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초고왕을 고백하다 백제를 이끌어간 지도자들의 재발견 1
이희진 지음 / 가람기획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학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사료라고 불리는 텍스트와 그 사료를 검증할 수 있는 고고학적 유물이다. 그렇기에 고대사는 늘 논란의 여지가 많다. 전해오는 것들이 적은 데다 전해지는 것들 역시도 매우 부분적이고 파편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중세인 고려와 근세인 조선의 경우 전해지는 유물과 기록이 많은 반면, 그전의 고대 시대는 유물도 적고 기록 역시도 미미하기 때문이다.

삼국 중 그나마 형편이 나은 것은 신라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고, 통일 왕조로 한동안 있었기에 다른 두 국가에 비해 전해져오는 기록과 유물이 많은 편이다. 반면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는 전해져 오는 것들도 드물고 사료도 매우 파편적이다. 백제와 고구려 중 그래도 우리에게 친숙한 것은 고구려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정복군주 광개토태왕이라는 불굴의 영웅이 고구려 출신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국가 중 광개토태왕만큼 영토를 넓힌 나라는 없었다.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늘 대륙 중국으로부터 시달림을 당했다. 그런데 광개토태왕은 이런 중국이 분열된 시기를 틈타 북방으로 영토를 개척했다. 그랬기에 우리는 광개토태왕의 정복을 통하여 '을로써 지낼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아픔'을 삭히곤 했다. 광개토태왕은 그래서 우리 민족에게 늘 선망의 영웅이었다.

삼국 중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적은 국가는 백제다. 물론 백제는 문화가 뛰어나서 지식인들 중에는 백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일반 대중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백제는 확실히 신라와 고구려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진다. 시험 문제에 단골로 나오는 삼국의 전성기 - 4세기 백제의 근초고왕, 5세기 고구려의 광개토태왕, 6세기 신라의 진흥왕 -를 빼고는 도통 가깝게 와닿지 않는다. 책은 이렇게 생소한 백제의 역사를 다루고 있었다. 책은 백제의 역사를 통사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업적을 이룬 인물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었다. 다루고 있는 인물은 두 사람, 첫 번째는 백제의 영향력을 최대로 높였다는 정복군주 근초고왕과, 두 번째로 백제의 중흥을 이끌었던 성왕을 다루고 있다. 제목은 '근초고왕을 고백하다'이지만 근초고왕의 파트보다 성왕의 파트가 분량이 좀 더 많았다.

백제는 가야와 더불어 우리 역사에 있어 수수께끼와도 같은 존재다. 왜냐하면 워낙 전해지는 사료가 미약하고, 그나마 전해지는 사료 역시도 백제에 대해 매우 불리한 기록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백제의 진면목을 오늘날 밝히기에는 매우 어렵다. 현전해는 사료 중 백제에 대한 사료로 취급하는 것은 바로 두 가지 텍스트인데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다. 《삼국사기》야 그렇다 쳐도 《일본서기》는 왜곡투성이의 일본 기록인데 이게 과연 백제의 모습을 밝힐 수 있는 사료로 활용할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든다. 그러나 이렇게 따지면 《삼국사기》 역시도 매우 편향적인 역사서다. 왜냐하면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은 대표적인 신라계 인물인데, 그는 노골적으로 친신라적인 사관을 《삼국사기》에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를 잘 읽어보면 신라의 기록이 가장 자세하고, 고구려, 백제 순으로 점점 기록이 미비해진다. 《삼국사기》 역시 백제사를 왜곡과 폄하의 시각으로 바라봤다. 그러므로 양 사서에 편향된 기록을 걷어내고 비판적인 눈으로 독해해야지 온전한 백제에 다가갈 수 있다.

근초고왕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백제의 주적인 고구려에 대항하여, 남방 세력을 평정했다는 점이다. 백제는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남방 경략에 힘을 썼는데, 마한 세력을 제압하고, 가야 연맹을 자신들의 세력권에 넣었으며, 왜 역시 이런 연합 세력에 편입시켰다. 백제는 왜를 이용하여 신라를 견제했고, 왜는 가야 연맹에 임나를 통해 한반도에서의 활동 영역을 보장받았다. 백제는 임나를 통하여 가야 세력과 왜를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즉 백제를 중심으로 한 남방 연합군이 형성됐다. 근초고왕이 이룬 업적 중 가장 큰 업적이 바로 이 연합 세력의 구축이었다. 근초고왕이 이룩한 이 남방 연합은 결국 광개토태왕의 남방 정벌로 인해 무산된다. 광개토태왕은 신라를 구원함과 동시에 남방 연맹의 핵심 거점인 가야 즉 임나를 공격하였고, 이로 인해 임나의 중심이었던 금관가야는 패권을 잃고 만다.

백제의 성왕은 근초고왕이 이룩했던 남방의 맹주 자리를 다시 되찾으려고 노력했던 군주다. 당시에는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고 있는 형국이었지만, 성왕은 잔존한 가야 세력과 왜 그리고 신라까지 연결한 거대 연맹국을 창설해 백제가 조종하려는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신라와 가야, 왜나라는 백제의 이런 움직임을 불편하게 여겼다. 설상가상으로 금관가야가 신라에 투항하자 백제는 강압적인 정책으로 나머지 가야 세력과 왜국을 독촉했고 결국 백제 중심의 남방 연합군을 다시 설립했다. 이러한 전략으로 백제는 한강 탈환을 감행했지만 신라의 배신으로 성왕은 전사했고, 백제는 어렵게 이룩한 남방 연합군의 맹주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책에서 다루고 있는 핵심은 연합 맹주를 주도하던 백제의 모습이다. 백제는 신라가 한강 유역을 먹기 전까지 한반도 남방의 외교와 정치를 주도했던 강대국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국제정세 앞에서 백제의 지도자들은 매우 탄력적인 모습으로 외교를 감행했다. 오늘날 생각했을 때 고구려와 백제는 하나의 민족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민족적 개념으로 이 시기를 해석해버리면 당시의 시대를 정확하게 조망할 수 없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철천지원수와 같은 사이였다. 백제의 최대 주적은 신라도 아니고 가야도 아닌 고구려였다. 고구려 역시 남쪽에서 사사건건 불편한 눈으로 바라보는 백제를 곱게 보지 않았다. 양국은 서로의 군주를 참살했을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던 사이다. 백제는 이런 고구려에 맞서 가야와 왜를 이용한 연합 세력을 구축했다. 오늘날 관점으로 보자면 같은 민족인 고구려를 치기 위해 일본인에게 도움을 청한 백제가 매국노처럼 보이겠지만 당시 백제에 있어 고구려는 그저 물리쳐야 할 적일뿐이었다. 마찬가지로 신라가 통일을 위해 외세를 끌어들였다고 하는데, 이런 관념 역시도 근현대 시대에 형성된 민족관에서 비롯했다. 당시 신라에게 고구려나 백제는 같은 민족이 아닌 적국일 뿐이었다.

책을 보며 새삼 느낀 것은 국제 관계의 본질은 역시 힘에 있다는 것이며, 그렇기에 힘이 결여되면 관계 역시도 비틀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런 면에서 나라와 나라 간에 행하는 외교는 본질적으로, 자연계의 약육강식과 매우 닮았다.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근초고왕은 백제 중심의 남방 연합군을 결성했다. 그러나 광개토태왕은 이를 힘으로 깨부쉈고, 공고할 것만 같았던 남방의 연합세력은 바로 와해됐다. 왜는 백제로부터 문화적인 유산을 제공받는 입장이라 꾸준하게 백제를 우대했지만, 가야는 광개토태왕의 정벌 이후 바로 백제와 연을 끊어버렸다. 고구려가 이토록 강대해지자, 고구려의 속국인 신라는 자주를 외치며 백제와 동맹하여 고구려와 맞섰다. 굳건한 나제동맹이 이뤄졌지만 결국 성왕 때 가야 세력을 포섭하는 문제와 한강 유역을 차지하는 문제에서 신라는 백제를 배신했다. 그러므로 고대왕국 시대에 나라와 나라의 외교관계는 본질적으로 의리나 명분 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법칙에 지배를 받았다.

또한 흔히 우리는 고조선과 연맹왕국 시기를 거쳐 삼국시대로 넘어갔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매우 편견인 듯싶다. 나는 이 시기를 오국시대로 정의해야 한다고 본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고구려와 백제가 남북의 형세로 싸우고 있었으며, 신라와 가야가 자국의 이익에 맞게 눈치껏 고구려와 백제에 편을 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나라 왜 역시 한반도에 많은 흔적을 남겼다. 왜는 본질적으로 백제와 깊은 관계를 맺고 백제의 입장을 끝까지 지지하여서 신라와 가야처럼 가변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았다. 또한 한반도 자체에 위치한 국가는 아니지만, 한반도 세력이 격돌할 때 왜군은 늘 파견되었고 백제군과 함께 싸웠다. 그러므로 왜 역시 우리의 고대사를 다룰 때 빠질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고대사도 한국과 깊은 연관이 있다. 왜는 이런 지원을 통해 문화적인 혜택을 백제로부터 누렸다. 이러한 한반도 도래 문화를 바탕으로 왜는 나라와 교토에서 독자적인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양국의 고대사는 서로의 존재를 제외하고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매우 많다. 따라서 한국의 고대사와 일본의 고대사는 하나로 연결됐고, 하나라는 시각으로 바라봐야지 편협한 오류와 편견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서기》는 기본적으로 일본인과 천황을 노골적으로 높이는 목적 하에 저술된 책이지만, 한반도의 세력 판도와 한반도에서 파견됐던 왜국 군대의 동향 등등을 자세하게 기록한 것으로 봤을 때 기록들을 모두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일본서기》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자문화 중심주의적 허구와 과장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비판적인 독해를 한다면 허구 속의 진실을 분명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밝히는 것이 사학자 본연의 임무가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근초고왕과 대륙 백제에 대한 생각을 적어보려 한다. 책에서는 대륙 백제에 관한 내용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대륙 백제란 백제가 중국의 동쪽 지역을 자국화하여 통치한 지역을 의미한다. 과연 대륙 백제는 존재했을까? 당시 근초고왕은 국가 팽창정책을 내세웠고 남방 경략을 했으며 북쪽으로는 고구려를 정벌하여 왕을 쓰러트리는 등의 활동을 보여줬으니 분명 바다에서도 왕성한 경제정책을 감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정치적으로도 중국 동쪽 지역을 장악했을까? 의문이 든다. 경제적인 영향력이 무조건 정치적인 영향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진다는 것은 결국 중국 대륙 안에 백제가 거점을 마련하고 영토화했다는 이야기인데, 당시 백제가 중국의 동쪽 영토를 자국화하고 유지할 수 있는 국력이 있었을까? 아무리 중국 대륙이 혼란스럽더라도 먼 바다 건너에 영토를 확장한다는 것은 매우 부담스럽다. 무엇보다 그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현실적인 자금과 비용, 힘이 있었을까? 당시 근초고왕 시대 백제의 가장 큰 사업은 대륙 백제의 확장이 아닌 한반도 세력 내에서 북방 고구려의 세력에 대비하여 남방 세력권의 연합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가야와 왜를 연결하는 거대 연맹체를 만들고, 또 백제 내부에서도 전남 지역의 마한 세력들을 복속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하는데 이런 시기에 과연 바다 건너 중국 본토에 영토를 마련할 여유가 있었을까? 상식적으로 너무 앞뒤가 안 맞는 추측이라고 생각한다. 정복이라는 것은 본토와 가까운 지역부터 정벌을 마친 뒤에야, 외부로 눈길을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백제 바로 밑에 마한 세력도 통합하지 않았는데, 바다 건너 대륙에 영토를 신경 쓴다?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다. 따라서 내 생각을 정리해보자면 근초고왕 시기에 분명 서해를 통해 중국 대륙과 경제적인 교류는 매우 활발했을 것이고, 서해의 장악력 역시 백제가 쥐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서해와 중국 동쪽 지역에 있어서 경제적인 주도권은 백제가 가졌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이 정치적인 영향력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튼 책을 읽으며 저자의 신선하고 비판적인 해석이 눈에 들어왔다. 잊었던 백제의 영웅들을 복원하는 것은 매우 한계가 있는 작업이지만, 그런 한계 속에서도 과거의 자취를 복원하는 것이 역사학자의 소명이다. 저자는 복잡한 자신의 의견을 평이한 서술로 알기 쉽게 대중에게 선보였다. 그래서 흥미롭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책을 통해 백제 군주들의 새로운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책의 후속작인 《의자왕을 고백하다》도 읽어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키아벨리 전술론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이영남 옮김 / 인간사랑 / 2017년 5월
평점 :
품절


마키아벨리의 대표작은 《군주론》이다. 물론 마키아벨리를 깊이 읽은 분들의 입장에서는 《로마사 논고》를 꼽을지도 모르겠지만, 《로마사 논고》는 《군주론》만큼 후세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점에서, 《군주론》을 앞설 순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군주론》에서 강력한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자강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자강의 핵심은 군대였다. 뿐만 아니라 《로마사 논고》에서도 마키아벨리는 군대에 대한 생각을 깊이 있게 밝혔는데, 이로 추측해볼 수 있는 부분은 마키아벨리의 생각 속에는 언제나 군대에 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군사 철학을 저술한 책이 있는데 그 책이 바로 《전술론》이다. 후대의 학자들은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 그리고 《전술론》을 마키아벨리의 3대 저서라고 이야기했다. 그만큼 《전술론》은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배우는데 있어 중요한 저작으로 간주됐다. 당시 유럽의 정세는 지방의 중소 영주 세력들을 중심으로 한 봉건주의 체제가 붕괴하기 시작했고, 강력한 중앙집권을 바탕으로 한 강대국들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강대국들은 자국의 패권을 이용하여 약소국을 이용하거나 식민지화했으며, 이러한 현상은 신대륙과 식민지를 바탕으로 한 제국주의의 배경이 되었다. 애석하게도 마키아벨리가 있던 이탈리아 대륙은 여전히 봉건주의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강대국들에 의해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휘둘리고 수탈당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마키아벨리는 과거 이탈리아 대륙에서 찬란한 제국을 만들었던 로마 시대를 주목했고, 그러한 고전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이탈리아의 정치와 군대를 개조하여야 한다고 소리쳤다. 그런 마키아벨리의 정치적인 관념을 대변하는 저서가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이며, 군사적인 관념을 대변하는 저서가 바로 《전술론》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자신의 명저인 《전쟁론》에서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다.'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마키아벨리의 사상도 마찬가지다. 그는 정치 안에 내재됐던 과대평가된 종교적, 윤리적인 부분을 걷어내고, 정치의 현실주의를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정치의 현실주의는 어떻게 완성되는가? 핵심은 지도층의 현실을 바탕으로 한 리더십과, 그 리더십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군대였다. 오늘날 현대에는 직접적인 전쟁을 겪을 일이 없기에 군대에 소중함이 크게 와닿지 않지만,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강대국의 필수 조건은 강력한 군사력이었다. 어느 시대에나 스스로 힘이 있어야 다른 세력에 휘둘리지 않고, 내 목소리를 당당하게 외칠 수 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평화나 미덕, 아름다움, 종교 등등으로 치장하고 포장했지만, 냉혹한 국제질서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언제나 군대를 필두로 한 힘이었다. 사실 오늘날도 별반 다르지 않다. 국제사회를 주도하는 G2를 잘 살펴보면 하나같이 경제력과 군사력이 강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무튼 정치적 현실주의는 군사력으로 대표되는 힘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기에 《전술론》은 정치철학자인 마키아벨리에게 있어 뜬금없는 저작이 아닌, 당연히 저술해야만 했던 저작이었다.

  《전술론》의 내용적인 측면은 책의 부피에 비해서 크게 독창적이진 않는다. 고전 옹호 주의자, 로마 시대를 극도로 찬미하는 마키아벨리는 군사적인 체제나 제도 역시도 찬란했던 로마 시대의 제도를 본받자고 이야기했다. 그뿐 아니라 공화정 로마 시대의 사심 없었던 장군들의 내면적인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로마인의 제도를 본받아 응용하고 로마 군인들의 정신을 본받아 자국을 강화하자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가장 특기할 만한 사항은 바로 상비군에 대한 생각인데, 마키아벨리는 직업 군인을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그럼 의문이 들 법도 한데, 직업 군인을 양성하지 않으면 도대체 나라의 자강은 어떻게 이루려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으로 마키아벨리는 시민군을 강조했다. 마키아벨리는 직업 군인은 특성상 호전적이며 전쟁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탐하는 존재들이므로, 위급한 상황에서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평화로운 시기에는 국가에 해가 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는 로마 역사의 선례를 거론하며, 공화정이었던 로마가 독재정 국가로 갔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직업 군벌 세력들의 야심과 직업 군인들의 입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전문적인 직업 군인들은 평화의 시기에 국가를 전복할 수 있는 막강한 세력으로 남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공화정 초기에 로마가 시행했던 군사 정책에서 시민군 징집에 집중했다. 공화정 초기에 로마는 전문적인 군인을 두기보다, 전쟁이 일어나면 시민들의 모병과 모집으로 군대를 꾸려서 전쟁에 임했다. 즉 시민군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병농 일치라고 볼 수 있다. 전쟁이 나면 시민들의 징집으로 군사를 충당하고 전쟁이 끝나면 다시 군대를 해산하여 생업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이다. 이럴 경우 사령관은 승리를 거두더라도 군벌 세력을 갖지 못하기에 국가에 위협적인 요소로 남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너무 이상적인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시민군 제도는 오늘날 우리나라의 예비군 제도와 비슷하다.  생업을 하다가 전쟁이 나면 군대에 가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효율적인 시스템이나, 과연 이렇게 모은 병사들이 정예화되고 훈련받은 병사들보다 노련할까? 로마 초기 공화정 시대의 이탈리아 반도의 국가들은 사실 전쟁의 수준이 매우 미개하고 떨어졌다. 그런데 마키아벨리가 사는 시기에는 전쟁 기술과 더불어 책략과 기교가 고대 공화정 로마 시절보다 훨씬 발전한 시대다. 과연 급조적인 시민군으로 막강한 정예병과 싸웠을 때 이길 가능성이 높을까? 의문이 든다. 물론 마키아벨리는 이런 시민군들은 상비적인 훈련과 뛰어난 지도력을 갖춘 장군의 지도를 따르면 막강한 군대로 돌변한다고 이야기하는데, 너무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마찬가지로 정예화된 군대가 뛰어난 지도력을 갖춘 장군을 따른다면 시민군보다 훨씬 강력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내 생각은 그렇다. 최소한의 정예병은 유지하되, 시민군의 징집으로 나머지 병사들을 운용하는 것이다. 아무튼 시민군을 바라보는 마키아벨리의 생각을 읽으며, 나는 그가 정말 로마 시대를 그리워하고 존경하는구나라고 새삼 느꼈다.

  그 외에 특이한 사항은 없었다. 보병 중심의 군대를 지향하는 점, 군대의 배치와 공격 수비에 대한 전문적인 이론, 그리고 비밀을 중요시하고, 군대에서는 임기응변이 가장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점 등등은 《손자병법》을 필두로 한 동양의 군사 사상과 흡사했다. 하긴 진리라는 것은 시대와 지역에 따른 개별성보다 그것들을 초월하는 보편성에 가치를 두고 있다. 그렇기에 동양의 병법 진리와 서양의 병법 진리가 서로 궤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책 말미에서 마키아벨리는 오늘날 이탈리아를 통치하는 군주들이 나약하기에 올바른 군대와 군대 체계를 이룩할 수 없었다며 통탄한다. 그렇기에 이탈리아의 군주들은 저 위대한 로마 시절의 군대 체계를 본받아 군대를 조직하여 강한 모습으로 쇄신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 모습은 마치 《군주론》의 마지막 대목, 이탈리아 통일을 위한 바람과 같이 굉장히 웅변적인 어조였다. 이렇듯 그는 자나 깨나 조국에 대한 마음으로 가득한 인물이었다. 애석한 것은 그의 이런 사상은 당대에 수용되지 못 했다는 점이다.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책의 구성이다. 《전술론》은 플라톤의 《대화편》처럼 대화체로 구성됐다. 이 대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실제로 마키아벨리와 함께 루첼라이 정원 모임에 참석했던 인물들로, 하나같이 인문적 교양이 충만한 사람들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적 실각 이후 루첼라이 모임을 통해 후학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이어가길 권고했다. 책의 배경은 실제 마키아벨리의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다. 책에서 군사학에 대해 주된 논의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파브리지오라는 사람인데, 결국 이 사람의 목소리는 마키아벨리의 목소리나 다름없다. 마치 플라톤이 《대화편》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말로 표현하는 것과 비슷하다. 또한 《전술론》 대화편의 대화 내용을 보면서 실제로 마키아벨리는 루첼라이 정원에서 어떤 방식으로 후학들과 교류를 하였는지 대강 유추해볼 수 있었다. 아무튼 마키아벨리의 저서는 사실과 허구를 섞어서 책을 쓴다는 특징이 있는데, 루첼라이 모임이라는 현실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부분은 사실적인 모습을, 자신의 목소리를 파브리지오라는 인물에 투영하여 전개한 부분은 허구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국어 - 전면개정판
좌구명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7년 6월
평점 :
품절


《국어》의 한자는 國語를 사용하는데 얼핏 보면 '나라의 문자'를 의미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國語라는 한자는 오늘날 흔히 사용하는 나라의 문자인 '국어'와 같은 한자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어》에서 사용된  語는 문자를 뜻하는 것이 아닌 이야기라는 뜻으로 사용됐다. 그렇기에 나라의 이야기 즉 나라의 역사를 의미하고 있다. 그럼 무슨 나라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책은 중국 춘추시대의 다양한 나라들을 나라별로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국어》의 제목을 풀어내보자면 '춘추시대 국가의 다양한 역사 이야기'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따라서 같은 춘추 시대를 다루고 있는 《춘추좌전》과 《국어》은 상호보완적 관계로 읽을 수 있는 역사서다. 두 사서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편집이다. 《춘추좌전》은 노나라 역사를 중심으로 주변국들의 상황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기록한 '편년체' 역사서인데 반해, 《국어》는 특정한 국가의 시각으로 편집한 것이 아니라 나라별로 나눠서 역사를 기록한 '국별체' 역사서다.또한 두 사서는 내용에서도 차이점이 두드러지는데, 《춘추좌전》은 사건을 자세하게 분석하고 조리 있게 정리하여 평가하는 것에 집중했다면, 《국어》의 서술은 역사적 인물과 인물 간의 대화체로 구성됐다. 그렇기에 《국어》의 서술은 《춘추좌전》에 비해 좀 더 가치중립을 확보하려고 노력한 모습이 보이며, 《춘추좌전》은 《국어》에 비해 저자의 주관적인 관점이 두드러진다.

그럼 이런 《국어》라는 고전의 주제는 무엇일까? 왜 저자는 춘추시대의 다양한 국가들의 역사를 정리하여 《국어》라는 고전을 남겼던 것일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급변하는 시대적 변화를 놓치지 않고 기록하려는 데 《국어》의 저술 동기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중국사에서 춘추시대는 시기적으로 매우 과도기적인 시대다. 춘추시대의 전후를 살펴보자면 앞에는 서주시대가, 춘추시대의 뒤에는 전국시대가 위치한다. 서주시대의 특징은 바로 봉건제의 완성이다. 황제를 중심으로 황제와 인척 관계의 인물들을 주변 제후국으로 파견하여 황제의 나라를 보필하는 시스템이 바로 봉건제인데, 이러한 시스템을 주나라가 확립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날수록 황제 주변의 제후국들은 자신들의 힘을 키우기 시작했고, 여기서 두각을 드러낸 패권국이 국제 질서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즉 명목상으로는 주나라 황실을 우대했지만 실제적인 실권은 힘 있는 제후국이 가지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이 춘추시대에 들어 생기기 시작했다. 

 춘추시대를 지나 전국시대로 넘어가면, 제후국들의 패권주의는 극에 달하고, 주나라 황실은 아무런 권위를 내세우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봉건제의 흔적이 완벽하게 사라지고, 철저하게 약육강식의 법칙만 남은 시대가 바로 전국시대다. 춘추시대는 이런 봉건제 시스템과 제후국들의 약육강식 패권주의가 공존한 과도기적 시대였다. 《국어》의 저자는 이런 시기에서 각 나라들의 동향을 국가별로 자세히 기록했고 그 기록한 문헌이 바로 《국어》라는 역사 고전이다.

그럼 《국어》의 핵심 주제인 중원의 패권은 누가 가졌고 어떻게 이동하였을까? 흔히들 춘추시대에는 오패 즉 다섯 명의 패자가 군림했다고 이야기한다. 이 오패는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손에 꼽는 인물은 총 8명이다. 먼저 제나라의 제환공, 송나라의 송양공, 진(晉)나라의 진문공, 진(秦)나라의 진목공, 초나라의 초장왕, 오나라의 합려와 부차, 월나라의 구천 등이다. 여기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은 송양공과 진목공이다. 송양공은 다른 패자들이 힘과 실력으로 나라를 이끌었을 때, 그는 인의와 예의를 내세워 주변국의 신망을 얻었다. 그의 드높은 인의는 많은 존경을 샀지만 반대로 너무 인의와 예의에 얽매여 전쟁과 현실 정치에서는 과오를 범하기도 하였다. 후대의 유학자들은 이런 송양공을 칭송하여 오패의 하나로 간주하기도 하였지만 객관적으로 살펴봤을 때 송양공에게 패자의 칭호를 붙이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다. 실제로 《국어》에서도 송나라를 다룬 챕터는 없었다. 

 진목공은 진(秦)나라를 중흥한 군주로 알려져 있다. 춘추시대에 진나라는 두 국가가 있었는데 하나는 진문공의 진(晉)나라고 하나는 진목공의 진(秦)나라다. 진(晉)나라는 전국시대에 세 개의 나라로 쪼개지지만, 진(秦)나라는 결국 전국시대를 통일하는 나라로 성장한다. 유명한 진시황도 진(秦)나라 출신이다. 아무튼 춘추시대 때 진(秦)나라는 서쪽 변방에 위치한 약소국이었다. 문공은 이런 진(秦)나라를 성장시켰고, 나름 중국의 중앙으로 진출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결정적인 전투에 패배한 뒤, 방향을 바꿔 서쪽의 융족들을 토벌하여 세력을 넓혔다. 패자라는 칭호는 당시 중국의 중앙 정치와 제후국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이 있는 군주들이 칭했던 칭호다. 그러므로 진목공은 뛰어난 중흥 군주였지만 중국의 패자라고 칭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인물이다. 설상가상으로 《국어》에도 진(秦)나라에 대한 챕터가 없다.

그럼 《국어》의 내용을 바탕으로 춘추오패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제나라의 제환공, 진(晉)나라의 진문공, 초나라의 초장왕, 오나라의 합려와 부차, 월나라의 구천. 여기서 오나라에는 두 부자인 합려와 부차를 거론했는데, 사실상 두 부자는 오나라의 패권주의를 달성하는데 있어 연장선에 있는 인물이므로 하나로 묶어도 될 듯하다. 이렇게 정하고 보면 중국의 패권이 이동하는 방향이 매우 이채롭다. 제나라와 진나라는 전형적인 북방 문화권, 화하 문화권인데 반해 초나라와 오나라 월나라는 남쪽 변방에 위치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즉 춘추시대의 패권전쟁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전됐다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북방에서 남방으로 패권이 이전되면서, 기존에 유지하고 있던 봉건제의 질서는 더더욱 무너져갔다. 단적인 예로 제나라와 진나라가 패자를 자처할 당시에는 군주들의 호칭이 공이었지만, 남방의 초나라를 필두로 오나라와 월나라의 군주들은 하나같이 왕을 자처하고 있었다. 원래 군주들의 호칭은 천자인 주나라 황제만이 부여할 수 있는 특권이다. 그러나 초나라가 패자를 자처할 때부터 힘 있는 국가들은 자신들을 왕으로 선포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봉건질서의 붕괴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또한 제환공과 진문공이 패자에 있던 시대에는 기존의 봉건질서를 무조건적으로 무시하지 않았다. 패권국은 힘이 있었지만 약소국과 외교를 할 때 공정한 입장에서 외교를 진행하는 등, 나름의 봉건질서와 규율을 지키려고 노력했으며, 명분만 남은 주나라 황실을 우대하려고 나름 노력했었다. 그러나 패권이 남방으로 이전되면서, 이런 봉건적 질서와 규율은 급격하게 파괴되기 시작했다. 봉건질서가 무너진 전국시대가 도래한 배경에는 이런 사건들이 있었던 것이다. 즉 춘추시대를 정리해보자면 봉건적 이상 질서를 지키고자 하는 이상과 현실적 패권주의에 입각한 정치활동이 공존하는 시대였다. 군주들은 이런 이상과 현실 속에서 정치를 했으며, 지식인층도 이런 이상과 현실을 대표하는 학파를 만들기 시작했다. 봉건제를 옹호하고 과거의 예의를 바로잡으며 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던 학파는 유가 학파였고, 현실을 앞세우고 대표했던 학파는 병가와 법가 학파였다. 이렇듯 춘추시대에는 정치와 사회를 둘러싸고 이상과 현실의 갈등과 조화가 나타났던 시대였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느꼈던 것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상을 강조하던 유가 학파와 봉건주의 옹호자들보다 현실을 강조하던 병가, 법가 학파와 패권주의 옹호자들이 강세를 보였다는 점이다. 실제로 춘추시대가 흐르면 흐를수록 봉건주의 질서보다 패권주의가 점점 강해졌으며 이후 전국시대는 현실 중심적 철학이 대세를 이뤘고, 군주들 역시 패권주의로 국가를 다스려왔다.    

  《국어》를 읽으며 이 책의 저자는 분명 북방 문화권 출신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각 나라별로 역사를 기록했다고 하지만 북방에 위치한 국가들의 내용이 남방에 위치한 국가들의 내용보다 훨씬 많다. 특히 진(晉)나라의 기록은 책의 1/3 정도의 분량을 차지하고, 이를 가지고 몇몇 사람들은 저자가 진나라 출신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너무 나간 주장 같다. 다만 저자는 분명 기존의 전통적인 중화 문화권의 영역인 북방 문화권 출신이라서 북방 출신의 국가 기록을 상세하게 기록했을 것이다. 나는 《국어》를 《춘추좌전》을 읽으며 부교재처럼 참고했다. 《춘추좌전》은 《국어》에 비해 디테일하고 자세한 부분이 있겠지만, 노나라의 정치사를 중심으로 여러 나라의 사건들을 시간대별로 기록하다 보니, 주변 국가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뭐랄까 좀 산만한 전개라고 해야 하나. 반면 《국어》는 특정 국가의 입장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챕터를 나라 순으로 편집하고, 그에 맞춰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어서 각국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에는 훨씬 가독성이 뛰어났다. 

 또한 문체도 《국어》가 《춘추좌전》에 비해 훨씬 평이하고 가독성이 좋았다. 《춘추좌전》의 문체는 분석적이고 논리적이지만 현학적인 부분도 있고, 이념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국어》는 《춘추좌전》에 비해 훨씬 명료하고 단순하게 서술됐다. 그래서 읽는데 부담도 없었다. 그렇기에 과거 사람들은 《국어》를 두고 《춘추좌전》의 보조자료인 《춘추외전》이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국어》는 크게 알려진 고전이 아니다. 《춘추좌전》과 전국시대를 다룬 역사서 《전국책》에 비해 《국어》는 아무래도 포스가 떨어지는 고전이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춘추시대에 대해 가장 빠르고 쉽게 배울 수 있는 고전을 꼽으라면 《사기》도 아닌, 《춘추좌전》도 아닌, 《국어》를 꼽고 싶다. 사람들은 흔히 춘추전국 시대를 이야기할 때 《사기》를 대표적인 역사서로 꼽는다. 물론 《사기》는 매우 뛰어난 고전이다. 그러나 《사기》는 춘추시대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전한 시대에 기록된 문헌이다. 따라서 《사기》는 춘추시대를 다룬 1차 문헌이 아니라 2차 문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시대를 알아보려면 그 시대와 가장 가까운 시기에 나온 1차 문헌을 확인해야 한다. 《국어》는 명실공히 춘추시대를 다루는 1차 문헌이며, 사마천 역시 《사기》를 저술할 때, 《국어》을 참고했다. 이런 중요성을 가진 고전인데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홀대받는 현실이 매우 안타깝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세트 - 전10권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플루타르코스 지음, 이다희 옮김, 이윤기 기획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사람은 누구나 나름의 성공을 꿈꾼다. 성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물론 다르겠지만, 일반인들이 보편적으로 꿈꾸는 성공은 돈이 많고 부유하며, 시간적 여유가 있고, 자신의 영향력이 사회에서 막강한 상태일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보편적인 성공을 바라고 꿈꾸지만 정작 그 성공한 삶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관심 가지지 않는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영웅들은 하나같이 커다란 성공을 이룬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성공으로 인해 불행해진 인물들이 많았다.

책을 통해 성공한 삶을 바라보니 하나의 성공 뒤에는 그보다 더 큰 고난과 난관이 있는 경우도 있었으며, 만족하지 않고 더 큰 성공을 꿈꾸다가 자멸한 경우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커다란 성공 뒤에는 숱한 시기와 배신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몰락한 인물들도 많았다. 물론 지혜롭게 자신의 성공을 유지하며 노력한 인물들도 있었지만, 그런 인물들은 정말 극소수였다. 대부분의 영웅들은 커다란 성공 끝에 몰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메인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 역시도 커다란 성공 뒤에 이를 유지하지 못하고 죽었다. 사람이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나와 비슷한 사례, 그리고 나와는 다른 삶을 통하여 배움을 얻기 위해서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절대적인 효용가치라고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아주 모범적인 역사서다. 우리는 50인의 인물과, 그 인물을 친절하게 비교 분석해주는 저자의 코멘트를 통해 짧지도 길지도 않은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고 숙고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더불어 내가 꿈꾸는 성공 저편에는 무엇이 있는지, 어떤 것들이 도사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기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가장 탁월한 영웅들의 본보기를 통해 성공을 어떻게 이루는지, 그리고 성공한 뒤에 기다리고 있는 것들에 대해 친절하게 알려주는 교과서다. 저자는 본문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들의 삶을 통하여 우리는 탁월함을 배울 수 있고, 스스로가 탁월한 인물로 거듭나게 된다며, 이 책의 저술 동기를 분명하게 하였다. 숱한 자기 계발서들이 성공하는 방법에 집중할 때,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성공하는 방법과 더불어 성공 이후 성공을 유지하는 방법까지도 친절하게 알려준다. 그렇기에 이 책은 매우 뜻깊은 고전이고, 그러한 이유로 서양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랄프 왈도 에머슨도 그러지 않았는가, 전 세계 도서관이 불타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과 《플라톤 전집》, 《셰익스피어 전집》은 반드시 구해야 한다고 말이다. 책들은 각각 서양의 역사, 철학, 문학을 상징하며 이 셋은 인문학의 주요 영역(문사철)이다.

과거의 사람들은 오늘날의 문제가 있을 때 바람직한 과거의 모습에서 현재의 모순을 찾는다. 크세노폰도 그랬고, 마키아벨리도 그랬고, 플루타르코스도 그랬으며 동양의 역사가들과 철학자들도 그러했다. 그는 제국주의가 만연한 로마의 현재를 매우 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랬기에 그는 민주주의가 빛을 발한 그리스 시대를 동경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는 그런 플루타르코스의 친그리스적 관념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는 작품에서 노골적으로 로마의 왕정을 비판하지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권력 독점을 비판했다. 로마와 그리스가 찬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시민들의 자유와 민권 의식에 있다고 그는 판단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라는 고전을 통해 우리 자신 속에 존재하는 모순과 결점을 직시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순들을 하나씩 극복하고자 노력한다면 영웅들과 같은 위업은 이룰 수 없더라도 영웅들과 비슷한 고귀한 품성은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플루타르코스는 이 책에서 영웅들의 화려한 행위보다, 화려한 성공을 이룬 영웅들의 품성에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인물들의 화려한 업적보다도, 그 인물의 사소한 말 한마디가 품성과 직결된다면, 그런 사소한 사례들에 집중했고 그것들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다양한 인물들의 품성을 비교 분석하며, 가장 탁월한 인물에 어울리는 품성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그런 플루타르코스의 품성에 대한 생각을 집약하여 개념화한 것이 바로 '비르투스'다. 비르투스라고 하면 흔히 마키아벨리가 만든 개념이라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책에서는 로마인의 바람직한 품성과 미덕을 '비르투스'라고 정의한다. 즉 플루타르코스의 비르투스는 로마인의 내적인 미덕과 도덕을 의미하고 있었고, 마키아벨리는 이런 로마의 전통적인 비르투스 개념과 대조적으로 현실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비르투스와 포르투나의 대립은 서구권 고전의 주된 논의 대상이다. 플루타르코스 역시도 이에 대해 숱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의 의견을 종합해보자면 결국 포르투나라는 운의 농간으로부터 사람은 비르투스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키아벨리의 사상과도 비슷하다. 단지 그 비르투스라는 개념이 내적 품성에 집중한 것인가 현실적 역량에 집중한 것인가라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개인적인 사견으로는 인생에 있어서 나름의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마키아벨리의 현실적 비르투스도, 그리고 플루타르코스의 품성적 비르투스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적 역량과 내면적 품성의 깊이. 둘 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10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10
플루타르코스 지음, 이다희 옮김, 이윤기 기획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드디어 10권이다. 마지막 권을 읽고 나니 뭔가 씁쓸하다. 전집을 모두 읽었다는 후련함보다 아쉬운 마음 그리고 씁쓸한 마음이 더 컸다. 책이 다루고 있는 배경 역시 어둡다. 그리스의 배경은 사실상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아카이아 연합 시절을 다루고 있으며, 로마의 배경은 숱한 군부에 의해 정권이 전복되는 시대를 다루고 있다. 또한 그리스, 로마 시대의 전성기에 인물들에 비해 내용도 빈약한 느낌이다.

  다섯 인물 중 세 사람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들이고, 두 사람은 만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자리에 오르기 위해 노력한 인물들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자유는 참 중요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자유를 추구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람은 여러 타인들보다 우위에 있기를 바란다. 이 두 가지의 개념이 충돌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현실에서는 이 두 가지의 개념이 필연적으로 충돌한다. 나의 우위를 무한정으로 추구하다 보면 결국 타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영웅전에서 나온 정치적, 군사적인 인물들이 불행하게 죽은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 자신의 야망을 극도로 추구하여서 수많은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한 결과가 아닐까. 아라토스와 필로포이멘은 필사적으로 조국과 그리스 지역을 패권주의로부터 해방하고자 노력했다. 그리스의 전성기에는 많은 도시국가들이 불화는 있었지만, 나름 옹기종기 경쟁하며 문명의 꽃을 피웠고 그래서 그리스 지역은 명실공히 세계의 중심 중 하나였다. 그러나 페르시아와 마케도니아 등등의 외세로부터 시달리기 시작했고 그들의 패권으로 인해 결국 그리스 지역은 예전의 찬란함과 민주주의가 사라졌다. 아라토스와 필로포이멘은 그리스의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 분투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아라토스는 군주정과 참주정을 매우 싫어하고 타도했지만 결국 스파르타의 경쟁의식 때문에 아카이아 연맹과 자신을 마케도니아에 예속했다. 플루타르코스의 말대로 그가 스파르타의 패권주의를 인정했다면 마케도니아의 군대가 펠로폰네소스에 안 왔을지도 모르겠고, 그로 인해 로마의 군대도 오지 않았을 것이니 그리스의 몰락이 좀 더 늦어졌을지도 모르겠다.

 티투스의 모습은 참 귀감으로 삼을 만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만약 일제 강점 시절에 일본군이 티투스처럼 우리 민족을 통치했다면 어땠을까? 진심으로 덕을 내세우며 한민족을 존중하고 예우하는 통치를 지향했다면, 어쩌면 일본의 지배가 더 장기화되지 않았을까라고도 생각했다. 다만 나는 책을 보면서 의문인 점이 물론 티투스가 그리스 지역의 자치를 인정해주고 그들의 문화를 존중해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져다준 자유는 결국 반쪽짜리가 아닐까? 티투스가 그리스 지역에 자유를 가져왔지만 그것이 진정한 자유인가? 아니다 결국 그리스는 이후 로마의 세력권에 편입됐고, 그리스는 자신만의 주체성을 상실하며 로마의 부속 지역으로 전락했다. 티투스가 가져온 자유는 표면적으로 자유일진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복속이라고 생각한다. 플루타르코스는 자유를 가져다준 티투스의 행동이 매우 고귀하고 이는 로마의 덕이라며 치켜세우는데, 이러한 생각도 어찌 보면 자문화 중심주의, 침략자의 제국주의적인 모습을 옹호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남이 가져다준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자유를 되찾고 싶다면 필로포이멘과 같이 최대한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갈바와 오토의 열전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나오는 인물은 많은데 정확하게 표현하면 막장의 시절이었다.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또 힘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 나는 시대였다. 로마를 성장시킨 가장 핵심은 군대라고 생각한다. 지칠 줄 모르고 물러서지 않는 기상으로 인해 다른 민족들을 모두 복속한 로마는 피를 갈구하며 발전한 제국이었다. 그런 로마를 내부적으로 무너트린 것도 결국 군대였다. 황제는 백성들의 민심을 고려하기보다 군대의 복종을 더욱 신경 썼다. 로마의 정권을 모두 결정하는 것은 시민이 아니라 군대였다. 칼로 성공한 자는 칼로 망한다. 갈바와 오토의 사례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 역시도 마찬가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