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은 것 같기도 하지만 생소한 이름이다. 학창 시절에 조선사를 공부할 때에도
언급된 적이 없었다. 조선의 두 전란과 깊은 관계가 있고, 무너진 조선을 세우려고 하는데 최선을 다한 인물이란다. 광해군의 실리적인 외교 정책도
그의 영향이었다고 하며, 인조반정 이후 이괄의 난도 그가 주축이 되어 제압했다고 한다. 공로만 봐서는 굉장히 뛰어나고 중요한 인물인 것 같은데
정작 한국사에서 그의 존재는 개미만큼 미약하다. 그의 이름은 '장만'이라고 한다.
장만은 조선 중기, 선조, 광해군, 인조 대에 활약한 재상이며 장군이다. 이
시기는 일본과의 전쟁, 그리고 여진과의 전쟁이 있었으며, 내부적으로도 쿠데타에 의한 정권 교체가 있던 혼란한 시기였다. 나는 일 년에 한 번씩
남한산성에 가서 성곽을 종주하는 습관이 있는데, 성곽을 돌 때마다 명분론에 젖었던 조선 중기 후기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남한산성은
명분에 휩쌓인 조선에게 국제적으로 치욕을 안겨준 상징적인 장소였다. 조선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사대부들의 나라, 선비의 나라, 문치가
중심이 된 나라 등등이 일반적으로 떠오른다. 옆에 나라인 일본은 칼의 나라라면 조선은 붓의 나라였다. 그러나 본디 국가는 문무 어느 한쪽에
치우칠 경우 폐단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일본의 막부정권은 극도로 무를 숭상한 결과 무모한 침략전쟁을 일으켜, 자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전체에 막심한 피해를 가져왔다. 조선의 경우 문치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태평성대에 젖어 국방을 소홀히 하고, 명분에 휩쌓인
성리학적 관념만을 종교적으로 추종하는 사태에 이르러, 화를 자초했다. 일본과 7년 동안 싸운 전쟁, 그리고 정묘년과 병자년에 청나라와 싸운
전쟁은 이웃 나라의 야욕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자국 안보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조선에게서 일차적으로 원인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더 큰 문제는 두 번의 전란을 거치면서도 조선 지식인층의 인식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조 정권 이후 송시열을 비롯한 조선의 지식인들은 성리학적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하며, 명분에 젖은 성리학을 파고드는데 더욱
열중한다. 이런 답답한 흐름을 바라보며, 과연 조선에는 현실을 기반으로 한 철학자들이 없는 것일까, 조선의 실리주의자는 없었던 것일까. 붓으로
필화를 자랑하는 선비들이 아닌, 현실에 문제점을 적극 개선하고자 노력한 실천 중심의 인물은 없었던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조선의 현실주의자를
찾는 과정에서 나는 청나라와의 전쟁을 굴욕적인 화평으로 해결하고자 주장했던 주화파의 우두머리이자 현실주의자인 최명길에 주목했다. 그리고 최명길을
파면서 만나게 된 인물이 바로 최명길의 장인인 '장만'이었다.
체 게바라는 이런 명언을 남겼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마음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키우자.'라고, 장만은 체 게바라의 명언과 일치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조선의 리얼리스트였으며, 불가능한 꿈인 조선의
부강을 꿈꾸며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조정에 남아있던 성리학에 경도되어 말과 붓으로 정치를 한 사대부들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장만은
동아시아 나라들이 세력 교체로 불안한 시기, 조선의 국방을 책임졌다. 선조 정권 대에는 중앙에서 문관직을 역임했고, 나아가 지방에 파견되어 군사
행정 관련 업무를 관장했다. 전란이 종결된 후 장만은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여진과의 충돌을 막는데 최선을 다했고, 발흥하는 여진의 세력을 보고
위기의식을 느끼며, 만주 일대의 지도를 만드는 등, 방비에 최선을 다했다.
광해군이 집권을 시작하자 장만은 광해군에게 여진의 강성함을 경고하며, 전란이
일어날 시, 명과 여진의 상황을 보며 중립외교를 펼쳐야 할 것을 주장했다. 외교적으로 실리적인 입장을 보여줬던 광해군은 아마 장만의 주장을
직간접적으로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장만은 조총부대를 훈련시키고, 북방 방어 전선을 구축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광해군의 내부적인 폭정이
높아지고, 서인들을 주축으로 한 인조반정의 싹이 트기 시작할 때 군권을 대부분 장악하고 있었던 장만은 사위인 최명길에게 '예전의 군주에 대한
은혜 때문에 전면에 나서진 못하겠지만, 너희가 백성을 구하고자 한다면 정변을 묵과하겠다.'라고 말하며 실질적으로 반정을 묵인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광해군에게 상소를 올려 '나라가 흩어지고 나면 누구와 정치를 논하겠냐.'라고 외치며 광해군이 정신을 차리고 내치에 더욱 힘쓸 것을
강조했다.
인조반정 이후, 인조와 서인 정권은 광해군 정권 때 활약하던 인물들을 대거
숙청했지만, 당시 조선의 국방을 논할 때 장만만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여전히 장만을 중용했다. 장만은 신정부를 위해 현실적인 성격의 상소를
올렸지만, 인조와 서인정권은 여전히 명분론에 젖어 있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 인조는 도망가고 장만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안산에서 이괄의
군대를 격파한다. 그는 이 싸움 도중 한쪽 눈이 실명했는데, 이는 오랜 야전 생활 때문이었다. 그 뒤 장만은 북방 경계를 위하 안주에 방어진을
세우자고 주장했지만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이귀는 의주를 고집했다. 결국 인조는 안주와 의주 사이에 있는 구성에 주둔지를 세운다. 인조와
이귀는 군대와 백성에게 명망이 높은 장만을 경계하고 시기하였는데, 이괄의 난과 같은 무신 반란이 언제 또다시 일어날지 몰라서, 군벌 세력들의
군사 훈련을 일부로 저지한 것이다.
그 결과 조선의 국방력은 크게 약화되는데, 이는 결국 정묘년과 병자년에 청의 군대
앞에 무기력하게 당한 주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중앙 정치에 현실성 없는 판단에 실망한 장만은 사직서를 무려 7번이나 올렸는데 매번
거절당했다. 정묘전쟁이 터지고, 인조 조정은 또다시 장만에 기대를 거는데, 장만은 약화된 조선군을 이끌고 전쟁에 나섰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화친론이 대두되고 결국 청나라와 형과 아우의 맹약을 맺은 조건으로 조선은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이후 대신들은 장만을 두고 탄핵해야 한다고
말했고, 그렇게 벼슬에서 물러나 살다가, 조정에 복귀한 뒤, 노쇠함 때문에 다시 벼슬을 물렸다. 이후 장만은 자택에서 죽었는데, 그의
실리주의적인 사상은 사위 최명길과 부하 장군 정충신 등이 이어나갔다.
이렇듯 장만은 당시 명분론에 휩쌓인 성리학자들이 탁상공론을 하던 조정에서 문관직과
무관직, 그리고 지방직과, 중앙직을 두루 경험한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국방에서 두각을 드러냈는데, 세종대왕 때 개척한 4군을 점령한 여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국토를 회복했으며, 이괄의 난을 제압하여 무너지는 조정을 다시금 바로 세웠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사고에
입각하여 정세를 바라봤고, 이런 그의 사상은 당대 주류의 사상이라 할 수 있는 성리학적 마인드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장만은 조선의
리얼리스트라고 할 수 있겠고, 명분론에 휩쌓인 나라에서, 현실주의적인 대안을 실천하고자 노력했으니, 그의 이런 노력은 가히 불가능한 꿈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현실주의자 장만 장군이 왜 후대에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조선 사상사의 흐름 때문이다. 알다시피 조선은 망국에 이르기까지 성리학적 사고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흐름이 이어졌으니, 조선 시대의
위인 자리는 성리학에 있어서 큰 업적을 남긴 위인들의 차지였고 현실주의적인 사상을 가진 장만이나 최명길 등등은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잊혀만 갔다. 그래서 나 역시 장만의 삶을 읽으면서 부끄러웠다. 이런 인물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고, 이를 통해 조선
중기와 후기에는 명분론에 휩쌓인 인물들이 가득했다는 나의 편견을 돌아볼 수 있었다.
장만의 삶을 읽으면서 느낀 사실은 능력이 뛰어나고 탁월하더라도,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환경을 만난다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자고로 영웅은 능력도 능력이지만, 시기를 잘 타고나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장만의 삶 역시 그렇다. 만약 장만이 명분론을 강조하는 환경이 아닌 실용을 추구하는 환경에서 활약하였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적어도
장만의 실용주의 정책을 지지할 수 있는 지도자를 만났더라면, 어쩌면 정묘전쟁에서 조선군이 그토록 무력하게 무너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조선의
운명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인조 정권은 북방 정책에 있어서 잔뼈가 굵은 데다 현장에서 활동한 장만의 의견과, 글만 읽고 군사일에 관해서는 전혀
경험이 없는 백면서생 이귀의 의견을 두고 고민하다 결국 절충하는 방안을 채택했는데, 이는 정말 어리석은 선택이다.
국방과 전쟁은 백성의 안위가 걸린 중차대한 사안이다. 왕조 국가는 자국의
신민들에게 일반적으로 무거운 세금을 거둔다. 그럼 백성의 피땀을 거둬들이면서 국가는 백성들에게 무엇을 해줘야 할까? 무엇보다도 신민들에게
최소한의 안정된 생활권을 보장해야만 했다. 이런 최소한의 생활권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은 무엇일까? 바로 '안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세금을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민이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내는 것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나의 삶을 국가가 지켜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민주 사회이든 왕조 사회이든 근본적으로 피지배층이 세금을 내는 원인은 '삶의 안정감'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렇듯
전쟁은 이토록 중요한 백성의 안위를 두고 싸우는 것이기에, 무엇보다도 현실 경험과 감각에 뛰어난 전문가의 의견을 주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소리다. 그러나 조선은 반대로 성리학적 이념에 젖은 그리고 당대의 권세가였던 문인의 의견과 전쟁에 있어 잔뼈가 굵은 장군의
의견을 절충하는 센스를 보여준다. 이런 상황을 보며 사람이 능력을 펼치고 뜻을 이루는 데에는 환경적인 조건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꼈다.
국내 평전을 읽을 때 주의하는 점이 있다. 우리나라 역사 인물의 평전 중 일부는
문중의 위인을 의도적으로 드높이고자, 편찬한 평전이 있는데, 이런 책을 읽을 때에는 최대한 객관적인 관점을 유지하며 책을 읽어야 한다. 이런
부류의 평전들은 대체적으로 다루는 인물이 자신의 선대의 어른이다 보니, 공을 너무 부풀리고 나쁜 점은 언급하지 않는 편파적인 기록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도 이런 부분에서 엄밀하게 살펴보자면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이 책은 장만의 직계 후손은 아니지만 장만의 먼 후손이
주축이 되어 저술된 평전이다. 그래서 장만에 대한 호평이 가득한데, 책에 나온 대로만 평가하자면, 장면은 문무를 겸비하고, 신분제가 엄격한 조선
사회에서 차별 없이 사람을 대했다고 하니 인품도 매우 뛰어난 사람으로 보인다. 물론 장만이란 인물이 뛰어난 인물이지만 잊힌 영웅이이게 이를
대중들에게 크게 조망하고자 장점을 강조한 점은 백번 이해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더라도 단점은 있기 마련인데, 책에서는 장만의 아쉬운 부분,
그리고 단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것 같아 아쉬웠다. 장점과 더불어 단점을 객관화하여 언급했더라면, 장만 장군이 오히려 더 인간적인 인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책을 통하여 장만이라는 거대한 인물을 자세히 알게 된 점은 고마웠지만, 책에서 묘사하는 장만의 모습은 입체적이고
인간적이기보다 위인전에 나오는 전형적인 인물처럼 다가와서 이 부분이 조금 아쉬웠다. 아무튼 사소한 아쉬움이 있는 책이지만, 조선의 리얼리스트를
알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