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타르코스 영웅전 1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1
플루타르코스 지음, 이다희 옮김, 이윤기 감수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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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고전을 읽을 때 가장 대표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세 가지다. 첫 번째 신화와 종교, 두 번째가 사랑, 세 번째가 바로 영웅이다. 특히 영웅에 대한 흠모는 서구 고전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최초의 서시시인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영웅담이라 봐도 무방하고 《아이네이스》는 로마의 건국자 로물루스의 조상을 노래한 영웅 서사시다. 그리스와 로마의 시작은 이렇듯 영웅담으로부터 시작됐고,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은 이런 영웅들을 본받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기에 어쩌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토록 흠모했던 《일리아스》의 주인공 아킬레우스의 현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양의 전쟁사는 '영웅'들의 전쟁으로 일컫는다. 반면 동양의 전쟁은 영웅의 전쟁이 아닌 전략과 전술 그리고 속임수의 전쟁이었다. 고대 동양에서는 전란을 통해 전쟁 철학이 발전했고, 병법 학파가 체계적으로 수립됐다. 그렇기에 동양에서는 장수가 함부로 전장에 나서지 않고 중군에 머물며 작전을 지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서양의 지휘관처럼 최전선에서 영웅처럼 싸우는 것은 그저 하급 군관이나 선봉장의 역할이었던 셈이다. 이렇듯 동양과 서양은 전쟁 영웅에 대한 관점이 철저하게 상이하다.

 동양의 역사는 군주를 중심으로 기록됐다. 모든 기록의 앞부분은 군주의 열전으로 시작됐다. 반면 서양의 역사는 민중으로부터 인정받은 영웅들을 중심으로 기록됐다. 서구권 사회는 동양과 달리 군주정을 매우 비판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도 마찬가지다. 그는 로마의 제정 시대 사람이지만, 그는 당대의 로마 제국을 비판적으로 바라봤던 것 같다. 과거의 지식인들은 현재의 모순을 발견할 때 과거의 찬란함으로부터 해답을 찾으려 노력한다. 그랬기에 중국의 역대 왕조와 우리나라의 왕조들은 아득한 중국의 왕조인 하나라와 은나라 주나라에서 이상적인 왕조의 모습을 찾았다. 플루타르코스도 그랬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찬란한 정신에서 현재를 극복할 수 있는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그런 플루타르코스의 해답이다. 그는 이 책에서 그토록 열망하는 민중으로부터의 권력, 즉 공화주의 정신을 우회적으로 부르짖고 있었다. 1권에서 나온 인물들을 읽을 때 가장 와닿는 것이 바로 '자유의 열망'이다. 민중에게 권력이 커지고 민의가 발달할수록 사회가 발전한다는 그의 생각은 작품 안에 교묘하게 숨어 있다. 그는 과거의 사례를 귀감으로 삼아 절대왕정으로 나아가는 현재 로마의 모습과 그저 권력자의 신민으로 추락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이런 그의 모습은 《리비우스 로마사》를 서술한 리비우스의 모습과 흡사하다. 리비우스도 《리비우스 로마사》를 통해 제정으로 나아가는 로마의 모습을 비판한 역사가였다. 이렇듯 서구 사회에서는 시민을 중심으로 한 민권 의식이 고대부터 요동을 치고 있었고, 이런 뿌리가 있었기에 시민혁명과 노예 혁명이 서구에서 비롯하지 않았을까 싶다.

 시민들의 민의를 드높이는 것과 특정한 인물을 중심으로 바라보는 영웅주의적 시각은 어찌 보면 모순적일 수 있겠다. 내가 동서양의 역사서나 고전을 뒤적였어도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손이 가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영웅에 집중하는 그 시각이 매우 거북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 생각이 어쩌면 편견이었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책은 확실히 영웅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그 영웅들은 동화책에서 나오는 영웅들처럼 무조건 성공하고 이기는 삶을 산 것이 아니라, 때로는 좌절당하고 배신당하고, 탐욕에 사로잡히고, 실수도 하는 등, 평범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행동들을 그들 역시도 저지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 속에서 나는 나의 과오와 지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그랬기에 그들의 이야기에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다. 

 어쩌면 플루타르코스는 작품을 통해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들도 우리랑 같았습니다. 그들을 특별하게 볼 이유는 없습니다. 신분상 특별한 위치에서 태어난 점은 있겠지만 그들도 실수하지 않는 비인간적인 인물들은 아니었지요. 어쩌면 영웅과 일반인의 기준은 종이 한 장의 차이일지도 모릅니다.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 참느냐 못 참느냐, 이겨내느냐 못 이겨내느냐, 그래서 어쩌면 일반인인 우리도 내면적으로 조금만 노력하면 영웅들이 자질을 충분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영웅이 됩시다. 그렇게 하여 영웅적인 시민들이 뭉쳐서, 시민이 정치의 중심이 되는 공화정으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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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일기 - 인조, 청 황제에게 세 번 절하다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6
작자미상 지음, 김광순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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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남한산성'이라는 영화가 개봉됐다. 가족들과 함께 영화를 봤는데 참 인상적이었다. 온라인 이웃님 중 한 분이 영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그때 나는 대충 얼마부리고, 언젠가는 《산성일기》의 서평을 통해 '남한산성' 영화에 대해서 내 의견을 피력하려고 했었는데 뒤늦게나마 이 서평으로 이웃님의 물음에 답하게 됐다.

사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봤을 때 명분의 척화파와 실리의 주화파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대부분 실리의 주화파를 선택할 것이다. 그렇기에 명분론만 앞세운 척화파의 주장은 크게 와닿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 중기 당대의 시대만 하더라도 주화파보단 척화파가 대세였고, 그러한 관념이 조선이라는 대륙을 잡아먹고 있었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실용주의적인 사람들도 조선 중기에 태어났다면 대부분 유교적 이데올로기에 입각하여 척화를 외쳤을 것이다.

각각의 시대에는 그 시대에 맞는 이념과 사상이 있기 마련이다. 오늘날에는 고루하고 따분하게, 이해가지 않는 이념이더라도, 과거에는 그러한 이념이 사회를 구축하는데 주요한 요소였을 수도 있다. 주화와 척화를 바라보는 관점 역시도 시대에 보편적으로 통변 되는 이념에 따라 가변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쉽사리 오늘날의 관점으로 당대의 모습을 평가하는 것은 어쩌면 후대인의 역사적 오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적 관념을 고려하여 척화파를 이해하려고 해도, 사실 조선 중기를 지배하고 있던 성리학적 사상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명분과 이념을 앞세우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척화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군사 훈련을 비롯하여, 국경 수비 등등에 자신이 있어야지 내세울 수 있다. 정묘년에 청나라의 군대 앞에서 호되게 당해놓고도 인조와 서인 조정은 반성하지 않고 그저 입으로만 전쟁을 떠들었다. 그 결과 남한산성에 몰려서 50여 일간 근근이 버티다 항복하게 된 것이다.

청나라 태종의 조서가 와닿는다 '너희 나라는 선비의 나라라고 자청하는데, 그럼 너네는 붓으로 우리의 대군을 막을쏘냐?'라고 일갈하는데, 조선의 사정을 정말 꿰고 있는 말이었다. 같은 성리학이 지배했던 조선 초기에는 이렇게 문약하지 않았다. 조선 초기에는 성리학이 국가의 이념이었지만, 성리학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는 않았다. 성리학을 주로 삼되 적절하게 탄력적으로 융통성 있게 적용하고, 성리학 자체에 대해서 비판적인 연구와 접근을 해왔다. 그리고 그러한 이념을 뒷받침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 국방력도 탄탄하게 정비했다. 그러나 시대가 흘러 조선 중기에 이르자 성리학을 수용하고 적용하는데 있어 현실적인 모습이 사라지고 그저 맹목적이고 교조적인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다. 국방은 문약한 문치주의로 인해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그저 이념만을 공허하게 외치는 선비들이 대세를 이뤘다. 이렇게 실력도 없는 주제에 잘난 척에 큰소리만 뻥뻥 쳐대고 있으니, 힘 있는 강국 입장에서는 이를 빌미로 당연히 쳐들어오지 않겠는가.

냉혹한 국제사회 앞에서 우리는 늘 명분으로만 맞섰다. 임진 - 정유년에도 그랬고, 정묘 - 병자년에도 그랬고, 조선 말기 개화를 앞두고도 이러한 자세를 고집했다. 너무나도 순진하게도 실력도 없이 그저 명분만을 앞세우며 의견을 주장했다. 패권이 왔다 갔다 하는 국제사회에서 명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력이다. 자강할 수 없는 나라는 명분도, 실리도 찾을 수 없다. 흔히 사람들은 병자호란을 주화파와 척화파의 입장을 빌려 명분과 실리의 싸움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명분과 실리 이전에 국력이 없고 국난을 대비하지 못했던 못난 조선의 안일한 생각이야말로 만화의 근원이다. 명분도 좋고 실리도 좋다. 다만 선택한 명분과 실력을 취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나서 고민할 문제다. 결국 남한산성의 치욕적인 항쟁은 조선의 나약함과 안일함에 대한 결과일 뿐이고, 명분도 실리도 취하지 못한 그저 무능한 패배일 뿐이다.

청나라의 침공은 우리에게 '호란'으로 불려왔다. 임진년의 일본과의 전쟁을 두고 왜란이라 한다. 그러나 과연 이 '호란'과 '왜란'이라는 명칭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 의문이 든다.  왜란과 호란. 언뜻 보기에는 별문제가 없어 보인다. 내가 제기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난이라는 글자다. 동양에서 亂 자가 붙은 사건은 대체적으로 상급자에게 하급자가 어지러움을 선사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에 숱한 반란 앞에 亂 자를 붙여서 명칭 했다. 왜란과 호란 역시 마찬가지다. 왜란이라는 글자를 해석해보면 '왜나라 오랑캐가 난리를 피운 사건.'이라는 뜻이고 호란은 '북쪽의 오랑캐가 난리를 피운 사건.'이라는 뜻이다. 과연 왜란과 호란이 그저 난리일 뿐이란 말인가? 당시 일본과 청보다 우리가 지위적으로 앞서있기에 두 전쟁을 亂이라고 칭하는 건가?

왜란과 호란은 국가와 국가 간의 전면전이었다. 그렇기에 명칭 역시도 임진전쟁, 정유전쟁, 정묘전쟁, 병자전쟁이라고 칭해야 옳다. 그러나 당대의 자존심이 강한 사대부들은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그렇기에 亂이라는 글자를 붙여서 '정신 승리'를 시전했다. 이러한 관념에 따르면 그럼 우리 정부와 정규군은 그저 하급자에 불과한 일본과 북방 민족의 난리조차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한 것인데, 참 웃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어릴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국권을 침탈당한 '을사늑약'을 '을사조약'이라고 배웠다. 마찬가지로 임진 - 정유년의 전쟁과 정묘 - 병자년의 전쟁은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혼란을 야기한 亂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당시 우리는 일본과 청나라보다 월등한 국력을 가지지도 않았으면서, 중화사상이라는 명분에 의거하여 우리가 그들보다 위라고 생각했다. 두 전쟁을 亂으로 표기하고 亂으로 생각한다면, 이러한 亂을 제압하지 못해 빌빌대고 항복했던 조선의 수준만 떨어트릴 뿐이다. 바른 역사교육이란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한다. 이는 자국의 역사에도 유효하다. 치욕의 역사라고 해서 이를 축소하기 위해 亂이라고 표현한다면 이것 역시도 역사왜곡이 아닐까 생각한다.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사용자의 심리를 반영한다고 한다. 이렇듯 왜란과 호란이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하는 것은 당대 조선 사대부들의 명분에 입각한 관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그대로 표출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무튼 《산성일기》는 비록 명분론에 입각하여 저술된 기록이지만, 글을 통해 오락가락하는 대책 없는 조선 정부의 모습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만약 책의 내용이 다소 어렵게 느껴진다면,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과 한명기 교수의 《병자호란》 등등을 곁들여 본다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책을 덮고 나니 남한산성에 가서 지나간 역사를 복기하고 싶다. 완연한 봄날 따스한 햇살 아래에 펼쳐진 장대한 성곽이 보고 싶다. 조만간 가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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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세노폰 소작품집
크세노폰 지음, 이은종 옮김 / 주영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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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세노폰의 대표작 《키로파에디아》를 읽은 뒤, 그의 사상에 대해서 더 공부하고 싶었다. 그래서 검색을 해 보니 마침 《키로파에디아》를 번역하여 출판한 곳에서 《크세노폰 소작품집》이라는 책을 출간한 것을 알게 됐다. 《크세노폰 소작품집》은 크세노폰의 저작들 중 정치적, 군사적, 그리고 경제학적인 소작품들을 묶어서 번역한 책으로 책 안에 포함된 작품은 《히에론》, 《아게실라오스》, 《라케다이몬의 국제》, 《수단과 방법》, 《기병대 사령관》, 《기마술》, 《사냥술》, 《아테네의 국제》 등으로, 총 8개다. 이 8개의 단편들은 매우 짧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명료하게 서술되어서 부담 없이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우선 정치적 색깔을 지닌 작품은 《히에론》, 《아게실라오스》, 《라케다이몬의 국제》, 《아테네의 국제》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크세노폰은 자신의 정치사상을 사회 구조적인 측면, 그리고 지도자의 뛰어난 개인적 역량으로 나눠 설명하고 있는데 구조적인 측면에서 접근한 저작은 《라케다이몬의 국제》와 《아테네의 국제》다. 《라케다이몬의 국제》는 스파르타의 정치제도를 고찰한 책으로, 주요 내용은 스파르타의 현자 리쿠르고스의 극단적인 공리주의 법제 시스템을 찬양하는 것이다. 《아테네의 국제》는 위작으로 분류되는 저작인데, 주요 논지는 아테네의 민주정을 비판하고 있으며, 과두정을 최선의 정치제도로 꼽고 있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민주주의의 포퓰리즘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데, 논지 전개 과정에서 다소 서투른 모습이 보였지만 오늘날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그대로 꼬집는 느낌이었다. 크세노폰은 법률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키로파에디아》와 《라케다이몬의 국제》에서 적극적으로 피력하는데, 그는 법률상 평등주의를 강조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테네의 소작품집》에서는 귀족 우위적인 관념을 표하고 있어서 기존의 작품들과는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한편으로 정치사상을 개인적 관점으로 고찰한 저작은 《히에론》과 《아게실라오스》다. 두 작품은 모두 실존하는 인물을 내세워 쓴 기록인데, 《히에론》은 플라톤의 대화편과 비슷한 구성으로 허구를 바탕으로 한 담화록이었으며, 《아게실라오스》는 크세노폰이 주군으로 모셨던 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라오스의 행적과 위업을 고찰한 기록이다. 《히에론》의 초반부는 지도자의 왕관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이야기하고 있었으며, 후반부는 옳은 지도자의 덕목들을 열거하고 있다. 《아게실라오스》는 스파르타의 제2의 중흥기를 구사하려고 노력했던 아게실라오스를 칭송하고 있는 저작으로, 역시 아게실라오스의 칭찬을 빌미로, 진정한 지도자의 덕목을 논하고 있었다. 《히에론》과 《아게실라오스》는 크세노폰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키로파에디아 - 키루스의 교육》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키로파에디아》를 읽을 때 두 작품을 참고 자료로 읽는다면 매우 유용할 것 같다.

 크세노폰은 그리스 최초의 경제학자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다. 그는 경제학 저서를 두 권이나 남겼는데, 하나는 《경영론》이며 하나는 《수단과 방법》이다. 《크세노폰 소작품집》에 포함된 경제학 저서는 《수단과 방법》 뿐이다. 《경영론》은 농지 경영에 대한 이론을 정리한 책으로, 작중 등장인물에 플라톤의 대화편과 같이 소크라테스가 나오는 점이 흥미롭다. 《수단과 방법》은 크세노폰이 죽기 전에 쓴 작품으로, 작품의 내용은 조국인 아테네가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에 대해서 강구한 책이다. 책의 내용은 기원전에 기록된 내용 치고는 굉장히 놀라운데, 국가 자금을 유치하기 위해서 외국인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자고 하는데 이 부분은 오늘날 해외투자를 떠올릴 수 있으며, 공노비를 활용하여 은광 사업을 대대적으로 유치하자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그뿐 아니라 원정이나 전쟁에 시민들의 투자를 받아서 승리한 뒤 전리품을 투자한 시민들에게 나눠주자는 부분은 마치 국가가 주도하는 주식사업을 떠올린다. 사실 《수단과 방법》은 경제학 저서로 분류할 수 있지만 크게 보자면 정치학의 구조적인 측면을 다룬 저서라고 해도 무방하다.

  
크세노폰은 군인 출신이었고, 그 역시 당대의 우수한 기마대 사령관을 역임했으므로, 군사 저작도 남겼는데, 《크세노폰 소작품집》에 포함된 책은 《기병대 사령관》, 《기마술》, 《사냥술》이 있다. 《기병대 사령관》은 기병을 이끄는 장교들을 대상으로 쓴 책으로, 그는 여기서 기마병의 포진과 병사들의 관리 등등을 고찰하고 있으며, 최종적으로 사령관이 갖춰야 할 전략과 전술에 대해서도 기록했다. 반면 《기마술》은 일반 기병 사병들을 대상으로 쓴 책으로, 말을 잘 선별하고 관리하는 방법과 다루는 방법, 기병으로 무장하는 방법 등등 세세한 부분을 기록하고 있었다. 《사냥술》은 사냥의 방법을 자세하게 서술했으며, 궁극적으로 젊은이들에게 사냥을 권면하여 상무정신을 유지할 것을 강조했다.

 

《크세노폰 소작품집》을 읽으며 가장 다가왔던 점은 확실히 저자 크세노폰은 경험적이고 현실적인 부분에 집중하여 저술한 철학자였다는 점이다. 이는 라이벌이라 불리는 플라톤과 비교했을 때 매우 두드러진다. 플라톤의 저작이 사색적이고 관념적이며 이상적인 철학을 바탕으로 저술됐다면 크세노폰의 저작은 관념적이기보다 현실적인 부분에 집중하고 있다. 정치학, 경제학, 군사학, 역사학 등등 그가 집중적으로 고찰한 부분은 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아울러 그는 자신이 복무했던 군사 경험을 토대로 병법서를 저술하였다. 《크세노폰 소작품집》에 포함된 군사 저작을 읽어보면 그가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썼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또한 확실히 그의 글은 매우 담백하고 간결했다. 군인 출신이라서 그런지 문장 자체도 투박한 부분이 많았다. 이는 라이벌인 플라톤의 저작과 매우 대조적이다. 플라톤의 저작은 매우 현학적이며 고도의 수사법으로 기록된 문헌이다. 따라서 짧은 저작이더라도 텍스트 자체를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반면 크세노폰의 글은 담박하고 투박하며, 생각할 여지가 별로 없다. 저자의 논지가 명확하며, 문장의 구조도 꽤 단순하고 명료한 편이라서 글을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다. 또한 플라톤은 자신의 저작 속에 자신의 의도를 숨바꼭질하듯 꼭꼭 숨겨놓고 아리송하게 흐려놨지만 크세노폰의 글은 말미에 교훈적인 내용으로 대부분 끝맺는다.

 

이런 투박한 크세노폰의 글이지만, 의외로 글을 읽다 보면 그가 꼼꼼하고 세심한 부분도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기마술》과 《사냥술》같은 저작에서 그는 말을 고르는 방법, 관리하는 방법, 사냥개를 관리하는 방법, 토끼를 사냥하는 방법 등, 당대의 지적인 사람들이 별로 관심 가지고 싶지 않은 부분들까지 세심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사실 《사냥술》을 읽으며 굳이 토끼를 잡는 비법을 이렇게 상세하게 기록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집요하고 디테일하게 서술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꼼꼼함과 세심한 기록을 통해 우리는 당대의 그리스 사회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크세노폰 소작품집》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바로 극단적인 공리주의 사상이다. 크세노폰은 국가의 발전과 집단의 발전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크세노폰의 사상은 오늘날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관점으로 볼 때, 매우 극단적으로 보인다. 물론 개인의 자유는 사회 집단의 공리를 위해 어느 정도는 제한해야 마땅하지만 과연 크세노폰이 주장하는 대로 극단적인 평등과 집단을 위해 극단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이런 내 생각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진실은 고대 의 정치에서 집단의 공리성을 극단적으로 내세운 국가들이 대부분 위업을 이뤄냈다는 점이다. 키루스의 페르시아, 중국 진시황의 진나라, 그리고 한국에서도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사회 제도를 일원화하면서 고대 국가들이 발전했다. 다만 이러한 사상은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것으로 오늘날 이런 정책으로 국가를 운영한다면 전 세계에서 비난의 화살이 몰려올 것이다. 모든 고전은 태생적으로 시대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크세노폰의 공리주의 사상 역시도 이에 속하는 듯싶다.  

 

 현재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현실주의적 관점을 고수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와 생활 모든 부분에서 현실주의는 이상주의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에는 정반대였다. 과거의 생활 전반에는 현실주의보다 이상주의적인 관념이 힘을 발휘했다. 그렇기에 서양의 전통 지식인층은 형이상학적이고 이상적인 플라톤을 크세노폰보다 우위에 뒀다. 그리고 이러한 서구의 전통은 이어져왔으며, 오늘날의 학계에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 이상주의가 만연한 시대에서 크세노폰은 현실을 바탕에 두고 현실에 근거를 둔 저술을 남겼다. 그는 자신을 추방했던 아테네의 시민들을 위해 '무언가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저작을 남겼다. 그의 저술은 투박하고 서툴렀다. 플라톤에 비해 세련되지도 않았다. 《사냥술》에서 그가 고백하듯, 그는 글을 쓸 때 쓸데없는 수사에 집중하기보다, 현실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으로 인정받길 원했다. 크세노폰은 궤변이나 가르침보다 자신의 행위와 업적으로 인정받고 싶었고, 저술의 표현이나 수사보다 내용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행위적 업적은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관을 실현하기 위해 매우 노력했던 것 같다. 소키루스 대왕을 따라 페르시아의 권력 투쟁에 용병으로 참전한 것은, 그가 이상적으로 꿈꾸던 키루스 대왕의 모습을 소키루스에게 기대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거품으로 끝난다. 소키루스는 키루스 대왕처럼 자제력이 뛰어나고 품성이 뛰어난 인물이 아닌 너무나도 속물적인 인간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원정 도중 소키루스는 죽었다. 그 뒤 만인대를 이끌고 어려움 끝에 그리스로 돌아온다. 그는 자신의 고국인 아테네의 적인 스파르타의 군주를 섬겼으며, 그로 인해 고국으로부터 추방령을 받았다.  그는 스파르타의 아게실라오스에 기대를 걸었고 그의 참모로 활동했지만 뛰어난 능력에 비해 커다란 정치적 업적은 이루지 못하고 아게실라오스는 죽음을 맞는다. 아게실라오스가 죽은 뒤, 그는 이룰 수 없는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키로파에디아》의 저술에 투영했다. 이렇듯 행동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리라 생각했던 그의 인생은 실패를 거듭했고 결국 역사소설 《키로파에디아》의 저술로 끝이 났다. 

 세월이 흘러 그는 자신의 경험과 실패를 바탕으로 저술에 몰두한다. 오로지 좋은 내용을 바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펜을 잡았다. 그는 플라톤처럼 이상과 관념으로 세상을 보지 않았다. 그는 보이는 현실 그 자체를 바탕으로 자신의 경험을 추가하여 글을 남겼다. 안타깝게도 후대의 지식인층은 이런 크세노폰의 글보다 플라톤의 글을 예우했다. 그렇게 그의 저술은 대중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고, 그러한 시각은 시대를 거듭하며 쭉 이어졌다.

 현실과 이상의 대립은 역사를 관통하는 주요 테마다. 이상과 현실이 대립하면 현실이 이길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앞서 살펴봤듯 크세노폰과 플라톤의 대립에서 역사는 플라톤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서구 근대 철학에서 대세를 이뤘던 학파는 바로 합리주의를 기초로 한 데카르트 - 칸트(물론 칸트는 합리론과 경험론을 통합했지만 기본적인 골자는 합리론에 기초한다.) - 헤겔의 계보다. 이들은 세상을 관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기에 어떤 면에서 플라톤의 사상과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철저하게 경험론을 바탕으로 한 베이컨의 사상은 합리주의의 데카르트에 비해 명성이 떨어진다. 오늘날 근대 철학의 아버지를 꼽으라면 대부분 '데카르트'를 꼽지 '베이컨'을 꼽진 않는다. 여기서도 이상은 현실을 이겼다. 서구 사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동양 사회는 사상적으로 서구보다 더욱 보수적이었다. 유가 철학은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하나의 관념이었고, 동아시아는 이러한 이념의 유학을 현실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조선은 이념적인 성리학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여, 다가오는 근대의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 나라가 아니었는가?

 오늘날에는 이념이나 사상 관념보다 현실이 앞선다. 너무 현실을 앞세우기에, 개념 없는 속물주의가 만연한 것이 오늘날의 문제점일 정도로 사람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만약 크세노폰이 오늘날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봤다. 아마 그는 커다란 성공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가지고 있던 실용주의적 마인드는 오늘날에는 매우 높이 사는 덕목이다. 아마 현대에 플라톤과 크세노폰이 환생했다면 플라톤은 저명한 대학교수가 되어 전문적인 연구를 하는 사람이겠지만, 크세노폰은 사업이나 경영 등등에서 활동했을 것 같다. 플라톤은 전문적인 연구 논문 등등을 저술했겠지만 크세노폰은 자신의 경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기 계발서나 리더십 에세이 등등을 저술했을 것 같다. 플라톤은 복잡하고 진지하며 어렵고 화려한 표현을 했겠지만, 크세노폰은 직설적이면서 웃음을 잃지 않는 소위 '꿀잼'의 서술법을 보여줬을 것이다. 《크세노폰 소작품집》을 읽으며, 나는 그런 21세기의 크세노폰의 모습들이 자꾸 떠올랐다. 그가 저평가 받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아마 그가 시대를 잘 못 타고나서가 아닐까 싶다.

 아직까지 크세노폰은 학계로부터 제대로 예우 받지 못하는 것 같다. 그의 책은 원전 번역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물론 주류 철학자들의 번역 역시도 이뤄지지 않는 실정이라 크세노폰의 저작을 번역할 여유는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를 전통적으로 폄하해 온 시각은 거둘 필요가 있겠다. 자신을 추방한 조국을 위해 무엇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끄적인 글이 이토록 후대에 저평가 받는다는 것을 무덤 속에 그가 안다면 매우 애석하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투박한 글이더라도, 그의 글은 나름 진솔했고 전문적이며, 플라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지금이라도 그에 대한 위치를 다시 재고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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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 중세의 역사를 바꾼 영국-프랑스 간의 백년전쟁 이야기
데즈먼드 수어드 지음,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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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적 전쟁을 꼽자면 영국과 프랑스가 싸운 백년전쟁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흔히 서양판 '임진전쟁'으로 불리는 백년전쟁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임진, 정유전쟁과 매우 흡사한 양상을 보여준다. 섬나라의 우세적인 침공과 그것을 극복하는 내륙의 세력. 여기서 영국은 일본에 비유할 수 있고, 프랑스는 우리나라에 비유할 수 있겠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와 일본의 사이가 안 좋은 것처럼, 유럽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사이도 미묘한 관계이며 라이벌 관계라고 한다. 단지 백년전쟁과, 임진 정유전쟁의 차이점이라면 백년전쟁은 말 그대로 100년에 걸쳐 이어진 긴 전쟁이었으며, 임진 정유전쟁은 7년에 걸쳐 일어난 전쟁이었다는 부분이다. 아무튼 중세의 서구 사회에서는 이 전쟁이 거의 세계대전 급으로 취급됐을 것이다. 머나먼 과거에 이뤄졌던 그리스 연합군과 페르시아 제국의 전쟁, 그리고 아테네와 스파르테가 거대하게 싸웠던 큰 사건처럼, 중세의 백년전쟁은 당대 유럽 열강의 이목을 집중한 사건이었다.

이렇게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백년전쟁에 관한 책이 한 권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백년전쟁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 검색을 의존하거나, 파편적으로 접할 수 있는 지식들, 그리고 간간이 책에서 요약된 내용으로 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찰나 2018년에 이 책이 출간됐다. 전쟁사에 관심이 있는 나로서는 매우 반가웠던 소식이었다. 책은 중세 유럽의 백년전쟁에 대해서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지명과 인물들 때문에 생소함이 있겠지만, 당대의 전쟁의 흐름을 최대한 평이하고 일목요연하게 서술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도와 가계도 편집 등이 적재적소에 나와 있어서 독자에게 책의 배경 이해를 최대한으로 돕고 있다. 백년전쟁은 단순하게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전쟁은 유럽의 패권을 둘러싼 전쟁이었고, 그랬기에 전쟁 전후로 유럽 대륙에 미친 영향은 엄청 지대했다. 전쟁을 통하여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군사적 전술과 전략은 발전을 거듭했고, 두 나라의 왕조의 권위도 많은 상처를 입었다.

복잡한 백년전쟁을 모두 설명할 수 없지만 짧게 흐름만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인 어머니가 장악하던 권력을 쿠데타로 되찾고, 왕권 강화에 열을 올린다. 당시 프랑스는 유럽의 최강국으로, 명목상 영국은 프랑스의 속국이었다. 프랑스를 타도할 목적이었던 에드워드 3세는 온갖 자금난을 겪으면서 빚을 내어 전쟁을 준비했다. 프랑스 역시도 영국의 불온한 움직임에 맞춰 군대를 준비했는데, 사실 프랑스도 겉으로 보기에는 강해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재정을 비롯해 엉망진창이었다. 그렇기에 강한 프랑스 역시도 전쟁을 준비하면서 무리하게 자금을 융통했다.

전쟁은 에드워드의 선공으로 시작됐다. 에드워드는 바다에서 슬라위스 해전, 육지에서 크레시 전투로 커다란 대승을 거둔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흑태자는 푸아티에 전투로 프랑스의 국왕을 사로잡으며 영국군의 위용을 과시했다. 우세를 예상했던 프랑스에 상황은 매우 비관적으로 흘러갔다. 프랑스 역시 반격에 나섰는데, 포로가 된 국왕을 이어서 샤를 5세가 취임했는데, 그는 선왕들처럼 전면전에 의지하지 않고, 외교적, 모략적, 게릴라전 등의 간접적인 방법으로 영국이 점령한 영토들을 야금야금 되찾기 시작했다. 전쟁영웅 흑태자는 병사했으며, 늙은 에드워드 국왕 역시도 예전만 못한 위용으로 프랑스의 공세에 몰리며 죽었으며 샤를 5세 역시 병약한 몸 때문에 일찍 죽는다.

영국에는 리처드 2세가 보위에 올랐으며 프랑스에서는 샤를 6세가 보위에 올랐다. 리처드 2세는 친프랑스 정책을 고수했고, 이로 인해 영국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헨리 4세가 등극한다. 한편 프랑스에서도 샤를 6세의 정부는 파당 정치로 내분이 격화됐는데, 브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가 권력을 앞에 두고 내부 투쟁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두 파당은 각각 영국 정부로부터 군대를 요청했는데, 이를 빌미로 다시 영국은 프랑스에 약탈을 시도했고, 헨리 4세를 이어 헨리 5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전세는 다시 영국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헨리 5세는 프랑스의 내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침략을 시도했고 아쟁쿠르 전투에서 우세한 프랑스의 귀족 군대를 몰살시킨 뒤 브르고뉴와 일드프랑스, 수도 파리를 비롯한 북부 프랑스 지역을 모두 점령했다. 그는 샤를 6세를 사로잡은 뒤 그를 압박하여 프랑스 왕위 계승자가 됐고, 프랑스 섭정으로 취임한다는 트루아 조약을 채결했다. 그 뒤 그는 남부 프랑스 지역을 점령하지 못한 채 죽었다. 그는 자신의 동생 베드퍼트에게 프랑스 섭정을 맡겼다.

남부로 피신한 도팽(태자) 세력은 이에 용기를 얻고 영국이 점령한 북부 프랑스 지역으로 진군했는데, 베드퍼트도 군대를 이끌고 맞이했다. 베르뇌유에서 양군은 격돌했고, 도팽 세력은 결국 영국군을 이기지 못하고 퇴각한다. 그 뒤 베드퍼트는 오를레앙으로 군대를 모아 진격했으나, 잔다르크의 등장으로 영국은 전쟁 주도권을 프랑스에서 빼앗긴다. 잔다르크는 결국 영국군에 붙잡혀 사형됐지만, 사기가 오른 도팽파는 북부 프랑스를 야금야금 점령해나갔고, 마침내 도팽은 샤를 7세로 프랑스 왕위를 이어나갔다. 그 뒤 샤를 7세는 기만과 책략, 그리고 군사력으로 프랑스 국토를 회복해나갔고, 영국 세력을 몰아낸 뒤 포르미니 전투의 대승, 기옌의 보르도 점령을 끝으로 전쟁을 종결지었다.

흔히 백년 전쟁의 주도권은 초중반까지 영국이 모두 잡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전쟁의 중반부 즉 영국의 에드워드 3세와 헨리 5세의 공백기 때에는 프랑스의 샤를 5세가 간접적인 방법으로 국토를 회복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프랑스 쪽이 주도권을 가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책을 읽으며 백년전쟁의 주도권을 잡은 세력의 원인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이 책에서 배울 점은 복잡하고 파편적인 역사 지식보다, 이런 역사적 흐름에서 유추할 수 있는 역사적 교훈이 더 값진 법이니까 말이다.

첫 번째로 원인으로는 '안정된 정치'였다. 주도권을 잡은 나라는 대체적으로 정치가 안정됐고, 당파가 나눠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국론이 하나로 모여 있었다. 반면, 열세의 나라에서는 내부적으로 파당을 이루고 있었고, 내부 갈등이 매우 심했다. 이를 중재할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인물도 없었다. 

 두 번째 원인으로는 '지도자의 리더십'이다. 주도권을 잡은 나라의 특징은 바로 강력한 지도력을 갖춘 인물이 전쟁과 정치를 이끌었다는 점이다. 이런 지도자들은 정치적으로 반대 입장에 선 사람들을 적절하게 회유하거나, 민족성에 호소하여 지지를 이끌어냈으며, 군사적으로는 강력한 리더십과 체계적인 명령을 바탕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사실 우세했던 프랑스군이 매번 영국군에게 패배한 원인은 바로 지도층의 리더십 부재와 지도층의 무데뽀 정신에서 비롯했다. 주요 전투에서 영국군은 비록 열세였지만 강력한 지도자의 지도와 철저한 전략 아래에서 우세의 프랑스군을 무찌를 수 있었고, 이런 자신감이 영국군을 감싸고 있었기에, 프랑스군은 전쟁 후반까지도 영국 군대를 두려워했다

 세 번째 원인으로는 '무기의 우세'다. 전쟁 당시 영국은 프랑스에 비해 절대적으로 전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우세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영국이 자랑하는 '장궁' 부대였다. 당시 프랑스 군대의 주력은 기병이 주축이었고, 중무장을 한 중기병이 주요 전력이었다. 반면 영국은 기병보다는 궁병을 내세웠으며, 사거리가 기존의 쇠뇌보다 훨씬 압도적인 장궁을 활용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그저 물량과 화력으로 돌격하여 영국군을 제압하려 했지만, 그러기에는 영국의 장궁이 너무나도 강력했다. 영국이 대승을 거둔 전쟁에는 항상 장궁이 함께하고 있었다.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 베르뇌유 전투 등 모든 대승의 배경에는 궁수가 있었다. 마치 임진전쟁 초기에 일본군의 무장인 조총 덕분에 압도적인 승리를 했던 것과 비슷하다. 반면 전쟁 후반에 접어들었을 때, 영국군은 프랑스군에 압도적으로 밀리는데, 이때 프랑스는 우세한 대포 기술력을 바탕으로 대포를 주력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장궁이 아무리 사거리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대포와는 게임이 되지 않았다. 이렇듯 전쟁에서 승리한 세력의 이면에는 '우수한 무기'가 있었던 것이다.

네 번째 원인으로는 '경제적인 요인'이다. 사실 백년전쟁을 거치면서 양국은 파산의 파산을 거듭했다. 우세한 국가도, 열세의 국가도 재정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양국의 군주는 엄청난 빚더미 속에서 전쟁을 수행했다. 언뜻 보기에 영국은 프랑스를 약탈하고 점령했기에 자금으로부터 더욱 우세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섬이 아닌 내륙에 상비해야 할 군대의 유지비용은 어마어마했으며 그렇기에 전쟁의 승리 군주들도 승리를 빌미 삼아 더 많은 돈을 융자하여 전쟁을 이어가려고 노력했다. 즉 우세한 세력의 배경에는 더 많은 돈을 대출, 융자할 수 있었던 여유가 있었다. 오늘날 사업 역시도 자금의 유통을 가장 최우선으로 여기는데, 이 시대의 전쟁도 오늘날의 사업과 흡사한 성격을 가졌다.

사실 읽으면서 마냥 마음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영국군이 프랑스에 가했던 모습은 일본이 우리에게 자행했던 온갖 종류의 악행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임진-정유전쟁 때의 침략에서도, 그리고 35년의 일제 강점기 시절에도 우리 민족은 일본에 수탈됐고 약탈됐다. 프랑스 본토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며 약탈하는 영국군의 모습을 읽을 때마다 매우 착잡했다. 신사의 나라 영국이라고 하지만, 열강의 제국주의, 그리고 자국 이기주의 앞에서는 그러한 신사도 가면을 벗어던지고 본능적 욕망에 너무나도 충실했다. 무자비한 약탈을 100년 가까이나 지속해왔던 민족이 신사로 불리는 영국인이다. 당시 영국군 안에서는 프랑스와 전쟁을 통해 한몫 챙기려는 하층민 벼락출세주의자들이 만연했다고 한다. 귀족들에게도 전쟁이 부를 축적하는 커다란 사업이었다. 그랬기에 100년에 걸쳐 전쟁(이라 쓰고 약탈)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전쟁의 배경은 한쪽에서는 처절한 생존, 한쪽에서는 막대한 이익에 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침공을 받는 프랑스 전역에서 조직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책 안에서도 프랑스인들이 점령인 영국인들에 대항하여 싸운 기록은 있으나 어디까지나 도시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반항이었다. 우리나라처럼 조직적으로 군대를 운용하여, 국가를 위해 일어나는 하층민 세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심지어 북부 프랑스 지역은 점령군인 영국에 굉장히 충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를 통해서 우리의 의병과, 대한 독립 투쟁이 얼마나 숭고하고 가치 있는 행동이었는지를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잔다르크에 대한 내 생각을 적어보려고 한다. 잔다르크는 100년 전쟁이 배출한 가장 큰 스타 영웅이다. 그녀의 등장으로 인해 프랑스는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책에 기술된 잔다르크의 분량은 매우 짧고, 매우 간단하게 나와 있었다. 유명세에 비해 생각보다 그녀가 이룩한 것들은 드물었던 것 같다. 물론 그녀의 존재가 프랑스 군의 떨어진 사기를 올렸다는 공은 인정해야겠지만. 사실 잔다르크에 대해 많은 전설적인 이야기가 떠도는데, 대부분 현실적으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뿐이다. 사실 나는 이 잔다르크야말로 샤를 7세가 만들어낸 스타가 아닐까 싶었다. 책에 나온 바와 같이 잔다르크가 등장할 당시 프랑스는 영국보다 객관적인 조건이 훨씬 우세했다. 당시 영국은 어린 왕이 집권했고 정치는 혼란스러웠는데다, 점령한 북부 프랑스 쪽으로 지원도 거의 없었다. 반면 남프랑스 일대를 장악한 샤를 7세의 도팽군은 자금을 축적했고, 군대를 비밀리에 키웠으며, 적지에 스파이를 보내고 있었다. 다만 영국군에 비해 군대 사기가 떨어져 있다는 것이 큰 흠결이었다. 샤를 7세는 초기에는 문약하고 떨어지는 지도자였지만 날을 거듭할수록 각성하여, 군주의 풍모를 되찾고 모략과 지략, 그리고 과감한 행동력으로 백년전쟁을 종결하는 지도자다. 모략에 능한 그였기에, 병사들의 사기를 올릴 만한 방법을 고민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잔다르크라는 스타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군대의 사기를 드높이는데 활용하려 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잔다르크의 등장으로 도팽군의 사기가 높아지고 북부 프랑스를 탈환할 무렵, 잔다르크는 무리한 군사작전을 수행하다 영국군에 포로가 된다. 샤를 7세는 '이용 가치가 떨어진 잔다르크'를 구하지 않는데, 이를 봐도 그녀는 정치적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의 영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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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VS 트럼프 - 시작된 글로벌 적벽대전, 문재인의선택은?
유필립 지음, 김현석 / 주류성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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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외적으로 한국은 커다란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의 서쪽에는 전통적으로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던 중국이 급부상하여 떠오르는 패권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이런 중국의 움직임은 현재 패권국의 미국의 심기를 자극한다. 한국은 미국에 거의 종속되다시피 한 상태인데다 지리적으로 중국과 때려야 땔 수 없는 관계다. 고래 싸움에 등 터진 격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최근 대중외교는 최악을 치달았다. 사드 문제에 민감한 중국은 바로 경제적인 보복으로 응수했다. 미국 역시도 마찬가지다. '아메리칸 퍼스트'라는 자국 이기주의 아래에, 국제 질서의 개입에 전면적으로 발을 빼겠다는 움직임은 한미 관계의 지각변동을 예고한다.

 책은 우선 시진핑이라는 중국의 지도자와, 트럼프라는 미국의 지도자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었다. 그들이 살아온 흔적,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정치 환경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두 지도자는 금수저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시진핑은 전통적으로 전형적인 모범 정치인의 모습이고, 트럼프는 이례적이고 독특한 정치인이다. 저자는 시진핑의 챕터에서 중국의 정치를 편향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중국인의 입장에서 볼 것을 당부한다. 우리나라는 서구 사회의 정치제도를 채택했기 때문에, 정치를 바라보는 눈길이 기본적으로 서구의 시각과 비슷하다. 그렇기에 우리의 입장에서 중국을 바라보면 중국의 정치제도가 '후져' 보이기 마련인데, 저자는 이런 부분에 있어서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근대화를 이루고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중국은 힘을 키우고 내정에 집중하겠다는 목표에 충실했다. 그리고 지금, 시진핑은 응축한 중국의 힘을 서서히 발산하려고 용트림을 준비하고 있다. 중국 발전의 핵심은 바로 바다다. 전통적으로 중국은 내륙 대륙에만 집중하고 해금 정책으로 바다에 대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다 아편전쟁을 빌미로, 서구 세력에게 호된 회초리를 맞았다. 그렇기에 시진핑은 해양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해양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지금까지의 응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동원하여 이를 실현하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이러한 해양 진출은 미국을 자극하고 있었다.

 대내적으로 시진핑은 당원 내의 부패를 척결하려고 노력했다. 흔히 중국을 움직인다는 부호 세력인 '꽌시'를 적폐의 근원으로 삼고 노리고 있으며, 관료 부패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시진핑은 노골적으로 친서민주의 정책을 내세우고 있다. 꽌시는 정계와 재계를 움직이는 커다란 중국의 보수세력이다. 물론 시진핑도 이들을 단숨에 갈아엎을 정도로 무모한 숙청을 감행하진 않았지만, 중요한 것은 시진핑의 집권이 장기화될수록, 적폐를 명분 삼아 정치적 반대파를 가차 없이 숙청하고 있었다. 이런 내정 개혁은 중국 중산층과 서민층의 열렬한 환호를 받고 있으며, 시진핑의 권력 정당성은 이런 중국 서민층의 지지와도 궤를 함께하고 있다. 우리의 시각으로는 시진핑이 자신의 권력만을 취하기 위한 독재자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중국 중산층 서민층은 시진핑을 매우 좋아한다고 한다. 물론 그도 인간인 이상 권력욕이 있겠고, 자신의 정적들을 부패라는 명분 하에 척결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중요한 점은 중국의 서민들이 그런 시진핑을 매우 친근하고 심지어 다정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한편 미국은 초유의 선거 결과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됐다. 중국 챕터에서는 중국의 정치제도, 그리고 배경을 바탕으로 거시적인 측면에서 시진핑을 해석했다면 미국 트럼프의 챕터에서는 트럼프 개인의 행동과 심리를 통해 미시적으로 트럼프를 해석하고 있었다. 확실히 트럼프는 전통적인 미국 대통령들과 비교했을 때, 매우 이례적이다. 거짓말은 밥 먹듯 하고 극단적인 표현도 거침없이 발설한다. 그러나 이런 개념 없는 행동은 생각 없이 하는 행동이 아니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실제로 트럼프의 돌출적 행동은 매우 파격적이다. 너무 파격적이라 제멋대로인 트럼프지만, 그의 행동을 유심히 분석해보면 한 가지 결론이 나온다. 트럼프에게 있어 명분은 전혀 쓸모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정치인들이 명분과 실리를 함께 갖추기 위해 노력할 때 트럼프는 명분을 집어던지고 극단적 실리에만 집중했다. 이는 그의 경제 행보, 그리고 심지어 오늘날의 정치 행보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요소다. 막말의 대명사인 트럼프는 개념 없이 아군 적군을 가리지 않고 총을 쏴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생각 이상으로 고단수다. 트럼프는 그저 반대만을 위한 반대를 하지 않는다. 물론 그가 감정적이고 돌출적인 행동을 자주 보이지만 그는 권력의 균형추와 손익의 계산을 민감하게 파악한다. 그렇기에 자신이 소리 지르고 주장했던 것들을 손쉽게 번복하고, 때로는 미치도록 으르렁대던 적들의 의견에 동조하기도 한다. 김정은과 트럼프의 트위터 전쟁은 이를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국의 대통령과, 그 누구보다도 야심 있는 중국의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고 있다. 미국이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친미국가들의 합종책을 통해 중국의 진출을 견제한다면, 중국은 연횡책을 통해 미국의 저지를 뚫으려고 하고 있다. 특히 시진핑은 박근혜 정부에 대해 공을 많이 들였다. 전통적으로 친한 북한을 등외시 하면서 한국과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한동안 한국에 대한 중국의 호의는 뜨거웠다. 한류 드라마를 비롯하여 한국 여행 등등 중국 정부에서도 적극적으로 한국에 러브콜을 했다. 골지는 미국이 주도하는 중국의 해양정책 진출 견제에 적어도 한국이 중립을 택해줬으면 하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결국 사드 배치를 감행했다. 사드 배치는 표면적으로 북한을 염두 했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으로는 사드라는 미사일 포대는 고 궤도 미사일 방어 포대인데 북한에서 핵을 쏜다면 '굳이' 사드의 사정거리에 포함된 고 궤도로 미사일을 쏘지 않아도, 낮은 궤도의 미사일을 통해서도 한국에 충분히 위협을 가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주장이 옳다면 결국 사드 배치는 중국의 핵을 겨냥한 미국의 노림수였고, 그렇기에 시진핑은 경제 보복을 통해 배신자 한국을 응징했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무엇보다 나는 저자의 설명이 옳은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자의 말은 매우 논리적이다. 박근혜 정부도 처음 사드 배치에 대해서는 시큰둥했다. 사드 배치 결정은 매우 갑작스럽게 결정 났다. 심지어 촛불집회가 열려 탄핵되고 비리의 원류인 최순실이 구속되어 조사받는 상황에서도 급하게 결정 났다. 저자의 말대로 사드 카드는 대중 대미 외교에서 중간에 낀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최고의 협상카드다. 중간에 낀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 카드를 내세워서 국익에 최대한 이득이 되는 쪽으로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중요한 카드를 너무나도 성급하게, 의혹투성이로 결정해버렸다. 사드 배치는 결국 '미국과 중국의 보이지 않는 패권 국경선'을 우리나라에 설치한 것과 같다. 이는 대외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에 앞으로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에 앞으로 우리 정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그 어느 때보다 감정적인 미국의 트럼프의 허영심을 만족해줌과 동시에 화난 중국의 시진핑을 풀어줘야만 한다. 말이 쉽지 쉽지 않은 부분이다. 한쪽에 치우쳐서 외교전을 행하기에는 무리수가 너무 크다. 게다가 지금 세계적인 추세는 서구 사회가 흔들리고 있고, 오히려 동남아시아와 중국의 발전이 더더욱 돋보이는 상황이다. 그렇기에 전통적으로 대미 외교에만 의지하는 것도 위험하고, 그렇다고 전통적인 우방을 내버리고 중국과 놀 수도 없다. 결국은 둘 사이에서 적당한 견제와 균형을 통해 어부지리를 얻는 전략으로 갈 수밖에 없다. 책은 이런 전통적인 외교 해결책 외에도 다른 부분을 주목했다. 바로 우리나라가 주도적으로 제3의 세력권을 형성하여 강대국의 발전에 견제를 가하자고 주장했다. 책에서 대표적으로 거론한 지역은 동남아시아다. 이는 매우 타당한 말이다. 강대국 사이에 끼여서 눈치 보기 전략으로만 나가다간 상황에 따라 곤란한 상황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이럴 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자강할 수 있는 카드를 만들어야 한다. 저자는 이 카드를 새로운 제3의 세력권을 만드는 것으로 주장했다. 물론 이는 매우 어려운 부분이고 지금 현재로 봐서는 현실성이 없는 대안이라고 할지라도, 장기적으로 볼 때에는 적절한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나라를 지키는 것에는 자강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 자강의 대안으로 제3 세력권의 동맹을 책에선 꼽고 있었다.

 사실 일반 대중들은 대외관계에 관심이 있더라도, 피상적인 부분만 주목할 가능성이 높다. 외교에 관한 부분은 상당히 전문성을 요하는 부분이라서, 뉴스 등을 상시로 보지 않는 한, 외교적 사안의 핵심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다른 나라의 정치나 다른 나라와의 외교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미국의 선거나 중국 시진핑의 정책에 대해서 풍문으로 들은 이야기는 많을 것이다. 전통적 강호인 미국과 신흥 강호인 중국의 성장은 정치나 외교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흔하게 접할 만큼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끄는 이슈라고 할 수 있겠다. 책은 이런 미국과 중국의 움직임을 평이한 서술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기에 배경지식이 없더라도 책 한 권으로 가볍게 국제 정세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저자의 주장과 주관이 강하게 들어간 부분도 있지만, 그런 부분을 배제하더라도 중국과 미국의 외교전의 커다란 흐름에 대해서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외교 흐름도 흐름이지만, 시진핑과 트럼프의 대조되는 리더십을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아쉬운 점이라면, 우리에게 생소한 중국의 정치제도를 설명할 때, 도표나 그림을 활용하여 시각적인 요소를 추가하여 설명했으면 하는 부분과 전문 기구에 대한 설명을 책 말미에 정리해서 쭉 살펴볼 수 있게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 외 내용적으로 중복되는 문장이 있지만, 거슬리기보단, 앞의 내용을 상기할 수 있어서 오히려 괜찮았던 것 같다. 책을 읽으며 중국의 정치제도에 대해 참고할 책으로 《차이나 모델》이라는 책을 추천한다. 이 책은 서구권 학자가 중국의 정치 모델의 장점을 분석하여 서술한 책인데, 아마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굳이 참고도서까지 보지 않고 이 책 한 권으로도 중국의 정치 모델을 파악하는데 무리는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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