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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4 - 국가 ㅣ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2월
평점 :
동양에 정치철학서 <맹자>가 유교사상의 정치철학을 대변하고 대표해왔다면, 서구 사회에서의 정치 텍스트의 시초는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국가>라는 책은 플라톤의 중기 철학, 그 자체를 대변함과 동시에, 플라톤이라는 아이콘을 대표하는 저서다. 왜 우리는 플라톤 하면 <국가>를 떠올리고, <국가>가 그의 대표작이라는 것을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일까? <국가> 책 안에서는 여러 가지 주제가 중구난방적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가령 국가와 정치에 대해서, 그리고 순수철학과 인식론, 이데아 이론에 대해서 강하게 드러난 책이 <국가>다. 일단 <국가>는 플라톤의 저서 중 분량이 방대한 편에 속한다. 다른 대화편들이 단편적인 성격을 지닌다면, <국가>는 상당히 두꺼운 양을 자랑한다. 그만큼 플라톤은 이 책을 저술하면서, 혼을 쏟아 저술했다. 분량이 방대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이론들이 심도 있게 많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 책은 국가와 정체에 대한 논의가 대부분이지만, 그런 것을 나아가, 사회와 개인, 도덕, 순수철학, 문학 분야들을 넘나들며,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플라톤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국가>, 그리고 명문대 선정 고전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책이 <국가>이지만, 사실 <국가>는 상당히 어려운 저술에 속한다. 플라톤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국가>부터 사 놓고 책을 펴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경우 십중팔구 멘붕당하고, 철학을 멀리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대표작이기는 하나, 플라톤의 입문작으로는 추천하고 싶지 않다. 책이 너무 방대하고, 여러 분야들이 뒤섞였기 때문에, 플라톤과 친숙하지 않다면 접근하기 힘든 텍스트가 <국가>다.
<국가>는 일반적으로 철학서적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나는 책을 읽으며 <국가>를 철학서적으로 분류하는 것은 오류가 있지 않나 싶다. 물론 이 책 속의 논의나 철학적인 색깔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철학서로도 손색없는 뛰어난 역작이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원저자의 저술 의도를 짐작하고 생각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여러 문헌에 따르면 플라톤이 이 책을 저술한 이유는 이렇게 나온다. 향후 정계에 나갈 명망 높은 유력 가문의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해, 숙고하고 생각한 플라톤만의 이상적인 정체 이념이 투영된 것이 <국가>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순수 철학서라고 이야기하기보단, 정치철학서라고 생각한다.
당시 그리스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페르시아와 전쟁을 겪었으며, 대내적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인해 아테네는 엄청난 타격을 받은 상태였다. 거기다, 최종적으로 30인의 과두정은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죽임으로써, 플라톤에게 강한 멘붕을 선사했다. 기존에 부유층 자제였던 그는 스승의 죽음에 절망하여,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학문 활동에 전념한다. 보통 사람들이 어떤 충격을 맞이했을 때, 극복하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 충격으로부터 정면 돌파하는 경우, 두 번째 다른 분야에 몰두하면서 다른 분야를 통해 충격을 준 부분을 해소하는 경우,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피하는 경우가 있겠다. 여기서 플라톤은 두 번째 경우를 선택했다. 그는 스승의 죽음을 내린 사회 앞에서, 정치가의 꿈을 접고 철학 학문을 통해, 자신의 아픔을 극복하기로 다짐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숙고의 삶을 거쳐, <국가>라는 텍스트를 통해 스승의 죽음을 내린 현재 그리스 정치관을 진단하고 비판했다. 플라톤의 입장에서 스승을 죽인 그리스 정부는 옳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숙고와 사색 끝에 자신의 이상적인 정치관을 형성하고 그것을 저술로 써 냄과 동시에, 향후 자라는 아테네의 미래들에게, 자신의 정치철학을 가르치는 것으로, 자신의 절망을, 그리고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것이 <국가>가 저술된 목적이었다.
<국가>에 나온 플라톤의 정치이념은 철저한 계급 이론을 바탕으로 하며, 가장 이성적이고, 가장 뛰어난 수호자 계급의 철인이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며, 각자의 계급에서 어긋나는 것은 사회를 혼란시키게 만드는 요소라고 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전제적인 정치를 떠올리기 쉽다. 특히 몇몇 사람들은 플라톤의 이런 정치이념을 보고, 독재주의로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구석은 있다. 그러나 이런 성급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플라톤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은 정체에 대해서 '과두정치'와 '철인정치'를 엄격하게 구분한다. 플라톤이 이상으로 내세우고 있는 철인정치의 최고 통치자는 그야말로 이성에 의해 통제되는 인간이다. 가장 이성적이며, 가장 자제력이 뛰어난 인물, 무한한 권력 앞에서 자신의 욕심을 잘 다스리고 초연하게 행동할 수 있는 인물, 사욕을 채우지 않는 인물, 본질(이데아)를 바라볼 수 있는 인물, 그런 인물이 다스리고, 그런 집단이 지도층에 서서 국가를 이끌어나가는 것을 '철인정치'라고 이야기했다. 사실 철인 수호자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부분에서 '과두정치'라고 규정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플라톤의 관념으로는 과두정치와 철인정치를 엄격하게 구분을 했었다.
플라톤의 수호자를 이런 부분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어쨌든 인간 집단에서는 리더가 필요하다. 아무리 평등을 지향한다 하더라도, 동물과 인간은 태생적으로 대표자를 선출해왔었다. 어쩌면 플라톤은 그런 인간 조직문화의 본연적인 속성을 이해하고, 반영하되, 그 지도자에 대해서 최대한 자신이 생각한 덕목들, 즉 이성 중심적인, 철학에 능통한 자격을 통치자에게 요구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플라톤의 정치이념은 동양 사상의 이상주의자 공자의 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 공자가 말하는 선비 집단, 그리고 그 선비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을 군자라고 칭하고, 그 군자를 중심으로 정치를 이뤄나가는 것, 사농공상이 제각기 할 일을 제대로 하는 사회를 공자는 꿈꿨다. 그래서 이런 이념을 보수주의적 이념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해석은 후대의 가치를 투영하여 바라본 결과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당시 공자가 말한 사 계급, 즉 선비 계급은 놀고먹고, 통치의 즐거움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농공상의 계급보다 더 청렴하고, 모범을 보여야 한다. 지도층은 내면적으로 더욱 더 성찰하고, 덕을 쌓아야 한다는 이론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느꼈던 것은 플라톤과 공자가 간과했던 것이 있다. 플라톤의 입장부터 보자면 인간은 완벽한 이성으로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을 간과했다. 공자의 입장으로 보자면 인간은 무조건적으로 선하지 않으며 무조건적인 도덕을 내세우고 있지 않다는 점도 간과하는 점이 보였다. 동양과 서양의 두 선현은 어쩌면 인간을 완벽하고 절대적인 이상적인 개체로 인식하고 정체 이론을 이야기했지만, 어쩌면 그들은 그들의 이론에 집중하여서,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본성을 고려하지 않았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이 둘의 사상은 의의는 있으되, 구현되기 어려운 이상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지만, 플라톤은 남녀평등을 이야기한 최초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수호자 자질이 있는 여성들은 남성과 평등하게 교육해서, 국가정책에 도움이 될 수 있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이 부분은 상당히 파격적인 주장이다. 고대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그야말로 바닥이나 다름없는데, 플라톤은 이러한 관념을 뒤엎고, 남녀평등의 교육을 주장했다. 그래서 여성들도 체육관(김나지움)에 가서 남성들과 비슷하게 레슬링(고대 그리스에서 대표적으로 남성들이 단련했던 운동)을 해야 하며, 군사적인 지식과 통치, 철학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 바람직한 철인, 수호자는 과연 어떻게 국가를, 국민을 이끌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국가> 7편에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물론 이 7편 외에도 여러 부분에서 지도자의 덕목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흔히 말하는 '동굴의 비유'라고 하는 이 대목이 가장 인상 깊었다.

플라톤을 이야기할 때 가장 빠지지 않는 부분이 이 '동굴의 비유'다. 이것은 <국가> 7권에 나온 이론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금 손발이 묶인 채, 그림자가 비치는 환영만을 보며 그렇게 인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삶의 본질은 그렇지 않다. 동굴을 빠져나와서 태양 위의 세상이 본질이듯, 결국 세상의 본질(이데아)은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과 떨어져 있다. 우리는 수갑을 풀고, 나와 용기 있게 동굴을 나와서 태양 아래에 올바른 세상을 봐야만 한다. 올바른 세상 그것이 바로 플라톤이 주장하는 이데아이며, 사물의 본질이라는 점이다. 플라톤은 이 동굴의 비유를 통해 자신의 이데아 이론과 더불어, 수호자가 어떤 자세로 정치를 임해야 하는가를 알려주고 있었다.
올바른 치자라면, 일단 동굴 안에서 그림자만 보는 속박당한 자신을 해방해야 한다. 수갑을 풀고, 나아가 동굴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그리고 빛 아래에서 세상의 본질을 바라봐야 한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치자는 다시 차갑고 어두운 동굴 안으로 다시 들어가, 환영에 사로잡힌 여러 대중들을 동굴 밖으로 이끌어야 한다. 수호자 그리고 철인은 이렇게 대중의 사슬을 끊고 대중들에게 사물의 본질, 세상의 본질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그런 자를 플라톤은 원한 것이다.
여기서 바깥세상, 즉 태양이 비치는 세상은 사물의 본질과, 세상의 본질 즉 이데아의 측면을 뜻한다. 플라톤이 생각한 관념 속의 개념인 것이다. 그에 반해,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현실적 형상은 동굴 개념에서 비추는 말과 병 등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부분에서 플라톤은 철저하게 이원론적 사고과정을 보여준다.
정신 vs 감각, 이데아 vs 보이는 사물의 형상, 동굴 밖의 원래 세계 vs 동굴 안의 세계, 이성 vs 감각, 등등 플라톤의 철학은 철저하게 하나의 축과 다른 축의 대립이 있다. 대체적으로 플라톤은 정신과 이상을 절대시하고, 그러한 정신과 이성으로 사물의 본질 이데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이데아를 바라보는 것이 동굴 밖의 밝은 세계를 본다는 개념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국가>에서 플라톤은 문학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결국 문학은 사실이 아니라 허구로 표현한 것이므로, 가까이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했는데, 이런 부분은 너무 지나친 오버가 아닐까, 플라톤에 따르면 결국 이데아(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속성이 있는데, 결국 문학이라는 것은 실제 사건이나 영감을 포장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포장하고 묘사하는 것 자체가 이미 실제 하는 것을 비틀어 표현하는 것이라 이데아적 속성을 지니지 않게 된다. 즉 플라톤은 모든 문학은 허구와 공상이 존재한다. -> 그것은 사물의 본질이 아니다. -> 본질은 가변적 속성이기보다 절대적 속성이다. -> 이런 부분에서 보자면 문학은 이데아적 속성을 지니지 않으므로 지향해서는 안된다.로 귀결된다. 플라톤은 이런 이유로 문학을 굉장히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비판적으로 플라톤의 이념을 바라보자면, 플라톤 자신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데아(본질)를 사물의 본질로 인식하고, 우리가 보는 현실의 세계를 껍데기로 인식했지만, 반대로 어쩌면 이데아야말로 상상 속에 만들어진 관념일 수 있겠고, 현실에 보이는 것이 본질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이렇게 문제 제기를 하며 더욱더 현실 중심적인 것에서 답을 찾으려 했던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의 문학론을 옹호하기보단, 자신만의 문학론을 <시학>이라는 저술로 남긴다.
디오게네스의 <철학자들의 생애>를 살펴보면 플라톤의 <국가>를 반박하기 위해 크세노폰은 <키루스의 교육>을 저술했다고 한다. 이 부분을 살펴봐도 <국가>의 저술 의도를 알 수 있다.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은 직접적인 리더십을 다루고 있다. 즉 외전과 내전, 그리고 스승의 죽음으로 얼룩진 위기의 아테네를 구할 정치에 대해서 플라톤이 이상적으로 생각한 것이 <국가>였다. 크세노폰은 플라톤의 사상에 반발하여 자신만의 해결책인 <키루스의 교육>을 저술했다.
두 책을 다 읽어 본 입장에서 과연 뭐가 다를까? 플라톤이 주장하는 철인은 절대적인 이성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크세노폰이 주장하는 키루스 대제는 이성적이긴 하되, 한계가 있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절제라는 측면에서, 플라톤의 철인은 자신의 감정을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기에 절제하는 건 지도자의 당연한 책무라고 이야기한다. 반면 크세노폰의 이상향 키루스 대제는 이성적이긴 하나, 결국 인간 본성은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기에 유혹들로부터 의식적으로 절제를 해야 한다는 그런 입장이다. 즉 플라톤의 입장은 이성을 통해 완벽한 자기 통제가 가능한 인물을 꿈꿨다. 그런 완벽한 자기통제 하에 절제를 자유자재로 하는 철인적인 인간을 이상적으로 꿈꿨다, 크세노폰은 인간은 이성으로 완벽하게 통제하기란 불가능하며,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유혹들로부터 타락하지 않기 위해 절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플라톤은 인간은 절대적인 이성의 존재로 인식하는 반면, 크세노폰은 그런 입장에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것이 두 철학자의 가장 큰 인식의 차이가 아닐까?
마치 동양의 성선설과 성악설의 대립을 보는 것 같았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본성은 선하기에 본성에 따라 선을 실천하고 배우기를 갈망한다고 해석한다. 순자의 성악설에서는 인간의 본성은 악하기에, 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공자를 중심으로 유학 학파는 계보적으로 맹자와 순자가 갈리기 시작하는데, 대체적으로 동양에서는 맹자의 사상에 권위를 부여해왔고 순자를 이단으로 치부했었다.
마찬가지로, 서구 사회에서도 소크라테스의 제자 크세노폰과 플라톤이 절제라는 측면을 해석하는 부분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플라톤의 이념을 좀 더 우위에 두고 있는데 이런 부분은 조금 아쉽게 느껴진다. 아니 솔직하게 말해서 인간은 과연 플라톤이 말한 대로 절대적으로 이성적인 존재인 것일까? 왜 나는 이 질문이 회의적으로 들리는 것인지...
거기다 플라톤과 크세노폰은 여러 가지로 대조적이다. 플라톤은 귀족 명문가의 자제로 스승의 죽음 이후, 깊은 사색과 숙고하는 자세로 자신의 번뇌를 돌파했다. 그 결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출함과 동시에 서양 철학에 엄청난 거두로 자리 잡았다. 크세노폰은 플라톤과 달랐다. 크세노폰은 스스로가 전쟁을 경험했었고 그 경험담을 <아나바시스>라는 책으로 남겼다. 활동적 성격이 다분하기에, 숙고하고 생각한 플라톤의 글과 비교해서, 글이 투박하다. 크세노폰의 저술을 살펴보면 자신이 경험한 전쟁담과 경험이 녹아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즉 크세노폰은 자신의 실제 경험담(주로 전쟁 경험)을 녹여서 저술을 했다.
가령 <국가>와 <키루스의 교육>을 비교해보자면, <국가>가 상당히 이상주의적이고, 관념적이며, 철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키루스의 교육>은 다소 현실주의적이며, 경험주의적이며, 간결하고 투박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보통 플라톤의 <국가>를 읽으면서 참고해야 할 도서로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술한 <정치학>을 꼽는데, 물론 <정치학>과도 비교를 해야 하지만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과도 비교를 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국가>는 쉽게 리뷰할 책은 아니다. 나는 지금 비교적 책의 저술 동기에 맞춰, 정치와 지도자에 관한 부분으로 좁혀 리뷰를 진행하고 있지만, 이 책은 워낙 방대한 분량이고 다루는 부분이 많아서, 여러 각도로 리뷰를 쓰고 싶은 생각도 든다.
국내에는 <국가> 번역본이 많이 나와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책은 아무래도 박종현 선생님의 <국가>다. 내가 본 책은 천병희 선생님의 번역본이다. 두 책은 장단점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박종현 선생님의 국가는 직역을 바탕으로 하였고, 철학을 전공하신 탓에 전문적이고, 다양하고 심도 있는 주석이 매력적이다. 깊이 있게 <국가>를 읽을 분들은 박종현 선생님의 저작을 추천한다. 반면 천병희 선생님의 <국가> 장점은 가독성이다. <국가>를 읽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아니 국가뿐만 아니라 사실 모든 철학서적에 국한된 것이지만,) 책은 굉장히 난해한 내용이다. 천병희 선생님은 번역을 하실 때 가독성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여 번역했다고 한다. 둘 다 읽은 결과, 확실히 천병희 선생님의 역본이 보기에는 더 편했다. 이 부분은 독자가 알아서 판단하여 읽으면 될 것 같다. 참고로 두 저서 모두 그리스 헬라어 원전 번역본이다.
예전에는 우리나라에 <국가> 원전 번역본이 없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호에 맞게 책이 나왔으니 좋은 것 같다. 앞으로 정암학당본 <국가>가 나올 예정이라는데 기대가 된다.
지금 보면 여러 가지로 한계도 있고, 이상주의적인 부분이 많은 텍스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역시 좋은 책이다. 리더가 되고자 하거나, 철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필수로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닐까 싶다. 확실히 고전이라는 것은 괜히 내려오는 책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