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선왕조실록 2 : 정종·태종 - 피와 눈물로 세운 나라의 기틀 ㅣ 조선왕조실록 2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7월
평점 :
1. 정종 - 무욕에 충실한 인품 있는 군주
《조선왕조실록 2 정종 태종》편의 주인공은 정종과 태종이다. 사람들은 흔히 정종을 태종이 세웠던 허수아비 호구로 생각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정종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왕좌에 올랐고, 동생 이방원의 눈치로 인해 왕위를 물려줬다. 아버지인 태조가 막내를 세자로 책봉했을 때에도 화는 났지만, 효심이 깊었기에 감히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려고 하진 않았다. 그는 숱한 전장에서 아버지와 함께 생사를 넘나들었다. 그는 순박했고, 우애가 깊었으며 효성이 깊은 지극히 소탈한 인물이었다. 정종은 동생 이방원이 일으킨 쿠데타 덕분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조정의 노른자는 이방원의 심복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랬기에 왕의 권한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정종을 그저 태종의 앵무새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저자는 이런 정종을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정종이 태종의 꼭두각시였던 것은 맞지만, 왕위를 계승했을 때, 정종의 힘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꼬집는다. 권력 다툼에 패배한 태조 이성계는 반정을 주도했던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그렇기에 태조는 착한 아들인 정종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알게 모르게 노력했다. 그뿐 아니라, 측근 대신들 중에서도 이방원과 정종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간을 본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사서에 나온 정종은 격구를 즐기고 정치를 멀리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은 이미지지만, 의외로 민생을 챙기고 좋은 제도를 확립하는 것에는 꽤나 열정적이었다. 정종 시기 확립된 제도 중 가장 손에 꼽을만한 것이 바로 임금의 좌우에 사관을 두는 것을 법제화한 것이다. 게다가 정종은 죽은 명나라의 황제 주원장의 잔혹성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는데, 사대를 주요 외교정책으로 삼은 조선의 국왕 입장에서는 이런 발언은 굉장히 파격적이다. 아무튼 권력욕이 없는 정종이지만 왕좌에 있는 동안은 성실하게 집무에 매진한 것으로 보인다.
이방원은 형인 정종에 의해 세자로 하루빨리 추대되길 원했지만 의외로 정종은 세자 책봉을 서두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묘한 줄다리기는 2차 왕자의 난으로 끝나게 된다. 혁혁한 군공을 세우는 이방원의 칼날에 두려움을 느낀 정종은 2차 왕자의 난이 끝나자마자 이방원을 세자로 임명하고 군권까지 내준다. 즉 자신은 자리에 아무런 미련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방원은 세자가 된 뒤 사병을 혁파하기 시작했는데, 군권을 빼앗는 과정에서 일부 공신들은 정종을 복위시키려는 모종의 밀담을 나누기도 한다. 이렇듯 두 형제는 서로를 배려하였지만 형제의 사이에는 커다란 권력이 있었기에, 권력 때문에 불러오는 오해를 모두 종식시킬 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종은 끝까지 자신을 낮췄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끝까지 형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정종은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어디까지가 자신의 역할인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집권 초기에는 권력의 맛을 느껴서인지 세자 자리를 이방원에게 선뜻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2차 왕자의 난 이후에는 자리에 대한 욕심은 금물이라는 것을 재빨리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정통성이 취약한 태종이 그래도 구색을 갖춰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형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정종이 욕심을 부려서 자리를 지키려고 했다면, 이방원은 다시 칼을 들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스스로에게도 굉장히 부담이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양보를 했던 정종이지만 그의 사후, 그가 받았던 대우는 그의 배려에 비해 너무나도 볼품이 없었다. 그는 후대 왕들에게 그저 태종에 기생한 왕으로 취급당했다. 저자는 세종 이후 벌어진 권력 다툼의 원인은 어쩌면 정종의 무욕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가 아니겠냐고 반문한다. 굉장히 일리가 있는 분석이다. 만약 세종이 정종의 무욕을 깊이 깨닫고 수양에게 무욕의 철학을 가르쳤다면, 계유정난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역사를 통틀어 정종과 같은 임금은 찾아보기 힘들다.
2. 태종 - 피와 눈물로 이룩한 조선의 기틀
사람은 누구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한다. 특히 야심이 강하고 지도력이 있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업적이 길이길이 빛나기를, 그렇게 역사의 주역이 되기를 희망한다. 태종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주역이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왕좌를 차지했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많은 가치를 잃어버렸다. 유교적 가치인, 충과 효를 중시하는 신생국 조선의 이데올로기 앞에 자신의 행위는 변명과 합리화를 하더라도 오점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모범이 되어야 할 군왕이, 모범적이지 않은 길을 걸어왔기에 그는 조선의 문화를 꽃피우는 성군 - 주인공이 될 자격이 없었다.
태종이 상대했던 정적들은 그냥 그런 상대가 아니라 모두 거물급이었다. 정몽주, 정도전, 이방석, 이방간, 그리고 태조 이성계. 하나같이 다들 자신보다 강력했으며, 하나같이 자신과 매우 가까운 인물들이었다. 만약 태종이 왕가와 관련이 없었다면, 이들과 반목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태종은 늘 부르짖었다. '내가 가까웠던 인물들과 척을 진 것은 내 사욕 때문이 아니라 하늘의 뜻, 즉 군왕의 길을 따르기 위해서였다.'라고, 그러나 권력의 속성을 모르는 사람들, 그리고 당하는 입장에서는 궁색한 변명처럼 들렸다. 고대 이래로 군왕의 허무한 하늘 타령은, 역설적으로 하늘 외에는 변명할 거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늘 타령을 하는 태종의 본심은 이럴 것이다. '권력이란 것이 원래 그런 거야. 피도 눈물도 없어. 내가 안 죽였다면 내가 죽임을 당했을 거야. 너희들은 나를 잔혹하다고 탓하지만, 너희들이 내 입장이 되어보라고.'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우여곡절이 많은 태종이었고, 잔인한 모습을 보여줬던 태종이었다. 그래서 의심이 갔다. '저 성질머리 있는 놈이 왕이 되어서 백성들을 더욱 수탈하는데 열을 올리는 것이 아닐까. 준비된 군왕이 맞긴 맞는가?' 놀랍게도 태종은 준비된 군왕이었다. 태종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손에 피를 묻혀서 왕이 됐다는 오명을 씻을 수 없다면, 그런 강한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여, 신생국 조선의 기틀을 잡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가 해야할 일이었다. 그는 신생국 조선에 남은 고려의 행정체계를 조선화하였으며, 부국강병을 위해 노력했다. 걸림돌이 될 만한 신하들을 모두 자신의 손으로 처리했다. 그 안에는 혁명 동지들도 있었으며, 거병할 때 앞장섰던 처남들도 있었다.
냉혹한 숙청이 있었다지만, 태종은 아무나 죽이진 않았다. 처남과 혁명 동지들이 죽었던 가장 큰 이유는 권력 앞에서 절제를 몰라서였다. 그들은 무한한 권력 앞에서 조심하지 않았고, 땅콩회항과 같은 갑질로 백성을 괴롭혔다. 태종은 이런 부분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의 정권에서 처음과 끝까지 영화를 누렸던 사람은 하륜이 대표적이다. 하륜도 개인적으로 탐욕을 추구하긴 했지만, 태종이 설정해놓은 선 밖으로는 절대 나가지 않았다. 이렇듯, 자신과 함께한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도 태종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유교 경전 《대학》에는 선비와, 지도자의 모범적인 로드맵이 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태종을 대입해보자면 제가가 걸린다. 아버지, 형제들과 싸우고, 아내의 가문을 박살 냈으며, 큰아들 양녕과도 신경전이 있었다. 그는 성공적인 제가를 했다고 할 순 없는 인물이다. 태종은 유학에 밝았지만 고지식하지 않았다. 유교적 이념에 맹목적으로 충실한 사람은 제가를 이루고 치국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태종은 제가가 치국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무너진 제가에 집중하기보다, 치국평천하에 힘썼다. 어쨌든 최종 목표는 평천하니까, 어떻게든 평천하로 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왕위에 오르면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개인적인 고통은 모두 겪은 태종이었다. 가족과 척을 지고, 함께했던 동지들을 떠나보냈다. 부강한 조선의 아침이라는 신념이 없었다면, 보통 인간으로는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이런 신념을 견지했다. 강력한 그의 신념 덕분에 시대는 난세에서 치세로 흘러가기 시작했고, 태종이 흘렸던 피와 눈물 덕분에 조선의 아침은 밝아지기 시작했다.
저자는 태종의 가장 큰 공적을 종부법에 두고 있다. 사실 태종의 업적을 이야기할 때 종부법은 흔히 거론되지 않았다. 종부법은 자식이 아버지의 신분을 이어받는 제도다. 종전까지는 종모법이 일반적이었고, 그랬기에 사대부는 본처 외에도 다른 여자와 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으며, 집 밖에서 자식이 태어나도 책임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태종의 종부법은 첩이나 기생의 몸에서 난 자식이더라도 아버지가 양반이면 아비의 신분을 따르도록 하였다. 태종은 이 제도를 통해 양인을 늘리려고 노력했으며, 양반 계층을 견제했다. 아쉬운 점은 이런 좋은 제도를 아들인 세종이 종모법으로 복원시켰다는 점이다. 종부법 외에도 명과의 외교활동을 통해 북쪽 영토를 넓혔다는 부분도 눈길을 끌었다.
책에서 아쉬운 점은 태종의 행적을 정치적인 부분에만 집중해서 고찰한 점이다. 재미있게도 태종 시기에 뛰어난 건축물이 많이 들어서는데 대표적인 예로 경회루를 꼽을 수 있겠다. 경회루 외에도 종묘의 월랑을 추가한 부분, 그리고 청계천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물을 공급한 점 등, 태종 시기에 건립된 건축물은 실용성과 심미성을 모두 만족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런 부분에서 태종은 건축에 대한 안목과 문화적 식견 역시도 뛰어난 군주였던 것 같다. 지금 유네스코에 지정된 조선왕조 건축물은 종묘와 창덕궁인데, 재미있게도 둘 다 태종과 관련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저자는 태종을 권력 앞에서 구도자와 같은 길을 걸었던 제왕, 그래서 한국사에서 보기 드문 지도자라고 칭송한다. 일리가 있다. 다만 태종이 권력 앞에서 구도자와 같은 마음을 가지진 않았을 것이다. 실록 중간중간에는 그가 권력에 심취하거나, 탐욕을 부렸던 대목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다만 다른 전제군주들과 비교해볼 때 태종은 권력 앞에서의 절제가 비교적 뛰어난 편이었다. 전근대 왕조국가의 강력한 왕이라는 점을 고려해볼 때, 권력에 대한 자제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특별함을 가진다. 만약 그가 사욕에 심취하여 권력을 휘둘렀다면, 후대의 백성들이 그를 폭군으로만 여겼을 것이다. 태종이 죽은 뒤, 태종의 기일이 다가오면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백성들은 이 비를 태종우라고 말하고 칭송했다. 신라의 문무왕은 죽어서라도 왜구를 막는 수호신이 되겠다며 바다에 묻혔다. 마찬가지로 태종은 죽으면서도 백성들을 향한 애민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기에 후세의 백성들은 그런 태종의 애민정신을 잊지 않았다. 피로 시작하여 권력을 쟁취하였고 왕이 됐지만 끝내 역사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태종. 외로운 권력의 길을 홀로 걸어갔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성군,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태종에게 백성들의 태종우 설화는 커다란 위안이었을 것이다.
다음 권은 태종이 그토록 걷고자 했던 성군의 길을 걸어간 세종이 나온다. 조선의 주인공이자 우리나라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세종. 그런 세종과 문종, 단종으로 이어지는 시대를 다룬다고 한다. 학계, 그리고 일반인들에게 세종은 결점이 없는 완벽한 지도자로 통한다. 과연 저자가 완벽하다는 세종을 어떤 시각으로 비판할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