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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백제 - 백제의 옛 절터에서 잃어버린 고대 왕국의 숨결을 느끼다
이병호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11월
평점 :
1. 전라도와 경상도, 백제와 신라
내가 백제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진 계기는 20대 중반, 전라도를 여행하면서 택시기사가 잠깐 언급한 말 때문이었다. 택시기사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고질적 대립관계는 삼국시대 전쟁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경상도는 신라, 전라도는 백제의 권역으로 오늘날의 동서 갈등의 뿌리는 이 시대의 두 나라의 전쟁으로부터 비롯한다고 하였다.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역사적 지식을 구수하게 담아내는 택시기사의 언변에 나는 아무런 대답을 못 했고, '백제에 대해 알아보겠다.'라는 짧은 대답으로 민감한 주제를 피할 수 있었다.
여행을 마친 뒤, 나는 백제에 관한 자료를 찾았고, 백제를 다룬 책을 읽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소략했고, 확실하게 연구된 부분도 드물었다. 파면 팔 수록 백제라는 나라는 신비한 나라였다. 근초고왕 이래로 한반도 남부의 패권을 장악했고 주도적으로 움직였던 나라, 일본의 고대, 아스카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는 나라, 해양 진출 활동이 매우 적극적이었던 나라, 그리고 문화적으로도 매우 융성했던 나라... 등등 백제는 매력적인 요소가 다분했다. 그러나 이런 백제는 일반인들에게 신라나 고구려에 비해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신라는 어쨌든 삼국을 통일했다는 점을 내세우며 주목을 받고 있었고, 고구려는 북방 대륙을 경영했던 맹주였기에 한반도의 자존을 상징했다. 이 둘에 비해서 백제는 크게 내세울 것이 없어 보인다. 전해지는 유물도 파편적이며, 삼국 중 가장 먼저 몰락한 왕국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사람들은 백제를 고구려나 신라만큼 크게 인식하지 않는다.
그런 백제가 유독 나의 관심을 끈 부분은 뛰어난 문화를 가졌다는 것이다. 백제의 유물은 파편적으로 전해지지만 그 파편 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부분을 짐작할 수 있다. 파편만으로 전해지는 백제의 유물들은 대체로 뛰어나고 정교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매력이 있기에, 특히 문화를 사랑하는 지식인들은 백제를 매우 애정 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뛰어난 문화적 식견을 가지지도 않았고, 나 스스로가 지식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해오는 백제의 수준 높은 잔상은 무지한 나에게조차 깊은 영감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2. 백제에 대한 첫인상
오늘날 백제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 백제의 역사를 읽는 것, 두 번째 백제의 유물을 탐구하는 것, 세 번째 융성했던 백제의 터에서 백제의 숨결을 느끼는 것. 이 중 가장 편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첫 번째다. 나는 시중에서 백제를 다룬 역사서 두 권을 통해 백제를 배웠는데 《살아있는 백제사 - 이도학》와 《백제왕조실록 - 박영규》다. 《살아있는 백제사》는 백제 연구를 전문적으로 했던 사학자의 역작인데, 백제의 전반적인 모습을 배울 수 있었다. 다만 논란이 많은 고대사이다 보니 저자의 주관적인 견해에 대해 부분적으로 이견이 있지만 그런 아쉬운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한 권으로 백제의 역사를 정리하기에는 가장 좋은 책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백제왕조실록》은 스테디셀러 작가가 정리한 백제 역사인데, 앞의 책보다 대중성은 뛰어나지만, 책의 내용이 국수주의적인 관점으로 너무 쏠려있기에 《살아있는 백제사》보다 좋은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두 책을 통해 백제의 역사를 살펴봤으며, 백제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는 '공주'와 '부여'를 찾아가 보기도 했다.
법정 스님의 대표 저작인 《무소유》에서 스님은 경주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어디나 옛 도읍지에 가면 느끼게 되듯이 경주도 어딘지 텅 빈 것 같은, 뭔가 덜 채워져 아쉬운, 그래서 배 떠난 나루와 같은 그런 분위기가 마음을 끈다.'
나도 그랬다. 경주의 모습은 으리으리한 왕궁이 살아있는 한양 서울과 비교했을 때 더욱 적막한 느낌이었다. 그런 나에게 공주와 부여, 오늘날 전해오는 백제의 민낯은 그야말로 처참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경주는 그나마 양반이었다. 경주가 적막했다면, 부여와 공주는 황량했다. 적막이라는 단어는 운치 있는 서정감을 더할 수 있는 나름의 여지가 있다면, 황량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느낌이 지배적이다. 마찬가지로 공주와 부여에 위치한 국립박물관과 경주의 국립박물관의 인상도 달랐다. 경주 박물관은 그나마 화려한 인상이라면, 공주와 부여의 파편들은 어딘가 아쉬움이 가득했다. 백제에 대한 호기심에 사로잡혀 떠났던 나에게 다가왔던 백제의 첫인상은 이렇듯 충격 그 자체였다.
3. 고고학과 역사학의 상관관계
파편만 가득한 백제의 잔상에서 나는 어떻게 백제를 느껴야 하는가. 어떻게 백제의 모습을 복원해야 하는가. 이런 어려움을 해소하는데 도와주는 곳이 바로 박물관이다. 박물관의 도록이나 큐레이터는 백제의 파편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연구한 뒤 일반인에게 축척된 지식을 공유한다. 그러나 둘 다 한계가 있다. 도록은 가격이 굉장히 비싼 편이라 쉽게 구매할 수 없고, 큐레이터의 설명 역시도 관심 있는 여러 사람들을 만족시키기에는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다.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은 여행자 입장에서 하루 종일 박물관에 머물며 여유 있게 유물을 관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러나저러나 유물을 통해 백제를 느끼는 것은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에게는 어려운 방법일 수밖에 없다.
그럼 유물을 통하지 않고 백제를 느끼면 될 것 아니냐고 이야기할 수도 있는데, 그럴 수도 없는 것이, 사료가 적은 고대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고고학과 깊은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전해 내려오는 텍스트가 제한적이기에 우리는 내려오는 파편을 통해 당대의 사회를 재구성하여 이해할 수밖에 없다.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역사학의 발전 역시도 고고학의 발견과 연구의 토대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특히 전해지는 사료가 적은 한국 고대사 연구는 고고학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백제 탐구의 근본적인 핵심은 전해오는 유물에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문제는 고고학적 연구 성과나, 고고학의 흐름은 일반 대중에게 흔히 공개되지 않는다. 왜냐면 풀어내 이야기하기엔 너무나도 전문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백제에 대한 고고학적 동향이나 연구 방법 등등은 웬만큼 관심을 가지지 않고서야 알기 어렵다. 백제에 대한 무지, 백제에 대한 무관심 역시 근본적으로 이런 부분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백제에 대한 고고학을 다룬 대중서가 나왔다. 책은 국립박물관 큐레이터가 애정으로 쓴 백제 이야기였으며, 책이 다루는 백제의 모습은 역사적인 관점보다, 고고학적 관점에 더욱 치중하고 있다. 나와 같이 백제에 대한 애정이 가득하고, 백제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고고학적 지식을 갈구하는 일반인에게 적합한 교양 인문서였다.
4. 백제 덕후의 애정 어린 백제 이야기
저자는 독특한 이력을 가졌다. 평범한 관점으로 보자면 박물관 큐레이터라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조금 더 들어가보면 그의 관심은 오로지 백제만을 향하고 있기에 굉장히 독특하다. 오늘날의 용어로 저자를 표현하자면, 백제 덕후라고 할 만하다. 저자는 박물관 큐레이터란 직업을 가지면서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백제에 대한 고문학적 연구를 꾸준하게 진행하고 있으며, 백제를 대상으로 한 논문 활동을 꾸준하게 이어가고 있다. 자처해서 시골이라 할 수 있는 부여로 내려갔으며 지금은 익산 미륵사지에 전시관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인생, 그리고 그의 이야기의 중심은 늘 백제였다.
인생에 있어서 몰두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매우 축복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몰두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저자는 평생을 걸쳐 몰두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았으며 거기에 인생을 몰두했다. 그래서 열정 어린 저자의 삶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그런 저자였기에 그의 책을 지배하는 주된 감정은 '열정'이다. 그의 글, 그의 치밀한 연구, 글에서 느껴지는 그의 감정 하나하나에는 백제에 대한 열정이 서려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용을 떠나 책이 참 마음에 들었다. 책을 읽을 때마다 그런 감정이 들었다. 마치 하나의 대상에 몰두하여 빚어낸 장인의 작품을 마주하는 느낌.
책을 통해 전반적인 백제 연구의 동향을 읽을 수 있었으며, 백제에 대한 일본의 움직임도 확인할 수 있었다. 백제 탐구 여행 때 무심코 지나쳤던 장소들의 사연과 연구동향을 읽을 때마다, 부여로 떠나고 싶은 나의 마음을 억누르느라 애를 먹었다. 가장 애정 하는 유물이라 할 수 있는 금동대향로 발굴 에피소드를 읽으며, 박물관에서 느꼈던 향로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2 아스카 나라》를 읽고, 백제와 관련된 아스카 지역을 언젠가 떠나봐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일본과 백제에 관련된 내용을 읽으니 가 본적 없는 아스카 지역에 대한 동경이 더욱 커졌다. 저자의 열정 어린 이야기는 그렇게 내 안에 백제에 대한 애정을 자극했고, 향수를 자극했다. 글의 문장은 평이했지만, 다루고 있는 분야가 워낙 전문적인 영역이다 보니, 평이한 문장이더라도 일반인이 읽기에는 부담으로 느낄 수 있을듯싶다.
책을 꼭 읽었으면 하는 부류는 세 부류다. 첫 번째, 백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 두 번째 박물관이나 고고학에 뜻을 두거나 관심이 많은 사람, 세 번째 백제 문화권으로 여행을 가는 사람. 특히 큐레이터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저자의 열정 어린 태도를 보면서 많은 부분을 배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행의 깊이와 감동은 지식에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똑같은 것을 보더라도 조금 더 알고 보는 것과 그냥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관광 도시는 도시마다 내세우고 있는 테마가 있는데 부여와 공주 일대는 바로 백제 문화가 주요 테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역사도시를 탐방하는데, 배경 지식을 조금이나마 가지고 간다면 여행을 좀 더 풍성하게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백제 문화권 여행을 앞두고, 사전 예비지식을 쌓는 과정에서 이 책은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5. 지식 생산자와 지식 소매상, 그리고 지식 도매상
요즘 독서 시장에 유행하는 인문학 작가들은 지식 소매상들이다. 유시민, 채사장 등등의 지식 소매상은 전문성을 지닌 지식들을 일반인이 먹기 좋게 가공하고 압축하여 선보인다. 이런 지식 소매상들과 비교해서 저자는 전문성이 뚜렷하다. 저자는 대중에게 글을 쓰기보다 전문적인 영역에서 글을 쓴 적이 많다. 그래서 저자는 지식 소매상이 아니라 지식 생산자에 가깝다. 그런 전문가가 자신의 생산물을 가공하여 대중에게 다가왔다. 그래서 저자는 책 말미에 자신을 비롯한 큐레이터들을 이렇게 칭한다. 지식 생산자와 지식 소매상의 성격을 둘 다 가진다고. 다른 큐레이터는 모르겠다만 적어도 저자의 경우는 지식 소매상이 아닌 지식 도매상에 가깝지 않을까. 소매는 2차, 3차적인 유통을 거쳐서 판매하는 것인데, 도매는 유통과정을 최소화하여 판매하는 것이니까, 저자가 쓴 책 내용의 대부분은 저자의 활동에 기인한 것이기에 소매라는 단어를 붙이기보단 도매라는 단어가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이번 책을 계기로 기회가 된다면 백제에 대한 최신 연구 결과나 활동을 정리하여 독자를 다시 찾아오겠다고 기약 없는 약속을 했다. 나는 저자의 기약 없는 약속이 기다려진다. 책을 덮으며 저자의 식지 않는 뜨거운 열정을 다시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저자의 열정 어린 백제 연구를 백제를 사랑하는 한 시민의 입장에서 굉장히 응원하고 싶다.
이런 좋은 양서와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전라도의 이름 모를 택시기사 아저씨 덕분이다. 그 아저씨를 다시 보게 된다면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다. 첫 번째. 오늘날 경상도와 전라도의 동서 갈등은 백제와 신라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현대 정치인들의 편가르기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물론 삼국 시대에 백제와 신라의 갈등이 깊었지만, 그러한 갈등은 통일 이후로 희미해졌고, 고려, 조선시대에 와서는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에서 특별히 감정적인 갈등이 있었다는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오늘날 동서 갈등의 원인은 현대의 정치적 시각차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이를 알기 위해 아저씨가 언급한 백제를 나름 성실하게 공부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두 번째는 감사하다는 인사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백제에 대한 애정은 어찌 되었던 아저씨로부터 비롯한 것이기에, 이런 멋진 신비의 왕국을 소개해 줘서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푹푹 찌는 날씨가 지나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백제의 숨결이 있는, 공주와 부여를 다시 한 번 방문하고 싶다. 아마 첫 방문과는 다르게, 이제는 황량한 느낌을 받지 않을 것만 같다. 파편밖에 안 남은 흔적의 도시지만, 현실의 황량함을 넘어서 온전한 백제의 미소를 마주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이 마구 샘솟는다. 이 근거 없는 믿음이 확실한지 아닌지 확인해보기 위해서라도, 올 가을 즈음에 다시 한 번 백제의 고도를 방문하려고 한다. 아마 그때 나의 한 쪽 손에는 이 책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