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작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1》이 왕권이 강했던 조선 전반부를 조망했다면 이번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2》는 사림의 당파
정치가 본격적으로 드러난 조선 중후반부를 다룬다.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2》에서 다루는 지도자는 '임진전쟁'으로 유명한 선조부터 순종까지인데,
이 시기는 대체적으로 조선 전반부에 비해 왕권이 약했다. 왕권이 약해지게 된 원인은 사림의 진출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본격적으로 사림이 정계에
등장하게 된 시기는 조선 전기 성종 대에서 시작됐다. 당시 성종은 훈구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사림을 적극 고용하여 세력 균형을 도모하였는데,
성종 대에는 두 세력 간의 균형이 유지됐지만, 연산군의 무리한 왕권 강화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조선 조정에서 신권 세력은 왕권을 누르기 시작했다.
그 뒤 사화가 있음에도 사림은 굴하지 않고 훈구 세력을 공격하여, 결국 선조 시기에는 집권 여당으로 자리 잡게 되는데 이때부터 신권 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선조는 조선 시대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군왕인데, 그의 시기에 사림이 대거 등용되었고 당파 정치가 본격적으로 이뤄졌으며, 이런
신권의 우위는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왕권을 압박하는 요인으로 남는다. 왜 선조 시기에 왕권은 크게 무너진 것일까. 첫 번째로 선조의
출신이다. 선조는 알다시피 방계 혈통으로 왕위를 이은 첫 번째 군주였다. 전근대 특히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강한 조선에서 특히나 사회의 최고
지도층인 왕실에서는 혈통을 굉장히 중시할 수밖에 없는데, 적통이 아닌 방계로 왕위를 이었으니 이는 신료들의 입장에서는 신권을 강화할 수 있는
최적의 빌미였다. 두 번째로 대외적인 국난을 들 수 있다. 일본과 싸운 임진전쟁과 정유전쟁에서 선조가 보여줬던 무능한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왕권을 실추하기에 충분했다.
선조 이후로도 조선 왕실은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무너지는 명나라와 흥하는 청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자처하며 실리적인 행보를 보였지만, 내부적으로 코드인사를 감행했던 점,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서궁에 가두고, 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였던 점,
무리한 왕권 강화를 가시화하기 위해 궁궐 사업에 열중한 점 등등의 아쉬운 행보를 보여 결국 인조와 서인에 의해 왕좌에서 내려와야 했다.
대중들에게 있어 연산군과 다르게 광해군은 명군으로 인식하는 시각이 많은데, 이런 재평가의 계기는 영화 '광해'에서 비롯한 것이다. 또한 광해군을
새롭게 해석한 저서들도 종종 나오기 시작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저서는 한명기의 《광해군》이다.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2》에서도 광해군을
대체적으로 현명한 군주로 평가하는데, 개인적으로 광해군은 외치에 있어서는 현실적이고 탁월한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하지만, 내부 정치에 있어서는
미숙한 모습을 많이 보여준 지도자인 것 같다.
인조는 만년 야당인 서인들과 함께 광해를 타도하며 일어섰지만, 그의 정부는 신정부가 보여줄 수 있는 최악의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아마추어적인 행정력, 오락가락하는 정책, 현실에 맞지 않는 사안들, 거기에 자신의 권력욕을 지키기 위한 치졸한 모습, 병자전쟁과
정묘전쟁에서 보여준 대책 없는 모습 등등... 이런 사건들은 하나둘씩 왕권을 약화시키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고, 인조 사후 효종과 현종은
송시열을 필두로 한 거대 서인 세력과 타협하며 정권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이렇게 신권이 우위에 있는 조선 조정의 흐름을 끊은 지도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장희빈으로 유명한 숙종이다.
숙종은 여당 서인과 야당 남인을 사이에 두고 극단적인 환국을 도모하여 실추된 왕권을 세우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강해진 왕권을
바탕으로 여러 치적을 남겼다. 그러나 숙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감행한 환국은 여당과 야당을 더욱 감정적으로 갈라놓았는데, 그렇기에 그의 후대인
영조와 정조는 극단적으로 갈러진 신권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탕평을 강조하였다. 숙종 사후 영조와 정조의 시기는 조선 중흥의 시기로 손꼽는다.
그러나 이 시기도 근본적으로 성리학 사상 내에서 국가 발전을 도모하다 보니, 근대로 격변하는 시대적 흐름을 쫓아가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영조와 정조는 죽음이 다가오자 후계자에 대한 지나친 걱정 때문에 노론 중에서도 외척 세력을 지나치게 의존했다. 이런 결과 정조 이후의 군주들은
외척이 중심이 된 세도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순조 이후 주목할 만한 왕은 고종인데,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2》에서는 현재 학계에서 고종에 대한 해석이 극단적으로 갈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고종은 시기적으로 조선이 망하기 직전의 지도자라 망국의 이미지 때문에 비난하는 시선이 대부분이지만 사학자들 가운데에서는
고종의 정치력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에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2》에서는 비난과 호평을 절충하여,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고종이 세간으로부터 욕을 먹는 이유는 고종 특유의 우유부단함도 있긴 하지만, 개인적인 능력을 떠나 민주화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당시의 시대적 흐름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쫓아가지 못한 부분이 가장 크지 않나 생각한다.
아무쪼록 선조 대에 시작해서 고종에 이르기까지 조선을 지배한 세력은 사대부로 대표할 수 있는 신권 세력과 특정 세도 가문이다.
이들은 시대에 따라 사림, 동인, 서인, 북인, 남인, 노론, 소론, 시파, 벽파 등등의 이름으로 불렸으며 당파의 이익을 위해 다른 당과
싸우기도 하였고, 때로는 왕권과 대립하기도 하였다. 책에서 나온 신권정치를 개인적으로 크게 두 부류로 나눠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집권
여당에 대해서인데, 여기에는 조선 초기 여당이라 할 수 있는 훈구, 숙종 시대까지 여당을 유지한 서인 집단, 영정조 시기에 우위를 점한 노론이
대표적이다. 이들 집권 여당의 장점은 야당에 비해 현실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랬기에 권력 유지에 있어서는 탁월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이들의 단점은 부정부패인데, 이는 고인 물이 썩는다는 속담이 있듯 만년 집권의 대표적인 폐해였다. 이런 부정부패에는 인사권을 동원하여
자기세력 사람들을 대거 등용하는 모습, 뇌물, 청탁 등등이 있다.
반면 야당 측을 살펴보자면, 야당을 대표할 수 있는 세력은 조선 초기 성종 대에서 명종에 이르기까지 활동한 사림세력(넓게
포함하자면 선조 시기의 사림 세력도 포함된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비주류 서인 세력, 숙종 시기까지 만년 야당을 담당한 남인 세력, 영정조
시기에 활동한 남인과 소론이 대표적이다. 이들 야당 정권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집권 여당의 부정부패를 감지하고 이로 인해 거대한 집권 여당을
공격할 수 있는 세력이라는 점이다. 군주들은 이런 야당을 통해 여당의 독점을 견제하고자 적극 노력했으며, 때로는 야당과 여당을 모두 품으며
탕평을 외치기도 하였다. 그럼 이런 야당의 가장 큰 단점은 무엇일까? 대체적으로 말만 앞서고 행동에 있어서는 무능한 모습을 보여준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를 꼽아보자면 조선 초기 훈구 대신들의 비리를 공격한 사림들인데, 사림 세력은 훈구 세력보다 정치를 잘 할 수 있다고
외쳤지만 정작 그들이 여당이 되었을 때에는 당파 싸움으로 분열되어 조정이 사분오열로 찢어졌다. 인조반정을 이룬 서인들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때까지만 해도 서인들은 광해군의 북인 코드인사 때문에 정치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그로 인해 인조와 함께 반정을 일으켜 여당이 되었지만, 정작
그들이 권세를 잡고 보여준 행정력은 그들이 비판한 광해군 때보다 훨씬 뒤떨어졌다. 마찬가지로 숙종 시기에도 만년 야당의 무능함을 확인할 수
있는데, 숙종은 기사환국을 통해 만년 야당이었던 남인을 여당으로 세웠다. 그러나 집권 여당이 되어 보여준 남인들의 모습은 서인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이에 실망한 숙종은 갑술환국을 감행하여 실각한 여당인 서인을 다시 중용하기 시작했다. 이런 신권의 여당과 야당의 모습은 사실 오늘날
정치에 있어서 여당과 야당의 모습과 비슷하다. 대체로 여당은 현실감각이 있으나, 현실 안주와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급급하여 문제고, 야당은 의지는
있으나 그 의지를 실행하는 방법이 너무 이상적이고 현실성이 결여됐으며, 결과적으로 행정에 있어서 서투른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그렇기에 왕조 국가의 지도자들은 권력을 신권에 양도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는데, 저자인
신동준 역시 기본적으로 왕조 국가에서는 왕의 권력이 강해야 한다는 입장을 주장한다. 사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 지도자 개인의 지도력을 극도로
강조하는 사상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낀다. 왜 그럴까? 일제 치하 이후 우리는 군부독재 시절을 겪었다. 이 시기는 국가적으로 볼 때에 외형적인
발전은 분명 있었지만, 시민들의 자유는 굉장히 제약적이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기에 시민들은 오늘날 독재를 연상하는 사상 등에 있어서는
민감할 수밖에 없다.
권력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시스템은 사실 위험한 제도다. 인간은 부정부패와 타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데, 막대한 권력을
가지게 됐을 때 그 권력을 사유화하여 사용한 지도자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수두룩했다. 우리가 독재를 생각하면 독재자가 자기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연상하는데 이 역시 독재 시스템의 대표적인 부작용이다. 그러나 이런 독재 시스템도 장점은 분명 있다. 독재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명령 체계가 일원화되어 있기에 비상시나 난세에서는 빛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공화정이 발달한 고대 로마에서도, 전쟁 등의 국난이 다가오면
국론을 하나로 모으고 명령 체계를 일원화하기 위해, '독재관'을 임명하는 제도가 있는데, 독재관은 동양의 왕과 대등할 정도의 권력을 가졌다.
물론 로마의 독재관은 자신의 임무가 끝나면 바로 사임을 하였기에, 특정 개인이 지속적으로 권력을 누리고 이를 바탕으로 사유화할 가능성은
없었다.
조선의 체제는 기본적으로 왕에게 권력을 몰아준 독재 왕조 체제였다. 그럼 단지 왕이 뛰어난 정치력을 통해 막강한 권력을 가지기만
한다면 성군이 되는 것일까? 아니다. 바람직한 독재자는 막대한 권력을 획득한 뒤, 그 권력을 사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공적으로 사용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조선 왕조의 군왕들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교육받는 '제왕학' 역시 바꿔 표현해보자면 '바람직한 독재 권력'에 대한 공부였다.
조선왕조에서 독재를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한 인물을 대표적으로 꼽아보자면 세종이다. 세종은 태종이 강화한 막강한 왕권을 이어받아, 권력을 백성들을
위해 최대한 사용했다. 이런 세종과 같은 독재자는 전 세계적으로 흔치 않은 케이스며, 그렇기에 우리는 조선하면 세종을 떠올리고, 여전히 세종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결국 바람직한 독재자가 되기 위해서는 정치에 있어 권력의 주도권을 가져야 하며, 그렇게 획득한 권력을 사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공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다만 앞서 언급하였듯, 인간이란 존재는 막대한 힘과 이익 앞에서 탐욕을 이겨내기 힘든 존재이기에 독재 시스템은
일말의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유화할 수 있다는 위험성 때문에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시민들이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아무튼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의 성격을 정리해보자면, 첫 번째로 권력구도를 통한 해석, 두 번째로 현실주의적인 시각, 세
번째로 최고지도자 중심의 리더십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저자의 해석은 사람에 따라 호불호를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지만, 방대한 실록을 압축하여
적절하게 단권화한 부분은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조선 지도자들의 업적을 살펴보며 오늘날 우리의 사회 지도층을 다시금 돌아볼 수
있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굉장히 유익한 시간이었다. 시중에 실록과 조선사에 대한 얄팍한 저서들이 판을 치고 있는데, 이 시리즈는
나름 내용에도 충실하고 깊이가 있으며, 역사학계의 최신 동향과 논의 등등을 빠짐없이 언급하고 있기에 역사에 대해 초보자를 비롯하여, 지식이 있는
사람들도 생각을 하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인 것 같다. 오래간만에 묵직한 책을 통하여 조선사의 흥망을 깊이 있게 조망하니 한편으로는 후련하고,
한편으로는 섭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