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 - 집념과 포용의 정치로 실현한 애민과 훈민, 세종을 찾아서 이한우의 군주열전
이한우 지음 / 해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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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상 가장 모범적인 성군을 꼽으라면 많고 많은 지도자 중 단연 으뜸은 바로 세종이다. 아마 이런 주장에 태클을 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며, 일반적인 여론, 전문가, 학계에서도 세종은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가장 모범적인 지도자로 입을 모은다. 세종의 업적은 굳이 일일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대부분 다 알고 있다. 집현전을 설립하여 문풍을 드높인 점, 훈민정음을 만들어 문자를 통하게 한 점, 《고려사》 정리를 통해 지난 역사를 정리한 점, 법제와 음악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발전을 이룬 점, 실용 과학에 있어서도 두각을 드러낸 점, 문치뿐만이 아니라 국경에 있어서도 4군 6진을 개척하여 지금의 국경선을 확보한 점 등등... 국가의 전반적인 부분에 있어서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줬다. 그래서 우리는 세종을 가장 이상적인 수성형 군주로 꼽으며 치세의 시대에 가장 모범적인 지도자로 꼽았다.

세종의 업적을 살펴보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세종은 일을 추진하기에 앞서 그 일과 관련된 원론적이며, 표준적인 지식을 스스로 최대한 습득하려고 노력한다. 그 뒤 습득한 표준을 바탕으로 목표를 설정한 후 적절한 인사에게 일에 관한 프로젝트를 일임하고 자신은 진행되는 일을 관찰하며 지켜본다. 재미있는 점은 이 시대에 원론적이며 표준적인 지식은 성리학적 사고와 밀접하게 관련됐다. 그렇기에 신하들은 그런 중국중심적 성리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일을 추진하였는데, 세종은 그런 신하들에게 '조선적인' 색깔을 요구했다. 역사에 있어서도, 음악에 있어서도, 법제에 있어서도 그랬으며, 이 책에는 거론되지 않았지만 과학 기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세종은 중국의 표준적인 지식과 기준들을 절대 등외시 하지 않았지만, 중국의 지식과 기준을 참고하여 '조선만의 표준'을 설정하려고 노력했다. 그러한 노력이 정점에 달해 표출된 것이 바로 '훈민정음' 창제였다. 세종의 시기는 이렇듯 정치, 행정적인 부분과 문화적인 부분에서 자주성이 강하게 나타났던 시기다. 또한 세종이 성과를 냈던 업적들은 인내심이 없다면 절대 당대에 꽃을 피울 수 없는 '장기간 프로젝트'가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세종은 특유의 뚝심을 발휘하여, 인내하며 우직하게 황소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며, 나라의 전반에 걸쳐 묵묵하게 발전을 도모했다. 시도만으로도 의미 있는 프로젝트들이 성과 역시 좋으니, 당대의 사람들과 후대의 사람들이 세종을 으뜸으로 꼽은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물론 세종의 업적은 세종 자신의 탁월함에서 기인한 것이겠지만, 이 모든 업적을 그가 혼자서 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지도자가 능력이 탁월하다 하더라도, 지도자 혼자서 조선 전반의 행정을 손수 도맡아 처리할 순 없다. 세종 시대가 빛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세종의 뛰어난 인사 정책 때문이었다. 세종은 자신이 추진하려는 프로젝트의 적임자를 기가 막히게 찾아냈다. 문신이었던 김종서를 6진을 개척하는 무신으로 임명했으며, 음악에 뛰어난 감각을 지닌 박연을 발탁하고, 역시 음감이 뛰어난 맹사성을 기용했다. 전체적인 행정 컨트롤 타워는 황희에게 일임했으며, 깐깐한 보주수의자 허조를 예조에서 활동하게 하였고, 노비 출신인 장영실을 과학 분야에서 활동하게 배려했다. 세종의 인사정책은 태종의 인사정책과 비슷했는데 과가 있더라도 공이 높은 사람이라면 그대로 임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사람들을 부리는 스타일은 태종과는 달랐는데, 태종은 자신의 강력한 왕권을 과시하고, 신하들과의 정쟁을 통하여 왕권을 세웠다면, 세종은 정치 보복이나 정쟁보다는 사람들을 포용하는 리더십을 보여줬다.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며 완벽주의적인 성격으로 일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지도자와, 적재적소에서 최선을 다하는 신료들의 컬래버레이션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가져왔다. 그래서 세종 시대는 대표적인 태평성대의 시기로 인식됐으며, 세종은 조선의 화신으로 추앙받았다.

사람들은 세종 하면 안정적인 기반을 물려받아서 그저 발전만 시킨 지도자라고 생각하는데, 실제 역사는 다르다. 힘의 역학관계가 가장 정점으로 표출되는 정치판에서, 그저 태평하게 권력을 받아 다툼 없이 평화롭게 나라를 발전시켰다는 관념은 동화책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지 현실적으로 들리진 않는다. 세종 역시 자신의 정치권력을 다지기 위해 파워 게임에 몰두한 적도 있었다. 충녕대군 시절에는 일탈하는 세자 양녕을 견제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으며, 이를 통해 아버지 태종과 신료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은연중에 과시하였다. 세자가 되어서도 실권을 잡고 있는 아버지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죽이고 살았으며, 태종 사후에는 강력한 왕권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신하들을 상대로 힘겨운 홀로서기를 해야만 했다. 그래도 세종 시기는 태종 시대와는 다르게 군신 간의 정쟁이 없는 편이었지만, 양녕 대군 문제와 세종의 불교 편애 때문에 격하게 대립하기도 했다. 즉 세종도 태종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파워게임에 신경을 썼던 지도자였다. 만약 세종이 정쟁에 있어 압도할 수 없는 힘을 가졌더라면, 그토록 공력이 들어가는 세종 시대의 굵직한 프로젝트들을 완수할 수 있었을까.

세종이 받았던 태종의 유산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했다. 막강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신권을 제압한 태종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정점의 위치에서 은퇴를 선언한다. 물론 이는 형식상의 은퇴였고, 실상은 정치 경험이 없는 세종을 정치적으로 길들이기 위해서였다. 이런 세종의 국왕 견습생 시절에 태종이 아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세종의 싱크탱크로 불리는 집현전이다. 집현전은 세종 시대를 대표하는 기관이라 세종이 양성한 기관으로 대부분 알고 있는데, 실상은 상왕 태종의 명으로 만들어진 기관이었다. 아마 태종은 왕이지만 정치 견습생에 불과한 세종의 친위세력을 양성하기 위해 집현전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태종은 세종에게 자신의 시대의 인사를 쓰지 말고 새 시대에는 새 인재를 등용하라고 조언하는데, 아마 그런 아들의 시대를 위해 배려한 것이 집현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세종은 태종 사후 태종의 인사들을 최대한 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태종 시대의 중신들의 마음을 얻었다. 그중에는 세종의 장인 심온을 죽이는데 앞장선 유정현과 같은 인물도 있었지만, 세종은 정치보복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화합의 길로 나아갔다. 결과적으로 아버지는 아들을 배려한 것이고, 아들 역시 아버지의 사람들을 품어안으며,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던 셈이다.

성공한 시대로 평가받는 세종의 치세를 보며, 바람직한 지도자의 역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내가 생각했을 때 바람직한 지도자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리더인 자신이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인식해야만 한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에 맞는 인사정책을 단행하여 일을 뚝심있게 진행해야만 한다. 세종은 이에 아주 모범적인 군주다. 세종의 시대에 바람직한 지도자 상은 내치를 정비하고 문물을 발전시키는 지도자였다. 아버지 태종은 세종에게 '모든 악역은 자신이 감당하고 주상은 성군의 길만을 걸으라.'라고 강조했다. 세종은 그런 아버지의 바람, 그리고 시대가 원하는 흐름과 바람을 외면하지 않았다. 시대는 난세에서 치세로 흘러가고 있었고, 그러한 시대에 필요한 지도자는 수성의 리더십이었다. 세종은 이에 충실한 지도자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각각의 프로젝트에 걸맞은 인사를 배치하고 진행한 결과 조선은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사실 세종의 시대는 다른 시대와는 다르게 신료들과의 정쟁이나 파워게임도 드물어서 다른 왕들의 시대보다 밋밋하게 읽혔다. 책의 구성은 서사적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것이 아닌 각각의 업적들이 어떻게 진행됐고 어떻게 결실이 맺었는지 챕터별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그렇기에 책을 보며 일을 최우선적으로 중시하는 신료들의 태도와 완벽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깐깐하게 일을 점검하는 세종의 성격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세종의 시대는 태종의 시대처럼 정치 정쟁 등등이 없어서 표면적으로는 무미건조하게 읽힐 수 있겠지만, 다방면적인 일을 추진하고 열정 있게 이끌어간 세종의 내면은 저자의 말대로 엄청 뜨거웠을 것이다. 자신의 건강마저 챙기지 않고 일에 몰두하는 세종의 집념은 경외 그 자체였다.

그런 세종에게 아쉬운 부분은 역시 말년 후계구도에 대한 처우다. 나는 세종이 왜 세자가 아닌 대군들에게 정치를 맡겼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치세의 시기에 태어난 세종이라서 자식들의 우애를 믿은 것일까. 그런 안일한 생각 때문에 자신이 키웠던 싱크탱크들은 둘로 나눠 서로를 죽였고, 아들들도 옥좌를 두고 싸웠으니.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을 따져본다면 세종의 과오가 가장 크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나에게 세종과 같은 인물이 되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서일까 공교롭게도 책을 통해 바라본 세종에게서 내 성격이 보이기도 했다. 독서를 함에 있어 다독보다는 정독, 한 가지 일을 추진할 때에는 집요하게 집중하는 점, 일을 할 때 근본 원리를 바탕으로 하여 적용하는 정석주의적인 태도, 잡기를 멀리하는 성격, 호학을 선호하지만 학문을 위한 학문보다는 실용에 바탕을 둔 학문을 선호하는 성향, 거기다 고기를 좋아하는 식성까지 등등... 알게 모르게 나에게 스며들었던 성격의 바탕은 세종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책은 전체적으로 세종의 업적을 잘 고찰하고 있다. 그렇기에 한 권으로 충분히 세종이라는 인물과 시대상을 읽어내기에 충분했다.


(참고)

책에 있어서 한 가지를 지적해보자면 454쪽에 나오는 문장이다.

'그(문종)의 효성은 지극했다. 직접 복어를 요리해 병중에 있던 아버지 세종에게 올리는가 하면 후원에 손수 앵두를 심어 세종이 맛볼 수 있도록 하였다.'

저자는 여기서 복어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복어로 쓰고 있는데, 여기서 쓴 복어(鰒魚)는 전복을 의미한다고 한다. 실록에 기록된 복이라는 한자도 전복 복(鰒)을 쓰고 있으며,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복어는 실록에 하돈(河豚)이라고 쓰고 있다. 생각해보면 당시 복어는 쉽게 식용할 수 없는 음식이었다. 세종, 문종 시대보다 훨씬 후대에 저술된 허균의 《도문대작》이라는 음식서에서 '복어는 한강에서 나는 것이 맛이 좋은데 독이 많아서 많이 죽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당시 독을 지닌 복어는 잘 못 조리할 시 목숨에 치명적인 음식이다. 따라서 문종이 위험한 복어를 손수 요리하여 진상했다기보다, 전복을 요리하여 바쳤지 않을까 생각한다.



1. 원전 실록에서 한자를 보고 의문이 생겨 더 찾아본 결과 '《왕의 한의학》 이상곤 - 사이언스 북스'라는 책에서 이에 대한 명쾌한 해설이 나와 있었기에 언급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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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조선의 태평을 누리다 - 성군(聖君), 성종의 리더십에 대한 최초의 재평가 이한우의 군주열전
이한우 지음 / 해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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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교과서에서 역사를 배울 때 성종하면 문물 정비와 《경국대전》을 강조하여 가르친다. 이 시기 조선에는 커다란 우환이 없었고, 그랬기에 성종은 평화 속에서 내치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성종을 생각하면 태평성대가 떠오르고, 세종대왕만큼은 아닐지라도 그에 견줄 수 있는 성군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그의 집권기는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시기지만, 그것은 외부에서 단편적으로 바라본 시각이고, 실제 성종의 집권기는 권력을 둘러싼 훈구와 성종, 그리고 신진세력 사림의 다툼이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봤을 때 성종이 물려받은 정치적 유산은 굉장히 탄탄했다. 태종과 세종이 다져놓은 외적인 국가역량과 기반은 매우 탄탄했지만, 문제는 계유정난 이후, 세조가 강화한 훈구 공신들이다. 그런 훈구 대신들이 택군한 왕이었기에, 성종은 스스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권력의 핵심은 훈구파가 고스란히 쥐고 있었으며,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던 국왕 성종은 그저 대비와 훈구의 눈치를 보며 '국왕 수업'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이런 악순환은 세조의 죽음에서 비롯한 셈인데, 신권을 강력하게 제압한 세조였지만 죽음에 이르러서 공신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원상제 제도'를 도입하여, 세조 이후 후대의 왕인 예종과 성종의 집권기에 커다란 부담을 남겼다.

책을 읽으며 내가 알고 있던 모습과는 다른 성종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종하면 세종대왕과 더불어 조선의 문치를 상징하는 국왕이고, 그렇기에 세종의 마이너 버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제 실록에 기록된 성종의 모습은 세종과 엄청난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마마보이 기질이 다분한 성격, 종친들을 극도로 편애하는 모습, 사치에 물든 모습, 인내심이 뛰어나지만 직설적이고 다혈질에 가까운 성격, 학문을 대하는 태도까지... 세종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새삼 놀라웠다. 물론 성종은 세종을 롤모델로 삼아서 통치를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기록을 통해 비교해보건대, 성종의 업적은 여러모로 다소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그런 성종을 우리는 왜 세종과 견줄 수 있는, 혹은 세종과 버금가는 성군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인식은 훈구에 이어 집권하게 될 사림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물려받은 결과가 아닐까 한다. 성종은 막대한 훈구 대신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 세력을 기용했던 군주다. 사림의 입장에서는 비주류로 있던 자신들을 정치무대에 나올 수 있게 만들어준 성종에 매우 감사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율곡 이이와 같은 현인도 자신의 저서 《동호문답》에서 성종을 세종과 버금가는 인물로 칭송했고, 이런 관념이 알게 모르게 지금까지 내려와서 우리에게 무비판적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실제 사서에 기록된 모습을 두고 냉정하게 평가하면 성종은 세종에 비하면 모자란 부분이 많은 지도자였다.

성종 시대를 읽으며 가장 아쉬운 부분은 바로 '가부장적 제도'의 강화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조선의 가부장적인 모습은 성종 시대에서부터 시작됐다. 여자의 재가를 부정적으로 보는 모습, 재가한 자식은 관직에 임용하지 않는 모습 등등의 법안이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 재미있는 점은 당대의 신하들은 이런 법안을 만들 때 대체로 반대했다는 부분이다. 역사에 어느 정도 상식이 있는 사람들은 고려시대가 조선시대에 비해 훨씬 개방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선 초반만 하더라도 이런 고려의 풍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어서, 여성들의 인권도 조선 중기에 비해 훨씬 자유로웠다. 그러나 성리학적 사고 관념에 함몰된 성종은 교조적이고 배타적인 성리학의 이념을 사회 전반으로 더욱 강하게 강조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조선은 한층 폐쇄적으로 나아갔다. 이렇게 바라보면 숭명주의와 극단적인 명분론을 강조하던 조선 중기의 모습은, 성종 시대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그는 조선을 한층 더 배타적으로 만든 지도자였다.   

사실 성종은 신하들에 의해 택군되었을 때, 거의 백지상태나 다름없었다. 왕위 서열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기에 탄탄한 교육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백지의 10대 소년이 하루아침에 왕이 되어 국왕 교육을 받았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러나 성종은 공부를 싫어하는 체질이 아니라, 종국에 가서는 신하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에 지식을 갖추게 된다. 다만 이렇게 교육받는 과정에서 성리학에 너무 몰두하였고, 그런 성종의 관념은 조선을 한층 폐쇄적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책에서는 지적 욕구가 왕성한 성종이 경연에서 《노자》, 《장자》, 《열자》 등의 도가삼서를 배우고 싶다고 했는데, 성리학에 함몰된 신하들은 이단의 책은 가까이해서는 안된다고 한 칼에 거절한다.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실록》에 의하면 성종은 경연에서 《전국책》과 같은 종횡가 서적을 배우겠다고 하지만, 역시 신하들의 저지로 읽지 못했다. 도가 사상이야 그렇다 쳐도 현실론적인 치국과 밀접하게 관련된 《전국책》과 같은 역사책을 멀리하는 것은 굉장히 지나친 처사다. 세종은 성리학 중심의 유학도 좋아했지만, 불교, 풍수, 지리, 병법, 역사, 과학, 농업 등등의 잡학 지식도 섭렵하려고 노력했다. 게다가 경연에서 세종은 《무원록》이라는 법전(법의학서)을 신료들과 읽었다. 그런 세종 시대와 비교해볼 때 성종시대의 모습은 아쉬운 부분이 많다. 만약 신료들이 융통성을 발휘하여 지적 호기심이 충만한 성종에게 다양한 학문을 권장했더라면, 그토록 폐쇄적인 조선이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비판적인 논조로 써 내려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성종이 무능한 국왕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왕좌에 올랐지만, 힘든 학습 커리큘럼을 모두 소화해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문제였던 거대 훈구 세력에 문제점을 정확히 인식하였고, 그들에 맞서 사림을 이용하여 세력 간의 균형을 도모한 점 등을 살펴볼 때, 정치에 있어서도 감각이 있는 지도자였다. 그렇기에 집권 시절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와 비례하여 성종의 권력은 강화됐고, 그에 반해 훈구 세력에 대한 권력은 점차 시들어졌다. 국가 경영적인 측면에서도 성종은 뛰어나다고 하긴 뭣하지만 그렇다고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좋게 말하자면, 중간 이상인 지도자였고, 나쁘게 말하자면 이도 저도 아닌 지도자였다.

성종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바로 '양면성'이다. 성종은 정말 야누스적인 인물이다. 신료들의 강도 높은 직간을 인내하고 들어주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한편으로는 강압적으로 논쟁을 결말짓고, 일탈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림의 의견대로 성종은 나라의 문풍을 드높이고 성리학을 한층 더 발전시킨 공로가 있지만 밤에는 여색을 가까이하며 술을 좋아하고, 유람을 좋아했다. 내 생각에 성종은 매우 감정적이고 직선적인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런 성종이지만, 정통성 없이 즉위했고 그렇기에 국왕 수업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 본성과는 다른 '국왕으로써의 인격'이 만들어진 것 같다. 그렇기에 그의 집권기를 잘 살펴보면 '인간 성종'과 '국왕 성종'의 충돌이 수시로 나타난다. 아마 왕이 되지 않았다면, 특유의 감성 어린 성격을 바탕으로 장안을 울리는 풍류가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흥미롭게도 이런 성종의 양면성은 아들 중종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맞이인 연산군은 자신의 본성을 억제하지 않고 폭주시킨 결과 몰락했지만, 중종은 그런 형과는 다르게 최대한 인내하는 모습을 집권 내내 보여줬다. 그런 중종도 조광조에 대한 신임을 바탕으로 사림을 밀어줬다가 금방 애정을 거둔 모습도 보여줬으며, 측근 정치를 경계해야 한다고 했지만, 정작 자신은 몇몇 측근에게 의존하여 정치를 행했다. 이런 중종의 양면성은 아버지 성종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닐까 싶다.

책을 통해 성종뿐만이 아니라 성종의 주변 인물에 대해서도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이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정희왕후 윤 씨. 세조의 처이며 손자 성종 집권기에 조선왕조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은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책을 통해 문제점도 발견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들을 꼽아보자면 사치하는 풍습과 더불어 인척 정치다. 정희왕후는 무능력한 사람이라면 정치에 자신의 인척을 쓰지 말 것을 당부하지만 한편으로는 인척이라서 등용에 차별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덧붙였다. 이 말인즉슨, 자신과 관련된 종친이더라도 능력이 된다면 기용하라는 말인데, 그래서 그런지 성종 집권기에 문제를 일으켰던 인사들 중에는 정희왕후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사람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대간들의 탄핵이 있었지만 성종은 문제의 인사를 최대한 감싸주려고 노력했는데, 아마 대비였던 정희왕후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한명회다. 우리는 흔히 한명회를 매우 부정적으로만 인식하고 간신의 표본으로 생각하는데, 물론 《실록》에서도 한명회는 비판적인 논조가 강하지만, 그의 졸기는 생각보다 굉장히 후하게 기록됐다. 한명회는 공과가 분명한 사람인데, 과는 사람들이 대체로 알고 있듯 권세에 심취하여 안하무인한 점을 꼽을 수 있으며, 공으로는 그래도 나라의 안정을 가져왔으며 제도와 법도 정비에 공을 들였다는 부분이다. 실제로 한명회는 성종의 견제를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권세를 누리다가 죽었으니, 처세와 권력 유지에 있어서는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다.

성종을 한 단어로 정리해보자면 '애매모호함'이다. 분명 조선을 위해 노력은 한 것 같은데, 그 노력의 결실은 다소 애매모호하고, 성군을 표방한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주색에 열중했으니 행실 또한 애매모호하다. 그뿐만 아니라 세종과 마찬가지로 내정을 정비했고, 2차례에 걸쳐 북방 군사활동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결과를 놓고 보면 참 애매하다. 신료들과의 관계도 그렇다. 성종은 친정 이후 훈구 세력과 대왕대비로 대표되는 왕실 웃어른들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막상 살펴보면 그러한 권력적 자립을 이뤘다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새로운 인재 양성도 홍문관을 통하여 양성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막상 성종이 고용했던 신진세력 사림들은 중하위 말단직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성종의 집권기는 크게 보자면 세조 정권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는데, 세조의 정권이 창업에 가깝다면 성종의 정권은 수성에 가깝다. 세조 - 성종의 콤비는 냉정하게 비교해서 태종 - 세종의 콤비보다 훨씬 퇴보했다. 세조 역시도 태종의 정치력에 한참 못 미쳤고, 성종 역시 세종과 비교해보면 굉장히 애매한 구석이 많다. 물론 중간 이상만 하더라도 좋은 지도자가 아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성종이 누군가? 세종과 비견되는 인물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세종을 기준으로 판단하다 보니 성종의 애매모호함이 더욱 부각됐을 다름이다. (하긴 세종을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어느 지도자인들 과가 없겠냐만...)

아무튼 그런 애매모호한 야누스적 성군인 성종이 묻힌 곳은 공교롭게도 강남 한복판이다. 과거 나는 아내와 연애시절 선정릉 데이트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선릉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저 무덤의 주인은 조선조 성종이라는 왕인데, 낮에는 공부를 열심히 했고 정사를 돌보는데 노력했지만, 밤에 주색 잡는 일에도 일등을 달렸던 왕이야. 그런 왕이 강남에 묻힌 것은 어쩌면 운명일지도 몰라. 강남이 어떤 곳이니? 낮에는 비즈니스의 노른자이지만, 밤이 되면 환락의 거리로 바뀌잖아. 낮과 밤이 다른 강남에 그런 성종이 묻혔으니 참 재미있는 것 같아.'

책을 덮는 순간에도 그랬고,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도 이 생각은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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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김범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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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시각, 평가로 볼 때 연산군과 광해군은 문제가 있는 지도자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광해군을 재조명한 시각의 대중 역사서라던가, 드라마, 영화 등등이 나왔고 이런 영향으로 인해 대중들에게 있어 광해군은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광해군과는 대조적으로 연산군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적인 시각이 우세하다. 물론 연산군을 새롭게 조명한 책들도 있지만, 두루 읽어본 결과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이 대부분이었다. 이 책은 그런 연산군을 최대한 실증적으로, 객관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은 조선의 문치를 완성함과 동시에, 언관들의 힘을 강화한 지도자였다. 기존의 언론을 담당하던 사간원과 사헌부, 그리고 성종의 친위세력을 담당했던 홍문관도 언관 활동에 깊이 개입하였기에, 이 세 기관을 우리는 삼사라고 일컫는다. 조선 개국 이후 여러 시행착오 끝에 귀결된 통치체제는 국왕과 대신, 그리고 삼사가 균형을 이루는 구조였고, 이를 완수한 인물이 바로 성종이었다. 성종 사후 연산군이 집권할 당시, 삼사는 그 권력이 아주 막강한 상태였다. 연산군은 국왕과 대신 그리고 삼사가 균형을 이루고 운영하는 정치체제를 매우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극단적으로 왕권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집권 초반에는 집정 대신들도 막강한 삼사의 권력을 견제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에 이런 연산군의 의견에 대체적으로 동조했다.

  그런 연산군과 대신들의 협력이 만들어낸 작품이 바로 '무오사화'다. 흔히 무오사화를 언급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훈구와 사림의 구도로 단순 도식화하여 해석한다. 대신들은 훈구, 그리고 삼사 쪽은 사림이라고 판단하여 이야기하는데, 저자는 이런 전통적인 해석에 의문을 제기한다. 저자가 주장한 바로는 이 당시 조선의 행정 중 삼사는 담당 인물들의 성향에 의해 조직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삼사라는 자리가 관원들의 관념을 통제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자기에게 태클을 거는 삼사를 견제할 목적으로 연산의 라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삼사의 수장으로 임명한다고 가장해보자. 이렇게 할 시 삼사가 왕권에 협조적인 움직임을 보일 것이라는 기대감을 연산군은 가질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자신의 라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조차 삼사의 수장이 되면 자신을 비판하고 나섰으니, 연산 입장에서는 삼사라는 기관 자체가 매우 성가시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렇듯 훈구 쪽 인물이더라도 사헌부나 사간원의 수장을 맡게 될 시에는 국왕을 압박하는 입장으로 자연스럽게 바뀌게 된다. 그러니 전통적으로 우리가 알았던 훈구 - 대신, 사림 - 삼사라는 공식은 면밀하게 검토하여서 해석할 필요성이 있는 셈이다.

  물론 무오사화를 통해 김종직을 필두로 한 사림 세력들을 제압한 것은 사실이지만, 김종직 일파의 처결은 명분에 해당되고, 실제 연산군과 대신들이 겨눈 것은 최종적으로 '삼사'였다. 저자는 이런 무오사화를 뒤이어 벌어지게 될 갑자사화와 비교하여 비교적 절제된 처벌이었으며, 이는 연산군이 삼사에게 내리는 경고성 이벤트였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뒤이어 벌어질 갑자사화의 엽기적인 처벌에 비하면 무오사화는 '사화'라는 이름이 붙어있긴 하지만, 연산의 입장과 대신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정치의 균형을 맞추는 정당한 행위라고 볼 수 있었으며, 피해도 생각보다 크진 않았다. 당시 삼사의 권한은 엄청 막강하여서 대신들을 수시로 탄핵하고, 탄핵만을 위한 탄핵을 일삼으며, 권세를 높여가고 있었는데, 연산과 대신 입장에서는 정치의 균형이 깨지는 것으로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연산군은 무오사화를 통하여 삼사를 제압한 뒤, 절대왕권을 위해 한 걸음씩 더 나아간다. 문제는 연산이 꿈꾸던 절대왕권 속에는 치국과 민생에 대한 실체적인 부분이 결여됐다는 점이다. 물론 말로는 민생을 위하는 군주라고는 했지만, 무오사화 이후 연산이 보여줬던 행동은 개인적 일탈의 모습뿐이었다. 견제가 힘든 전제왕권을 필두로 한 일탈은 그 자체만으로 왕조를 위협하는 칼날이었으며, 이런 연산군의 일탈을 묵묵히 지켜보던 대신들은 오히려 삼사와 의견을 함께하여 폭주하는 연산을 말리기 시작한다. 이런 범 신권 연합은 연산군에게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왔고, 이런 신하들의 움직임은 결국 갑자사화를 일으키는 빌미로 작용하게 된다.

  성종의 정치는 대체적으로 평균 이상이었지만, 가장 큰 결점을 이야기하자면 아내였던 윤 씨를 죽인 사건이다. 당시 신료들은 세자(연산군)을 봐서라도 극단적인 처사를 취하할 것을 주장했지만 화난 성종은 결국 윤 씨를 죽여버렸다. 훗날의 폭풍을 우려하는 신하들에게 성종은 굉장히 무책임한 태도로 일갈하는데 '그때 가면 그 상황에 맞게 처신할 것이고 세자가 효자면 내 뜻을 이해할 것이다.'라는 발언으로 신하들을 억누른다. 결국 연산군의 폭주는 따지고 보면 성종의 정치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는데, 첫 번째가 바로 삼사의 강화고, 두 번째가 바로 윤 씨의 사사였다. 섬세한 감정을 가진 연산군은 이 두 가지 사안을 빌미로 하여, 역대 이래로 시도하지 않은 전제적인 왕권 강화에 나섰던 것이다.

무오사화가 경고성 이벤트였다면, 갑자사화는 연산의 폭주를 대표하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신권은 엄청난 탄압을 받았으며,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본 중앙 관료들 역시 굉장히 많았다. 잔인한 피의 숙청을 이룬 뒤, 연산은 위태하게 구축한 절대 왕권을 바탕으로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 자신의 사치하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여주지 않게 하기 위해 담장을 높이고 궁궐 수리를 넓혔으며, 궁 주변의 민가를 헐어버리고 경기 일대의 절반을 사냥터로 만들었다. 국왕을 말릴 수 있는 신하는 조정에 남아있지 않았으며, 민심은 연산군을 떠나고 있었다.

연산군을 변명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연산군일기》는 반정을 이룬 중종 세력이 집필한 것이라서 의도적으로 왜곡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하는데, 저자는 이런 말에 역대 실록의 분량과 《연산군일기》의 분량을 비교하며 큰 차이가 없으므로, 의도적인 왜곡이 없다고 할 순 없겠지만, 없는 사실을 가지고 지은 것은 아니라는 쪽으로 주장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연산군의 입장에서 본다면 무오사화까지는 그래도 포용하고 이해해 줄 수 있는 사건이라고 본다. 연산 집권 당시 삼사의 권력은 굉장히 강했으니까. 다만 문제는 무오사화 이후의 모습이다. 연산군이 만약 민생안정에 뜻이 있고 정치에 뜻이 있다면, 강화한 권력을 바탕으로 정사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다. 그러나 연산은 그렇지 않고 강화한 권력을 보란 듯이 누리는데 사용했다. 그렇게 신료들을 향해 권력을 과시하며 복종만을 요구하는 군주에게 어느 누가 충성을 다하겠는가.  

특히 갑자사화는 전제왕권의 부패가 만든 비극적인 사건이다. 물론 어머니를 향한 복수심에 불타는 연산군에게 동정심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개인적인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신권을 탄압하는데 사용하는 것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지도자의 과오일 뿐이다. 이때 연산이 신권을 탄압한 것은 조선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모습이었다. 왕권 강화에 힘을 들이던 태종과 세조조차도 신권 세력을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탄압하진 않았다. 조선은 애초부터 건국 이념이 군신 공치를 지향하던 나라다. 이런 연산의 극단적인 왕권 강화는 조선의 건국이념을 무시한 것이며, 어떻게 해석해보면 국정운영의 공동 파트너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자》에 이르길 아무리 궁지에 몰린 군대라도 도망칠 곳은 열어주라고 했다. 이런 극단적인 탄압은 결국 신하들의 반발로 이어졌고, 그랬기에 연산군은 폐위될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으며 재미있는 점은, 연산군이 아버지 성종과 기질이 매우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성종 역시 다혈질에 직선적인 성격을 가졌는데, 연산군 역시 마찬가지다. 성종은 시를 좋아하고 그림을 좋아하는 풍류가적 성격을 가졌는데 이는 연산군도 마찬가지다. 또한 사치를 부렸던 점이며, 여자들을 가까이한 점에서도, 성종의 모습이 떠올랐다. 성종 역시 호색했고 술을 좋아했으며, 사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군주였기 때문이다. 다만 연산군과 성종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자제력이다. 성종은 그래도 일탈을 즐기고, 신하들과 싸우다가도, 종국에 가서는 자제력을 발휘하였다면, 연산군에겐 그런 브레이크가 없었다. 
 
  만약 연산군이 무오사화 이후, 삼사와 대신들을 너무 억압하지 않으며, 국정 운영에 최선을 다했다면,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성군이 탄생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무오사화 정도의 사건은 다른 치세에도 비교적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수준의 정치적 사건이니, 이때에 강화한 왕권으로 좀 더 정치에 매진하였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만약 연산군이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삼사와 대신의 손을 잡고 국정을 잘 운영했더라면, 아마 조선의 정치구조는 왕권을 우위로 한 체제로 지속되지 않았을까. 어쨌든 연산군의 극단적인 왕권 강화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로 인해 연산군 이후의 왕들은 강력해질 대로 강력해진 대신과 삼사 때문에 제약적인 왕권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연산군의 극단적인 왕권 강화는 결과적으로 조선의 왕권 약화를 초래하게 된 셈이고, 이런 체제를 후대의 왕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으며 또 눈에 들어온 점은 바로 무리한 공납(특산물 세금)이다. 연산군은 팔도에서 진귀한 특산물을 모으는 데 혈안이 됐던 지도자였다. 이런 요구를 만족하기 위해 각도에서는 공물(특산물)을 마련했는데 이를 위해 백성들의 노고가 엄청났을 것이며, 그렇기에 생겨난 방납의 폐단도 말도 못 했을 것이리라. 이런 방납의 폐단은 조선 중후반기 대동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백성들을 지독하게 괴롭혔다. 물론 방납을 전적으로 연산군의 탓으로 돌릴 순 없겠지만, 연산군의 사치로 인해 공납이 많아졌고, 연산군 이후의 왕들도 연산군이 받았던 양만큼 공물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서 두고두고 백성들을 괴롭혔으니, 방납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따져보자면 연산군의 책임도 없다곤 할 수 없을 것이다. 정리해보자면 연산은 후세에 방납의 빌미를 제공했으며, 더욱 약해진 왕권을 물려준 꼴이 된다. 

우리는 역사를 배울 때 되도록이면 좋은 시대, 좋은 인물만을 보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위인전을 읽히고, 역사 교육에서도 찬란한 시대를 강조하여 가르친다. 그러나 나는 문제가 있고 나쁜 평가를 받는 인물이나 시대도 마찬가지로 조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연산군은 그런 대표적인 케이스다. 그는 권력을 강화해야겠다는 목적이 분명했던 인물이다. 물론 그런 연산군의 생각이 전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강화한 권력을 정치나 경제 민생 개선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신 스스로 향유하려고 했던 것이 문제였다. 사실 이런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도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유형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오늘날 사회에서 세종대왕과 같은 사람보단 연산군과 같이, 권력을 앞세워 자신의 사욕에 충실하려는 인물이 더 많은 게 사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쩌면 세종과 같은 이상적인 인물보다 연산군과 같이 비교적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인물에게서 배울 점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학술적인 책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다. 저자는 사학계에 만연한 훈구, 사림이라는 단순화된 도식 구도를 걷어내고 (우리는 흔히 훈구는 악, 사림은 선이며, 사화를 훈구와 사림의 대립으로만 간단하게 도식화하여 해석하는데, 실제 한 시대의 역사는 이렇게 단순화하여 설명할 순 없다.), 최대한 실증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연산군과 그 시대의 모습을 디테일하게 분석하여 해석하고 있다. 실증적인 데이터, 그리고 명료하게 정리된 필력이 인상적이다. 책의 바탕은 논문이고, 저자 역시 사학 분야에서 정통한 전문가여서 그런지 부분적인 단어 수준은 다소 높은 편이고, 현학적인 문장이 더러 있으며, 글의 성격도 학술적인 느낌이 강하지만, 그렇다고 비전공자가 못 읽을만한 수준은 아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전문성과 대중 역사서의 장점을 두루 갖춘 양서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개인적으로 참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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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스크립티드 부의 추월차선 완결판
엠제이 드마코 지음, 안시열 옮김 / 토트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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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자기개발 서적을 자주 읽는 편이지만 리뷰로 남긴 적은 드물었다. 지금까지 블로그에 주로 남긴 서평들은 대부분 인문학, 철학, 역사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이제 경제와 경영, 그리고 자기개발 서적도 간간이 올릴까 생각한다. 그 첫 타자로 베스트셀러였던 《부의 추월차선》의 후속작인 《부의 추월차선 완결편 언스크립티드》를 리뷰해볼까 한다. 이 책은 전작인 《부의 추월차선》의 확장판이자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작과 이번 작의 관계를 표현해보자면 전작은 부에 대한 커다란 시각을 제공하는데 초점을 뒀다면, 이번 편은 전작의 거시적인 관점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디테일한 부분들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전작은 총론이라고 볼 수 있고, 이번 책은 각론이라고 보면 되겠다.

저자인 엠제이 드마코는 30대에 커다란 부를 성취하고 은퇴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부를 이룬 배경을 전작인 《부의 추월차선》에서 밝혔는데,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회에 만연한 통상적인 관념들을 거부하고, 부자가 될 수 있는 추월차선으로 갈아타라.'라는 것이다. 전작에서 저자는 인생에는 세 가지 길이 있는데 가난을 만드는 인도, 평범한 삶을 만드는 서행차선, 부자를 만드는 추월차선이 있으며,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나이와 상관없이 재빠르게 추월차선으로 갈아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전작의 경우는 저자가 말하는 '부의 추월차선'에 대하여 추상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으로 설명하고 있기에 세부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하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우리의 윗세대 관념으로 생각해보자면, 인생에 있어서 부를 이루는 시기를 보편적으로 (물려받은 부가 없다는 가정 하에) 50 ~ 60세 정도로 꼽는다. 그때가 되면 자식들도 모두 출가했고, 저축을 많이 해둔 결과가 이 시기부터 빛을 발휘하기 때문이니까.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경제구조와 산업구조가 급격하게 변했다. 금리는 낮아지고, 취업은 힘들고, 퇴직 이후에도 새로운 경제활동을 고민해야만 한다. 이런 급변하는 시기에 30대에 부를 재빠르게 축척하고 은퇴한 저자는 오늘날 젊은 사람들에게 있어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으로 꼽힐 수밖에 없다. 노동은 소중하고, 신성한 것이지만 까놓고 말해서 노동보단 놀고먹는 것이 더 즐겁지 않은가. 그러니 이렇게 빨리 은퇴하여 경제적으로 자유를 찾은 저자가 솔직히 부러웠다.  

어찌 보면 우리는 저자의 말대로 오늘을 뼈빠지게 소비한 대가로 안락한 노년을 보장받는 셈이다. 그래서 저자는 《부의 추월차선》에서 '돈이란 느리고 천천히 버는 것이 아니라 빠른 시기에 폭풍처럼 버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저자의 말은 하루하루가 불안한 오늘날에 꿈과 같이 들리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를 실천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속 시원하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저자는 이번 신작인 《부의 추월차선 완결편 언스크립티드》를 통하여 자신의 부의 관념을 더욱더 디테일하게 풀어내어 설명했다. 

이 책에서 핏대 높여 강조하는 것이 바로 '조작된 관념과의 결별'이다. 통상적인 관념, 그리고 통속적인 관념, 사회에 만연한 노동에 대한 통설과 보편성 등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어야만 역설적으로 경제적인 자유를 이룩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고 한다. 언스크립티드(Unscripted)라는 형용사는 '각본에 따르지 않는'이라는 뜻이다.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저자가 지목하는 각본이란 우리 사회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관념들이다. 정해진 규율과 각본과의 결별을 강조한 저자는, 그런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며 예시로 자신의 관념과 사업 경험 등등을 풍부하게 들려준다. 이런 사례들은 전작인 《부의 추월차선》보다 더욱 풍성했으며, 더욱 디테일했다.

결국 저자는 두 권의 책으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우리에게 남겼다. 《부의 추월차선》을 통하여, 추월차선으로 갈아타서 경제적 부를 이룩하라는 메시지. 《부의 추월차선 완결편 언스크립티드》를 통하여, 그런 부의 추월차선으로 갈아타는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조작된 각본이니, 익숙한 각본과의 결별을 과감히 시도하라는 메시지. 두 메시지는 이렇듯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책을 읽으며 느꼈던 것은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피나는 저자의 노력이다. 이 시리즈를 읽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책을 보고 그저 그런 인물이 얄팍하게 쓴 책이겠거니 했었는데, 실제로 책을 읽어본 결과 저자는 부를 이루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었다. 많고 많은 저자의 노력 중 가장 눈에 들어온 점은 바로 독서였다. 저자는 경제적 부를 이루기 위해 수많은 책을 읽었으며, 나태해지려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노력했다. 두 번째는 바로 자신만의 철학이 뚜렷하다는 부분이다. 운 좋게 떼돈을 벌어서 자신을 과시하려고 쓴 책들과는 다르게, 이 책은 저자가 시행착오를 겪으며, 생각했던 자신의 주관적인 철학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자기만의 색깔이 너무 뚜렷하기에,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는 거부감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자기만의 색깔이 뚜렷한 저자의 철학을 읽으며 많은 부분을 배웠던 것 같다.

끝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자서전을 읽을 때에는 책의 내용을 모두 믿기보다 의심하며 읽어나가야 한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행적을 남길 때, 자신의 행위를 은연중에 미화하거나 과장하여 부풀리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 책 역시 그런 부분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고질적인 단점이 있지만, 읽어본 바로 다른 부자들의 책보다는 자화자찬이 비교적 덜한 것 같았다. 모쪼록 부에 대한 마인드 정립, 그리고 돈벌이에 대한 관념을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싶다면 일독을 권하고 싶다. 전작인 《부의 추월차선》을 읽지 않더라도 《부의 추월차선 완결편 언스크립티드》를 읽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기에, 굳이 한 권만 본다면 《부의 추월차선 완결편 언스크립티드》를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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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본능 - 슈퍼리치가 되는 9가지 방법
브라운스톤 지음 / 토트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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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테크나 투자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마인드다. 이쪽 분야에 익숙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어설픈 의욕을 앞세워서, 무리하게 실전 투자를 고집한다면 그것은 투자와 재테크가 아닌 투기이자 도박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듯, 당장 돈이 필요하고 돈으로부터 자유를 원한다면 성급하게 투자하거나, 기교적인 부분을 배우기보단, 투자 마인드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읽는 것이 좋다고 고수들은 말한다. 그러나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초를 지루하게 생각하듯, 투자에 있어서도 투자 마인드를 다룬 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투자 마인드가 잡히지 않는다면, 운이 좋게 벌어들인 돈을 유지하기도 어렵다. 그렇기에 투자의 처음이자 마지막은 자신만의 투자 철학을 세우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중에는 투자 마인드, 투자에 관한 시각을 다룬 책이 숱하게 나와있다. 과거에는 투자에 대한 지식이 공유되지 않던 금단의 지식으로 치부되어서, 이쪽 분야의 양서를 구하기가 힘들었다면, 요즘은 너도 나도 전문가라고 말하며, 투자에 대한 책을 쏟아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지식의 홍수 속에서 폭탄을 피하는 방법은 과거로부터 인정을 받아왔던 양서를 선택하는 편이 그나마 리스크를 피할 수 있는 셈인데, 그런 면에서 보자면 지금 리뷰하려는 《부의 본능》은 가장 안성맞춤의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브라운스톤이라는 익명을 쓰고 있는데 한때 개미들을 위한 투자 카페를 운영했었고, 자신 스스로도 파산과 부의 축적을 번갈아 경험한 결과, 최종적으로는 돈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어 40대 초반에 직업으로부터 은퇴했다. 책에서 저자는 자신이 고찰한 투자에 대한 마인드를 역설하고 있었다.

책에서는 주장한다. 부의 핵심은 바로 9가지의 생물학적 본능을 극복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그 9가지 핵심은 다음과 같다. 무리 짓는 본능, 영토 본능, 쾌락 본능, 근시안적 본능, 손실 공포 본능, 과시 본능, 도사 환상, 마녀 환상, 불완전한 인식 체계. 열거한 아홉 가지 오류는 태초의 인간이 사회적 동물로 성장하면서 가지게 된 자연스러운 본능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몇몇의 사례는 비약적인 해석이 있는 점도 있었지만, 타당한 부분도 많았다. 저자의 요점은 아홉 가지 오류가 생기게 된 원인은 바로 '수렵시대와 농경시대'에 적응한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집단적, 농경사회적, 원시 협동적인 마인드는 오늘날 개인이 강조되는 투자 체제에서 커다란 문제로 작용하고 있다. 그렇기에 부를 축척하기 위해서는 원시 시대 이래로 습득해왔던 생물학적 본능을 극복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투자서에서 누차 이야기하듯, 투자를 잘 하기 위해서는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군중심리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머리로는 모두 알고 있지만, 막상 행동해야 할 때가 오면 군중의 눈치를 보거나 군중의 행동을 보고 자신의 거취를 결정하기에 돈을 벌 수 있는 타이밍을 놓치게 된다. 마찬가지로 경제적인 자유를 쟁취하기 위하여 투자를 한다면, 우물쭈물 타인이나 환경에 의지하기보단, 확고한 자신만의 투자 철학이 있어야 한다. 저자가 말하는 아홉 가지 오류는 사실 투자 분야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음미해볼 가치가 있는 덕목들이다.

책은 투자 마인드를 다루는 저서답게 평이하게 잘 쓰였다. 이쪽 분야에 대해서 초짜거나, 아는 바가 없더라도 무난하게 읽을 수 있으며, 투자를 함에 있어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저자의 아홉 가지 오류를 경청하며 자신 속에 어떤 오류가 있는지 거울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흔히 투자에 관련된 책은 유통기한이 짧은 것이 특징이라고들 하는데, 이 책은 투자 마인드를 잡아주는 기본서와 같은 책이기에, 10년 20년이 가도 내용은 유효할 것 같다. 실질적인 테크닉과 기술, 그리고 투자에 대한 전문적인 기교를 원하는 사람들이 봤을 때에는 추상적이고 뜬구름 잡는 소리가 많다고 할 법 하겠지만, 투자에 대해서 제대로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 혹은 자신의 투자를 돌아보려는 중수에게는 유용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책을 완독하며, 나 역시도 생물학적 본능을 최대한 통제하며, 내 안에 숨겨진 부의 본능을 일깨우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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