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세트 - 전10권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플루타르코스 지음, 이다희 옮김, 이윤기 기획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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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나름의 성공을 꿈꾼다. 성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물론 다르겠지만, 일반인들이 보편적으로 꿈꾸는 성공은 돈이 많고 부유하며, 시간적 여유가 있고, 자신의 영향력이 사회에서 막강한 상태일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보편적인 성공을 바라고 꿈꾸지만 정작 그 성공한 삶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관심 가지지 않는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영웅들은 하나같이 커다란 성공을 이룬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성공으로 인해 불행해진 인물들이 많았다.

책을 통해 성공한 삶을 바라보니 하나의 성공 뒤에는 그보다 더 큰 고난과 난관이 있는 경우도 있었으며, 만족하지 않고 더 큰 성공을 꿈꾸다가 자멸한 경우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커다란 성공 뒤에는 숱한 시기와 배신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몰락한 인물들도 많았다. 물론 지혜롭게 자신의 성공을 유지하며 노력한 인물들도 있었지만, 그런 인물들은 정말 극소수였다. 대부분의 영웅들은 커다란 성공 끝에 몰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메인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 역시도 커다란 성공 뒤에 이를 유지하지 못하고 죽었다. 사람이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나와 비슷한 사례, 그리고 나와는 다른 삶을 통하여 배움을 얻기 위해서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절대적인 효용가치라고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아주 모범적인 역사서다. 우리는 50인의 인물과, 그 인물을 친절하게 비교 분석해주는 저자의 코멘트를 통해 짧지도 길지도 않은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고 숙고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더불어 내가 꿈꾸는 성공 저편에는 무엇이 있는지, 어떤 것들이 도사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기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가장 탁월한 영웅들의 본보기를 통해 성공을 어떻게 이루는지, 그리고 성공한 뒤에 기다리고 있는 것들에 대해 친절하게 알려주는 교과서다. 저자는 본문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들의 삶을 통하여 우리는 탁월함을 배울 수 있고, 스스로가 탁월한 인물로 거듭나게 된다며, 이 책의 저술 동기를 분명하게 하였다. 숱한 자기 계발서들이 성공하는 방법에 집중할 때,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성공하는 방법과 더불어 성공 이후 성공을 유지하는 방법까지도 친절하게 알려준다. 그렇기에 이 책은 매우 뜻깊은 고전이고, 그러한 이유로 서양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랄프 왈도 에머슨도 그러지 않았는가, 전 세계 도서관이 불타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과 《플라톤 전집》, 《셰익스피어 전집》은 반드시 구해야 한다고 말이다. 책들은 각각 서양의 역사, 철학, 문학을 상징하며 이 셋은 인문학의 주요 영역(문사철)이다.

과거의 사람들은 오늘날의 문제가 있을 때 바람직한 과거의 모습에서 현재의 모순을 찾는다. 크세노폰도 그랬고, 마키아벨리도 그랬고, 플루타르코스도 그랬으며 동양의 역사가들과 철학자들도 그러했다. 그는 제국주의가 만연한 로마의 현재를 매우 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랬기에 그는 민주주의가 빛을 발한 그리스 시대를 동경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는 그런 플루타르코스의 친그리스적 관념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는 작품에서 노골적으로 로마의 왕정을 비판하지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권력 독점을 비판했다. 로마와 그리스가 찬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시민들의 자유와 민권 의식에 있다고 그는 판단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라는 고전을 통해 우리 자신 속에 존재하는 모순과 결점을 직시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순들을 하나씩 극복하고자 노력한다면 영웅들과 같은 위업은 이룰 수 없더라도 영웅들과 비슷한 고귀한 품성은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플루타르코스는 이 책에서 영웅들의 화려한 행위보다, 화려한 성공을 이룬 영웅들의 품성에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인물들의 화려한 업적보다도, 그 인물의 사소한 말 한마디가 품성과 직결된다면, 그런 사소한 사례들에 집중했고 그것들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다양한 인물들의 품성을 비교 분석하며, 가장 탁월한 인물에 어울리는 품성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그런 플루타르코스의 품성에 대한 생각을 집약하여 개념화한 것이 바로 '비르투스'다. 비르투스라고 하면 흔히 마키아벨리가 만든 개념이라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책에서는 로마인의 바람직한 품성과 미덕을 '비르투스'라고 정의한다. 즉 플루타르코스의 비르투스는 로마인의 내적인 미덕과 도덕을 의미하고 있었고, 마키아벨리는 이런 로마의 전통적인 비르투스 개념과 대조적으로 현실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비르투스와 포르투나의 대립은 서구권 고전의 주된 논의 대상이다. 플루타르코스 역시도 이에 대해 숱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의 의견을 종합해보자면 결국 포르투나라는 운의 농간으로부터 사람은 비르투스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키아벨리의 사상과도 비슷하다. 단지 그 비르투스라는 개념이 내적 품성에 집중한 것인가 현실적 역량에 집중한 것인가라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개인적인 사견으로는 인생에 있어서 나름의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마키아벨리의 현실적 비르투스도, 그리고 플루타르코스의 품성적 비르투스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적 역량과 내면적 품성의 깊이. 둘 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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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 영웅전 10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10
플루타르코스 지음, 이다희 옮김, 이윤기 기획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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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10권이다. 마지막 권을 읽고 나니 뭔가 씁쓸하다. 전집을 모두 읽었다는 후련함보다 아쉬운 마음 그리고 씁쓸한 마음이 더 컸다. 책이 다루고 있는 배경 역시 어둡다. 그리스의 배경은 사실상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아카이아 연합 시절을 다루고 있으며, 로마의 배경은 숱한 군부에 의해 정권이 전복되는 시대를 다루고 있다. 또한 그리스, 로마 시대의 전성기에 인물들에 비해 내용도 빈약한 느낌이다.

  다섯 인물 중 세 사람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들이고, 두 사람은 만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자리에 오르기 위해 노력한 인물들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자유는 참 중요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자유를 추구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람은 여러 타인들보다 우위에 있기를 바란다. 이 두 가지의 개념이 충돌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현실에서는 이 두 가지의 개념이 필연적으로 충돌한다. 나의 우위를 무한정으로 추구하다 보면 결국 타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영웅전에서 나온 정치적, 군사적인 인물들이 불행하게 죽은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 자신의 야망을 극도로 추구하여서 수많은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한 결과가 아닐까. 아라토스와 필로포이멘은 필사적으로 조국과 그리스 지역을 패권주의로부터 해방하고자 노력했다. 그리스의 전성기에는 많은 도시국가들이 불화는 있었지만, 나름 옹기종기 경쟁하며 문명의 꽃을 피웠고 그래서 그리스 지역은 명실공히 세계의 중심 중 하나였다. 그러나 페르시아와 마케도니아 등등의 외세로부터 시달리기 시작했고 그들의 패권으로 인해 결국 그리스 지역은 예전의 찬란함과 민주주의가 사라졌다. 아라토스와 필로포이멘은 그리스의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 분투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아라토스는 군주정과 참주정을 매우 싫어하고 타도했지만 결국 스파르타의 경쟁의식 때문에 아카이아 연맹과 자신을 마케도니아에 예속했다. 플루타르코스의 말대로 그가 스파르타의 패권주의를 인정했다면 마케도니아의 군대가 펠로폰네소스에 안 왔을지도 모르겠고, 그로 인해 로마의 군대도 오지 않았을 것이니 그리스의 몰락이 좀 더 늦어졌을지도 모르겠다.

 티투스의 모습은 참 귀감으로 삼을 만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만약 일제 강점 시절에 일본군이 티투스처럼 우리 민족을 통치했다면 어땠을까? 진심으로 덕을 내세우며 한민족을 존중하고 예우하는 통치를 지향했다면, 어쩌면 일본의 지배가 더 장기화되지 않았을까라고도 생각했다. 다만 나는 책을 보면서 의문인 점이 물론 티투스가 그리스 지역의 자치를 인정해주고 그들의 문화를 존중해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져다준 자유는 결국 반쪽짜리가 아닐까? 티투스가 그리스 지역에 자유를 가져왔지만 그것이 진정한 자유인가? 아니다 결국 그리스는 이후 로마의 세력권에 편입됐고, 그리스는 자신만의 주체성을 상실하며 로마의 부속 지역으로 전락했다. 티투스가 가져온 자유는 표면적으로 자유일진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복속이라고 생각한다. 플루타르코스는 자유를 가져다준 티투스의 행동이 매우 고귀하고 이는 로마의 덕이라며 치켜세우는데, 이러한 생각도 어찌 보면 자문화 중심주의, 침략자의 제국주의적인 모습을 옹호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남이 가져다준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자유를 되찾고 싶다면 필로포이멘과 같이 최대한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갈바와 오토의 열전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나오는 인물은 많은데 정확하게 표현하면 막장의 시절이었다.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또 힘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 나는 시대였다. 로마를 성장시킨 가장 핵심은 군대라고 생각한다. 지칠 줄 모르고 물러서지 않는 기상으로 인해 다른 민족들을 모두 복속한 로마는 피를 갈구하며 발전한 제국이었다. 그런 로마를 내부적으로 무너트린 것도 결국 군대였다. 황제는 백성들의 민심을 고려하기보다 군대의 복종을 더욱 신경 썼다. 로마의 정권을 모두 결정하는 것은 시민이 아니라 군대였다. 칼로 성공한 자는 칼로 망한다. 갈바와 오토의 사례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 역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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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 영웅전 9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9
플루타르코스 지음, 이다희 옮김, 이윤기 기획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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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만큼 개혁을 강조하는 때가 있었을까? 국정 농단 사건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의 정치의식은 과거에 비해 높아졌으며, 이는 결국 나라의 개혁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오늘날만 개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10년 전에도,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도 시대가 요구하는 개혁은 늘 있었고 존재했다. 인간이 집단을 이루고 산 이래로, 제도의 타락과 지도층의 부패가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에 각 시대마다 필요한 개혁은 늘 존재했다.

  책에서 개혁을 상징하는 인물들을 주관적으로 평가해보자면, 아기스의 개혁은 매우 바람직했다. 스스로 솔선하여 재산을 분배했고, 강경한 추진력으로 밀어붙였지만 결국 내부의 부하 아게실라오스가 문제였다. 아기스가 아게실라오스의 본성을 파악하고 그를 빠르게 내쳤더라면 아마 그는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클레오메네스는 개혁을 이룰 수 있는 힘을 가지기 위해 내부적으로, 외부적으로 노력했던 인물이다. 다만 그의 개혁은 스파르타 내부에 집중하기보단 외부 원정에 너무 집중됐다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외부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결국 외세인 마케도니아를 펠로폰네소스 대륙으로 불러들였고 이로 인해 스파르타가 전복됐으니, 애초에 그가 외부 원정에 대한 욕심을 줄이고 내치에 좀 더 집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로마의 그라쿠스 형제들의 개혁은 매우 바람직하고 뛰어난 가치를 지향했지만, 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는 미숙한 모습이 있었다. 그라쿠스 형제들의 가장 아쉬운 점은 바로 민중들의 감정적인 선동에 너무 쉽게 동조했고, 이를 통해 너무 과격하게 밀어붙였다. 이렇듯 개혁은 방향이 옳더라도 방법론에서 오류를 범하면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참 어려운 문제다.

  나는 개인적으로 개혁이라는 것은 전쟁으로 비유하자면 단기전이 아닌 장기전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급진적인 개혁이더라도 그 개혁이 현실화되려면 숱한 반대를 뚫어야 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개혁들은 미묘하게도 매우 점진적으로 이뤄졌다. 그렇기에 단기적으로 성급하게 이루려고 한다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라쿠스 형제가 좀 더 여유를 가지고 감정적이기보다 좀 더 냉정하게 대응했더라면 아마 그들이 추구했던 개혁이 꽃을 발휘했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나라를 바꾸려는 개혁은 말이 쉽지 현실화하기에는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했듯 각 시대에는 그 시대에 필요한 개혁이 늘 존재했고,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렵고 복잡한 개혁이라는 화두에 대해 민감하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마 플루타르코스가 이들의 열전을 쓴 이유도 독자들에게 있어 개혁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쓰지 않았나 싶다.

  개혁에 대한 인물들에 비해 퓌드로스와 마리우스 이야기는 매우 단순하다. 끝없는 욕망보다 현재의 행복을 생각하라는 교훈이다. 나는 마리우스를 보며 욕망도 세대를 거쳐 진화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마리우스의 끝없는 야욕은 결국 카이사르로 이어졌다. 카이사르는 마리우스보다 더욱 세심하고 정교한 모습으로 자신의 야욕을 실천했다. 마리우스는 집정관이라는 자리에 집착하였지만 카이사르는 독재를 꿈꿨다. 이런 카이사르보다 더 교묘한 인물은 그의 사후 등장한 옥타비아누스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보다 훨씬 정교한 야욕을 선보였다. 마리우스와 카이사르는 결국 자신들의 야욕으로 몰락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야욕으로 성공했으며, 결국 그 야욕을 지켜냈다. 그는 카이사르보다 훨씬 기만적이며, 훨씬 잔혹했다. 이렇듯 시대가 흐를수록 인간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기교도 훨씬 정교해진다. 과거의 드라마에 비해 오늘날 드라마의 스토리가 막장인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시대이기에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은 더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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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전 - 하 - 전면개정판 춘추좌전
좌구명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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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전 하》 권에서 다루는 내용의 핵심은 북방 문화권과 남방 문화권의 대립이다. 춘추시대의 주도권은 대체적으로 북방 세력이 줄곧 잡아왔다. 주나라 황실 역시 서북방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앞서 패권을 잡았던 제나라와 진나라 등등도 전형적인 북방 세력권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진문공의 진나라는 주나라와 인접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북방에서 비롯한 중국 전통의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국가였다. 이 거대하고 막강한 진나라가 전국시대에는 3개로 쪼개지는데, 수많은 나라가 전국시대에 몰락함에도 진에서 비롯한 3개의 국가는 진시황의 통일 전까지 유지됐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전성기 진나라가 얼마나 강력한 국가였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다. 춘추시대 초기에는 북방 세력이 패권을 주도했지만 중기 이후로는 남방의 세력권 쪽으로 무게가 쏠린다.

《춘추좌전 하》권에서는 남방의 강대국인 초장왕의 초나라를 필두로, 오나라 합려와 부차 그리고 월나라 구천 등등이 차례로 중원의 패권을 장악한다. 이들 나라의 특징은 전통적인 북방 문화권 출신이 아니라 이민족의 영토라 할 수 있는 남방 문화권의 나라다. 강성하는 남방의 신세력 초나라와 기존의 강대국 진나라는 필연적으로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춘추좌전 하》 권에서는 이 두 세력의 갈등을 주의 깊게 다루고 있다. 진나라와 초나라의 대결 이후에는 중국의 패권이 완전 남방으로 넘어가는데, 초나라보다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오나라가 급성장하여 중원의 패자를 자처했고, 오나라는 더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월나라에 패권을 내주게 된다. 북방이 가졌던 중원의 패권을 남방의 세력들이 가지는 과정 속에서 중국의 국경 범위는 더더욱 넓어졌고, 이민족이라 할 수 있는 초나라와 오나라, 월나라의 영토도 이 시기를 거쳐 중국의 국경으로 명확하게 인식됐다.

내용적인 부분을 잠시 두고 구조적인 측면에서 《춘추좌전》을 생각해보자. 공자가 편집한 본문은 노나라의 정치 상황을 짧은 메모 형식으로 기록했지만 좌구명의 해설과 평론은 노나라의 정치상황보다 주변국들의 외교와 패권의 이전 과정 등등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한 독자의 주관적인 입장에서 노골적으로 평하자면, 《춘추좌전》에 있어 노나라의 역사는 노잼이었고, 주변 강국들의 첨예한 외교사는 꿀잼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공자가 편수했다는 《춘추》의 본문은 공자의 사후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좌구명의 주석은 그 이후의 국제정세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었다. 그래서 《춘추좌전》은 월나라가 패권을 가지게 됐으며, 막강한 북방 세력인 진나라가 3개의 국가로 쪼개질 위기에 처한 부분에서 끝맺고 있다. 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춘추좌전》의 본문은 노나라와 공자의 입장을 대변하는데 반해, 좌구명의 주석은 노나라의 상황도 상황이지만 그보다 첨예한 국제관계에 더 중점을 뒀다고 볼 수 있다.

묵직한 사서를 다 완독하고 나니 역자가 서두에서 밝혔던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인물이 생각난다.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일본인들의 영원한 스승으로 추앙받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오늘날의 일본을 만드는 데 사상적으로 가장 앞장선 인물이었다. 그는 근대 일본을 탄생한 메이지 유신의 방향을 제시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평생에 걸쳐 13번 완독한 도서가 바로 《춘추좌전》이다. 유학을 배격하고 서구화를 부르짖으며 근대화를 꿈꾼 위인이 평생에 걸쳐 유학적 이데올로기로 저술된 역사서를 13번이다 봤다는 사실은 참 역설적이다. 왜 근대화를 주장했던 그는 유학적 이데올로기로 저술된 《춘추좌전》을 13번씩이나 탐독한 것일까? 사실 번역본 쪽수로 파악할 수 있듯, 《춘추좌전》은 분량이 엄청 방대한 고전이며, 한 번 완독하기에도 쉽지 않은 고전이다. 그런데 왜 그는 이 책에 몰두한 것일까?

첫 번째로 아마 그는 《춘추좌전》을 읽으며 중원의 패권이 이동하는 부분에 주목했을 것이다. 알다시피 《춘추좌전》에 나오는 패권국은 고정적이지 않고 가변적이었다. 게다가 기존의 문명화된 북방 지역에서 패권이 유지된 것이 아닌, 문화적으로 불모지나 다름없는 남방 세력으로 패권은 이전됐다. 이를 보고 그는 일본의 미래를 꿈꾸지 않았을까. '지금은 문화적으로 낙후됐고, 열등한 일본이지만 빠른 근대화를 통해 서구가 가지고 있던 국제적 패권을 우리도 가질 수 있겠구나.'라고  말이다. 실제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빠른 근대화에 성공했고, 그 결과 아시아의 맹주로 잠시 동안 군림했었다. 전통적으로 머리를 숙여왔던 중국인 청나라를 제압하고 러시아까지 무력으로 진압하여서 일본의 위력을 세계만방에 알리게 됐다. 이런 일본의 변화에는 후쿠자와의 사상에서 비롯했고, 그런 후쿠자와의 사상은 아마 평생을 걸쳐 읽었던 《춘추좌전》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그는 《춘추좌전》의 '춘추필법'에 주목했을 것이다. 《춘추좌전》이 고전으로 추앙받은 이유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바로 '춘추필법'이라는 역사서 집필의 기준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춘추좌전》을 집필했다고 전해지는 좌구명은 공자의 《춘추》에 방대한 주석을 가하면서 주관적인 역사적 판결을 선보였다. 물론 그의 판단은 유교적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것이지만, 어쨌든 이 춘추필법은 후대 역사가들에게 하나의 커다란 모범으로 남았고, 이로인해 사마천을 필두로 좌구명 후대의 역사가들은 자신이 기록한 사서에 '춘추필법'과 같은 역사적 품평을 남겼다. 후쿠자와도 이를 통해 일본의 역사에 있어 '춘추필법'과 같은 기준을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후쿠자와는 '메이지 유신'이라는 방향을 제시했다. 그렇기에 오늘날 일본인들은 후쿠자와를 개혁의 아버지로 부르며 1만엔 짜리 지폐에 초상을 새겨 그를 존경한다. 즉 좌구명이 《춘추》에 주석을 가해 《춘추좌전》을 완성했고 '춘추필법'으로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하나의 모범으로 남았다면, 후쿠자와는 메이지 유신이라는 커다란 일본의 개혁에 '정신적인 지주'의 역할을 주도하여서 일본인들에게 개혁의 정신적 지주로 칭송받았다. 아마 후쿠자와의 이러한 행적은 《춘추좌전》의 춘추필법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세 번째로 《춘추좌전》 저자의 정신에 주목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춘추좌전》의 집필은 '춘추필법'으로 대표된다고 하였다. 그럼 《춘추좌전》의 저자는 왜 춘추필법으로 역사를 해석한 것일까? 당시 중원은 난세 중의 난세였다. 그런 혼탁한 난세 속에서 저자는 '춘추필법'을 통해 사라지고 허물어지는 시대의 기준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저자의 기준은 유학적 이데올로기였다. 당시 패권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인간의 윤리와 예의가 허물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이를 역사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려 기록한 것이 바로 《춘추좌전》이며, 그러한 집필이 '춘추필법'이다. 근대 일본도 마찬가지다. 당시 일본은 외세로부터 불평등 조약에 시달리고, 개혁을 하려는 세력과 개혁을 막는 막부 세력으로 인해 혼란한 정국이었다. 후쿠자와는 이런 혼란한 시국에서 근대적 개혁만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춘추좌전》의 저자가 혼탁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유교적 이데올로기로 역사적 사실을 평가하고 저술한 것처럼, 후쿠자와는 당시의 모순을 근대적 개혁으로 극복하고자 생각했던 것이다. 그랬기에 후쿠자와의 의식과 《춘추좌전》 저자의 의식은 시대의 모순에 항거하고, 막장의 시대를 바로잡을 '해결책'을 필사적으로 모색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마 후쿠자와의 시대적 사명감은 《춘추좌전》이라는 고전의 탐독 아래에서 굳건해지지 않았겠는가.

전근대 유교사상을 배격하려고 노력한 후쿠자와와 그런 전근대 유교적 이데올로기로 대표되는 《춘추좌전》은 얼핏 생각하면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다. 오히려 후쿠자와는 유교 경전과 유교적 마인드로 저술된 역사서를 배격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벽돌 같은 책을 13번이나 읽었다는 부분, 평생을 걸쳐 탐독한 책이 자신이 배격하려는 사상 속에서 태어난 것이라는 부분에서, 우리는 고전이라는 텍스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어떻게 탄력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이렇듯 메이지 유신이라는 근대적 서구적 개혁 안에는 유학적 이데올로기로 만들어진 《춘추좌전》의 영향력도 들어 있었다. 나는 후쿠자와를 보면서 법고창신 즉, 옛것을 본받고 새롭게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떠올렸다. 우리가 고전을 읽는 주된 이유도 사실 법고창신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후쿠자와는 매우 모범적인 고전 애독자였다. 그는 고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고전을 어떻게 활용하고 그 배움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 위인이었다.

끝으로 후쿠자와를 비롯하여, 현실 정치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역사책을 가까이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마오쩌둥이 《사기》, 《자치통감》을 주기적으로 애독한 것은 널리 알려졌으며, 나폴레옹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매우 좋아했다. 메이지유신의 영웅 후쿠자와는 《춘추좌전》을 평생 애독했으며, 조선의 세종, 태종, 영조, 정조 등도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물론 역사 독서가 무조건적으로 훌륭한 정치를 만들어주진 않는다. 독서 교양 없이도 탁월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서를 좋아하는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역사 장르를 가까이했다. 왜 이런 공통점이 있는 것일까?

인간에게 있어 철학은 빛과 같은 존재다. 인생이라는 어두운 터널 속에서 우리는 빛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여기서 철학은 우리의 앞날을 비춰줄 수 있는 등불과도 같은 존재다. 그러나 그 등불은 우리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앞에 위치하기에 이상적일 수밖에 없다. 반면 역사는 인류가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길을 기록한 문헌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역사를 통해 우리가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무엇이 잘못됐는지 무엇을 유지해야 할지를 판단할 수 있다. 역사는 인류가 지나온 길을 담고 있고, 그 기록은 인류의 행적을 그대로 담았기에 이상적이기보다 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정치 활동은 이상을 지향하기도 해야 하지만, 그러한 이상은 현실을 바탕으로 지향해야지 결실을 맺을 수 있다. 그렇기에 지도자들은 철학도 철학이지만 그보다 더 역사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이렇게 비판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권력자도 아니고 나는 평범한 일개 시민인데 그럼 역사를 배울 필요가 없지 않냐고.

전근대까지 역사는 엘리트 교육을 지향했다. 동양의 역사는 수요층이 국가를 지도하는 최고지도자와 권신들이었다. 서양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지식인층이 어떻게 하면 나라를 잘 다스릴까라는 목적 의식하에 역사는 기록됐으니까. 그렇기에 이런 역사서들을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일리 있는 의견이다. 역사 고전의 주된 주제는 권력이다. 나는 권력과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늘 권력관계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며 살아온다. 직장생활을 하며 갑과 을의 관계는 권력관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익과 이익으로 맺어지는 현대 자본주의 아래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권력관계를 빚을 수밖에 없다.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당신이 당신 주변에서 일어나는 권력관계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 집단과 사회활동에서 권력관계를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아무도 없다.

우리는 자유민이며 신분제가 없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는 형식적 평등일 다름이다. 실질적으로 개개인이 평등한 삶을 사느냐? 그렇지 않다. 삼성 이재용과 나의 삶은 같은 인간이고 같은 대한민국이지만 절대 평등하다고 볼 순 없다. 이런 시대이기에 역설적으로 권력의 역사를 추적한 역사 고전은 권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평범한 시민들에게 있어 더더욱 빛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춘추좌전》과 같은 고전은 치국의 도를 담고 있기도 하지만 작은 직장 관계, 권력관계 내에서의 지혜로운 처세를 알려주기도 한다. 나를 둘러싼 작은 권력관계와 과거 왕조국가들의 권력관계는 다르다고 생각하지 말자. 작던 크던 권력관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오늘날 역사 고전을 가장 효용성 있게 읽는 것은 이러한 시각으로 읽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법고창신의 정신을 다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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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 영웅전 8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8
플루타르코스 지음, 이다희 옮김, 이윤기 기획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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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서 우리는 소신 있는 삶을 강요받는다. 그러나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그리고 사회에 나와서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우리의 가치관은 소신 있는 모습을 향하기보다 타협과 방종에 가치를 두게 된다. 소신 있는 삶은 참 멋진 삶이지만, 현실적이지 않기에 망설이게 되며,  존경할 만한 삶이지만, 그 존경 이면에 숨겨진 어려움 때문에 선뜻 행하고 싶진 않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소신 있고 강단 있는 삶을 두고 이렇게 비꼬기도 한다. '선비 같은 삶.' 확실히 포키온과 카토의 삶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경지다. 이는 당대에도 그랬으며, 오늘날에도 이런 소신을 가진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렇기에 그들의 소신이 더더욱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오히려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인물들은 안토니우스와 데메트리오스와 같은 인물들이다. 그들은 뛰어난 위업을 세운 인물이지만 한편으로 친근한 이유는, 그들의 방종과 타협적인 모습이 우리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체하지 못하고 타협해왔던 색욕과 식욕, 그리고 과도한 음주 등등은 우리가 고민하는 타협과 비슷하다. 일 끝나고 한 잔 마실까 말까, 오늘 저녁은 먹을까 먹지 말까, 군것질을 할까 말까, 지를까 말까, 저 이성에게 작업을 걸까 말까 등등 일상에서의 우리의 고민들은 그들이 행하고 누렸던 것들과 비슷하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우리는 수중에 자금이 제한적이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하고 절제해야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원초적 욕망을 채울 수 있는 힘이 있었기에 방종에 있어 절제가 없었다.

그러한 인간의 욕망의 충족 끝에는 결국 몰락만이 있었다. 데메트리오스는 결국 포로가 되어 과식과 운동부족, 과음으로 죽었으며, 안토니우스는 집착했던 여인의 품에서 자결했다. 카토와 포키온 역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지만, 적어도 그들은 수치스럽게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다. 그들이 한평생 추구한 모습처럼 지조있게 죽었고, 죽음을 통하여 결국 자신들의 지조를 인정받았다. 그들은 생에 있어서는 패배자였을지 모르지만, 곧은 지조로 인하여 역사적으로는 승자가 됐다. 8권의 핵심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의 두 인물은 백로였고, 뒤의 두 인물은 까마귀였다.

소개한 인물 네 명 외에 내가 가장 눈에 들어오던 인물은 바로 옥타비아누스다. 카이사르의 후계자, 실질적인 1대 황제로 불리는 로마의 지도자. 다만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는 그의 열전이 없다. 아마 분명 기록했겠지만, 전해오는 과정에서 분실했을 것이다. 이 정도의 거물을 플루타르코스가 다루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안토니우스의 열전 속에서 보이는 옥타비아누스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어린 나이지만 그는 매우 교활했다. 그는 자신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명확하게 알았다. 자신의 세력이 미약할 때에는 키케로를 이용하여 안토니우스와 대립했지만, 결국 안토니우스와 야합한 뒤에는 이용 가치가 없어진 키케로를 안토니우스에게 죽이라고 허용했다. 어떻게 보자면 키케로를 죽인 것은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옥타비아누스다.

그는 안토니우스를 관리하려고 자신의 누이를 이용했다. 누이의 행복을 진정으로 바란다면, 지조 없는 안토니우스 같은 인물에게 고귀한 옥타비아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예상대로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를 홀대했고, 지조 있는 옥타비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토니우스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줘 로마인들의 공분을 샀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런 자신의 누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안토니우스에 대한 여론을 조작했다. 뿐만 아니라 안토니우스에 대한 시민들의 악감정을 조장하고자 날조, 기만, 사기 등등을 동원했다. 게다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카이사르의 아들 카이사리온을 소리 소문 없이 제거했다. 그가 왜 최후 승리자가 될 수 있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카이사르의 후계자답게, 그 역시도 매우 현실 정치에 능숙한 인물이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런 옥타비아누스의 기만적인 행위를 가감 없이 비판했다. 로마의 독재는 이런 인물이 열었다는 불편한 진실을 플루타르코스는 새삼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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