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열전 - 담백하고 시원한 한국인의 소울 푸드
백헌석.최혜림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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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울에서 돌아오는 길에, 당신과 함께 강남 중고서점에서 구매했던 냉면 관련 책을 읽었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여정길에, '나를 매료시킨 평양냉면에 대한 썰'을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책은 평양냉면의 역사와 형태, 장르, 그리고 갈래 등등 여러 가지를 심도 있게 논하고 있었는데, 평양냉면의 가장 핵심은 슴슴한 맛입니다. 이것을 빼고는 평양냉면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어떤 재료의 육수, 어떤 스타일의 고명을 올리더라도 평양냉면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그 특유의 슴슴한 맛이 있어야 합니다.

잠시 책을 덮고 슴슴한 맛을 떠올려봤습니다. 진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특유의 육향이 풍미 짙게 드리워진 육수. 그 육수에 혀가 닿으면 육향의 풍미와는 다르게 심심한 맛이 느껴집니다. 그 특유의 심심함을 음미하며, 목구멍에 담백한 육수를 넘기고 나면, 슴슴한 맛의 뒤끝에 있는 특유의 감칠맛이 입안을 간지럽게 자극합니다. 이 맛. 이 느낌. 어디서 많이 느꼈던 것 같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런 슴슴한 매력의 평양냉면은 당신과 무척 닮았습니다.

세상에는 배워야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음식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평양냉면과 홍어가 있지요. 이 둘 모두 초짜 입장에서는 온전한 맛을 느끼기 힘듭니다. 평양냉면은 우리가 지금까지 먹었던 자극적인 음식과는 전혀 다른 맛을 보여줍니다. 몇 번 먹어봐야지, 그 특유의 슴슴한 맛을 느낄 수 있고 음미할 수 있습니다. 평양냉면이 특유의 슴슴한 맛을 내세운다면 홍어는 강렬함의 정점입니다. 삭힌 특유의 향은 초심자 입장에서는 부담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둘 다 조금씩 먹으며 배워야지만 온전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도 만나면 만날수록 당신만의 매력이 드러났으니까요.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 나는 당신의 매력을 온전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만나다 보니, 고요함 속에 숨겨진 당신의 매력을 조금씩 알게 됐습니다. 굳이 구분해보자면 당신은 강렬한 홍어보다 슴슴한 평양냉면과 닮았습니다. 당신의 정적인 고요함은 강렬한 홍어보단 슴슴한 평양냉면과 비슷하니까요. 평양냉면은 무서운 음식입니다. 첫인상은 무심하지만, 중독된 순간 시크하게 사로잡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첫인상은 무심한 듯 조용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내 모든 부분을 압도적으로 점령했습니다.

평양냉면은 다양합니다. 슴슴하다는 공통적인 맛과, 메밀면을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육수의 재료나 고명의 형태, 지역색 때문에 여러 가지 모습으로 식탁에 오릅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요하고 조용하지만, 시기와 때에 따라서 다양한 매력으로 나에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다양한 모습을 가진 평양냉면을 사랑합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다양한 매력이 있는 당신을 애정합니다. 당신과 닮은 평양냉면을, 남은 인생 동안 함께 쭉 먹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지금까지 그래왔듯 평양냉면을 사랑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쭉 당신을 애정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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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연의 : 리더십을 말하다 - 하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국가리더십연구센터 국가리더십연구총서 3
진덕수 지음, 정재훈 외 옮김, 김병섭 편집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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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사회에서 권력자들의 주변 인물이 공적인 권력을 사적으로 남용하는 사례는 흔하게 찾을 수 있다. 권력자의 친인척, 그리고 직계 가족들의 비리로부터 자유로웠던 정부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최순실과 박근혜 대통령의 사례뿐만 아니라, 보수와 진보 어떤 정권에서도 이런 문제는 늘 제기됐었다. 전근대에 비해 권력이 분산된 현대에서도 이렇게 권력의 핵심부는 사적 남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데, 막강한 권력이 집중된 전근대 왕조 국가에서는 권력의 사적 남용이 엄청난 문제로 인식됐을 것이다. 제가의 요체는 이러한 특권 세력의 국정 농단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하고 있다.

제왕에게 있어 가족의 존재는 매우 모순적이다. 전근대에서 왕의 힘은 국가의 공적인 힘과 일치했다. 그러나 이런 제왕도 가족을 이루며 자식을 가지게 되면, 편애하는 마음으로 가족과 자식을 챙길 수밖에 없다. 즉 제왕에게 있어서 가족과 외척은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충돌하는 전쟁터였다. 외척이 쉽게 권세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제왕과 사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이다. 만약 군주가 가족에 대한 애정에 과도하게 도취되어 중심을 못 잡고 인척을 편애한다면, 권력의 축이 외척에게 이전된다. 외척은 이런 총애를 바탕으로 권력의 핵심을 장악하고 파당을 이루며 자신의 가족들을 권력의 핵심에 올린다. 이렇게 세도 가문이 탄생하고, 제왕은 허수아비로 전락한다.

사실 《대학연의》 하권의 내용인 '제가의 요체'는 《대학연의》 중권에 '격물치지의 요체' 챕터 안에 '인재를 분별함'과 거의 흡사하다. 차이점이라면 '제가의 요체'에서 나오는 국정 농단의 주체는 제왕의 가족이나 외척, 환관(內臣) 들인데 반해 '인재를 분별함'에서 나오는 국정 농단의 주체는 일반적인 신하(外臣) 들이다. 책을 읽으며 비슷한 내용을 이렇게 구분하고 굳이 중복해서 서술할 필요가 있었을까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분량 면에서 '제가의 요체'가 '인재를 분별함'보다 훨씬 많고,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당시 빈번하게 이뤄졌던 국정 농단은 외신들보단 내신들과 제왕의 인척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일어났음을 유추할 수 있다. 아마 저자인 진덕수는 권력의 타락은 권력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이뤄진다는 교훈을 강조하기 위해, 국정 농단에 관련한 내용을 앞서 서술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의 요체에서 다시 다루고 있는 것 같다.

영국의 역사철학자 액튼경은 절대권력에 대해 이런 명언을 남겼다. '모든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대학연의》 역시 이러한 관점을 깊이 있게 숙고하고 있고, 이런 막강한 절대권력의 부패를 막기 위하여 지도자의 수신을 그토록 강조하였다.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성공적으로 절대권력을 휘두른 제왕보다, 권력에 굴복하여 타락한 제왕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만큼 힘이 집중된 절대 권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부패의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었다. 이런 권력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은 군주의 가족들과 군주를 최측근에서 모시는 내신들이다. 그들은 유혹적인 권력의 향기에 쉽게 노출됐고, 쉽게 타락했다. 그 결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저자 진덕수는 《대학연의》의 '제가의 요체'에서 제왕의 가족들과 내신들의 단속을 엄격하게 강조했던 것이다.

지도자의 외척이나 인척이 중심이 된 권력의 사유화는 과거에도 우리 시대에도 흔히 목격할 수 있다. 조선 말기에는 외척들이 왕의 권력을 능가하며, 국정을 사유화했으며, 2016년에는 최순실이라는 가정주부가 박근혜 대통령의 묵인 아래 대한민국의 모든 국정을 사유화하여 좌지우지하였다. 물론 이런 비정상적인 경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 개국 초, 태종 이방원은 외척 세력들의 비리를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권력 앞에서 절제하지 못했던 그의 처남들은 태종의 칼날에 모두 숙청됐으며, 외척뿐만이 아니라 미래를 이을 세자를 위협할 수 있는 권신들을 모두 제거했다. 냉혈한이라 불리는 이방원이지만, 왜 인간적인 갈등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공적인 책임과 사적인 감정을 혼동하지 않았다. 힘들게 건국한 신생국 조선의 탄탄한 아침을 위해, 그는 사적인 감정을 억제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후대에 처가를 몰살했다는 잔인하다는 혹평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안정된 왕권과 탄탄한 나라 기반을 세종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대학연의》는 그런 태종의 애독서였다. 태종은 《대학연의》를 논하며 '외척에 대한 역사적인 교훈'을 얻었다고 이야기하는데, 분명 '제가의 요체' 챕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가족이나 친지를 챙기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지만,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들이라면, 그런 사적인 감정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 《대학연의》 하권을 읽으며 우리나라의 지도층도 공사를 구분할 수 있는 태종 이방원과 같은 사람들이 많아지길 희망했다.

 

 

 

- 책을 완독하며

 

《대학연의》를 처음 만난 것은 4년 전 여름이었다. 무척 더웠던 계절, 네가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대학연의》가 번역본이 나왔다며, 가장 친한 형이 선물을 해 줬는데, 그때의 벅찬 기쁨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생하다. 그 시기의 가장 큰 행복은 일과를 마치고 찬물로 샤워를 한 뒤 스탠드에 불을 켜고 《대학연의》를 읽는 순간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정말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책은 쉽게 읽어지지 않았다. 철학과 역사의 만남. 유학의 형이상학적인 이론 철학과, 중국의 시대를 종횡으로 넘나들며 전개하는 역사적 식견은 각각 감당하기에도 벅찬 수준이었는데, 이 둘이 혼합되어서 전개되고 있었기에 손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린아이가 인수분해 문제를 들고 하루 종일 고민하는 마음으로, 한 땀 한 땀 꾸역꾸역 읽어나갔다. 처음 완독했을 때에는 전체적인 윤곽만 파악했고, 세세한 부분까지는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첫 완독 직후에는 스스로 뿌듯한 감정에 흠뻑 도취됐었다.

여러 번의 완독을 거치면서, 텍스트가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이해되지 않던 문장들은 반복을 거듭하자, 조금씩 문이 열리는 듯하였고, 생소하던 역사적 사건들도, 중국사의 흐름을 파악하고 나니, 친숙하게 다가왔었다. 그렇게 책이 익숙하게 읽힐 무렵, 나 스스로가 절제가 되지 않거나, 분노의 감정에 휩싸였을 때에는 습관적으로 《대학연의》의 구절을 찾아서 마음을 다스렸다. 국정이 농단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대학연의》에 일부 권신, 외척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농단하던 사례를 찾아 읽었다. 분명 1000년 전에 쓰인 책인데도 불구하고, 그때의 정치적 모순이나 오늘날 정치적 모순은 일란성 쌍둥이처럼 흡사했다.

그렇게 내 곁에는 항상 《대학연의》가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새로운 《대학연의》 번역본이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서울대학교출판부에서 새롭게 나온 《대학연의》는 기존의 《대학연의》 번역이 가지고 있었던 아쉬운 부분들을 모두 수정하여 나왔다. 명확한 번역, 전문성, 쉽게 읽히는 문장, 꼼꼼한 편집, 주제별로 잘 나눈 분권, 예쁜 표지까지... 확실히 서울대에서 출판한 책이라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흠잡을 곳이 없었다. 물론 지금 이렇게 만족하는 번역본일지라도, 훗날 이보다 더 나은 《대학연의》 번역본을 만나고 싶긴 하다.

두꺼운 책을 끼고 다니며 읽으니 사람들은 말한다. 뭐 하러 그런 고리타분한 책을 그렇게 열심히 읽냐고. 현실에 뒤떨어진 곰팡내 나는 벽돌을 굳이 저렇게 애정 하며 읽을 필요가 있냐고도 하더라. 그런 사람들에게 굳이 내 입장을 번거롭게 말하고 싶진 않았다. 그냥 좋아서요.라고 일갈하듯 끊어버렸다. 실제로 《대학연의》는 지금 읽어봤을 때 현실감이 떨어지는 내용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대학연의》 뿐만이 아니라 모든 고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결점이다. 고전은 그 시대의 산물이기에, 태어난 시대의 모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대학연의》가 품고 있는 가장 큰 결점은 바로 인간에 대한 시각이다. 《대학연의》는 주장한다. 인간은 선하고, 그렇기에 그런 선한 마음을 바탕으로 인의의 정치를 해야 한다고, 선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반성을 끝없이 해야 하며, 지도자는 이에 더욱 앞장서야 한다고. 여기서 가장 핵심은 인간이 선하다는 것에서 논지가 시작한다는 것이다. 과연 인간은 선한 것일까? 만약 선하지 않다면, 《대학연의》가 주장하는 정치와 치국론은 근본적으로 성립될 수가 없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우리는 인간의 마음을 좀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게 됐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인류가 선하고 착하다면, 종족의 번식을 위해 생태계를 파괴하는 행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인간은 자신의 생존, 그리고 자신의 집단의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생태계뿐만이 아니라 동족인 같은 인간도 죽였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에 무한 경쟁 사회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과연 성선설로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인 생각이다. 그럼 인간은 법가가 주장하듯, 악하고 이기적이며 욕망으로만 가득 차기에 힘으로 굴복시켜야만 하는 존재인가. 그렇지도 않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공감력에 있다. 인간은 유대감과 공감력이 매우 뛰어난 편인데, 이런 유대감과 공감력의 배경에는 선한 마음이 있다.

생물학적 이기와 인간만의 이타가 공존하는 것. 이것이 바로 현대 과학이 밝힌 인간의 본성이다. 오늘날 사회는 겉으로는 이타를 권장하지만, 속으로는 이기를 추구한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연일 뉴스에서는 인간의  뒤틀린 이기가 극도로 발현된 사건들을 흔하게 접할 수 있다. 정치에도 사회에서도 이타적인 모습보다는 이기적인 모습이 주로 보인다. 인간적인 휴머니즘을 갈구할 때 나는 습관적으로 《대학연의》를 읽었다. 책을 읽으며 무한 이기주의에 익숙한 우리가 잊어버렸던 이타의 가치는 무엇인지 되돌아보려고 노력했다. 《대학연의》의 성선설이 시대적인 오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더라도, 철학적으로 고찰한 인간의 이타주의는 오늘날 사회를 돌아보기에 충분한 거울이라고 생각한다. 

임어당이 극찬한 수필집인 《유몽영》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경서(철학서)를 읽기에는 겨울이 좋다. 정신을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서(역사서)를 읽기에는 여름이 좋다. 날이 길기 때문이다.'  《대학연의》는 철학과 역사가 고루 섞인 책이고, 분량도 많은 편이기에 날이 긴 여름에 읽기에 적합한 도서라고 생각한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무척 더웠지만, 그래도 완성도가 높은 《대학연의》 번역본을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렇게 유난히 더운 2018년 여름에 나는 행복을 부르짖으며 《대학연의》를 다시 완독했다. 완독을 하는 동안, 지독히도 추웠던 2016년의 겨울의 순간이 자꾸 떠올렸다. 육체는 푹푹 찌는 여름에 있었지만, 의식은 싸늘하게 추웠던 과거에 머물러 있었던 셈이다.

'지금 우리가 이룩한 국가는 어떤 국가인지', 책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 우리의 지도층은 어떤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지', 책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의 마음은 세속의 타락과 유혹으로부터 굳건하게 저항할 수 있는지', 책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느 것 하나 확실하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치유해야 할 모순이 많고, 지도층의 리더십도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나 스스로도 자기 수양에 있어 부끄러운 부분이 많았다. 그렇기에 다음 《대학연의》를 읽을 때에는 책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했던 물음들에 확실하게 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하더라도, 지금보다는 좀 더 나아졌기를 희망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그저 바라고 소망하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성취로 이뤄진다. 그래서 나는 다음에 《대학연의》를 다시 마주할 때까지, 내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스스로의 내면 수양을 꾸준하게 이어갈 것을 다짐했다. 더 나은 사회, 그리고 더 나은 자신을 스스로에게 약속하며 두툼한 양장본을 서재에 꽂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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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연의 : 리더십을 말하다 - 중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국가리더십연구센터 국가리더십연구총서 3
진덕수 지음, 정재훈 외 옮김, 김병섭 편집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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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연의》 중권은 우리 실생활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내용들로 구성됐다. 중권의 핵심은 바로 리더십인데, 리더십의 핵심은 두 가지로 첫 번째는 지도자의 치인이고, 두 번째는 지도자의 수양이다. 《대학연의》는 이상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가장 노력해야 할 사람이 바로 지도자라고 강조한다. 사실 나는 국가 운영을 한 사람의 책임으로 규정하는 전통적인 시각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왜냐면 오늘날 민주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국정 운영을 독점하는 모습보다, 분산된 권력의 모습이 더 친숙하고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근대 왕조 국가에서 나온 숱한 제왕학 책을 읽을 때마다 국가경영에 있어 한 개인의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 《대학연의》 독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현대인이 전근대 왕조국가의 시대적인 사회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비롯한 것이다. 책이 나온 시기, 그리고 책이 다루고 있는 배경은 한 명의 절대권력자가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 보편적인 모습이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이런 불편한 마음과는 다르게, 《대학연의》에서 고찰하고 있는 인간 중심의 리더십은 오늘날 현대에서도 매우 유용한 덕목들이다.

  현대 사회에서 사회생활이나 학교생활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뤄지는 활동이다. 그러므로 학교나 직장 생활에 있어 교우관계, 인간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사회에서 개인이 겪는 문제의 대부분은 인간관계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시대가 바뀌어도 유효하다. 개인의 일상생활에서도 인간관계가 중요한 요소로 꼽히는데, 국가의 운영이나 조직의 운영에 있어 인간관계의 중요성은 두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다. 어떤 사람을 임용해야 하고, 어떤 사람을 내쳐야 하며,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일을 맡겨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국가와 조직운영의 전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직과 국가의 경영에 있어 인간관계는 사적인 영역의 인간관계 문제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사적인 영역에서 인간관계가 틀어졌을 시 개인이 피해를 받는 선에서 그치지만, 공적인 영역에서의 잘못된 인간관계는 공동체 전체에게 막심한 피해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예나 지금이나 정치의 근본은 인사에 있다고 강조한다. 《대학연의》에서는 좋은 사람을 고찰하는 것 이상으로 악한 간신들을 구별하는 방법에 집중한다. 그들은 지도자에게 달콤하게 접근하며, 지도자의 눈과 귀를 닫아버리고, 권력을 사유화한다. 왕조국가에서 권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사권과 군권을 소리 없이 장악하며, 자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소인배들을 정치판에 끌어들여 당파를 결성한다. 그렇게 권력을 손아귀에 틀어잡은 뒤, 가면을 벗고 가렴주구에 열중하며 허수아비 같은 지도자를 압박하고 겁박한다. 지도자는 권력을 빼앗기고 나서야 간신들의 정체를 깨달으며, 후회한다. 

 우리는 이런 비슷한 사례를 최근 겪었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그리고 문고리 3인방이 그 주인공이다. 《대학연의》에서 고찰한 간신의 유형과 21세기 최순실이 행했던 모습은 토시 하나 바뀌지 않고 똑같이 재현됐다. 다른 점이 있다면, 《대학연의》에 권력을 빼앗긴 군주들은 빼앗긴 권력을 두고 후회하거나 되찾으려는 모습을 보이기라도 했는데, 박근혜 대통령은 아예 그런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또 하나는 전근대에는 권력의 핵심이 군대였지만, 오늘날은 권력이 핵심이 돈으로 대체됐다는 차이. 이 두 가지가 다를 뿐 나머지 국정농단의 흐름은 완전히 똑같았다. 현재는 과거를 그저 재현할 뿐이고, 인류사에 있어 중요한 사건은 늘 반복된다는 문구 역시 이러한 사례를 꼬집은 것이리라. 《대학연의》는 앞선 국정 농단 사례와 같이 인간사에 있어 시대를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반복적으로 일어나던 인간 관계 문제를 심도있게 분석하고 있다. 반복되는 사건과 국정 농단을 세심하게 분석하여 지도자의 통치에 있어 거울로 삼기를 강조하고 있다. 그럼 과연 박근혜 대통령이 간신의 행적을 자세하게 논한 《대학연의》를 읽었다면, 스스로의 모습을 자각할 수 있었을까. 회의적이다. 과거 그녀는 치국의 도를 얻기 위해 《정관정요》를 탐독하고 읽었다는데 고전을 읽고도 실천을 하지 않았으니, 아마 《대학연의》를 읽는다 해도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인사와 더불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지도자의 자기 수양이다. 인간은 완벽한 동물이 아니기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결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인간의 내면적 결점을 깊이 인식한 《대학연의》는 모든 지도자의 리더십은 지도자의 수양으로부터 시작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마음 수양에 매진할 것을 강요하는데, 빈틈없이 부단히 노력하라는 유학의 자기 수양론은 너무 빡빡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처럼, 너무 도덕에 집착하고 도덕을 강조하는 것도 좋게 보이진 않는다. 억지로 강요된 도덕은 결국 타율적 성격을 가지는데, 이런 취지로 퍼진 도덕은 자율성을 내포한 도덕의 본뜻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또한 냉정하게 따져본다면 자기 수양이 일의 성사와 직결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인품이 뛰어난 사람은 전반적으로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 좋은 결과를 맞이할 가능성이 높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오늘날에 커다란 공을 이룬 지도자라도 도덕적, 인성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럼 자기 수양은 리더십과 관계가 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까. 그렇지도 않다. 우리는 우리보다 뛰어난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능력이 바로 도덕성이다. 동서고금, 그리고 시대를 막론하고, 하층민은 상층에 있는 사람에게 도덕적인 모습을 기대했다. 그리고 이런 시각은 특히 예법과 도덕을 강조한 유교적 전통이 있는 지역에서 더욱 강했다. 지도자는 슈퍼맨이 아니다. 그렇기에 현실적이지 않은 도덕성의 잣대를 들고 엄격하게 해부하듯 평가하는 것은 지양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도덕성이 결여된 인간을 정치에 들여서도 안된다. 너무 엄격한 잣대로 도덕을 재단하는 것도 문제지만, 도덕성이 아예 없는, 자기 수양과는 거리가 먼 인간을 중요 요직에 올리는 것도 경계해야만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적어도 자기 스스로를 수양하는 것이라도 열중했다면 이렇게까지 욕을 먹진 않을 것이다. 수양을 통해 마음을 정갈하게 하였다면, 측근을 이용하여 권력을 사유화하려는 유혹을 극복했을 지도 모르고, 최순실의 국정 농단도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남을 지도하는 위치에 서려는 사람들은 적어도 남보다는 더 나은 도덕성을 보여줘야만 한다. 그래야 남들로부터 신망을 잃지 않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 권력에서 나오는 유혹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 수양이 덜 된 지도자는 권력에서 뿜어나는 유혹을 거부하지 못하고 권력의 달콤함에 굴복해 타락하고 만다. 이런 지도자를 우리는 역사에서 흔하게 찾을 수 있으며, 굳이 복잡하게 역사책을 뒤지지 않더라도 오늘날 현실 정치판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결국 지도자가 자기 수양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남에게 도덕적으로 잘 보이기 위해서라는 표면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핵심은 바로 권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렇기에 극단적으로 과도한 자기 수양은 지양해야 하겠지만 권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자기 수양은 오히려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대사회에서 《대학연의》가 추구하는 리더십은 어떤 의의를 가질까? 얼핏 보면 큰 의의가 없어 보이기도 하다. 좋은 내용의 글이고 현실성이 있다지만, 대부분의 일반 시민들은 권력자가 아니고 권력과는 거리가 멀기에, 최고 권력자의 리더십을 논한 《대학연의》는 크게 와닿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과거에는 리더십이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덕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오늘날 현대 시민은 권력과 권한이 과거보다 분배된 사회에서 살고, 민권이 성장한 시대에 살기 때문에, 이런 현대 시민에게 있어 리더십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필수적인 덕목이다. 가정을 이끌어가는 부분에서, 자식을 교육하는 부분에서, 친구들 간의 모임을 주선하는 부분에서, 직장 생활에서 짬밥이 붙어 부하들을 인솔하는 과정에서, 일상 모든 부분에서 리더십은 필요하다. 이런 일상의 리더십이 보편화된 시대에서, 《대학연의》가 추구하는 리더십은 인간의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두고 있기에 교우의 구분, 직장의 관계, 일상의 인간관계에 크게 도움이 된다. 또한 상류층의 도덕적 해이가 일상화된 오늘날 사회에서 지도자의 자기 수양을 강조한 《대학연의》의 리더십은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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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연의 : 리더십을 말하다 - 상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국가리더십연구센터 국가리더십연구총서 3
진덕수 지음, 정재훈 외 옮김, 김병섭 편집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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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연의》와 유교 철학이 꿈꾸고 있는 이상 국가의 중심은 인간이다. 백성 개개인이 행복지수가 높으며, 도덕과 예가 있는 국가. 내적으로 충만한 국가. 이런 이상 국가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대표적으로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해야 하는데, 바로 제도적인 역할과 인간의 역할이다. 유교 철학에서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집중적으로 주목하는 부분은 바로 인간의 역할이다. 한편 《한비자》를 비롯한 법가의 철학도 이상 국가를 꿈꾸고 있는데, 이들이 꿈꾸는 이상 국가의 중심은 바로 부강이다. 힘과 패권이 강력한 나라, 엄격한 법으로 사회를 단속하며, 끝없는 외적 팽창을 추구하는 국가. 이런 이상 국가를 이룩하기 위해 법가의 철학자들은 제도적인 시스템을 주로 강조한다. 법가가 고찰하는 인간의 역할은 인간 중심의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둔 것이 아니라, 통치의 제도적인 시스템을 강력하게 구현하는 군주의 역할에만 한정하고 있다.

양자의 철학은 매우 극단적이며 상이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극단적으로 증오했으며, 이런 시각을 《대학연의》 상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럼 어느 쪽이 추구하는 이상 국가가 더 좋은 국가일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두 사상 모두 한계가 있다. 《대학연의》로 대표되는 유학의 치국은 개개인의 행복과 복지가 보장된다는 장점은 있겠지만, 《한비자》가 추구하는 나라보다 객관적으로 국력이 약할 것이다. 반대로 《한비자》로 대표되는 법가의 치국은 국가의 부강과 외적인 팽창은 유학이 추구하는 나라보다 훨씬 뛰어나겠지만, 백성 개개인의 행복지수는 유학이 추구하는 이상 국가보다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법가가 추구하는 국가는 극단적인 국가주의 법률이 지배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바람직한 국가는 외적인 팽창과 발전도 추구하면서 백성 개개인의 내적인 행복도 추구하는 국가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양자의 국가관은 단독으로 추구하기보다 상호 보완적으로 사용해야지 의미가 있다.

하지만 만약, 나에게 양자의 이상 국가 중에 하나만을 택일하라고 하면, 당연 《대학연의》가 추구하는 이상 국가를 선택할 것이다. 《대학연의》의 이상 국가는 외적인 팽창, 그리고 전쟁을 통한 부강 등등을 권장하지 않기에, 아마 현실에서는 약한 나라일지 몰라도, 인간 중심의 휴머니즘 사회를 추구하기에, 개인의 입장에서 행복을 지향하기에는 법가의 이상 국가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가졌다. 오늘날 냉정하게 바라볼 때, 고루하고 현실에 맞지 않으며 보수적인 냄새를 풍기는 유학이 동아시아 대륙을 전근대까지 지배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이런 따뜻한 휴머니즘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유학과 관련된 책을 읽을 때마다 인간적인 냄새를 물씬 느낀다. 반대로 이런 인간적인 따스함을 법가의 책을 통해서는 느낄 수가 없었다.

흔히 유학을 전해 내려오는 전통적인 사상만을 쫓는 보수주의적 수구주의적 철학으로 간주하며, 법가 철학을 진보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본다. 물론 유학은 대체적으로 보수적인 관점이 주를 이루고 있다. 원래 유학은 과거 까마득한 상고시대의 모범적인 군왕들의 정치와 행적을 본받고자 하는 취지에서 태어난 학문이므로, 근본적으로는 보수주의와 맥을 함께한다. 반면 법가의 철학은 기존에 내려오는 전통보다 오늘날 현실의 시세에 따를 것을 종용하므로, 전통을 이으려는 유가의 기본 입장과 비교해볼 때 진보적인 색깔이 뚜렷하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단편적인 일반론으로 보수와 진보의 개념을 유학과 법가의 철학에 각각 대입 수 있을까. 《대학연의》가 추구하는 이상 국가는 백성 개개인의 복지를 강조하고 있다. 복지를 강조하는 입장은 오늘날 진보를 대변하는 입장이다. 반면 《한비자》가 추구하는 이상 국가는 백성 개개인의 행복이나 복지보다, 국가주의적인 태도를 우선한다. 이렇게 놓고 봤을 때 어느 쪽이 더 진보의 이념과 가까운가? 나는 유학이 추구하는 인간 중심의 철학이 국가주의를 추구하는 법가의 시각보다 훨씬 진보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일반적으로 따분하고 지루하게 생각하는 유학의 이면에는 보수적인 성격뿐만이 아니라 진보주의적인 성향도 내재되어 있다.  

일제 강점 이후 우리가 줄곧 추구하던 국가철학은 법가의 철학과 닮았다. 외적인 성장을 국가의 목표로 하였고, 그러한 국가주의적 목표 아래 개인의 인권은 처참하게 무시당하는 목적전치현상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바탕으로, 국제 사회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받는 국가가 됐지만, 화려한 겉과는 다르게 속은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국민의 행복지수는 시간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으며, 자살률, 도덕적 해이, 갑질 논란, 빈익빈 부익부 등등 내부 문제점이 더욱 커지고 있었다. 우리가 이룩한 물질문명의 척도에 비해 정신문화는 엄청 뒤떨어졌다. 이러한 내부적 모순이 정점에 달해 폭발한 사건이 바로,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 농단 사건이었다.

  묻고 싶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 농단의 원인을 국가의 행정이나 제도의 구조적인 측면에서 찾아야 할지, 아니면 박근혜 대통령과 주변의 사람들 개인의 사욕에서 찾아야 할지. 아마 일부 극우주의에 함몰된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상식이 있는 대부분의 국민들은 열이면 열 박근혜 대통령과 그 측근 사람들의 사욕이 근본 이유라고 꼽을 것이다. 왜 이렇게 도덕적으로 하차가 있는 인물이 국가지도자가 된 것일까. 우리는 왜 개인의 사욕을 노골적으로 추구한 지도자를 맞이하게 된 것일까. 《대학연의》를 읽으며 생각해본바, 이러한 지도자의 탄생 배경에는 법가가 추구하던 외적 성장 중심의 철학만을 무비판적으로 고수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법가의 국가관이 나쁜 것은 아니다. 행복한 나라는 자강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며, 어느 정도는 외적인 토대가 구축되어야 국민 개개인이 행복을 추구할 여지가 생긴다. 그러나 법가의 국가관을 무조건적으로, 전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법가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사회의 경직성이다. 법가는 국가를 부강하게 만든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는 발전과 외적인 팽창만을 추구한다. 국가적 목표 앞에서 개인의 행복은 뒷전이다. 이런 극단적인 성장은 단기간에 폭발적인 성과를 보여줄 수 있을진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특유의 경직성 때문에 민심의 지지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사 민심의 이반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팽창만을 위해 간과하며 지나쳤던 내부의 모순들은 언젠가 터지기 마련이다. 법가를 맹목적으로 추종한 진시황의 진나라는 2대를 이어가지 못하고 멸망했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한강의 기적을 시작으로 끝없는 물적 성장만을 추구했던 결과가 바로, 정치의 타락으로 이어졌다.

시민들의 가득한 촛불 아래에서 나는 격노한 시민들의 뜨거운 열망을 읽을 수 있었는데 그 열망은 바로 '인간답게' 살고, '인간다운'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대학연의》 상권에 나오는 인간 중심의 이상 국가 철학을 읽으며, 차가웠던 한겨울에 들어서 더욱 뜨겁게 느껴졌던 촛불의 외침이 떠올랐다. 비정상적인 정부가 사라진 지금,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정부를 얻게 됐는가? 국민의 심판은 그저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는 것인가? 과연 지금의 정부는 '인간 중심'의 가치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정부인가? 아닐 것이다. 아직도 많이 부족할 것이고,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을 것이다. 그렇기에 끝이 아닌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시작의 단초는 앞으로 들어서게 될 우리나라 정부의 방향에 대해 끊임없이 숙고하고 고민하는 것에서 찾아야만 한다. 우리 정치가 성장만 하느라 어떤 가치를 잊어버리고 외면했는지 깊이 있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성숙한 시민들이 많아진다면, 우리를 괴롭혔던 정치적 타락과 부패는 더 이상 우리 정부에 자리 잡지 못할 것이다. 

모든 고전은 시대적 한계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적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값진 교훈을 전해주기에 우리는 그런 책을 고전이라고 부르고 존중했다. 《대학연의》 상권에 나온 유학 철학을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대학연의》는 지금으로부터 약 천년 전에 만들어진 책이라 오늘날 그대로 수용하기란 한계가 있다. 유학과 《대학연의》가 인문학적 뇌피셜로 추측하고(?) 형이상학적으로 정리한 인간의 본성론은 현대 과학이 발전한 오늘날의 기준으로 살펴볼 때 결점과 맹점이 많은게 사실이다. 그러나 《대학연의》가 지향한 '인간 중심의 이상 국가관'은 오늘날 외적인 팽창을 추구했던 우리 사회에, 그리고 작금의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인류의 시간 앞에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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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2 : 정종·태종 - 피와 눈물로 세운 나라의 기틀 조선왕조실록 2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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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종 - 무욕에 충실한 인품 있는 군주

《조선왕조실록 2 정종 태종》편의 주인공은 정종과 태종이다. 사람들은 흔히 정종을 태종이 세웠던 허수아비 호구로 생각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정종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왕좌에 올랐고, 동생 이방원의 눈치로 인해 왕위를 물려줬다. 아버지인 태조가 막내를 세자로 책봉했을 때에도 화는 났지만, 효심이 깊었기에 감히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려고 하진 않았다. 그는 숱한 전장에서 아버지와 함께 생사를 넘나들었다. 그는 순박했고, 우애가 깊었으며 효성이 깊은 지극히 소탈한 인물이었다. 정종은 동생 이방원이 일으킨 쿠데타 덕분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조정의 노른자는 이방원의 심복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랬기에 왕의 권한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정종을 그저 태종의 앵무새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저자는 이런 정종을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정종이 태종의 꼭두각시였던 것은 맞지만, 왕위를 계승했을 때, 정종의 힘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꼬집는다. 권력 다툼에 패배한 태조 이성계는 반정을 주도했던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그렇기에 태조는 착한 아들인 정종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알게 모르게 노력했다. 그뿐 아니라, 측근 대신들 중에서도 이방원과 정종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간을 본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사서에 나온 정종은 격구를 즐기고 정치를 멀리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은 이미지지만, 의외로 민생을 챙기고 좋은 제도를 확립하는 것에는 꽤나 열정적이었다. 정종 시기 확립된 제도 중 가장 손에 꼽을만한 것이 바로 임금의 좌우에 사관을 두는 것을 법제화한 것이다. 게다가 정종은 죽은 명나라의 황제 주원장의 잔혹성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는데, 사대를 주요 외교정책으로 삼은 조선의 국왕 입장에서는 이런 발언은 굉장히 파격적이다. 아무튼 권력욕이 없는 정종이지만 왕좌에 있는 동안은 성실하게 집무에 매진한 것으로 보인다.

이방원은 형인 정종에 의해 세자로 하루빨리 추대되길 원했지만 의외로 정종은 세자 책봉을 서두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묘한 줄다리기는 2차 왕자의 난으로 끝나게 된다. 혁혁한 군공을 세우는 이방원의 칼날에 두려움을 느낀 정종은 2차 왕자의 난이 끝나자마자 이방원을 세자로 임명하고 군권까지 내준다. 즉 자신은 자리에 아무런 미련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방원은 세자가 된 뒤 사병을 혁파하기 시작했는데, 군권을 빼앗는 과정에서 일부 공신들은 정종을 복위시키려는 모종의 밀담을 나누기도 한다. 이렇듯 두 형제는 서로를 배려하였지만 형제의 사이에는 커다란 권력이 있었기에, 권력 때문에 불러오는 오해를 모두 종식시킬 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종은 끝까지 자신을 낮췄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끝까지 형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정종은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어디까지가 자신의 역할인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집권 초기에는 권력의 맛을 느껴서인지 세자 자리를 이방원에게 선뜻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2차 왕자의 난 이후에는 자리에 대한 욕심은 금물이라는 것을 재빨리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정통성이 취약한 태종이 그래도 구색을 갖춰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형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정종이 욕심을 부려서 자리를 지키려고 했다면, 이방원은 다시 칼을 들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스스로에게도 굉장히 부담이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양보를 했던 정종이지만 그의 사후, 그가 받았던 대우는 그의 배려에 비해 너무나도 볼품이 없었다. 그는 후대 왕들에게 그저 태종에 기생한 왕으로 취급당했다. 저자는 세종 이후 벌어진 권력 다툼의 원인은 어쩌면 정종의 무욕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가 아니겠냐고 반문한다. 굉장히 일리가 있는 분석이다. 만약 세종이 정종의 무욕을 깊이 깨닫고 수양에게 무욕의 철학을 가르쳤다면, 계유정난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역사를 통틀어 정종과 같은 임금은 찾아보기 힘들다.


2. 태종 - 피와 눈물로 이룩한 조선의 기틀

사람은 누구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한다. 특히 야심이 강하고 지도력이 있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업적이 길이길이 빛나기를, 그렇게 역사의 주역이 되기를 희망한다. 태종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주역이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왕좌를 차지했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많은 가치를 잃어버렸다. 유교적 가치인, 충과 효를 중시하는 신생국 조선의 이데올로기 앞에 자신의 행위는 변명과 합리화를 하더라도 오점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모범이 되어야 할 군왕이, 모범적이지 않은 길을 걸어왔기에 그는 조선의 문화를 꽃피우는 성군 - 주인공이 될 자격이 없었다.

태종이 상대했던 정적들은 그냥 그런 상대가 아니라 모두 거물급이었다. 정몽주, 정도전, 이방석, 이방간, 그리고 태조 이성계. 하나같이 다들 자신보다 강력했으며, 하나같이 자신과 매우 가까운 인물들이었다. 만약 태종이 왕가와 관련이 없었다면, 이들과 반목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태종은 늘 부르짖었다. '내가 가까웠던 인물들과 척을 진 것은 내 사욕 때문이 아니라 하늘의 뜻, 즉 군왕의 길을 따르기 위해서였다.'라고, 그러나 권력의 속성을 모르는 사람들, 그리고 당하는 입장에서는 궁색한 변명처럼 들렸다. 고대 이래로 군왕의 허무한 하늘 타령은, 역설적으로 하늘 외에는 변명할 거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늘 타령을 하는 태종의 본심은 이럴 것이다. '권력이란 것이 원래 그런 거야. 피도 눈물도 없어. 내가 안 죽였다면 내가 죽임을 당했을 거야. 너희들은 나를 잔혹하다고 탓하지만, 너희들이 내 입장이 되어보라고.'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우여곡절이 많은 태종이었고, 잔인한 모습을 보여줬던 태종이었다. 그래서 의심이 갔다. '저 성질머리 있는 놈이 왕이 되어서 백성들을 더욱 수탈하는데 열을 올리는 것이 아닐까. 준비된 군왕이 맞긴 맞는가?' 놀랍게도 태종은 준비된 군왕이었다. 태종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손에 피를 묻혀서 왕이 됐다는 오명을 씻을 수 없다면, 그런 강한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여, 신생국 조선의 기틀을 잡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가 해야할 일이었다. 그는 신생국 조선에 남은 고려의 행정체계를 조선화하였으며, 부국강병을 위해 노력했다. 걸림돌이 될 만한 신하들을 모두 자신의 손으로 처리했다. 그 안에는 혁명 동지들도 있었으며, 거병할 때 앞장섰던 처남들도 있었다.

  냉혹한 숙청이 있었다지만, 태종은 아무나 죽이진 않았다. 처남과 혁명 동지들이 죽었던 가장 큰 이유는 권력 앞에서 절제를 몰라서였다. 그들은 무한한 권력 앞에서 조심하지 않았고, 땅콩회항과 같은 갑질로 백성을 괴롭혔다. 태종은 이런 부분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의 정권에서 처음과 끝까지 영화를 누렸던 사람은 하륜이 대표적이다. 하륜도 개인적으로 탐욕을 추구하긴 했지만, 태종이 설정해놓은 선 밖으로는 절대 나가지 않았다. 이렇듯, 자신과 함께한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도 태종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유교 경전 《대학》에는 선비와, 지도자의 모범적인 로드맵이 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태종을 대입해보자면 제가가 걸린다. 아버지, 형제들과 싸우고, 아내의 가문을 박살 냈으며, 큰아들 양녕과도 신경전이 있었다. 그는 성공적인 제가를 했다고 할 순 없는 인물이다. 태종은 유학에 밝았지만 고지식하지 않았다. 유교적 이념에 맹목적으로 충실한 사람은 제가를 이루고 치국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태종은 제가가 치국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무너진 제가에 집중하기보다, 치국평천하에 힘썼다. 어쨌든 최종 목표는 평천하니까, 어떻게든 평천하로 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왕위에 오르면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개인적인 고통은 모두 겪은 태종이었다. 가족과 척을 지고, 함께했던 동지들을 떠나보냈다. 부강한 조선의 아침이라는 신념이 없었다면, 보통 인간으로는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이런 신념을 견지했다. 강력한 그의 신념 덕분에 시대는 난세에서 치세로 흘러가기 시작했고, 태종이 흘렸던 피와 눈물 덕분에 조선의 아침은 밝아지기 시작했다.

저자는 태종의 가장 큰 공적을 종부법에 두고 있다. 사실 태종의 업적을 이야기할 때 종부법은 흔히 거론되지 않았다. 종부법은 자식이 아버지의 신분을 이어받는 제도다. 종전까지는 종모법이 일반적이었고, 그랬기에 사대부는 본처 외에도 다른 여자와 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으며,  집 밖에서 자식이 태어나도 책임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태종의 종부법은 첩이나 기생의 몸에서 난 자식이더라도 아버지가 양반이면 아비의 신분을 따르도록 하였다. 태종은 이 제도를 통해 양인을 늘리려고 노력했으며, 양반 계층을 견제했다. 아쉬운 점은 이런 좋은 제도를 아들인 세종이 종모법으로 복원시켰다는 점이다. 종부법 외에도 명과의 외교활동을 통해 북쪽 영토를 넓혔다는 부분도 눈길을 끌었다. 

책에서 아쉬운 점은 태종의 행적을 정치적인 부분에만 집중해서 고찰한 점이다. 재미있게도 태종 시기에 뛰어난 건축물이 많이 들어서는데 대표적인 예로 경회루를 꼽을 수 있겠다. 경회루 외에도 종묘의 월랑을 추가한 부분, 그리고 청계천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물을 공급한 점 등, 태종 시기에 건립된 건축물은 실용성과 심미성을 모두 만족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런 부분에서 태종은 건축에 대한 안목과 문화적 식견 역시도 뛰어난 군주였던 것 같다. 지금 유네스코에 지정된 조선왕조 건축물은 종묘와 창덕궁인데, 재미있게도 둘 다 태종과 관련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저자는 태종을 권력 앞에서 구도자와 같은 길을 걸었던 제왕, 그래서 한국사에서 보기 드문 지도자라고 칭송한다. 일리가 있다. 다만 태종이 권력 앞에서 구도자와 같은 마음을 가지진 않았을 것이다. 실록 중간중간에는 그가 권력에 심취하거나, 탐욕을 부렸던 대목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다만 다른 전제군주들과 비교해볼 때 태종은 권력 앞에서의 절제가 비교적 뛰어난 편이었다. 전근대 왕조국가의 강력한 왕이라는 점을 고려해볼 때, 권력에 대한 자제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특별함을 가진다. 만약 그가 사욕에 심취하여 권력을 휘둘렀다면, 후대의 백성들이 그를 폭군으로만 여겼을 것이다. 태종이 죽은 뒤, 태종의 기일이 다가오면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백성들은 이 비를 태종우라고 말하고 칭송했다. 신라의 문무왕은 죽어서라도 왜구를 막는 수호신이 되겠다며 바다에 묻혔다. 마찬가지로 태종은 죽으면서도 백성들을 향한 애민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기에 후세의 백성들은 그런 태종의 애민정신을 잊지 않았다. 피로 시작하여 권력을 쟁취하였고 왕이 됐지만 끝내 역사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태종. 외로운 권력의 길을 홀로 걸어갔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성군,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태종에게 백성들의 태종우 설화는 커다란 위안이었을 것이다.

다음 권은 태종이 그토록 걷고자 했던 성군의 길을 걸어간 세종이 나온다. 조선의 주인공이자 우리나라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세종. 그런 세종과 문종, 단종으로 이어지는 시대를 다룬다고 한다. 학계, 그리고 일반인들에게 세종은 결점이 없는 완벽한 지도자로 통한다. 과연 저자가 완벽하다는 세종을 어떤 시각으로 비판할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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