심각한 나라니, 국왕만 죽이면, 조선의 반을 먹을 수 있었다. 이러니 일본과 전쟁을 하기보단 강화에 주력하지 않겠는가? 더 웃기는 것은 이런 것을 선조는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두둔하고 있다는 점이다. 참으로 모골이 송연하지 않을 수 없다.

 

류성룡은 이와 같은 명의 만행에, 목숨을 내놓고 결사반대를 했고, 비록 중국의 속국이긴 한 조선이지만, 나라의 자주권을 지켜냈다. 선조와 같은 우매한 군주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저자는 임진전쟁은 명나라와 일본의 조선 분할 전쟁이라고 해석했는데 일리가 있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남북으로 양분되고 있는 부분, 그 시초는 바로 임진전쟁부터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 부분은 전적으로 조선의 군대를 관군의 입장으로 본 해석이다. 이 당시에 관군은 명나라 군대의 서포트 역할밖에 되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군이라 불릴 수 있는 군대들은 의병이었다. 관군의 입장에서 해석한다면, 임진전쟁은, 명과 일본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애통해도 나라와 왕조를 지속시키려면 명의 군대에 의존을 해야만 했던 것이 현실이다. 이 모든 것이 자강을 하지 못한, 조선 왕조의 실책임을...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더더욱 분했었다.

 

류성룡 그는 명나라의 군대를 지원하였으며, 조선군의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자강하려 애썼으며(훈련도감, 속오제), 명의 야욕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밖으로 일본과의 전쟁을 총괄적으로 주관했으며, 안으로는 나약한 선조를 달래며, 능구렁이 같은 명나라로부터 조선을 지키기 위해 분골쇄신했었다.

 

전시 체제에 있어서, 이런 명재상이 있었다는 점은 정말로 조선으로서는 '행운'이다. 썩어 빠질 대로 빠지고 군사력조차 없으며 백성에 대한 의무를 지지 못하는 국가가 400년이나 지속했다는 것 자체가 운이 참 좋은 국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런 운도 400년까지였다. 조선은 늘 그랬다. 류성룡은 주장했다. '징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스스로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미래란 없다고, 또 다른 외침이 있을 거라고 강하게 강하게 주장했었고, 저술들을 남겨 후세가 귀감이 되도록 애를 썼다.

 

그러나 우리는 어땠는가? 교조화된 사대주의 의명사상은 존명사상으로 바뀌며, 송강 정철을 비롯한 노론은 다 죽어 없어진 명나라만을 그리워하며 고집했었다. 시대의 흐름을 보지 못했으며, 자강하지 못했으며 징비하지 못 했다. 류성룡이 쓴 <징비록>은 읽히지 않았으며, 여전히 주자학만을 고집했었다.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그 결과 어땠는가? 그 조선왕조를 지탱하던 운빨은 결국 한일합방에 이르러서 끝을 고한다. 제2의 이순신은 없었으며 제2의 류성룡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일본의 지배를 받았었다. 결국 운으로 지탱하던 무사 안일주의는 역사적 심판을 받은 것이다. 자강하지 못했던 우리의 한

 

일본은 자국의 사무라이 무에 대한 사상을 발전시켜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래 우리 조선은 뭐가 있는가? 선비정신이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하게 묻고 가보자. 그 선비 정신의 원류는 뭔가? 결국 중국의 사상의 복제품이 아닌가? 물론 그 선비정신을 주동적으로 해석한 조선 초의 정도전과 같은 위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 중 후반기의 선비정신은 뭔가? 그 문치주의 안일한 대책 없는 현실성 없는 선비정신으로 인해 국가가 약해졌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 선비 정신을 올바르게 우리나라의 자국화하여 재해석하였다면, 더 나은 발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선비정신은 다 죽어가는 명나라를 그리워하고 존중했으며, 정치인들은 바뀌는 시세를 볼 수 없었고 국가는 도태됐다. 그 문약한 문치주의, 선비정신의 사념의 결과가 바로 안전불감증으로 진화하여 지금 현실로 다가온 것 아니겠는가?

 

지금이라고 뭐 다르겠는가? 세월호 사건을 비롯한, 지하철, 버스, 터미널 등에서 산발하는 재난에 대해서,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 안일함과 의존주의 어떻게든 되겠지, 그리고 이어지는 부정부패, 관피아... 그런 것들이 빚어져 터지는 것이 바로 이번 사태들이다. 그 옛날 조선 관료들이 도태되고 썩어 빠진 것과 뭐가 다른가, 시대가 바뀌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도 나아지지 않은 무능함

 

그 옛날 문약한 문치주의의 조선 왕조가 지탱해왔던 '운' , 그리고 지금 세월호 사태에서 그 불안불안한 배를 아무렇지 않게 운행해왔던 '운'

 

뭐가 다를까? 생각하니 암울하다. 지하에 있던 류성룡은 과연 지금의 국가 사태를 보며 어떻게 생각을 할까? 류성룡이 외치던 자강을 우리는 왜 하지 못했는가? 그토록 징비하라고 그는 외쳤는데... 애석하고 애석할 뿐이다.

 

책은 류성룡의 행적과, 고뇌를 실증적으로, 그리고 비교적 수치들을 동원하여서, 정치사적인 해석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인 부분까지 고찰해가며 시대의 아픔을 잘 해석하고 있었다. 저자의 분별 있는 식견이 돋보였었고, 조선 중기의 썩은 모습들을 잘 설명하고 있는 책이었다. 그래서 책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조선의 못난 모습이 이곳에 다 담겨있고, 징비하지 못한 지금의 우리에게도 깊은 시사점을 남기는 책이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은, 저자는 율곡과 류성룡에 대한 해석에서 류성룡에 대한 부분을 높이 산다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은 관점에 따라 다르게 생각할 수 있겠다. 저자는 율곡이 관념적인 이야기만 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류성룡의 글이 율곡보다 현실적이지 못하면 그것은 이상한 것이다. 어쨌든 류성룡은 국난을 직접 총괄했고 국가의 여러 뒤틀리는 부분들을 실제로 경험했었던 재상이다. 그런 류성룡이 율곡보다 더 현실적인 글을 못 남기면 안 된다. 어쨌든 율곡보다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본 것이 많이 때문에, 그냥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류성룡이 뛰어나고 명재상이지만,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율곡의 경장을 외치는 것에 당론에 의거하여, 반대를 한 부분에 대한 언급도 없었으며, 실제로 이순신의 탄핵 때, 절친했던 류성룡조차 이순신과의 거리를 둔 부분이 <조선왕조실록>에 있었다. 이런 부분들은 구체적으로 밝혀줬다면 더욱더 인간적인 면모가 돋보였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내 가슴을 뜨겁게 울렸다. 항간엔 지금 조선 초기의 드라마 <정도전>에 열풍으로 인해 조선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가득하다. 물론 여말선초의 조선의 건국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러나 역사는 단편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 찬란한 국가 조선의 중기는 썩어 있었다. 그랬다. 정도전이 기대를 걸었던 사대부는 썩었고 도태됐다. 고려 말보다도 더 한심했었다. 사명 의식을 가진 올바른 사대부 류성룡과 극소수의 신료들만이 발분해서 조선을 일으켜세웠으나, 결국 우리는 징비하지 못 했다. 그것이 사실이다. 그 조선에 대해서 우리는 알고 있는가? 그 못난 모습은 지금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불어, 우리 양옆의 중국과 일본인들이 어떤 족속들인지 이 책은 역사적 사실을 통해 소상하게 알려주고 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끝으로 류성룡이 쓴 상소를 인용해본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는 일이란 언제나 급합니다. 어찌할 겨를도 없이 급하게 허둥지둥하다가 그만 일을 그릇되게 처리하고 맙니다. 그러다가 그 일이 지나고 나면 금방 해이해집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끝내지 못하고 내버려 둡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큰 폐단입니다. 지금 왜적이 우리나라 중심부에 아직 있음에도 이러하다면, 만약 명나라 군대가 떠나버린다면 다시 믿을 곳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하는 일은 무슨 일이든 오래 견뎌내는 일이 없습니다. 짧으면 한두 달이고 길어봐야 한 해를 넘기지 못해 중도에서 폐지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의지가 굳게 서 있지 못하고 계획이 먼저 정해져 있지 않아, 이리저리 옮겨서 일이 귀착할 곳이 없습니다. 아침에는 갑이란 사람의 말을 좇아서 일을 진행하다가, 저녁에는 을이란 사람의 말을 듣고 일을 폐지합니다.

 

~

 

이미 일을 시작했다면 반드시 그 일을 성공시켜야 합니다. 혹시 일을 맡은 사람이 능력이 모자라고 직위가 맞지 않는다면 사람을 바꿀지라도 그 일을 폐지해서는 아니 됩니다.'

 

 

이게 과연, 임진전쟁 시기에 써진 글이란 말인가? 과연 우린 징비를 했단 말인가? 진심으로 깊은 반성의 마음이 일었다. 이런 애통한 마음의 기록 <징비록>을 과연 우리 국민들은 몇이나 읽었단 말인가? 어쩌면 이 책 역시도, 그런 <징비록>이 인정받지 못함을 탄식하여서, 태어난 책이 아닐까? 정말로 반성해야 한다. 국가도, 관리도, 민간도, 나 역시도... 그래야 열정적으로 민족을 보존한, 류성룡, 선조에게 떳떳하지 않겠는가?

 

지금 세월호 문제를 비롯한 여러 부분에서 나라가 통탄하고 있다.

 

실로,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다.'  개혁을 외치는 지금, 나라 전체를 확실히 바꿔야 할 필요성을 국민들이 느끼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린 선조 류성룡에 주목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