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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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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느낌이었다. 책을 덮었을 때, 내 마음이 그렇게 말했다.


알랭은 이 신간에서 프롤로그에서 시작으로 '언론'을 고찰하고 들어간다.


'이 작은 매뉴얼은, 오늘날 좀 지나치다 싶게 당연하고 무해한 것으로 보이게 된 어떤 습관을 우리 자신을 위해 잠시나마 복잡하게 비틀어보고자 한다.'


사람들은 지금의 언론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종국에 가서는 언론에 기대고 있다. 우리는 뉴스와 신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어쨌든 문제 인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인간이 세상을 좀 더 넓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뉴스기 때문에, 뉴스를 멀리하는 삶은 있을 수 없다. 시력이 나쁜 사람은 실제적으로 보이는 것이 제약적이다. 그런 시력을 좀 더 선명하게 그리고 더 멀리 보이도록 도와주는 것은 '안경'이다. 뉴스는 바로 이 안경의 역할을 하고 있다.


 문제의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뉴스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뉴스에 권위를 부여했었다. 안경이 없으면 볼 수 없다는 그 근본적 이유만으로 말이다. 알랭은 권위를 부여한 뉴스를 어쩔 수 없이 보는 시각을 앞서 이렇게 정의했다. '지나치다 싶게 당연하고 무해한 것으로 보이게 된 어떤 습관'이라고 이야기하며, 당연하다시피 받아들이는 일상의 뉴스를 우리 자신을 위해 잠시나마 복잡하게 비튼다고 정의하며 뉴스를 근본적으로 고찰하며 비평하고 있다.

 
이 서두를 끝으로, 그는 뉴스를 분야별로 세분화하여 비틀기 시작했고, '그만의 바람직한' 뉴스의 이상을 제시하고 있었다. 정치, 해외, 경제, 셀러브리티, 재난, 소비자 정보 등등으로 세분화하여 각 뉴스의 문제점을 알아보고 추구해야 할 이상형을 제시하고 있다. 이 각각의 뉴스 설명으로부터 알랭은 뉴스 텍스트를 그의 시각으로 뉴스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그리고 그 뉴스의 텍스트의 한계를 지적하며, 동시에 그가 뉴스 내면에서 읽어내고자 하는 '가치'를 이야기함으로써, 기존 뉴스 텍스트의 부재된 부분 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알랭의 글을 보며 느낀 점은 세분화된 뉴스에서 결여된 속성, 그것들은 가지각색이지만, 한 가지로 모아서 이야기해보자면 결국 지금의 뉴스에는 '긍정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그것을 추상적으로 표현하면 '휴머니즘'의 결여라고 확대해서 해석했었다. 뉴스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지식욕의 충족과 인간의 발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뉴스, 발전 가능성을 위해 만들어진 정보 전달의 매개체인 뉴스에서 휴머니즘을 느낄 수 없다는 이 사태를 알랭은 강하게 지적했다.


 뉴스는 사실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사실성을 바탕으로 해서 만든다 해서 사실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물론 뉴스가 설명하고 있는 것은 사실과 현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현상의 모든 것을 대변하고 있지 않다. 뉴스는 현상과 사실을 다루는 과정에서 가치 개입이 이뤄지며, 어떤 사실을 어떻게 보도할까, 어떻게 중요성을 가져야 할까에 대한 가치판단의 개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따라서 뉴스가 이야기하고 있는 사실은 사실이더라도, 그것을 어디에 편집했고, 사태의 어느 부분을 부각하여 의도적으로 더 서술해야 하는가에 대한 모든 부분에서 '가치 개입'이 들어가 있다.


알랭 식 표현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단지 현실을 선택적으로 빚어낼 뿐이다.' - 51쪽 첫 단락 끝 부분


 알랭은 이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뉴스가 '가치 개입'을 전제로 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인정하고 있다. 보통 우리는 그러한 가치 개입적 사고를 '진보'와 '보수'라는 관점으로 해석하여 편가르기를 시도하려 했다.


그러나 알랭은 그러한 논의를 넘어서, '근본적인 언론'의 시각을 비판하고 있다. 그의 요지는 뉴스라는 매체는 지극히 사실성을 바탕으로 보도하는데 집중하여서, 정작 뉴스가 추구해야 하는 부분을 망각한다고 꼬집고 있었다. 뉴스는 궁극적으로 인류의 현상에 대한 비판성과 더불어 긍정성 역시도 제공해야 한다고 알랭은 말했다. 그러나 지금의 뉴스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뉴스를 보면서 항상 비판적 사고만을 견지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비판에 익숙해지고, 점점 더 뉴스를 볼수록 시니컬해져갔다. 알랭은 여기서 뉴스의 맹점이 있다고 봤다. 비판과 더불어 긍정성과 휴머니즘을 뉴스는 제시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비평서는 세 가지 부류가 있다. 첫 번째 현상을 고찰하는 데에만 그치는 것, 두 번째 현상을 고찰하고 이상을 제시하는 것에서 그치는 책, 세 번째는 현상을 고찰하고 실현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궁극적인 이상을 제시하는 책, 여기서 알랭의 책은 두 번째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뉴스의 문제점을 제시하며 궁극적으로 뉴스가 추구해야 하는 사상을 알려주고 있지만, 그것에 대한 해결 방안의 구체적인 논의는 없었다. 알랭은 정치 뉴스 챕터에서 이런 논지로 말했다. 한 가지 문제 현상에 대해서 뉴스는 단기간에 해결될 것처럼 해결방안을 제시하지만, 모든 현상을 그렇게 쉽게 단번에 해결되지 않는다.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했다. 그래서 어쩌면 이런 뉴스의 바람직한 (알랭의 관점에서 바라본 이상적인 언론) 이상을 추구하려면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렇게 간단하게 제시될 부분이 아니라고 알랭은 주장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의 논의를 떠나서 어쨌든 책은 참 매력적이다. 보통 비평서를 보면서 느끼는 점은 굉장히 날카롭다거나, 때론 책의 냉소적 풍자적 논조에 차가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비평가들은 대체로 자신의 비평을 날카롭게, 자극적으로 표현하는데 힘을 들인다. 톡 쏘듯, 자신의 비평을 대중에게 신선한 자극으로 받아들여지길 원하며, 독자는 비평서를 볼 때 어쩌면 그런 톡 쏘는 비평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공감력을 형성한다.


그러나 알랭의 비평은 뭔가 느낌이 달랐다. 조곤하고, 조용하면서, 때론 추상성이 보이기도 했었지만 대체적으로 조용하면서 섬세하고 여성적인 느낌이었다. 날카로운 비평이 아닌, 따뜻한 비평을 가하고 있었고, 대체적으로 언어의 신중함이 돋보이고 있었다. 무미건조할 법도 한 논지를 특유의 비유와, 일상의 추상화적 글쓰기를 통해 날카롭고 자극적인 선선함과 대조적인 신선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언론의 방향을 고찰하며, 언론에게 망각된 긍정성과, 따스함 휴머니티를 강조하며, 알랭 역시도 그것을 표현하는데 따뜻함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래서 책을 볼 때 기분이 좋았었다.


사실 비판하고 싶은 부분도 있다. 여러 부분이 있지만 한 가지 꼽자면, 세계 뉴스를 다룰 때 좀 더 '예술적'으로 다뤄달라는 말, <줄리어스 시저>의 극과 그와 비슷한 뉴스를 대조하며, 특히 뉴스는 대중이 관심을 가질 만큼, 좀 더 문학적이고 흥미롭게, 그리고 세계의 현상만 고찰할 것이 아니라, 현상 너머에 있는 그 사회(예를 들면 그 사회에 대한 이미지를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다양함) 문화적 부분을 추구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어쨌든 기사가 너무 길어진다. 뉴스가 문학적 기법이나 예술적 기법을 도입한다면 물론 대중의 시선을 더 끌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뉴스가 그렇게 진행된다면, 다소 뉴스를 볼 때 피곤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알랭은 대중이 무관심하고 우리가 뉴스에 멀어지게 된 것이 뉴스의 간결성과 현상만을 전달하는 태도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솔직히 모든 뉴스가 문학적, 예술적 기법을 적용한다 하더라도, 물론 사람들이 이전보다는 뉴스에 관심을 가지겠지만, 그럼 전달량이 많아진 뉴스의 양을 어떻게 분별하고 감당할 것인가?  지금 우리는 극도로 단편화되고 간결한 뉴스, 그 뉴스들이 쏟아지는 세상을 살고 있고, 그 간결화된 뉴스조차도 똑바로 선별하지 못하는데, 개개의 뉴스가 문학예술적 기법을 쓰는 세상에서, 그 분량이 많아진(기법이 추가된) 뉴스에서 필요한 정보를 선별하는 데에는 더 힘들지 않을까?


사실 나 역시도 개인적으로는 알랭의 논의인 뉴스에 문학적 예술적 기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시각에 찬성한다. 사실 뉴스는 다른 텍스트나 영상에 비해 재미가 없는 것이 사실이니까... 그렇지만 그렇다고 예술적 기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부분도 수긍하기는 조심스럽다.


또 한 가지는 이 책의 결론은 '알랭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상적 언론'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마다 개개인 만다 생각이 다르듯, 어쨌든 알랭이라는 한 개인이 바라본 언론의 문제점과 언론이 추구해야 하는 이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책의 원저 이름인 "The News : A User's Manual"에서 유저 매뉴얼이라 표현하는 부분에서 좀 거부감이 들었다. 매뉴얼은 공인된 설명서에 붙일 수 있는 안내서이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내용의 한계가 있더라도, 나는 이 책이 참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이 책의 내용을 동조하거나 비판하거나를 떠나서, 이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라서 우리는 어쨌든 '언론'에 대해서 돌아볼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열풍을 통해 우리는 우리 사회의 윤리 속에 정의의 부재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마찬가지로 최근 열풍을 불러오는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통해 우리는 우리 시대의 경제, 자본주의의 모순점과 부의 불평등에 대한 시각을 더욱더 강하게 인식하게 됐다. 비단 저 책들을 읽지 않더라도, 책이 사회에 영향을 주는 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 사회를 되돌아볼 수 있게 됐다.


앞선 블로그의 글에서 나는 밝혔듯, '명저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내용을 넘어선 시대의 모순이나 일상화된 현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여지를 만들어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책이야말로 명저'라고 이야기했다. 알랭의 이 책 역시 내가 알기론 베스트셀러에 머물러 있으며, 두 책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우리 시대의 언론에 대해 뒤돌아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긴 것에서 이 책은 좋은 책이 아닌가 싶다.


사실 이 책은 잘 읽히지 않았다. 책을 보다가 덮은 경우도 많았고(어렵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빨리 읽어나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끌거나 배송 온 <21세기 자본>을 읽느라 자꾸 미뤄서 봤던 경우도 있다. 따뜻한 비평서이고, 알랭을 좋아하는 나인데도, 왜인지 모르게 자꾸 덮어지는 책이 이 책이었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 여름 막바지에 다시 읽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의 글귀가 생각났다.


'자꾸 덮어지는 책이야말로 좋은 책이다.'라는 스님의 말씀. 그 말씀이 유난히 생각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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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중용 동양고전 슬기바다 3
주희 지음, 김미영 옮김 / 홍익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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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중용>은 유학의 경전 사서의 가장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는 책이며, 그런 사서의 마지막에 위치한 만큼 다른 경전들보다 가장 스케일이 큰 느낌을 항상 받았다. <중용> 역시 <대학>과 마찬가지로 <예기>의 한 편명이었는데, 주희에 의해 '선택'받아진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중용>을 보면서 느꼈던 점은 첫 번째로, 굉장히 형이상학적이다.라는 느낌을 받았고, 두 번째는 앞서 말한 대로 스케일이 굉장히 크다.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대학>과 <중용>은 고대 유학과는 다른, 새로운 시대의 사상을 대변하는 선택받아진 책이었었다. 따라서 사서의 체계로 봤을 때, <논어>와 <맹자>는 기존의 제자서이고 시대적으로 존중받아온 책이었지만, 이 <대학>과 <중용>이 주목받았던 것은 결국 주희에 의한 선택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부단히 <대학>과 <중용>을 읽으며, 내용에만 몰두했던 것이 아니라, 왜 주희는 이 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책을 읽어나가면서 스스로 찾아보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나름 결론을 내려보자면,

<대학>을 선택한 이유는 짐작건대, 앞서 <대학>리뷰에서 말한 대로, 유학의 구체적인 학습 방법론을 체계적으로 나타내고 있어서라고 밝혔다. 사실 <대학>의 내용면으로 봤을 때는, 다른 <논어>나 <맹자>에 비해 크게 이질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유학의 핵심 이념과 체계를 간결하고 짧게 제시한다는 것에서 <대학>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싶었었다.

<중용>을 봤을 때 나는 주희가 왜 신유학의 이념으로 <중용>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갔었다. 사실 <중용>이라는 굉장히 추상적인 내용이 많다. 읽다 보면 사실 구름 위에 붕 뜬 기분을 유난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대학>을 읽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그나마 대학은 <중용>에 비해서는 간결하고, 압축적이며, 단순하고 명료한 구절들로 강령을 제시하고 있었다.

<중용>은 일단 한 번 보고 이해하기가 굉장히 난해하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부분들을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중용의 도'에 대한 논의가 책의 주된 주제였다. 도(道)라는 것의 논의는 사실 동양철학에서 굉장히 추상적인 철학 논의다. <중용>의 주제는 이 중용의 도(나아가 유학의 도)라는 부분을 심층적으로 고찰하고 있고, 그것을 쪼개서, 도에 이르는 자격과(지혜, 인자, 용맹), 도를 발현하려면 궁극적으로 성실함을 가지고 지극하게 수양해야 한다는 논의와 더불어, 하늘의 도(이미 나면서 깨달은 사람)와 인간의 도(선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발분해야 깨달을 수 있는 사람)를 번갈아며 설명한다. 쪼개서 설명하는 도의 논의를 마지막에 이르러 시경의 인용으로 하나로 마무리하여 <중용>의 요체를 설명하면서, 경전을 끝맺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中이라는 것은 치우침이나 지나치거나 부족함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으며 庸이라는 것은 본분(中의 마음)의 의거하여 특출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희는 정의했다. 즉 어떠한 것으로부터 중의 마음을 지키며, 그것을 발현하는 행위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중용>은 하늘(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기질(선한 기질과 중용의 요체인 도)를 밝혀서 발분하여 지극한 도에 이르게 되는 것에 대한 핵심 이론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면 되겠다. 인간은 두 부류로 나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태어나면서부터 도를 깨우친 사람(대표적으로 순임금)과 두 번째는 태어나면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기질은 있지만 깨우치지 못한 사람이 존재한다고 한다. 물론 후세(<중용>이 나왔던 시절의 사람)들은 전자의 인간이기보단 후자의 인간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다 후세 사람들은 그런 중용의 도를 깨닫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중용>이라는 책은 몽매한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일깨우기 위한 저술의도도 옅보였으며 그럼 어떻게 하여야만 중용의 도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심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선천적인 도를 깨우친 사람과 후천적 학습으로 도를 습득한 사람은 처음에 자질의 차이는 있으나, 결과론적으로 후자가 학습을 통해 도를 습득한다면, 선천적인 도를 깨우친 사람과 동일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중용>은 강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유학 사상에서 지극하게 강조하는 '인간의 배움은 기질을 바꿀 수 있고 본성을 바꿀 수 있다.'라는 긍정과 희망의 철학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런 <중용>의 큰 도에 대한 설명을 한 뒤, 세부적으로 쪼개어 어떻게 <중용>의 도에 도달할 수 있는가, 그 자격에 대해서 책은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 세 가지 자격이란 지혜와 인자함과 용맹을 들고 있으며, 각각 이상적인 인물들을 제시하는데 지혜에는 타고난 지혜를 갖춘 순임금을, 인자함에는 선천적으로 깨닫지 못했지만 발분하여 깨달음에 달하게 되는 안회를, 용맹에는 용맹만을 갖춘 한계가 있는 자로를 설정하여 설명하고 있었다. 각 인물들은 지혜와 인자함 그리고 용맹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바라본다면 배움에 있어서, 순임금은 이미 갖추고 태어난 자를 상징하고 있었고, 안회는 갖추지 못했지만 발분하여 이상적으로 갖춘 사람을, 자로 역시 갖추지 못했지만 발분했음에도 치우친 갖춤(용맹에 특화)에 그친 사람을 상징하고 있었다.

이런 논의를 통해 중용의 도에 이르기 위해서는 지혜의 앎과 인자함의 실천, 그리고 앎과 실천을 실행할 수 있는 용맹의 덕목 세 가지를 고르게 찾추라고(中)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것은 치우침이 없다는 관점에서 볼 때 역시 중용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었다.

그리고 다시 도에 대한 논의가 계속해서 진행되지만 사실 솔직히 굉장히 추상적으로 도를 묘사하고 있어서, 와 닿는 구절들은 없었었다. 가까운 부분에서 도를 실천하거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도, 도의 발현 등등에 대한 논의, 그리고 제사의식에 대한 부분도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이런 부분을 넘어서면 한 가지 '중요한 대목'에 이르게 된다.


도의 추구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는 '성실함'에 대한 논의가 이야기되고 있다. <중용>에선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성실함'이다. 이 챕터에서는 특이하게 치국에 대한 논의와 사회생활에 대한 논의가 주요를 이루는데, 지금까지의 개인 마음 수양과 형이상학적인 도에 대한 설명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정치와 가족에 대해서, 그리고 <대학>에서 봤던 수신에 대한 논의가 나오기 시작하며, 유명한 오륜(군신, 부자, 부부, 형제, 친구)에 대한 이야기, 앞서 말했던 도에 이르는 3가지 덕목 (지혜, 인자, 용맹)은 결국 수신의 요체이며, 이것은 제가와 치국평천하에도 확장된다는 부분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큰 것으로 나아가는 부분)

그리고 국가를 이롭게 하는 아홉 가지 요체 (몸을 닦음, 현자를 높임, 친족을 사랑함, 훌륭한 신하를 공경, 여러 신하를 내 몸과 같이 아낌, 일반 백성들을 자식과 같이 생각함, 많은 기술자들을 자신의 나라로 오게 함,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을 회유함, 제후를 포용함 등 9가지)를 설명한다. 이 모든 것의 중심은 '성실함'에 있다고 이야기하며,

'성실함'이야말로 인간이 지극하게 발전하거나 도를 추구할 때 항상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결국 이 성실함의 정의와 더불어 하늘과 사람의 도를 번갈아가면서 논의를 전개한다. 하늘의 도와 사람의 도에서도 군자가 가장 중요한 것은 성실함이었다. 이 챕터에서도 성실함을 기준으로 도의 본체를 접근하는 구성을 가지고 있었고, 마지막에는 <중용>의 요체를 <시경>의 인용으로 끝을 맺었다.

<중용>을 보면서 많은 부분을 생각해 볼 수 있었는데 첫 번째로 경전 자체가 굉장히 추상적인 부분이 많았고, 사실 실체가 없는 도라는 것에 대한 정의라 그런지 많이 본 책임에도 난해한 부분이 있음을 느꼈었다. 다른 유가 경전들과 비교를 해 보자면 <논어>의 경우는 일상적이고 친근한 공자의 모습을 통해 유학이 추구하는 바를 알 수 있으며, <맹자>에서는 <논어>보다 더 복잡해지고 문체와 논의는 더 정교해졌으며, 인간의 심성론적 부분의 고찰(사단)과 더불어 정치철학에 대한 주된 이상의 논의가 있는 책이었다. <대학>은 앞서 말한 대로 간결하면서도 유학의 강령을 잘 제시하고 있는 책이었고, 마지막으로 <중용>은 세 경전들과는 다소 스케일이 다른, 뭔가 웅장한 유학의 도를 이야기하는 느낌을 받았으며, 거대하고 울림이 있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래도 <대학>과 비교를 안 할 수가 없는데, <대학>이 다소 간결하고 핵심적이며, 체계성이 있고, 명료하며, 특히 지도자에 대한 논의가 많이 담겨있다면, <중용>은 간결하되 형이상학적이며, 사변적이며, 추상성이 있는 책이었다. 그리고 <대학>과 반대로, 개인의 수양과 마음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뤘다. 성행했던 도교와 불교의 형이상학적인 부분을 의식해서인지, <중용>에서 볼 수 있었던 점은 의도적인 유학의 형이상항적 모습이 보였었고, 아마 그것은 주희가 <중용>을 통해 나타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주희는 이 새로운 <대학> <중용>을 통해 이단을 배척하고,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유학 사상에 걸맞은 이념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삼봉집>에서 정도전은 유학에 깊이가 있는 정몽주에게 학문의 물음을 구했고, 정몽주는 학문의 지극함을 알기 위해서는 <대학> <중용> 두 책만 한 것이 없다고 일러준다는 대목이 있다. 그로 인해서 정도전은 <대학> <중용>을 읽으며, 학문의 요체를 파악한다. 중요한 점은 정몽주가 정도전에게 권한 책이 고대 유학을 상징하는 <맹자>나 <논어>가 아닌 신유학(주자학)이라 할 수 있는 <대학> 과 <중용>이라는 점이다.

정몽주는 성리학에 능통한 학자였었고, 그런 그가 권한 두 책은 주희가 세심하게 의도적으로 격상시킨 사서의 두 책 <대학> 과 <중용>이라는 점을 통해, 주자학에서의 가장 핵심적인 유학 이념을 담은 책은 특히 <대학>과 <중용>이라는 점이라고도 해석해 볼 수도 있다.

두 번째로 느낀 점은, 일단 기존 유학 학파가 존중하고 있는 성선설을 기본으로 하여, 모든 인간에게는 착하고 어진 마음이 있다는 부분과 그 부분을 발분시켜서 노력한다면, 태어나서 깨닫지 못하더라도 지극한 본성을 깨닫고 나서부터 깨달은 존재들과 같아진다는 부분, 그 모든 사상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인류에 대한 강한 긍정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존재에 대한 긍정과 나아질 수 있는 긍정, 그런 긍정이 유난히 <중용>에 많이 나타나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성선설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입장이지만, 교육을 통해 기질이 나아질 수 있다는 이런 유학의 이념에는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싶은 입장이고, 어쩌면 그 입장은 나 자신의 기질을 바꾸고자 하는 마음과 공명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난 사람이 아니라서(과연 난 사람이 있을까라는 의문도 들긴 하지만... 세상에는 내 관념보다 더 뛰어난 인간들이 많기에...), 부족한 사람이라서, 발분하며 노력하게 된다면 난 사람의 기질에 필적할 수 있다는 부분 역시도 나의 부족함에 희망과 긍정을 가져주는 것 같아서, 의미 있게 다가왔었다.  

솔직히 나는 <중용>이 너무 추상적이고 도에 대한 논의도 너무 와 닿지 않아서 사실 그렇게 좋아하는 책은 아니다. 뭔가 웅장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뭐랄까 그 웅장함 속에 감동이 일어나기보단 뭔가 웅장함에만 그치고 허한 그런 기분을 느꼈다. 아마 내가 어쩌면 아직도 <중용>에 대한 도에 도달하지 않아서인가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 도에 대한 논의는 제외하더라도, 앞서 말한 인간 발전에 대한 긍정성과 더불어, 인자함과 용맹함 그리고 지혜를 조화롭게 갖추는 부분과, 모든 도의 추구에서는 '성실함'을 필요로 한다는 사상은 울림이 있다고 생각했다.

자고로 인간이 살아가는데 '성실함'은 기본이니까, 그 만고불변의 진리를 <중용>은 고대에서부터 밝혀오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회독에서 책을 덮을 때에는, 알 수 없는 엄숙함과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중용>의 진정한 울림에 한층 더 가까이 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기분은 지금까지의 <중용>으로부터 느끼지 못한 기분이어서 개운함을 느꼈었다. 그 개운함에 나는 이제야, 20년 만에 <중용>의 서평을 조용히 써 내려갔다.


마지막으로 <중용>에서 감명깊었던 구절 몇 가지만 써 본다.


6장

공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순임금은 매우 지혜롭도다! 순임금은 다른 사람들에게 묻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아주 일상적인 말도 그냥 넘기지 않고 잘 생각해본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나쁜 점은 묻어 주고 좋은 점은 드러내 주었다. 그리고 양극단을 파악하여 그 가운데를 백성들을 다스리는 데 사용했다. 이러한 점이 순임금다운 점이다.'


7장

공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나는 똑똑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물이나 덫, 함정에 빠지게 되면 그 상황에서 벗어날 줄 모른다. 사람들은 모두 나는 똑똑하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중용을 선택하고는 한 달 동안 제대로 그 상태를 지켜낼 수 없다.


20장
 
배우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언정 배울 바엔 능숙해지지 않고서는 그치지 않는다. 질문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언정 질문할 바엔 알게 될 때까지 질문을 그치지 않는다.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언정 생각할 바엔 파악할 때까지 그치지 않는다. 변별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언정 변별할 바엔 분명해질 때까지 그치지 않는다. 행하지 않을지언정 행할 바엔 독실해질 때까지 그치지 않는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은 한 번에 할 수 있지만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백번이라도 하고, 다른 사람은 열번에 할 수 있지만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천 번이라도 한다.

과감히 이 도를 행할 수 있다면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명철해질 것이며, 유약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강인해질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배움은 더 나은 존재로 각성할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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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중용 동양고전 슬기바다 3
주희 지음, 김미영 옮김 / 홍익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대학>이란 텍스트는 나에게 굉장히 의미가 있는 텍스트다. 나는 나 자신을 제어하지 못 했을 때나 의식적으로 나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다잡아야겠다고 다짐했을 때, 항상 봤던 책이 <대학> 이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도, 이틀에 한 번 꼴로 <대학>을 계속해서 봤었다. 유가의 많은 경전들 중 내가 <대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분량이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어린 시절 내가 사서 중 가장 싫어했던 책은 <맹자>였고, 가장 좋아했던 책은 <대학>이었다. <맹자>는 가장 분량이 많고 다소 복잡한 정치철학에 대한 논의가 많았었다면, <대학>은 분량이 가장 짧았고, 문체도 부담이 없었기 때문이다.

분량이 가장 적었기 때문에 빠르게 본다면 한 시간 내에 전문을 다 독파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화가 나거나 나 자신을 제어할 수 없는 감정에 이르렀을 때 의식적으로 <대학>을 읽었다. 읽고 또 읽었다. 분노했을 때는 글이 주는 뜻을 따라가지 못하고, 눈으로 글에 머물기만 했었던 적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주기적으로, 읽다가 보면 나의 노기는 눈 녹듯 사라지곤 했었다.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대학>의 힘이었다. 글을 차분하게 읽다 보면, 마음의 중심을 잡게 되는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반복해서 읽다, 내 마음의 파도가 사라졌을 때 책을 덮고 잠을 청하곤 했다. 그것이 나의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이었다.

한동안 <대학연의> 독서에 열중이었다. <대학연의>를 볼 때 나는 항상 <대학>을 가까이 두고 같이 읽어나갔다. 오늘도 따로 <대학>을 읽었다. 분노한 나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대학>을 읽었다.

<대학>이라는 책은 유가 경전의 가장 첫머리에 위치한다. 주희는 이 책을 엮으면서, 왕을 비롯한 사대부의 자제, 그리고 성인이 된 남자들, 배움에 탁월한 이들이 첫 번째로 읽어야 할 책이라고 했다. '사서'라는 체계를 집대성한 주희. 그 주희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편찬을 한 것이 바로 <대학>이다. <대학>이라는 경전은 독립된 책이 아니라 원래 <예기>의 한 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대학>을 독립적으로 한 책으로 엮어서 유학의 도통을 완성시킨 사람이 바로 주희였다.

책을 읽으며 왜? 주희가 이 책을 유학 가르침의 첫 번째 교과서로 선택했을까라는 물음이 일어났다. 그 해답은 <대학>이라는 책은 유학이 추구하는 공부 방법론과 학문의 방향을 제시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유학의 핵심 이념과 더불어, 어떻게 그 핵심 이념을 실천해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이 담긴 책이었었다. 더불어 내 개인적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우선 유학의 경전들 중 <대학>은 지극히 짧고 간결하다. 문체가 간결하며, 부피도 적다. 

그러면서도 내용이 상당히 깊다. 독립된 격언들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좋은 구절들이 많지만, 그 독립된 격언들이 모여서 한 챕터를 이루고, 그 챕터들은 의미군을 형성하고 그 의미군들이 체계적으로 조직화되어 커다란 유학의 방향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 바로 <대학>이다. 더불어 이런 체계성의 장점과 간결함이 합쳐져서 처음 유학을 배우는 사람에게는 가장 제격의 입문서가 아닐까 싶었다.  

나는 유학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 뭐 일반론적으로 유학의 중심 이념은 '인'이며 등등의 그런 일반화된 사상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유학 서적을 읽으며 느낀 것은 세 가지다.

1.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며 큰 것으로 나아간다.
2. 우선 나를 돌아본다. 
3. 선함을 추구한다.

<대학>은 이런 유학의 정신을 가장 간결하게 핵심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는 고전이다.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큰 것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모든 유학의 핵심적인 사상이다. 나로부터 시작하여, 가정을 돌보고, 그리고 치국을 행하고, 천하를 평정한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이런 유학의 이념을 잘 나타내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논어>와 <맹자>, <중용> 역시 이런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사상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대학은 수신 이전에 인간이 행해야 하는 부분들까지도 고찰하고 있다. (격물치지, 성의정심) 그래서 대학은 선택받았다. 유학의 이념을 한층 더 깊이 있게 하기 위해서, <예기>라는 경전의 한 편이, 사서의 첫 경전으로 격상되었다. 그것이 <대학>이었다.

<대학>을 한 구절로 압축해보면 '삼강령을 팔조목으로 실천하라'라고 할 수 있다. 삼강령은 유학에서 추구하는 정신의 3가지의 강령이라고 할 수 있다. 세 가지를 말해보자면, 나 자신의 덕을 밝히고, 백성들을 교화하며, 사회를 지극한 선에 머물게 한다.'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도 주목해서 봐야 할 점이 우선 나부터 덕을 밝힌다는 부분, 즉 작은 곳에서부터 무언가를 행하고, 나 자신이 그렇게 행하고 나서야 남을 교화하며, 그것은 결국 사회를 선한 곳에 머물게 한다. 이것은 내가 앞서 말한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큰 것으로 나아간다, 우선 나를 돌아본다, 선함을 추구한다.라는 세 명제를 만족하고 있다.

그럼 이 삼강령을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대학은 친절하게 구체적 방법론을 설명하고 있다. 우선 사물을 관찰하고, 그 관찰을 토대로 앎을 확장해나간다. 앎을 알아가며 나의 의지를 성실하게 하고, 그것을 토대로 마음의 방향을 올바르게 만든다. 그렇게 내 마음을 다진 후에야 내 몸을 닦고, 가정을 바르게 하여, 나아가 사회생활에서 발분하며, 평천하를 이룬다. 이것을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 치국 -평천하) 8가지 조목으로 나눠서 설명했다. 이것이 팔조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본 이 역본은 주희가 해석한 <대학>의 번역을 존중하여 해석하고 있었다. 그것은 주자학의 관점이었다. 훗날 명나라의 왕수인은 이런 주희의 <대학> 해설에 반발하는데, 여러 가지 부분들의 해석상 차이가 있지만 팔조목 부분의 비판을 보면, 주희가 말하는 격물치지 이후에 성의정심으로 나아가는 것을 비판하였다. 왕수인은 굳이 격물치지(사물을 탐구하여 앎을 넓힌다.)와 성의정심(나의 의지를 성실히 하고 마음의 방향을 올바로 잡는 것)을 단계별로 볼 것이 아니라 통합하여,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주장으로는 성의정심을 이룩하게 되면 굳이 격물치지를 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하며, 사물 탐구(어떠한 대상)로부터 마음을 다지는 주희의 사상을 비판하며, 마음공부의 우위성을 주장했었다. 즉 그의 사상으로는 격물치지는 마음 외부의 대상의 탐구에 너무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면 올바른 마음 수양으로 가는 것에 번거로울 수 있다며 격물치지보단 성의정심의 우위성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런 왕수인은 훗날 주자학과는 다른 양명학 학파를 일궈낸다.

개인적으로 나는 주자학의 관점도 양명학의 관점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어쨌든 주자학의 관점으로 팔조목을 지금 시대에 발맞춰 해석해본다면, 어린아이가 태어나 탐구를 시작한다. 그 탐구라는 것은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이고(격물), 직간접적인 관찰과 지식의 탐구는 결국 아이의 뇌에 앎을 확장하게 만든다. (치지) 그러한 앎과 지식이 축적됐을 때 아이는 성장하며 자신의 주관적인 의지의 다지게 되며(성의), 그러한 의지로부터 나의 마음의 방향을 바로 세우게 된다. 이 마음의 방향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비롯한 사상, 관념 등이 어느 정도 고착화된 것을 의미한다. (정심) 이렇게 한 개인이 마음이 체계가 잡히게 되면 스스로의 스펙을 쌓고 (수신), 가정을 일궈 아이를 낳게 되고 가정을 잘 꾸리며 (제가), 사회생활에서 원활하게 활동을 하며(치국), 자신이 맡은 바에서 최고의 결과를 내는 것(평천하)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왕수인의 관점을 존중해본다면, 사물(어떠한 물체)의 탐구와 앎을 확장하는 것에 너무 지나치게 되고 그로 인한 그 앎의 지식이 체계가 잡히지 못하고 방향을 잃는다면, 나의 의지를 다지는 것과 내 관념의 방향을 잡는 것에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모든 수신의 중심은 결국 나의 의지를 바로하고 마음의 방향을 바로 세우는 것이라는 점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되며, 격물치지 역시도 큰 관점으로 본다면 성의정심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대학>이 체계화한 학문의 방향 방법, 팔조목을 지금 시대에서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생각은 나도 없다. 하지만, 대학의 이 팔조목을 바라보며, 우리 시대의 사람들을 둘러보게 됐다. 격물과 치지에 너무 힘써서, 지식이 충만한데도 마음의 방향이 없는 사람, 애초에 격물과 치지(공부)에 힘쓰지 않는 사람, 잘 배운 교육 덕분에 격물과 치지가 충만하나, 성의정심이 이뤄지지 않는 사람, 등등 현대 사회의 각박한 사람들의 자화상을 이 팔조목에 대입하여 생각해 봤었다. 그리고 그 자화상들이 내는 결론은 결국, 우리 사회 사람들은 '마음공부'가 부족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대학>이라는 텍스트는 사실 지극히 짧은 글이지만, 풍부한 성찰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대학>을 보며 진덕수는 <대학연의>라는 방대한 저작을 탄생시키기도 했으며, 역대 사상가들은 <대학>의 해석을 두고 찬반양론이 있었었다. 

책을 보며, 주희의 고민이 여실히 느껴지는 듯했다. 같은 사서라도 <논어>와 <맹자>와 <대학> <중용>은 달랐다. <논어>는 유학의 창시자 공자의 맨얼굴을 내 보인 경전이고, <맹자>는 유학이 추구하는 정치철학이 담긴 책이다. 수당 시대에 이르러 유학은 위기를 맞았다. 성행하는 불교와 도교의 이론 앞에서 주희는 고민했다. 유학 역시도 이대로는 안된다. 기존의 <논어> <맹자>와 6경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불교와 도교를 누를 수 있는 '강력한' 이론서가 유학에서도 필요했다.

<대학>은 그런 유학의 이론에 체계를 제시하고 있어서 선택받았고, <중용>은 그런 유학의 형이상학적 이론을 발견할 수 있어 선택받았다. 그리고 주희는 이 두 가지 책과 <맹자>와 <논어>를 '사서'라는 체계로 완성하였다. 그렇게 <대학>과 <중용>은 유교를 더욱더 깊이 있게 심화하였다.

책을 읽으며 반성했다. '나의 사물에 대한 탐구는 진지하지 못 했다.'
책을 읽으며 반성했다. '나의 앎은 깊지 못하다.'
책을 읽으며 반성했다. '나의 의지는 굳건하게 다져지지 못한 것을'
책을 읽으며 반성했다. '나의 마음이 바로 서지 못한 것을'
책을 읽으며 반성했다. '마음을 다지지 못하여 수신을 하지 못한 나의 몸뚱어리를'

그랬다. 그래서 분노에 감정에 이를 때, 나는 <대학>을 부단히 읽었다. 나 자신이 반성을 해야 할 때 부단히 <대학>을 읽었다. 그리고 평정을 하고자 노력했다. 사물 탐구를 좀 더 진지하게, 앎을 좀 더 지극하고 깊게, 의지를 더욱더 굳건하게 다지기 위해, 나의 마음의 관점을 바로 세우기 위해, 그렇게 수신하기 위해, 앞으로 제가를 할 가정에 충실하기 위해, 사회에서 좀 더 충실한 내가 되기 위해, 그리고 내가 맡은 곳에서 최고의 성과를 내기 위해, 그런 나를 꿈꾸며 반성하며 책을 읽었다.

그렇다고 해서 책의 모두가 좋게 느껴지진 않았다. 특히 10장 치국평천하 장에서, 재물에 대한 관념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현대 사회에서 지도자가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점은 경제적인 이익이다. 국익을 내 대수의 국민들이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추구해야 하고 그 방법에는 경제적인 이익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따라서 이런 경제적 이익 추구에 극단적으로 비판적인 부분은 수용하기가 힘들었다.

다만 <대학>의 관점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자면,  재물을 무조건적으로 배격하며 명문을 우선시(대학의 관점) 하지 말며, 이익을 추구하되 명분과 이익을 같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어쨌든 현대 사회의 무조건적인 성과주의와 이익 추구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유학에서 말하는 부분도 부분적으로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됐었다.

확실히 유학이라는 관점은 치국으로 나아가면 현재 상황으로 볼 때 맹점이 많이 보인다.(무조건적인 선의 추구, 경제적 이익을 고려하지 않은 명분론 등등) 그것을 <대학>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수신의 영역으로 바라볼 때는 굉장히 좋은 격언들이 많다. 유학이라고 해서 좋은 것만 있지 않으며, 또 무조건적으로 배격할 사상은 아니라는 부분도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불만점은 <시경>의 인용문이었다. <대학>에서도 다른 고전들의 인용이 많이 나오는데 특히 <시경> 인용이 가장 많다.  각 장의 마지막 부분들을 <시경> 인용으로 채우는 경우가 많았다. 시의 인용으로 가져오는 서술상 특징이라면 함축적이며, 경구문으로 완결할 때 보다 좀 더 많은 여운을 남길 수 있다는 점은 있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그렇게 공을 들이고 그런 해석상의 여운의 의도가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용과 구성이 의미하려는 주제가 와 닿지는 않았다. 그냥 돌려 시로 표현하지 말고, 짧고 간결한 경구문으로 표현했으면 어떨까 싶은 아쉬움도 있었다.

 
 자질구레한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나에겐 굉장히 의미가 있는 고전이며, 최근 <대학연의>를 읽으면서 <대학>의 체계와 <대학>의 내용에 대해 더욱더 심취했었다. 마지막으로, <대학>에서 와 닿은 구절 한 구절을 끝으로 리뷰를 마칠까 한다. <논어>는 이미 작성했고, <중용>과 <맹자>는 다음 기회에 다뤄보도록 하겠다.


<대학> 전 10장 治國平天下 中

 자신이 아랫사람의 위치에 있을 때 윗사람에게서 본 싫어하는 모습으로 아랫사람을 부리지 말며, 아랫사람에게서 본 싫어하는 모습으로 윗사람을 섬기지 말라. 그리고 자신이 뒷사람의 위치에 있을 때 앞사람에게서 본 싫어하는 모습으로 뒷사람에게 먼저 하도록 시키지 말며 자신이 앞사람의 위치에 있을 때 뒷사람에게서 본 싫어하는 모습으로 앞사람을 따르지 말라. 또 자신이 왼쪽에 있을 때 오른쪽에게서 본 싫어하는 모습으로 왼쪽과 사귀지 말며 자신이 오른쪽에 있을 때 왼쪽에게서 본 싫어하는 모습으로 오른쪽과 사귀지 말라 이것이 '자신의 마음으로 미루어 헤아려 보는 도'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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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 선비들의 생활사 인간사랑 중국사 3
쑨리췬 지음, 이기흥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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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인적으로 인문정신이 살아있는 출판사를 굉장히 좋아한다. 그래서 눈여겨 보고 있는 출판사들이 꽤 있는데, 몇몇 예를 들자면, '글항아리', '한길사', '나남', 그리고 '인간사랑' 출판사 등등을 선호한다. '인간사랑' 출판사는 신동준 씨의 고전들이 대부분 출판되고 있는데, 나는 신동준 씨의 번역이 꽤나 마음에 들기 때문에 몇몇 저서들을 구매했고, 그 출판사인 '인간사랑'을 좋아하는 편이다. (기존 학계와 상반된 주장의 번역을 하시는데, 가끔 자의적인 해석도 보이시지만, 개인적으로 학문의 획일성을 자극하는 좋은 예라고 느껴진다.)

그런 인간사랑에서 교양서로 '중국 선비'들을 고찰한 책을 번역했다. 내가 특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 '올바른 선비정신'인데, 그런 내 관심에 부합되기도 했고, 우리의 문화라고 생각할 법한 선비정신을 중국에서는 어떻게 표현하고 적용되고 있는지 궁금증도 있었기 때문에, (사실 원류로 따지자면 중국이 선비정신의 원조가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의 선비정신은 중국의 문화를 많이 받은 가운데 독자적으로 발전한 사상인 것 같다.) 책에 대한 기대도 컸었다.

책은 두툼했다. 648페이지에 걸쳐 중국의 선비들에 대한 모든 것을 고찰하고 있었다. 선비의 정의에서부터 시작하여, 독서, 과거, 의식주, 유람, 사회활동, 모임, 취미, 여자 등등을 고찰하고 있었으며, 더불어 저자가 가르치는 과목이 '위진남북조사'가 있어서인지 따로 위진 남북조의 선비 생활에 대해서 독립적으로 다루고 있었었다.

일단 좀 비판하고 싶은 것이, 책을 폈을 때, 놀란 점이 머리말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역자 후기가 있긴 하지만, 책을 펴자마자 튀어나오는 목차와 바로 책의 본문이 나오는 것에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나는 책을 볼 때 머리말을 항상 먼저 보는 편인데, 인쇄상의 문제인지 아니면 머리말을 편집하지 않은 탓인지 (설마 저자가 머리말을 안 썼을 리가...) 아무튼 이 부분이 굉장히 아쉽다. 머리말이 없는 책이라면 역자 서문이라도 앞에 배치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이 부분이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책의 제목에서 풍기듯, 고대의 선비뿐만이 아니라, 중세와 근세의 선비들까지, 춘추시대 이래로 청나라 시절까지 다양한 중국 선비의 모습들을 밝히고 있었다. 따라서 책 제목을 그냥 '중국 선비들의 생활사'라고 이야기하거나 시대성을 표시하자면 굳이 고대라고 칭하기보단 '중국 옛 선비들의 생활사' 였으면 어떨까 싶기도 했다. 아무래도 고대라는 구분이 지어진 단어보다는 옛날이라는 모호성이 있는 단어(고대 중세 근세를 포함하는 부분이기 때문에...)가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책 제목에서의 '고대'는 시대적 분류의 고대라기보다는, 내가 의미한 옛날이라는 그런 의미로 써진 것 같지만.)

책의 부분들이 워낙 소상하고, 시대별로 선비들의 다양하고 엽기적인 (몇 가지 예로 들면, 친구를 만나고 싶어 멀리서 친구 집을 방문했다가 문 앞에서 마음이 바뀌어 집으로 돌아왔다는 부분) 모습들이 나타나져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선비의 모습은 다소 꼿꼿하고 격식 있는, 고루한 유학적 사고 관념에 입각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데, 이 책에 나온 중국의 선비들은 그런 모습도 있긴 했지만, 다소 자유분방한 모습들도 있었다.(특히 위진남북조 시대의 선비들) 나는 다소 선비라는 이미지와 유학적 이미지를 연결하여 생각했는데, 이 책은 그런 부분에서 도가에서 말하는 선비의 이미지도 제시하고 있으며 비단 유가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상에서 강조하는 선비 정신들도 포괄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물론 종국에 가서는 유학적인 모습의 선비들이 많이 설명되긴 했지만 말이다.

특히 마지막 장, 위진남북조의 격동의 시대의 선비들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선비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으며, 자유분방하고 구속에 얽매이지 않으며, 파격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양한 시대의 선비들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저자의 논의에서 강조 받는 시대는 아무래도 '위진남북조'의 선비들이었다.

'위진남북조' 선비상을 읽으며 생각했던 것은 위진남북조의 영웅인 '조조'가 떠올랐다. 조조는 유학을 존중하면서도 자유분방한 도가의 학문도 익혔었다. 그의 치적에서 볼 수 있듯, 파격적이고 격식 없는 통치의 방침도 어쩌면 그런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중국의 선비들은 그 땅덩이만큼이나 굉장히 다양한 모습을 지녔으며, 많은 왕조를 거쳐왔듯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중국의 선비들은 다소 네임밸류가 있는 선인들만 기억했는데, 이 책에는 그런 네임밸류가 강한 선비들은 물론, 다소 생소한 선비들의 행적까지도 소상하게 밝히고 있었다.

내가 가장 유념해서 본 부분은 독서 부분과, 과거시험 부분, 그리고 음식에 대한 부분과(술 포함), 여자에 대한 부분이었다.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음식에 대한 부분이었다. 특히 중국의 여러 선비들의 음식에 대한 글들을 읽으며, 놀라웠던 점은

음식을 연구했던 선비들이 육식보다는 채식을 선호하고 과식보다는 소식을 선호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음식을 어떻게 먹어야 건강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찰들을 읽으며, 지금 현재에도 통용되는 지혜들이 그대로 녹아 있다는 것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

더불어 가장 흥미 있었던 부분은 선비와 기생의 관계를 다룬 부분이었다. 예로부터 남녀 간의 로맨스만큼 풍부한 관심거리가 없듯, 중국 대륙에서의 선비와 기생의 이야기들도 풍부했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중국의 기녀들 역시 높은 교양 수준을 갖췄으며, 선비들에게 육체적인 쾌락을 넘어선 정신적인 안정을 주려고 노력했었다. 뛰어난 선비들 역시도 색욕을 밝히기보단, 정신적 교제를 우위에 두고 기녀들과 시나 글을 주고받았었다.

재미있는 부분은 문예에 뛰어난 선비들의 시나 부가 기녀들의 가요로 전해져 유행가처럼 불렀다는 부분에서, 요즘 시대의 가요 열풍과 여중고생들의 팬클럽을 연상하기도 했었다. 책에서 아쉬운 부분은 선비와 아내, 선비와 첩에 대한 부분은 거의 없는데 반해 선비와 기녀에 대한 부분만을 다룬다는 점. 이 부분이 아쉬웠으나, 한편으로는 수긍한 부분이, 그 시절 선비의 결혼은 어쨌든 자신의 의지보다 타율적인 정략적인 결합이 많았고, 기녀와의 만남은 아무래도 자의적이고 적극적인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선비의 여성을 다룬다면 기녀를 다루는 것이 맞겠구나라고도 생각했다. 다만 아내에 대한 부분이나 가정생활 육아나 그런 소상한 부분도 밝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기녀와 다룬 부분이 또 재미있던 것은 기녀들과 선비의 시가 인용되고 있는데, 그 시들이 아름다운 구절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님을 위한 애절한 마음을 절절하게 노래한 기녀들, 그리고 점잔 빼는 이미지인 선비들이 솔직하게 애정을 토로하는 부분에서, 사랑이라는 것은 고하를 막론하고 뜨겁구나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만큼 이 챕터의 시들은 뜨거웠고 생기가 있었으며, 애절했었다. 다른 과거나 독서 취미 등등은 개인적으로 생각했던 부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 아쉬웠었었다.

책은 대체적으로 중국의 선비들을 시대별로, 다양한 모습들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그런 다양한 모습의 선비들을 다소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부정적인 부분들도 다루고 있었다. 예를 들어보면, 기녀와 선비를 다룬 부분에서, 선비와 기녀가 아름다운 로맨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정을 통하고 새로운 여인을 찾고, 이전의 기녀에게 이별을 고하는 매몰찬 선비들의 모습도 있었다.

책의 주된 서술 방식은 인용과 설명이었다. 설명은 다소 짧고 간결하게, 그리고 인용은 풍부하게 하여서, 솔직하게 말해서 좀 지루한 전개 부분도 있었다. 선비정신이나 선비 분야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다소 지루함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비교적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고전의 인용도 엿보였고(생소한 시도 많았다), 더불어 국내에서 알려지지 않은 마이너한 중국 선비들의 모습도 볼 수 있으며, 다양한 모습의 '선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동양의 계급에서 선비는 최상위를 담당하고 있는 계층이다. 士라는 계급은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대체적으로 문인에 속하였고 일본에서는 사무라이, 무인의 계급에 속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자국의 선비정신만을 연구했으며, 자국의 선비상에서만 교훈을 얻으려 노력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중국의 선비에 대한 연구는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의 선비를 다룬 이 책이, 반가우면서도 생소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 책을 계기로, 중국의 선비정신에 대해서도 대중에게 활발하게 소개되었으면 좋겠다란 생각을 했다.

어쨌든 다양한 중국의 선비의 모습 속에서, 버려야 할 부분도 있었으며, 엽기적이고 기괴한 부분도 있었으며, 본받아야 할 부분도 있었다.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대륙의 선비'의 모습을 다양하게 확인할 수 있어서, 굉장히 유익하게 독서했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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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블루 2024-07-18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출판사가 저와 일치하네요^^
 
한 우물에서 한눈 팔기 - 서로 다른 생각들의 향연, 창의융합 콘서트
강신주 외 지음 / 베가북스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개인적으로 이런 스타일의 책을 싫어한다. 여러 저자가 챕터를 맡아서 쓴 것들을 편집한 책, 그리고 무슨 무슨 강연록을 책으로 엮은 것, 등등 내가 싫어하는 부분이 많이 들어간 책이라서 책을 손에 잡았을 때는 유쾌한 마음은 아니었음을 솔직하게 밝힌다. 사실 이런 류의 책은 뻔하지 않겠는가, 인문과 과학 기술의 융합, 이런 것들에 대해서 다소 원론적인 통합과 융합을 이야기한 강연을 옮겨놓은 책이겠구나... 그런 편견으로 책을 대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책을 본 순간, 나는 내 생각과는 책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솔직하게 말해서 이 책의 주제나 이 책의 내용적인 부분보다, 우선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책의 편집에 대해서 굉장히 칭찬을 하고 싶었다. 일단 책은 굉장히 알록달록한 사진들이 많았고, 그 챕터에 맞는 사진들이 풍부하게 있어서 시각적으로 책을 보는 즐거움을 선사했다.


 뭐랄까 마치 인문과 과학 두 속성은 다소 일반인들에게, 무겁고 딱딱한 이미지가 강한데, 전체적으로 책의 편집, 특히 시각적인 부분에서 굉장히 공을 들인 티가 났었던 책이었다. 아무리 인문학이나 과학 기술이 가벼움을 지향하여 설명을 한다 하더라도, 본질적인 학문의 무거움을 벗어내기란 쉽지 않다. 대중이 인문과 과학 기술을 좋아하면서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본질적 무거움 때문이기도 하다. 책의 편집 구성, 특히 시각적 측면에서 살펴봤을 때, 이런 알록달록하고 시각적으로 흥미로운 자극을 줄 수 있는 편집에서 호감을 느꼈었고 학술적인 인문서나, 전문적인 과학서의 무거움을 덜어주는 효과를 느꼈다. 마치 인문 과학서를 읽는 느낌보다 잡지를 읽는 기분이었었다.


 두 번째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시각적인 효과 이상으로 '청각'과 '영상'을 곁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텍스트인 책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점은, 시각 매체나 청각 매체의 구체성에서 다소 취약함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책 읽는데 훈련이 잘 된 독자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책이라는 텍스트보다 더욱더 구체적인 '영상' 매체를 선호하기 마련이다. 이 책은 그런 영상 매체를 책에다가 담았다.

 기존의 책에서도 영상 매체를 담거나 음성 매체를 담은 적이 있다. 부록으로 테이프를 주거나 CD에 영상을 포함하는 등의 방식으로, 영상과 음성을 책에 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점은 편의성이 아닐까, 책을 보다가 바로, 영상이나 음성을 확인하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컴퓨터를 켜서 확인을 해야 되고 그래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이 책은 '영상'과 '음악'을 내포하고 있는데, 스마트폰을 이용한 바코드 형식으로 첨부를 했다. 이런 점에서 나는 굉장히 놀라웠다. 보통 책을 볼 때 우리는 스마트폰을 항상 곁에 두고 책을 본다. 그러다 책에서 강연자가 '영상 하나 보고 지나가겠습니다.'라는 대목을 발견했다. 예전 책들 같으면 그런 영상들을 CD에 담거나, 글로 풀어서 주석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과감하게도 스마트폰이 인식할 수 있는 바코드가 있다. 곁에 있는 스마트폰을 들어서 이 바코드를 인식하면, 스마트폰에 바로 책에서 언급하는 영상이 나온다. 굉장한 편의성이 보이는 부분이다.


  책은 '창의융합콘서트'라는 강연록을 엮은 책이다. 강연록을 책으로 옮길 때 가장 역점을 둬야 하는 것은 강연의 그 감동과 강연의 그 생생함을 책에 최대한 반영을 해야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존의 책들은 강연에 비해서, 책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만큼 고정되고 정적인 텍스트에 강연이라는 동적인 리얼리티를 담기가 힘들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은 결국 시각적으로 화사한 이미지 자료를 통해, 그리고 영상을 통해 그러한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을 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숱한 강연록의 편집책 보다, 이 책은 구성적으로 이런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내용적으로 책의 리뷰를 해 보자면, 책의 리뷰를 하기 전에 이 책의 모태인 '창의융합콘서트'가 무엇인지부터 언급을 해야겠다. 나도 사실 책을 통해 처음 안 지식콘서트였는데, 각 방면의 혁신적인 인재들이 나와, 창의력과 융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지식 토크라고 정의하면 될 듯싶다. 이 책에 나온 사람들은 항간에 인기를 끌고 있는 철학자 '강신주'를 필두로, 일러스트레이터 '밥장', 음식 인문학자 '주영하', 로보티스 수석연구원 '한재권', 제일기획의 '김홍탁' , 다음소프트 부회장 '송길영' 등등을 포함한 13명의 창의적이고 융합형 인재들이었다. 그들은 나와서 강연을 하고, 챕터가 끝날 때 방청객의 질의를 받은 것과 강연자들끼리의 대담을 싣고 있는 구성이었다.   


 책이 내포하고 있는 주제는 여러 가지지만 크게 보면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 번째, 전문적인 사고도 중요하지만 종국에 가서는 전문성보다는 융합형 인재가 크게 주목받는다는 것, 두 번째는 그런 융합적 사고력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그들이 전개하는 논리가 기존의 강연에서 볼 수 없었던 참신함으로 융합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즉 그들의 창의력이었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각양각색이다. 인문학자, 철학자, 과학자, 예술가, 음식문화학자, 기업인 등등 그들이 만나서, 그들만의 창의적인 언어로 인문과 기술에 대한 융합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이 이 책의 모토였다. 아니 굳이 인문과 자연과학으로 나누는 것이 아닌 예술과 사회, 과학, 등 등 모든 것에 대해서 융합적인 사고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사실 우리나라의 실태는 인문사회에 나온 사람과 자연과학을 전공한 사람 간의 행보가 뚜렷하다. 솔직하게 말해서 사람들은 이공계에 대해서 더 높이 치고 더 높이 인정해주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너도 나도 이공계를 진학하려고 노력한다. 국가는 6차 교육과정에서 통합형 인재를 추구하였다면, 7차부터는 전문형 인재를 추구하며, 인문계 학생에게는 과학을 가르치지 않고, 이공계 학생에게는 사회와 역사를 가르치지 않았다. 이공계에 진학한 학생들은 인문계 학생들을 바라보며 '현실성 없이 뜬구름 잡는 이상주의자'들이라고 폄하한다. 인문계 학생들은 자연계 학생들을 바라보며 '교양 없는 속물 현실주의자' 들이라고 비난한다. 그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인문사회와 과학기술은 상호 보완적이어야 하며, 그 중심에는 인간이 있어야 한다. 인문이란 학문은 결국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과학과 기술은 원천적으로 인간을 좀 더 풍요롭게 살기 하기 위해 만들어진 학문이다. 고대에는 이런 인문과 과학기술을 나누지 않았었다. 플라톤은 철학자로 잘 알려졌지만 사실 플라톤은 수학자이기도 했다. 그가 만든 대학 아카데미아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기하학을 모르는 자 이 문에 들어오지도 말라.' 서양 사회의 발전 내부에는 인문(철학)과 자연(수학)이 공존하고 있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를 들어보면, 얼마 전 드라마에서 방영된, 정도전, 그리고 명량의 이순신, 성군이라 불리는 세종대왕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정도전은 고루한 유학(인문학)만을 한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군사학에 대한 저술을 남겼으며, 한양을 축성할 정도로(기술) 기술적인 면에도 관심을 가진 다방면적인 인재였었다. 세종대왕 역시도 마찬가지다. 세종은 경학(인문학)에도 밝았으며, 경학을 바탕으로 한 수학 교육에도 중점을 뒀고, 기술의 발달에도 상당히 신경을 쓴 군주였다. 그 결과 장영실을 필두로 한 세종의 기술자들은 조선의 기술을 드높였고, 세종의 인문학자들과 세종은 한글이라는 문화유산을 만들 수 있었다. 인문과 자연의 두 치적이 만나서, 세종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일궈냈었다. 그것은 세종이 생각하고 있던, 인문과 과학 기술에 대한 융합의 힘이었다. 조선 후기의 정약용 역시도 다방면적인 저술에서 인문학적인 소양을, 그리고 화성 축조를 비롯한 다리 건설 등에서 기술적인 면모를 보여준 융합형 인재였었다.

 이순신 역시도 마찬가지다. 다들 이순신을 무인으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이순신은 무인이기 이전에 문인이다. 그는 문과를 준비하던 선비였었으며, 무인이 돼서도, 선비 때 학습하던 유교의 사상을 버리지 않고 활용하였다. 당시의 무관들이 책을 가까이하지 않고, 문을 가까이하지 않을 때, 이순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인문정신으로 스스로를 무장했으며, 자신의 기술력을 응용하여 거북선을 강화했고, 그 결과 임진전쟁에서 혁혁한 성과를 보일 수 있었다. 그것 역시도 문과 무의 결합, 그리고 인문과 기술의 결합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다.


 현대 사회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이 책에 나온 명사들의 이야기를 잘 보면, 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점이 바로 융합적인 관점이었다. 그들이 남들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관점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의 가장 원동력은 고정된 관점이 아닌 지식과 지식 간의 유연한 관점, 관념과 관념을 넘나드는 그런 융합적인 관점이었다.

 교훈적인 내용을 떠나서, 내가 흥미 있게 봤던 점은 역시나 내가 가장 부족한 분야인 과학 기술자들의 연설이었다. 나는 특히 로봇 시대에 대한 말씀을 하신 '한재권 로보티스 수석디자인'의 강연이 재미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생명공학과 윤리에 대해 말씀하신 '박태현 교수'님의 말씀도 의미 있게 들었었다.

 특히 놀랐던 점은 다음 소프트의 부사장인 '송길영'씨의 강의 챕터에서, 설명 방법이나 마인드가, 굉장히 참신하다는 점을 느꼈다. 일례로, 한 청중객이 구글과의 비교를 이야기하자, 구글을 따라가고자 하는 마음도 없으며, 구글은 구글이고 다음은 다음이니, 인간 중심적인 커뮤니티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대답에서 자신감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인문 분야 쪽의 강연으로는 '윤경로' 님의 글로벌 인재에 대한 이야기가 귀감이 됐다. 듀폰이라는 글로벌 기업에서 아시아 인사팀을 담당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글로벌 인재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나갔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질은 좋은데 획일적인 교육과 주입식 교육 때문에 창의력이 많이 떨어진다는 부분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특히 이분께서 이스라엘 영재교육센터 이사장이자, 세계 영재 국제 네트워크 설립자인 '헤츠키 아리엘리'에게 유대인의 잠재력에 대해 자문을 했는데, 그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첫 번째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치열했고(유대인은 독립된 나라가 없다.), 두 번째는 남다른 교육열이며, 세 번째는 그들이 행하는 탈무드 교육법에 있다고 했다. 특히 우리나라와 대조를 이룬 것이 바로 저 세 번째였다. 우리나라 역시도 교육열이라면 어느 국가에 뒤지지 않으니까,

 그들은 어릴 적부터 탈무드라는 인문고전을 읽고, 자유스럽게 토의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는데 이것을 '하브두타'라고 한다. 즉 어린 시절에는 부모와 자식이, 커서는 친구와 친구끼리, 그렇게 토의와 토론을 거친 인문고전 교육은 그들의 창의적 사고에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는 것이 헤츠키의 논지였었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열풍을 맞고 있는 인문고전을 어떻게 소화하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획일적인 지식 습득형 교육에 대해서 안타까움이 일어났었다.

 책이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소 과학 기술 영역의 저자들의 논지를 읽다 보면 융합과 통합을 이야기하지만 다소 그들의 영역을 주로 풀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 결론 부에서 황급하게 인문과의 통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데, 그런 부분에서 약간의 부조화성을 느끼기도 했었다. 이와는 반대로 음식 인문학자 주영하씨는 자신의 영역인 인문의 영역으로 음식을 고찰하기보단 상반되는 기술적 영역, 김치냉장고를 가지고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전개방법으로 봤을 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쪽이 더 융합적 취지에 옳지 않을까 싶었다.

 두 번째는 개인적으로 강신주씨의 청중 토크를 읽고 싶었는데, 없었다는 점이 아쉬웠다. 다른 분들은 청중 토크를 다 기록했는데, 강신주씨의 것만 없어서 그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책에 나오는 강연자들은 하나같이 보통의 평범한 마인드를 지닌 사람들과는 구별됐었다. 그 점이 그들의 강연을 담은 이 책에서 생생히 느껴졌었다. 책의 구성과 책의 내용, 모두가 상당히 내실 있다고 생각됐었다. 그냥 일반적인 짜집기 강연록들과 비교했을 때, 굉장히 공을 들인 부분이 보인 책이었다.


 여러 저자들의 다양한 관점, 그리고 인문학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 것인가에서부터, 차별화할 수 있는 글로벌 인재가 갖춰야 할 조건들, 기업을 경영하는 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등 여러 경험담이 이 강연에 녹아 있었었다. 그래서 어느 누구라도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좋은 책이 아닐까 싶었다. 더구나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거나 독서에 이제 막 취미를 붙이려는 사람에게 시각적, 구성적 효과가 뛰어난 이 책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


나는 앞에서 말했다시피, 이런 종류의 짜집기 책을 극도로 싫어하고, 한 저자가 같은 논지로 주제를 전개하는 책을 선호한다. 그러나 이 책은 생각보다, 내가 느낀 것들이 많았었고, 나의 그런 강연집에 대한 편견을 조금이나마 해소해 준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 본 리뷰는 베가북스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리뷰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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