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리자 - 중국판 목민심서
유기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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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는 스토리텔링을 굉장히 중요시했다. 같은 내용이더라도 이야기를 첨부하거나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어 표현한다면 사람들에 공감을 얻어데는 데 있어 효과적이라며 너도 나도, 적극 스토리텔링을 권유하는데 《욱리자》 역시 이런 스토리텔링을 기본으로 한 고전이다. 저자인 유기는 원말명초의 격변기에 활동했던 인물로, 명나라를 개국한 주원장의 핵심 참모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주원장은 유기를 두고 '한나라를 건국한 한 고조에게는 장량이 있고, 촉한의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는데, 자신에게는 유기가 있다.'라며 굉장히 칭찬했는데, 이는 참모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 그만큼 유기는 주원장의 통일 정책에 있어서도, 그리고 통일 이후의 명나라의 행정을 정비하는 과정에서도 두각을 드러낸 브레인이었다. 원말명초 시기 유기는 원래 원나라에서 봉급을 받는 공무원이었다. 모든 왕조의 말기가 어지럽듯, 당시 원나라도 망해가는 과정이었으므로, 행정은 엉망이고 인사 배치는 출신을 따지고, 권력자의 코드인사가 일반적이었기에, 이런 상황에서 유기는 분노하며 벼슬을 내던지고, 칩거하며 군사를 기르며 때를 기다렸다. 그런 과정에서 유기는 자신의 울분을 저술로 표현하였는데 그 저서가 바로 《욱리자》였다고 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식자 계층은 언제나 당대의 시대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는데, 유기가 활동했던 시대는 원나라가 망하기 직전이었기에 식자들의 비판의 강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유기는 시대 비판을 넘어 스스로 시대를 개혁하고자 하였는데, 《욱리자》 역시 그런 일환으로 저술된 책이다. 재미있는 점은 그는 《욱리자》를 통해 현실을 노골적, 직설적으로 비판하지 않고, 우화를 통해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돌려서 현실을 비판했을까?

 

지식인들이 무엇을 비판할 때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첫 번째는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방법, 두 번째는 돌려서 비판하는 방법. 첫 번째 방법은 직설적인 만큼 명료하고 깔끔하지만 그만큼 위험 부담도 크다. 너무 직설적인 방법이기에 비판의 대상으로부터 집중적인 반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법은 다소 간접적이지만, 첫 번째 방법보다는 위험 부담이 없는 편이다. 아마 유기가 우화를 통하여 현실을 비꼰 것은 원나라의 세도가들의 눈을 피하고자 했던 보신책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또한 우화 형식은 앞에서도 말했듯 스토리텔링 기법이기에, 문자를 배우지 않고 글을 모르는 백성들이 접하기에도 용이했다.

 

또 생각해 볼 점은 《욱리자》의 우화들은 대체적으로 굉장히 자극적인 내용이 많다. 이를 통해서 생각해보면 유기는 비판의 방법론은 직설적인 비판보다 우화를 통한 간접적인 방법을 선택했지만, 우화의 내용에는 사회를 개선하고자 한 자신의 울분에 찬 감정을 적극적으로 담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욱리자》의 필법에서 나는 유기의 분노에 찬 감정적인 울분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런 감수성이 가득한 필법으로 작성된 고전을 하나 더 꼽아보자면 사마천의 《사기》가 떠오른다. 사마천은 유기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느꼈던 당대의 모순점, 그리고 인물의 논평을 《사기》에서 가감 없이 감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실 이런 우화 중심의 고전의 대표적인 작품은 《장자》인데, 《장자》와 《욱리자》는 우화를 사용하여 자신의 철학이나 생각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형식적인 공통점이 있지만 내용상의 차이점은 존재한다. 《장자》는 탈 세속적인 성격을 가지는 대표적인 도가 사상을 대표하는 책이다. 따라서 《장자》의 우화는 대체적으로 허무적인 성격을 가지며, 현실의 범주를 초월한다. 그러나 《욱리자》의 우화들은 세속적이며, 현실참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물론 《욱리자》의 우화들 중에는 현실 초월적인 이야기도 많이 나오지만, 이는 표면상으로 봤을 때의 이야기고 궁극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들은 현실의 부조리함을 꼬집고 있다.

 

아무튼 현실에 대한 불만이 강하며, 사회의 개선에 적극적으로 행동하려 하였던 유기는, 명나라를 개국하는 주원장을 만나 그의 핵심 참모로 등용된다. 주원장은 원나라를 몰아내고 명을 개국하여 중원에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알린다. 바야흐로 유기가 욱리자를 통하여 꿈꿨던, 문명의 융성함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유기의 생각대로 새 시대는 흘러가지 않았다. 유기가 희망을 걸었던 주원장은 권력을 독점하자, 측근들을 의심하며 대규모의 숙청을 감행하는데, 여기에는 유기 역시 포함되었다. 결국 주원장의 측근에 질투를 받은 유기는 벼슬을 버리고 정계에 은퇴하여 짧은 노년을 보내다 죽었다는데 일설에 의하면 독살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때 유기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욱리자》를 통해 보건대 유기는 굉장히 감정적인 성격을 지닌 것 같았는데 굉장히 마음고생을 많이 했을 것 같다. 어쩌면 시대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특정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시대의 문제를 개선하는 것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지고 불변의 역사의 법칙을 깨닫지 않았을까 싶다. 그가 어떻게 최후를 맞이했건 간에, 우리는 오늘날 《욱리자》라는 문헌을 통해 당대의 혼란했던 시절, 사회를 개선하고자 노력했던 한 지식인의 순수한 열정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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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역대 황제 평전 - 변화와 혁신을 두려워하는 지도자는 도태된다 역대 황제 평전 시리즈
강정만 지음 / 주류성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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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조선 이래로 직간접적으로 중국과 관계를 맺어왔고 그렇기에 중국 대륙의 정치구도와 흐름은 한반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우리나라를 설명할 때 미국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한반도를 명확히 파악하려면 중원 대륙의 역사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주변의 강대국들의 막대한 영향력.'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인데, 이는 어쩌면 지정학적으로 반도에 위치한 우리나라의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고 우리의 역사를 배우는 과정에서 중국의 역사에 대한 지식의 필요성을 느꼈고, 그 결과 평생의 독서 숙원 사업 중 하나인 《자치통감》 완독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자치통감》이 어떤 저서인가? 다루는 시기는 전국시대 이래로 송나라 건국 이전까지 무려 1400여 년을 다루고 있으며 방대한 시대를 다루기에 책의 권수도 무려 294권으로 구성됐다. 이는 오늘날 500페이지 기준 번역본으로 31권에 해당하는 분량이니 엄청난 분량을 자랑하는 저서다. 사실 분량이야 많더라도 번역만 되어 있다면 인내심을 가지고 읽으면 그만이다. 그렇기에 나는 방대한 분량이 부담이 되긴 했지만 사실 걱정되진 않았다. 내가 인식한 《자치통감》의 문제점은 바로 송나라 이후부터 내용이 끊어진 점이다. 다행히 《자치통감》을 완역한 권중달 교수는 최근 《자치통감》의 후속작인 《속자치통감》 완역 작업에 나섰는데, 이 작업이 완료되면 《자치통감》에서 다루지 않았던 송, 요, 금, 원나라의 역사까지도 읽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또 남아있다. 원나라 이후의 역사인 명나라와 청나라의 역사서는 대체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다행히 명나라와 청나라의 정사인 《명사》와 《청사》는 《조선왕조실록》이 번역되어 무료로 공개된 사이트에서 열람할 수 있게 해놨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글로 번역된 것이 아니라 원문으로만 되어 있어서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렇다 보니 나는 명나라 역사와 청나라 역사를 정리한 책을 찾았고, 그런 과정에서 《명나라 역대 황제 평전》과 이번에 발간된 《청나라 역대 황제 평전》 세트를 알게 됐다. 책은 내가 생각하던 조건을 만족시켰는데, 정사인 《명사》와 《청사》를 기준으로 그 시대를 다룬 각종 사서들을 참고하여 정리했다고 한다. 앞으로 중국의 다른 왕조를 정리한 시리즈가 계속 출간될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명나라와 청나라 역사 파트가 절실하게 필요했는데 이를 만족하고 있으니 나에게 있어 안성맞춤의 책이다.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에 우리나라는 조선왕조의 집권기였다. 알다시피 조선은 대한민국이 들어서기 전에 있었던 마지막 봉건왕조 국가이며, 그렇기에 우리 사회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줬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전통적인 가치관과 풍습 예법 등등은 거의 대부분 조선왕조의 유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조선을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알아가는 과정에서, 조선을 알면 알수록 동시대에 존재했던 중원 대륙의 명나라와 청나라의 존재가 생각 외로 조선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최근 인문학, 고전 열풍이 불면서 동양 철학, 중국 철학과 역사에 대한 지식의 수요가 예전보다 높아졌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러한 흐름에서 아쉬운 점은 유행하고 있는 동양학은 대체로 춘추전국시대에 국한됐다는 점이다. 제자백가 철학도 춘추 전국시대의 산물이며, 역사서로는 《사기》가 주목을 받고 있는데, 이 역시 춘추전국시대를 다루고 있다. 이렇게 특정 시대만 집중적으로 조망한다면, 중국 역사나 사상의 거대한 흐름을 파악하기가 어려운데, 이는 바꿔 말하면 중국과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은 우리의 역사도 파편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되지 않겠는가. 특히 조선은 명나라를 아버지처럼 사대하였고, 명이 멸망하고도 명나라의 이념과 가치관을 고수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일까 명나라의 멸망 과정을 보면 조선의 멸망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청나라는 병자전쟁과 정묘전쟁(매번 내가 역사 서평에서 되풀이하며 밝혔는데 나는 왜란과 호란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임진년과 병자년에 일어난 사건은 단순히 오랑캐가 난리를 피운 것을 넘어 국가 대 국가 간에 전면적으로 싸운 '전쟁'이라고 생각한다.)을 통해 우리와 악연을 맺은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청나라의 건국 세력인 여진족은 조선의 개국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이전 시대에도 발해나 고구려의 유민에 포함되어 우리 민족과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요즘 도서 출판 시장에는 '조선'을 테마로 한 주제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조선왕조실록》을 재해석하여 나온 책이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주장했듯, 조선을 똑바로 알기 위해서는 명과 청을 알아야 한다. 근데 작금의 출판계는 조선을 강조하면서 명과 청나라의 역사에는 관심이 없다. 그나마 인문학의 열풍이 불어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만을 쫓고 있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명나라 역대 황제 평전》과 《청나라 역대 황제 평전》이 발간됐으니, 편파적인 인문학 시장에서 이 두 책의 가치는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번 글에서는 최근에 발간된 《청나라 역대 황제 평전》을 집중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책은 청나라의 황제들을 중심으로 청나라의 정치사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읽어본 바, 청나라의 봉건 황제들은 역대 다른 왕조들의 지도자들에 비해 굉장히 양호한 편이었다. 황제들은 자기 계발에 최선을 다했고, 능력과 자질 면에서도 평균 이하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청나라가 명을 몰아내고 중원에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실용주의였다. 명나라 말기에 황제들은 정사에 뜻을 잃고, 사치와 마약, 주지육림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반면 신흥 세력인 청나라는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제도와 군사조직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몰락한 명을 멸망하고 중원의 새 주인으로 자리 잡았다. 중원에 자리를 잡은 청나라는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시기를 거치면서 최절정기를 꽃피운다. 영토를 더욱 확장하여 지금의 중국 국경선 지대를 확정한 것도 이 시기에 달성한 위업이다. 그러나 건륭제 이후에는 나라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그런 과정에서도 청의 후반부의 지도자들은 쇠락하는 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나라는 왜 멸망한 것일까?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

 

중국의 정치제도, 막강한 황제를 중심으로 하여 운영되는 제도의 기원은 기원전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가 구축하였다. 물론 시황제의 진나라는 엄격한 법치 때문에 2대를 넘기지 않고 멸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나라의 시스템은 역대 중국 왕조의 골격을 형성했다. 진의 뒤를 이은 한나라 그리고 그 이후의 여러 나라들은 하나같이 진나라의 황제 중심적 정치 시스템을 발전시켜나갔고 계승했다. 한편 중국의 의식과 사상은 전통적으로 유학을 기초로 하였는데, 이는 한 고조와 한 무제가 유학을 국학으로 숭상하면서부터 시작됐고 이후 역대 왕조들은 유학을 으뜸으로 여기며 이를 토대로 지적 활동을 전개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보면 중국의 제도와 의식은 기원전의 제도와 철학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셈인데, 이는 청나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면 서양에서는 기원전 로마에서 민의를 바탕으로 한 공화정 체제를 수립했다. 이후 로마는 특정 개인이 권력을 독점하는 황제 중심의 제도로 변질됐고, 로마 이후 중세가 열리자 서양에서도 영주를 바탕으로 한 봉건주의 사회에 돌입하게 됐다. 당시 중세에서는 동양과 마찬가지로 특정 개인이나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고 세습하는 제도를 따르고 있었으며, 예수로부터 비롯한 종교관이 모든 사상을 규제하고 있었다. 근대사회에 접어들면서 서구에서는 권력을 특정 개인이 독점하는 왕정제를 폐지하기 시작했고, 정치의 전면에 피지배층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시민들은 자신들의 인권을 드높이기 시작했고, 이를 토대로 민주체제를 확립하는데 성공한다. 한편 사상적으로도 많은 혁신이 일어났는데, 기존의 종교 중심의 사상을 타파하고 현실을 바탕으로 한 학술 체계를 성립하는데 성공한다. 이러한 대변혁을 바탕으로 서구 열강은 과열된 유럽 대륙을 벗어나 식민지를 만들기 위해 눈을 돌렸는데, 그런 서구 세력권에 동양 사회는 그야말로 먹기 좋은 떡에 불과했다.

 

즉 청나라는 이런 시대적인 흐름을 읽지 못하고, 기존 전통의 가치관 - 봉건주의적 중국 중심의 천하관인 중화사상- 을 고수하였다. 이렇다 보니 기술적으로, 제도적으로, 사상적으로도 앞선 서양의 우월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멸망에 이른다. 약소한 부락 사회에서 시작한 여진족이 청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개국할 수 있었던 원인에는 실용주의와 넓은 세계관에 있었다. 청을 개국한 청 태조와 청 태종은 여진족의 주적인 명나라 중원에만 집중하지 않고, 인근 국가인 조선과 몽골 그리고 여러 이민족의 부족들도 포용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원나라의 몰락을 참고하여 출신을 따져 차별적으로 대우하기보다, 능력이 있으면 출신과 상관없이 등용하는 포용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이런 넓은 시야가 있었기에 여진족은 열세를 극복하고 국제적인 제국인 청을 개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청나라도 결국 시대가 지나면서 보수화되고 한족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 중화사상에 빠져 중국 중심의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그 결과 격변하는 시대의 상황을 모르고, 그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중화사상 이데올로기 안에서 개혁을 외쳤으니, 황제들이 최선을 다해 노력한들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서세동점이 일어난 근본 원인에는 유학에서 비롯한 '중화사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서구 열강이 개혁을 단행할 무렵 동양에서는 여전히 중화사상이 뿌리 깊게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유학은 동양을 대표할 수 있는 전통 사상이고, 뛰어난 덕목도 많다. 그러나 후대로 가면 갈수록 실질을 경시하고 명분을 중요하는 가치관 때문에 현실성과는 동떨어진 사상으로 변질됐다. 문제는 이런 폐해를 가진 중화사상이 《공산당 선언》에서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라고 표현하듯, 유령처럼 동양 사회를 2000년 이래로 계속해서 배회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중화사상 앞에서 청나라의 장점인 실용주의는 점점 가려지기 시작했고, 청의 황제들 역시 중화사상에 예속되기에 이르는데, 이는 결국 중원의 영토는 여진족이 점령했지만, 정신적으로는 한족이 중심이 되어 만든 중화사상에 굴종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비극은 청나라뿐만 아니라 우리 조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령처럼 배회하는 '변질된 중화사상'을 맹목적으로 고수하다 조선 역시 멸망했으니까 말이다. 이렇듯 하나의 사상, 그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관념의 힘은 생각보다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다. 미시적으로,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는 별것 아니고 와닿지 않지만, 거시적인 관점으로 해석해볼 때 사상과 관념은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청나라의 쇠락 조짐은 언제부터 이뤄졌을까?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로 이어지는 청나라의 황금기라고 생각한다. 이 시대의 군주들의 행적과 치적을 보면 '한계가 많은 독재 위주의 권력 시스템이 이토록 투명하고 뛰어나게 구현될 수 있구나'라고 할 정도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청의 몰락은 청의 최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건륭제 시기에서부터 시작됐다. 건륭제는 집권기 초반에는 선대의 치적을 이어받아 정사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정책의 결과도 좋았다. 그러나 말기로 갈수록 축적된 잉여 생산물을 바탕으로 하여 사치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특정 대신을 총애하였다. 이런 황제의 흔들리는 모습은 지방 행정의 부패로 이어졌는데, 그렇기에 건륭제 집권 후반기에는 겉으로는 태평성대였지만 내부적으로는 부정부패가 싹트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부정부패는 후대의 정권에사회 혼란과 민란으로 구체화되었고, 이는 서양의 침략과 함께 청을 망하게 하는 주요한 원인이었다.

 

동양의 철학 도가 사상에 의하면 가장 성할 때에 쇠락한 기운이 싹트니, 이를 경계할 것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이치는 역대 왕조에서 빈번하게 발견된다. 전한 시대의 최전성기를 구현했다는 한 무제 집권기는 한나라를 대표하는 시대지만 한편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쇠락을 예견할 수 있는 싹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뿐일까 당나라 중흥의 군주로 불리는 당 현종 시대도 마찬가지다. 현종 집권기 초반은 당나라의 국력을 한층 더 드높이는데 일조하여 중흥의 시기로 손꼽힌다. 그러나 이런 성세도 잠시뿐 집권 말기에는 양귀비를 비롯한 주색과 미신에 빠져 정사를 포기하였고, 이로 인해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 당은 쇠락의 길로 빠지게 된다. 청나라 역시 이런 사례와 마찬가지였다. 이를 토대로 우리는 성공 가도를 달릴 때에 교만하지 말고, 더욱더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는 점을 배울 수 있다.

 

아무튼 책의 교훈을 한 마디로 집약해보자면 '어떤 일을 시작할 때에는 시대적인 흐름과 시류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라고 할 수 있다. 청나라가 만약 이런 교훈을 알았더라면, 변하는 시대 흐름에 맞춰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이를 토대로 개혁에 성공했다면, 어쩌면 오늘날에도 중원의 주인은 청나라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교훈은 개인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어떤 사업을 하거나 어떤 분야에 일을 할 때에는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속한 업종이 어떤 전망이 있는지, 어떤 트렌드가 대세인지, 앞으로 유행하게 될 아이템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연구해야 한다. 성공을 위해 노력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핵심은 노력의 방향에 있다. 잘못된 방향으로 노력한다면 그것은 노력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빠질 수 있으니, 이러한 노력의 방향을 알기 위해서는 시대적인 흐름을 읽을 수 있는 거시적인 시야가 너무나도 중요하다. 더더군다나 오늘날 사회는 과거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변화가 빠른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기에 이런 거시적인 흐름을 읽는 시각은 과거보다 오늘날 더욱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묵직한 청나라 역사가 최종적으로 나에게 준 교훈은 위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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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 교육방법론 - 에라스무스가 권하는 고전공부법
에라스무스 지음, 김성훈 옮김 / 인간사랑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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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도서 출판시장에서 인문학이 유행하고 있다. 과거에 인문학은 전공자나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만 찾았던 분야지만 오늘날 대중적인 관심을 받으면서 예전과는 다르게 남다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인문학을 처음 접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난해하고 접근하기 어려우며 막막한 인문학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남들이 대세라고 해서 큰마음을 먹고 인문학과 관련된 책을 구매하여 읽어보려고 노력하지만, 특유의 어려운 진입장벽 때문에 빈번히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며, 인문학에 대해 배움을 시도하고 싶지만 두려움 때문에 시도하지 않는 분들도 많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종종 인문학에 대한 로드맵이나, 고전과 친해지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종종 받는 편인데, 나도 내 코가 석자인지라 누군가를 가르칠 만한 수준이 아니기에 매번 한발 물러나는 대답을 하거나, 겸손을 빙자한 침묵으로 대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이 궁금했다. 책의 저자 에라스무스는 인문학이 꽃을 피운 르네상스 시대에 교육철학으로 이름난 인물이다. 보통 에라스무스의 대표작으로 《아동교육론》을 꼽는데, 사실 나는 《아동교육론》보다 《교육방법론》이 더 궁금했다. 인문고전 교육이 보편화된 르네상스 시대에 최고의 석학이 제시하는 인문학 공부법이라니, 고전에 관심이 있고 고전 공부를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지 매번 고민하던 나로서는 굉장히 흥미가 가는 주제였기 때문이다. 《교육방법론》은 짧은 책이었고 내용은 간결했다. 책에서 에라스무스는 고전에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비유와 은유를 섞어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데, 그리스 로마 고전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다소 생소하게 읽히겠지만, 읽어 보건대 배경 지식이 없더라도 저자의 핵심 내용을 파악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을 듯싶다.

 

에라스무스는 책에서 주장한다. 일단 스승을 최고 좋은 사람, 그리고 인품도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한 소리로 여기겠지만 책에서 주장하는 스승의 기준은 생각보다 너무 이상적이었다. 에라스무스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스승의 조건은 특정 인문학 과목을 넘어 다방면적으로 박식하며 깊이 있는 지식을 갖춰야 하고, 언어 구사력이 좋고, 인품이 뛰어나야 한다. 물론 이런 스승을 만나면 행운이겠지만, 사실 이런 조건을 가진 스승은 교육이 보편적으로 활성화된 현대 사회에서도 구하기 힘들므로 기준이 너무 이상적이지 않나 생각한다.

 

어쨌든 에라스무스는 좋은 스승에 가르침 아래에서 지식을 섭렵하기 전에 언어를 꼼꼼하게 공부할 것을 권한다. 이는 굉장히 일리 있는 지적이다. 최근 나는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중 하나인 《공부머리 독서법》이라는 책을 훑어봤다. 그 책의 핵심은 독서력 즉 독해력이야말로 아이의 성적을 좌우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예를 들어놨다.《공부머리 독서법》의 저자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의 에피소드인데, 저자는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선행 학습에 과정으로, 다음 교과 과정에 배울 내용에 해당하는 교과서 분량을 미리 읽어 오라고 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한다. '선생님 이 부분은 안 배워서 모르는데요?' 그러자 저자는 이렇게 반문했다. '학습을 하라는 게 아니라 책을 읽어오라는 뜻이야.'라고, 그러나 그런 대답을 받은 아이들의 표정에는 당혹스러운 표정이 가득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 저자는 학원에서 주입식으로 선행 학습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여기다 보니, 스스로 글을 읽는 능력은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는 결국 성적 저하로 이어지게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나는 이 에피소드에 대한 저자의 분석이 굉장히 일리 있는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글을 잘 읽는 아이들은 대체적으로 성적이 좋은 편이다. 우리나라의 시험은 모두 텍스트로 되어있고, 이를 잘 생각해본다면 공부에 있어 가장 기본은 글을 해독하는 능력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렇기에 특정 수리영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교과목은 엄밀하게 말해서 일차적으로 언어 구사력 그리고 독해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사회탐구 영역의 문제도 일차적으로는 사료나 자료를 분석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사료나 자료의 대부분은 텍스트로 구성되어 있다. 글을 잘 읽고 소화한다는 것은 특정 정보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필요 없는지를 정확하고 빠르게 파악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잘 훈련된 언어 능력은 언어로 표현된 텍스트 위주의 시험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에라스무스가 활동하던 중세 시대에 주류 학문인 인문학 역시 일차적으로 텍스트로 표현됐다. 그렇기에 예나 지금이나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 기초 중에 기초는 언어능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라스무스는 학습에 있어 언어의 중요성을, 무려 15세기에 일찌감치 깨닫고 주장하고 있었다.

 

또한 에라스무스는 언어의 표현이나 문법 공부만 주장하지 않고, 다양한 언어학, 즉 중세 시절에 상류 계층에서 통용되는 언어인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울 것을 권한다. 왜냐면 이 당시에 저명한 고전은 모두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서술됐기 때문이다. 유럽의 중세 시대 즉 르네상스 시대에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는 지적인 사람들이 특정 지역을 초월하여 사용하던 '세계적인 언어'였다. 마찬가지로 동양에서는 이러한 세계적인 언어가 바로 '한문'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추측해보자면 오늘날에 에라스무스가 환생한다면 국제적으로 통용 가능한 '영어'나 떠오르는 '중국어' 교육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 같다.

 

언어 능력이 궤도에 오르면 본격적으로 고전 공부에 들어가게 된다. 교사는 고전의 배경과 핵심 포인트 등을 상세하게 설명할 것을 권하는데, 당대에는 고전의 자구 하나하나에 얽매여 분석하듯 풀이하여 주입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에라스무스는 쓸데없이 소모적인 당대의 고전 교육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교사는 고전의 배경 그리고 고전에 중요한 부분을 위주로 강의해야 하며,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학습자의 참여를 이끌어내서, 함께 생각하고 서술하는 등의 토론 수업을 권장하고 있다. 즉 교육의 핵심은 바로 학생과 교수의 상호적인 교감을 강조한 셈인데, 취지는 좋지만, 규격화된 객관식 시험을 위해 대다수의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주입식 교육을 할 수밖에 없는 작금의 대한민국 입시 체제에서는 에라스무스의 학습법이 너무나도 이상적이다.

 

에라스무스는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였고, 최고의 교육자이기에 나는 그의 고전 공부 방법론을 주목했지만, 사실 오늘날 그의 교육론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다. 다만 그가 주장했듯, 교육의 가장 기본은 언어능력이라는 점만큼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덕목인 것 같다. 아무튼 에라스무스의 고전 교육법을 오늘날 현실에 맞게 적용해본다면, 인문학을 공부할 때, 처음부터 욕심내서 어려운 원전 번역본에서 시작하기보다, 쉬운 말로 잘 풀어진 입문서나 개론서를 차분히 읽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좋은 입문서나 개론서를 통하여 고전이라는 텍스트의 주된 표현 기법과 서술 기법, 고사성어, 주요 인물들을 차근차근 익히고, 친숙해진 뒤 소위 기본기가 쌓인 뒤에 비로소 잘 번역된 고전에 도전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아가 시간적인 여유가 남는 사람이라면 한문이나, 라틴어 등등을 배워서 고전을 원전으로 읽는 시도를 해도 괜찮겠지만... 바쁜 현대인의 입장에서 그렇게까지 하기에는 무리가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는 냉정하게 말해서 이전에 통용되던 언어라 할 수 있는 한문이나 라틴어보다 영어나 중국어가 더 실용적이고 중요하다. 그러므로 무리해서 고전에 통용되는 언어를 배우기보다, 원전을 훌륭하게 번역하는 부분은 전문가인 학자들을 의지하고, 좋은 번역본을 통해 인문학을 배우는 것이 여러모로 현실적인 대안이 아닐까 생각한다.

 

《교육방법론》에 포함된 편지에서 가장 재미있던 부분은 바로 생활고를 이야기한 에라스무스의 투정이다. 당시 유럽의 15세기에는 오늘날과 다르게 인문학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요 학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무스는 돈 버는 게 힘들다고 투정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아마 에라스무스가 오늘날 밥벌이가 힘든 순수 인문학 전공자들의 모습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똑같이 배를 굶는 입장이지만 아마 인문학의 전성기 시절인 르네상스 시절에 태어난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대우받을 때나 대우받지 않을 때나 경제적인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순수 인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생활고를 고민했던 것 같다. 끝으로 《교육방법론》은 에라스무스의 대표작인 《아동교육론》과 깊은 연관을 지닌 도서다. 사실 이 두 도서의 핵심은 같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고, 내용상으로 볼 때 《교육방법론》은 《아동교육론》의 후속작 같은 느낌이므로, 가능하다면 두 도서를 함께 읽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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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군서 - 부국강병의 공격경영 전략서
상앙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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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을 읽으면서 전국시대를 종결한 진나라의 천하통일은 진시황제의 노력도 있었지만, 시황제 이전부터 통일의 준비를 차곡차곡 해왔다는 점을 알게 됐다. 이를 통해 커다란 사업이나 정책은 장기간의 기간을 거쳐 역량의 축척을 바탕으로 성사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데, 진나라의 통일 역시 마찬가지다. 시황제 이전 진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군주는 대표적으로 두 사람을 꼽을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진 목공의 시대였고, 두 번째는 진 효공의 시대였다.

 

목공은 춘추시대에 진나라의 국력을 처음으로 만방에 알린 지도자로, 춘추오패에 거론되는 명군이기도 하다. 물론 춘추오패에 다섯 명의 영걸은 사람에 따라 거론하는 인물이 다른데 대체적으로 제 환공, 진(晉 - 천하통일하는 시황제의 진나라와 다른 나라) 문공, 초 장왕, 오 합려, 월 구천을 꼽는데, 여기에 진 목공과 송 양공, 월 부차가 추가되기도 한다. 아무튼 진 목공은 춘추오패로 거론될 정도로 진나라의 세를 대외적으로 과시한 인물이다. 목공 이후 진나라를 부흥시킨 인물은 진 효공인데, 이 때 진 효공의 개혁 정책에 앞장서서 진나라를 법치주의로 바꾼 인물이 바로 《상군서》의 저자 상앙이다.

 

진 효공은, 진 목공과 같이 대외적으로 진나라를 크게 넓히진 않았지만, 대내적으로 법가에 입각하여 체제를 정비하여, 내부 통치를 안정화시켰다. 《상군서》는 진 효공의 개혁을 추진한 상앙의 법치주의를 담은 고전으로, 책에서는 당시 상앙이 추진했던 법치 정치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조직이 흥할 때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나타나는데, 이를 크게 두 가지로 집약해보면 '제도'와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상앙의 《상군서》는 나라의 제도적인 부분을 뜯어고치는데 중점을 뒀다. 법에 근거한 정치, 그리고 군사 조직의 개편은 결국 진나라의 외형적인 제도를 뜯어고치는 것들이며, 진 효공은 이런 상앙의 변법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수용하였다. 그 결과 진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부국강병에 있어서 훨씬 우위에 있게 되었다.

 

이런 의문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럼 상앙의 《상군서》는 국가의 외면적인 제도에만 집중하는 부국강병만 다루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상군서》는 표면적으로는 엄격한 법치와 군사 시스템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러한 제도의 바탕을 이루는 내면에는 '인간의 이기심'이 있으며 이를 깊이 있게 이해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상앙은 《상군서》를 통해 말한다. '백성들이여, 법을 지켜라. 그리고 군대에 가서 노력해라. 그러면 너희에게 돈이 떨어질 것이다. 너희가 군공을 세운 만큼 국가는 보상할 것이다. 법을 지키는 자는 떡을 줄 것이요, 법을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할 것이다. 법만 지키면 너희가 바라는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고, 나라에 공을 세우면 그러한 공에 합당하게 신분 상승을 약속할 것이다.' 이는 결국 제도적인 시스템을 움직이는 것은 인간의 이익이며, 백성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그들의 욕망이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인정한 셈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이기심을 적극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 정책에 적용한 상앙의 철학은 당대에 모럴리스트들인 유가 학파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백성들은 이렇게 엄격한 상앙의 변법에 불만이 없었을까? 당시의 기록으로는 백성들이 대체로 상앙의 변법을 반기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상앙의 변법은 피지배층뿐만 아니라 지배층과 특권 계층인 귀족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고, 귀족들 역시 세습적으로 누리는 특권들을 포기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당시 전국시대 나라는 귀족과 특권 계층은 엄청난 특권이 주어졌고, 커다란 공이 없이도 지위를 세습하며 권력을 누렸었다. 이러한 예를 우리 역사에서 들어보자면 멀리 갈 것도 없이 조선 왕조의 양반 계층을 생각하면 된다. 그들은 문벌에 의지하여 각종 세금으로부터 자유로웠으며, 신분적 특권을 누렸는데, 전국시대의 분위기도 이와 같았다. 아무튼 이런 세습적인 특권이 상앙의 변법 아래에, 제약을 받기 시작했다. 나아가 상앙은 커다란 특권을 누리는 귀족들에게 누진세를 강하게 주장하여 귀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진 효공의 입장에서는 상앙의 변법론을 잘만 이용하면 거대 문벌을 이루는 신권 세력을 탄압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으니, 상앙의 개혁론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다. 아무튼 진나라는 상앙의 개혁 아래에서 나라의 하드웨어를 대대적으로 뜯어고쳤다. 그리고 이런 역량을 바탕으로 진시황제 때에 천하통일을 달성한다.

 

《상군서》를 보면서 상앙의 제도의 장점을 정리해보자면 첫 번째로 상벌이 명확하다는 점, 두 번째로는 배경이나 연줄이 아닌 실력 위주의 인사배치를 지향한 점, 세 번째로는 법을 통하여 국정 정책에 기준을 세웠다는 점, 네 번째로 병농일치의 군사력 확대를 꾀했다는 점, 다섯 번째는 인간의 이익을 부정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긍정하며 받아들인다는 점 등이다. 그럼 반대로 단점을 꼽아보자면, 첫 번째로 극단적으로 전제 왕정을 옹호하는 사상, 두 번째는 극단적인 법치주의를 주장하여 사회의 경직성을 조장할 수 있다는 점, 세 번째는 농사를 중시하고 상공업을 멸시하여 상품 경제의 발전을 저해한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상군서》에는 유가 학파의 철학을 비판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요지는 다음과 같다. '유가 학파들은 말만 하면 상고시대의 법과 제도를 계승하고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오늘날의 시세는 상고시대와는 전혀 다르므로, 오늘날에 맞게 현실성 있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기에 상앙은 《상군서》를 통하여 약육강식이 빈번한 전국시대에 맞는 시스템은 법을 중심으로 한 법가 사상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결국 '사회의 진보는 현실성을 바탕으로 한 개혁을 성사시켰을 때 이뤄진다.'라는 논리로 정리할 수 있는데, 이러한 논리는 상고 시대의 복고주의를 주장하는 유가 학파의 사상에 비해 굉장히 융통성 있고 현실을 고려했다는 부분에서 높게 살 만하다.그렇기에 상앙의 논리를 고려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상군서》는 뛰어난 고전이다. 중국의 제도는 진나라의 통일을 기반으로 하여, 진의 제도를 계승하고 발전시켜왔는데, 그런 시발점이 바로 상앙의 변법에서 시작됐으니, 어찌 보면 중국의 왕조국가들의 틀은 상앙으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21세기의 오늘은 상앙이 살던 왕조 중심의 국가와는 다르다. 제도도 다르고 시민들의 위치와 권리 역시도 상앙의 시절과는 상이하다. 그러므로 상앙이 주장했던 《상군서》를 오늘날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오늘날 시류에 비교해볼 때 현실적이지 못한 부분이 많으니까. 그러므로 상앙의 철학은 중국 제도사에 있어서 역사적인 의의가 있지만, 오늘날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적용하려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다만 상앙이 법치주의를 통해 주장하고자 했던 내용 중에서, 조직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상벌이 명확하고, 법에 만인이 평등해야 하며, 능력을 우선하여 인재를 선발해야 한다는 제도의 필요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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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우스 로마사 2 - 끝나지 않는 전쟁 리비우스 로마사 2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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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본 《리비우스 로마사 2》 권은 원전의 6,7,8,9,10권으로 구성됐는데 주요 내용은 삼니움 전쟁이다. 갈리아 내전을 통해 한차례 호되게 털린 로마는 기존의 잘못을 반성하고 분골쇄신하여 국가 재건에 앞서는데, 리비우스는 그런 로마의 행동을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리비우스 로마사》의 출간 이래로, 이 책의 핵심 부분은 초기 공화정 로마가 어떤 제도와 정신을 가졌기에 그토록 위대해질 수 있는가를 디테일하게 다룬 1 ~ 10권 부분이라고 하는데, 이번에 번역본 《리비우스 로마사 2》 권이 발매되면서 《리비우스 로마사》의 가장 핵심 노른자를 모두 번역한 셈이다. 《군주론》의 마키아벨리도 방대한 《리비우스 로마사》 중 초반부 1 ~ 10권을 읽고 《로마사 논고》라는 해설서를 펴냈다.

 

지금까지 번역된 《리비우스 로마사》를 읽으면서 나는 작은 로마가 어떻게 그토록 위대해질 수 있었는지, 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번역본 2권을 완독한 결과 나름대로 로마가 위대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주관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책의 해체에는 역자가 매우 디테일하고 심도 있게 로마의 성공 요인을 분석했지만 이 분석을 참고하여 내 의견을 첨가하여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모든 조직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데, 첫 번째는 제도적인 부분이고 두 번째는 구성원의 의식적인 부분이다. 초기 로마 공화정 역시 이 두 가지 요소를 200% 충족시키고 있는데 먼저 제도적인 측면을 살펴보자.

 

우선 로마의 제도는 주변국에 비해 굉장히 진보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공화정이 들어선 뒤로 로마는 한 사람의 집권자가 독점적으로 만년 독재를 하는 정치 시스템이 아니라, 집정관, 귀족의 원로원, 평민들의 민회,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 독재관 등등의 여러 구성원이 상호 조율하여 국가를 이끌어나갔다. 물론 이런 시스템은 일당 독재 체제에 비해 내부적인 갈등 요소가 많지만, 한편으로 보자면 특정 가문이나 세력의 장기 집권을 배제하고 있어서, 소위 고인 물이 썩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 시스템뿐만 아니라 로마를 강대국으로 만든 데에 가장 중요한 공헌을 한 군사 제도 역시 주변 국들에 비해 탁월했다. 로마군의 전술을 어찌 보면 정형화된 포진법을 사용하여 권모 위주의 동양 병법에 비해 단순한 느낌이 들었지만, 힘과 힘이 격돌하는 백병전에서는 최적화된 조직화로 인해 백전백승을 자랑했다. 백병전을 담당하는 강력한 보병, 그리고 양익에서 적들을 혼란에 빠트리는 기병 부대의 융통적인 활약, 거기다 뛰어난 연설로 제장들의 자부심과 명예욕을 고취시키는 지도자의 웅변까지, 이런 최적화된 군 시스템 덕분에 로마는 주변 이탈리아 부족들 간의 싸움에서 매번 승리를 점할 수 있었다.

 

또 하나, 로마의 제도에서 가장 뛰어난 점은 바로 상벌이 공정한 성과제 시스템이다. 이런 성과제 시스템은 시대가 지날수록, 평민들의 군사적 정치적 참여권을 확장시키는 계기로 작용했으며, 귀족들 역시 문벌 가문에 의존하기보다 평민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실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정치력과 군사적 업적을 경쟁할 수밖에 없었다. 평민들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의 능력을 통하여 공직에 임용될 수 있었고, 집정관, 나아가 독재관에 임명되어 군공을 세우면 로마 장군들이 꿈에 그리는 개선식을 개최할 수 있었다. 전쟁에 나서는 사병들 역시 공정하게 전리품을 배정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고, 지휘관들은 병사들의 그런 노고를 잊지 않고 치하하였기에, 여타 다른 부족들의 군대에 비해 로마의 군대는 사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거론할 제도는 탁월한 식민지 정책이다. 역자가 해설에서 잘 설명하듯 로마의 식민지 정책은 무조건적으로 무력을 앞세우지 않고, 정복할 식민지와 동등한 조건으로 우후죽순 연합하여 세를 불리는데 급급하지 않았다. 로마는 외교를 통해 동맹정책을 앞세워, 로마의 우위를 기점으로 하여 세를 불렸고 이를 군사력으로 고착화하였다. 즉 겉으로는 부담 없이 친하게 다가갔지만 복종하지 않을 시에는 온갖 명분을 같다 붙인 뒤, 군사력을 앞세워 해당 도시를 토벌했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이런 식민 정책이 성공할 수 있는 가장 큰 원인은 강력한 군사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까지가 내가 확인하고 정리한 로마의 제도적 위대함이다.

 

그러나 아무리 제도가 뛰어나더라도, 이를 행하는 사람의 의식이 따라오지 않는다면 한계가 있다. 사실 세상에 통용되는 모든 제도는 나름의 공과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약삭빠르거나 약은 사람들은 아무리 뛰어난 제도라 하더라도, 그런 제도의 틈을 노려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거나, 공적인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뛰어난 제도가 제대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집단의 의식 역시 뛰어나야 하는데, 공교롭게도 《리비우스 로마사 2》권에 나오는 로마인들의 의식 역시 그들의 뛰어난 제도에 비해 부족함이 없었다.

 

그럼 로마인들의 의식은 어떤 점에서 특별한 것일까.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점은 바로 '비르투스' 라는 개념이다. 서양 역사서에서는 운명과 인간의 역량을 두고 매우 대조적인 시각으로 개념화하여 해석했는데, 이에 대표적인 개념인 바로 운명을 상징하는 '포르투나' 그리고 포르투나와 대조적으로 인간의 역량을 상징하는 '비르투스'가 있다. 비르투스라고 하면 《군주론》의 저자로 유명한 마키아벨리가 주장한 비르투가 떠오르는데, 엄밀하게 말해서 마키아벨리가 주장한 비르투의 개념은 비르투스에서 변형시켜 독자적인 해석을 부여한 마키아벨리만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리비우스 로마사》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등의 로마 고전에 나오는 '비르투스' 개념은 마키아벨리의 '비르투'와 뜻과 느낌에서 차이가 있다.

 

비르투스는 운명을 뜻하는 포르투나와 대조적인 개념으로, 인간의 역량, 그리고 인간이 주도적으로 행할 수 있는 능력 내지 도덕적인 품성 등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마키아벨리가 강조하는 비르투는 비르투스보다 좀 더 강하고 남성적인 느낌을 강조하고 있으며, 인품과 덕성에 대한 부분보다는 정략적이고 현실적인 판단력을 추진할 수 있는 역량 쪽에 중점을 두고 개념화한 단어다. 그런 면에서 비르투스는 비르투가 강조하는 남성적인 힘과 역량, 현실적인 판단력을 포함하고 도덕적인 품성과 부드러운 인품에 대한 부분도 포괄하고 있는 덕목이니 어떻게 해석해보면 비르투보다 훨씬 광범위한 범위를 다루고 있는 개념이다. 《리비우스 로마사》 외에도 비르투스를 다루고 있는 로마 고전은 유명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다. 《영웅전》에서 나온 비르투스 역시, 《리비우스 로마사》에 나온 비르투스와 비슷한 뉘앙스인데, 대체적으로 도덕적인 품성 쪽으로 치우친 개념 같았다.

 

아무튼 《리비우스 로마사 2》에서는 위기의 순간마다 여러 인물들이 나와서 각자 개성 있는 비르투스를 보여주며 로마라는 조직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공헌한다. 로마를 다시 재건한 카밀루스의 진취적인 비르투스, 갈리아족과 싸울 때 1:1의 일기토를 통하여 남성적이고 마초적인 비르투스를 과시한 만리우스와 발레리우스. 독재관으로 임명된 뒤 군법을 어긴 아들을 참수하며, 조직의 기강을 세운 만리우스의 강직한 비르투스, 땅에 떨어진 군대의 사기를 위해 2대에 걸쳐 목숨을 봉헌하여 희생한 데키우스 부자의 살신성인 비르투스, 독재관 파피리우스와 사마관 파비우스는 앙숙이었지만 어려운 전쟁 앞에서 사적인 감정을 죽이며 공의를 앞세웠는데 이 역시 하나의 비르투스로 볼 수 있으며, 삼니운 군의 계략에 빠져, 포위되었을 때 결사항전을 고집하기보다, 로마의 미래를 위해 훗날을 기약하며 치욕을 감내한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의 결단도 어떻게 보자면 비르투스의 일종이다. 이렇듯 로마인들은 그들만의 비르투스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런 각자의 개성 있는 비르투스를 통하여, 로마의 운명을 개척하고 개선해나가는 데 앞장섰다. 이런 로마인의 비르투스 정신은 그들의 선공후사 정신, 그리고 공리주의 정신과 결합되어 로마를 지탱하는 강한 정신적인 유산으로 남게 된다.

 

비르투스 외에도 또 다른 정신적인 유산을 거론하자면 바로 '독재에 대한 거부감, 공화정 시스템에 대한 애정'이다. 이 시기의 로마에 살았던 사람들은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독재를 경멸했다. 그렇기에 국가에 위급한 상황이 일어나 막강한 권력을 일시적으로 휘두를 수 있는 독재관이 임명된다 하더라도, 독재관은 자신의 임무를 마치는 순간 주어진 권력을 이어가기보다 재빠르게 사임하였다. 공화정의 로마 시민들은 특정 세력의 고착화, 특정 세력의 권력 남용 등등을 가장 경멸했다. 이는 기득권인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그랬기에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고 영원토록 누리려고 하기보다, 상호화 견제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공화정 시스템을 수호하는데 앞장섰다. 평민들 역시 자신들의 정치 권한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점차적으로 공직의 주요 요직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랬기에 로마는 특정 세력이 독점하여 부패로 이어지는 왕조 국가의 시스템과는 다르게, 권력의 상호 견제를 통하여, 건설적이고 역동적으로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리비우스가 살았던 시기는 아우구스투스가 왕정을 시작한 시기였는데, 《리비우스 로마사》를 통해 리비우스는 우회적, 직설적으로 공화주의 정신의 상실을 아쉬워하고 있다.

 

이렇듯 로마는 제도적으로도, 의식적으로도 다른 국가에 비해 월등하게 뛰어났다. 이런 역량을 바탕으로 로마는 삼니움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이탈리아반도의 패권을 차지했고, 나아가 포에니 전쟁을 통해 국제적인 세력으로 성장한다. 앞으로 발간될 《리비우스 로마사 3》 권에서는 2차 포에니 전쟁을 다룬다고 하니 매우 기대 중이다.

 

책의 해설에서는 《리비우스 로마사》와 사마천의 《사기》를 비교 대조하고 있었는데, 동양 역사서를 주로 읽었던 나로서는 매우 흥미로운 화제였다. 전체적으로 역자의 해설은 타당한 분석이라 생각했지만 개인적으로 사견을 덧붙여보자면, 《리비우스 로마사》와 《사기》는 서술 방식에 있어서도 공통점이 발견되는 고전이다. 《사기》를 읽어본 사람은 알다시피 사마천은 《사기》를 만들기 위해 대륙을 주유하고, 사료를 모았다고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사마천은 민간의 이야기를 부분적으로 차용하여 스스로의 뛰어난 필력을 바탕으로 문학적인 묘를 살려 《사기》를 완성한다. 그렇기에 냉정하게 독서하다 보면 《사기》에는 사마천이 자의적으로 포함한 이야기, 의도적으로 사실을 비틀어 서술한 대목을 찾을 수 있다. 《리비우스 로마사》 역시 마찬가지다. 《리비우스 로마사》도 기본적으로는 진실을 바탕으로 전개하지만 리비우스는 독자들을 위해 약간의 허구를 포함시켰는데, 대표적인 부분이 바로 영웅들의 연설이다. 《리비우스 로마사》에 나오는 연설은 역사적 사실과 상황을 토대로 리비우스가 자신의 뛰어난 수사술을 동원하여 재구성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연설 대목이야말로 리비우스라는 저자의 웅변과 수사법이 얼마나 뛰어난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즉 두 역사서 모두 원저자에 의도에 따라 자의적인 허구가 들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게다가 두 역사가의 서술 방식도 문학적인 색깔을 가졌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가진다. 사마천의 《사기》는 역사서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소설 장르의 탄생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책이다. 《사기》가 오늘날까지 그토록 유명한 이유를 꼽으라면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역사 서술법과 다르게 생동감 있고, 마치 소설을 연상시키는 필력을 가졌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그렇기에 몇몇 학자들은 《사기》를 두고 역사서의 탈을 쓴 소설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리비우스 로마사》 역시 마찬가지다. 리비우스의 필력 역시 사마천에 못지않은 문학적인 표현과 수사법이 나오는데, 특히 전쟁의 모습을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부분이나 정치적인 갈등을 설명하는 과정, 특정 인물의 개성적인 포인트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생동감 있는 서술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문학적인 표현이 가득한 역사서라는 점에서 두 책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최근 나는 《자치통감》 완역본을 정주행하고 있는데, 마침 내가 읽은 부분이 전한, 서한 시대의 몰락까지인데, 시대적으로 《리비우스 로마사 2》 권의 시대와 겹친다. 상이한 문명의 역사를 두루 읽다 보니 동양과 서양 문화의 이질적인 부분과 이질적인 사고 관념이 새삼 느껴졌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사회문화 시간에 사회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을 배웠는데, 기능론과 갈등론이다. 거친 비유일 수 있겠지만 동양의 역사를 쭉 살펴보면 기능론이 떠오른다. 동양의 역사는 절대 권력을 지닌 최고지도자가 권력을 통해 사회 안정을 가져오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두고 있다. 반면 《리비우스 로마사》로 바라본 로마의 역사는 갈등론에 가깝다. 공화정이 중심인 로마 역사는 절대 군주가 독재적으로 정치를 운영하는 동양의 정치와는 전혀 달랐다. 절대 권력자가 없는 로마의 공화정은 늘 갈등의 연속이었다. 시민 계급과 기득권인 귀족 계급은 시도 때도 없이 치고받고 싸웠으며, 밖으로는 이민족들과 정복 전쟁을 계속했다. 신기한 점은 우리가 생각할 때 일반적으로 갈등이 심화되면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법 한데 로마는 아니었다.

 

어찌 보면 로마가 큰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에는 '갈등'이라는 요소가 가장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갈등이 극도로 심화되고 타협될 여지가 없이 흘러간다면 이는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겠지만, 다행히도 공화정 시기의 귀족과 평민들은 극단적으로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갈등은 지양했다. 그들은 서로 싸우다가도 힘을 합쳐야 할 때가 오면 때로는 귀족이 양보하기도 하고 때로는 평민이 양보하며, 그렇게 힘을 합쳐 국난을 극복했다. 그런 갈등 속에서 점진적으로 평민들의 권한이 높아졌으니, 하층민의 인권과 복지도 발전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점은 그저 동양의 왕조 국가에서 상류층에 복종과 수탈을 당연한 의무로 알았던 백성들에 비해 훨씬 능동적이고 역동적이다. 그리고 이런 전통이 있었기에, '인권 운동과 신분제 해방 운동이 서양에서 시작된 것이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결과론적으로 볼 때 로마의 발전은 '적절한 갈등'에서 찾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이번 책은 《리비우스 로마사 1》이 나온 지 무려 1년 만에 발간됐다. 사실 《리비우스 로마사 1》권을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후속작을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는데 이렇게 발간되니 오랜 지기 벗을 만난 것처럼 매우 기쁘다. 이번 번역도 매우 깔끔했고, 술술 읽혔으며, 특히 해설에서도 역자의 해박한 분석도 좋았다. 다음 책의 테마는 포에니 전쟁이라고 하는데, 저 유명한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대결을 읽을 수 있을 테니 매우 기대가 크다. 얼른 발간이 되었으면 좋겠고, 개인적인 바람을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리비우스 로마사》를 축약한 고전 텍스트를 한 권 더 번역해서 완역본 4권, 그리고 축약본 1권 해서 5권 구성으로 《리비우스 로마사》를 마무리하는 건 어떨까 싶다. 오래간만에 지적인 희열과 가슴 벅찬 감동을 듬뿍 느끼며 읽었던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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