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태종실록 : 재위 11년 -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이한우의 태종실록 11
이한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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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게 흘러간 한 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에 조정을 가장 시끄럽게 만든 사건을 꼽으라면 당연 '이색비문사건'이다. 이색비문사건은 여말선초 유림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목은 이색의 저서와 행장이 중국인 사대부에게 전해졌는데, 대륙의 사대부는 목은을 사모한 나머지 비문을 써서 이색의 친인척에게 내준 것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동방의 선비를 대륙에서 열렬히 추모하는 모습은 표면상으로 볼 때에는 국위를 선양한 공으로 추앙할 수 있겠지만, 논란의 주인공이 이색이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이색은 고려조에 충성을 유지했던 인물로,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와 정치적으로 꾸준히 대립했다. 그렇다 보니 이색의 행장과 저서는 필연적으로 신생국 조선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나라를 개국한 아버지 태조, 그리고 신생국 조선의 입장이 있다 보니 태종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대륙 명나라에 눈치를 보는 신생국 조선 입장에서 개국에 대한 부정적인 글이 퍼지기 시작하면 외교에 있어서도 좋을 것이 없으니 민감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문제는 이색의 행장을 쓴 사람이 바로 태종대에 문신으로 활약했던 '권근'과 태종 정권의 핵심 중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하륜'이었다는 점이다. 이 두 사람은 이색이 살아있을 당시에는 이색을 스승으로 모셨기에, 그와 정치적인 행보를 함께했다. 그렇다 보니 이색이 죽은 뒤 이들이 남긴 행장에는 조선과 태조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글을 남겼다. 훗날 두 사람은 조선의 태조, 태종 정권에서 고관 대작으로 활약하는데, 젊은 날에 썼던 글이 그들의 발목을 뒤늦게 잡은 셈이다. (물론 이 시기 권근은 죽고 살아있는 사람은 하륜뿐이었다.) 권근과 하륜은 이색을 기린 글에서 '이색이 권력을 가진 사람의 농간으로 인해 배척받았다.'라는 내용을 썼는데, 핵심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삼척동자가 봐도 이는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태조 이성계를 지칭하는 것임을 쉽게 유추할 수 있는데, 이를 태종이 꼬집고 나선 것이다.

 

여기서 흘러가는 구도가 참 흥미롭다. 태종은 이색이 죽은 뒤 이런 글이 세간에서는 널리 통용되고 있는데 아무도 이런 문제를 알려주지 않다가, 명나라에 의해서 문제가 제기되니, 그제서야 신하들이 권근과 하륜를 벌주라고 하는 부화뇌동한 행위에 대해 강렬하게 서운함을 내비쳤다. 태종 입장에서는 이색의 글이 널리 유포될 경우 아버지이자 나라의 건국자인 태조의 악덕을 강조하는 꼴이므로, 당연히 이를 저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하륜 역시 자신을 변명하는 글을 무려 네 차례나 올리며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하륜의 말로는 권력자를 지칭한 것은 태조가 아니라 정도전과 조준과 같은 무리였다고 했는데, 영명한 태종은 이런 하륜의 변명을 보고 '권력자는 분명 태조를 지칭한 것이며, 만약 태조가 나라를 얻지 못했을 정도전과 조준의 무리처럼 같이 비유됐을 것이다.'라며 사안을 확실히 분별해낸다. 이렇게 태종의 마음이 선 것을 확인하자 공신과 의정부, 그리고 대간의 신료들은 한목소리로, '하륜'을 지목하여 강도 높은 탄핵을 시도한다. 문제는 태종이 하륜을 처벌할 마음이 없었다는 점.

 

덕분에 하륜은 엄청난 정치공세의 탄핵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안이 이렇게 흘러가자 신료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나뉘는데, 언론 비판을 담당하는 대간들은 하륜과 권근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고, 조선 개국에 깊이 있게 관여했던 의정부의 고관들은 국초 혼란한 시기 빚어진 일이므로, 좋게 좋게 넘어가며, 정도전 역시 나름의 공이 있으니 태종도 아량을 베풀 것을 간접적으로 요구했다. 이런 의견 차이는 의정부와 대간들의 정쟁으로 이어갔고, 태종은 글에 표현된 권신은 정도전이었다고 결론지으며, 사퇴한 하륜을 다시 등용하는 것으로 사건의 마무리를 지었다. 태종은 왜 이런 소동을 일으킨 것일까.

 

두 가지 정치적 의도였을 것이다. 첫 번째는 소동을 통해 조선 건국에 대한 정통성을 대내적으로 다시금 세우려고 했을 것이고, 두 번째는 바로 하륜에 대한 경고가 아닐까. 태종은 하륜을 신임하고 다른 신하에게 보이지 않은 특혜를 베풀었지만, 특혜가 많은 만큼, 정치적 견제가 필요했다. 하륜이 아무리 눈치가 빠르고 태종의 마음을 잘 읽는 노련한 정치인이라지만 태종 입장에서도 너무 한쪽에만 의존하기보다는 이렇게 긴장감을 조성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정치적 긴장과 이완을 반복함에도 불구하고 고관 대작 중 하륜만큼은 목숨을 끝까지 보존할 수 있었으니, 태종 시대의 중앙 권신 중에서는 드문 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이번 권도 두툼했는데 대체적으로 나라가 안정돼가는 모습이 잘 나타났다. 특히나 예조의 상서가 많은 것으로 봐서, 국가의 정신과 예의 규범을 집중적으로 정리하는 데 노고를 쏟았는데, 나라가 이런 정신적인 영역에 공을 들인다는 것은, 기본적인 물적 토대를 어느 정도 구축한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하기에, 국초의 어수선한 나라의 분위기를 나름 안정화시킨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별다른 큰 사건은 없었던 평탄한 한 해지만, 그래서인지 유독 이번 권을 보면서 태종 주변의 인물들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먼저 태종의 복심 중 복심이라 할 수 있는 하륜!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벌써 죽어도 남았을 정도의 탄핵을 받고도 여러 번 살아남은 하륜의 장수 비결은 무엇일까. 첫 번째로 유능함이다. 미우던 곱던 태종에게 있어 신하 평가 대상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능력인데, 하륜은 나름의 비리와 문제가 있더라도 독보적인 일처리 능력을 보여줬다. 그래서 이색비문사건을 통해 집중적인 탄핵을 받는 하륜을 두고 태종은 '그를 대신할 사람이 없다.'라고 이야기하며, 더 이상 그를 건들지 말 것을 이야기했다. 정도전이 태조 시대의 상징적인 관료라면 하륜은 태종 시대를 대표하는 관료다. 이렇듯 태종은 자신의 정권을 대표하는 상징성을 지닌 하륜을 쉽게 내치지 않았지만, 일말의 견제의 필요성은 느꼈기에 물밑에서 신료들을 움직여 대규모 탄핵의 움직임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는 하륜의 권력에 대한 무욕이다. 하륜은 사소한 재물에 대해서는 욕심을 부리곤 하였지만 임금의 권력에 대해서는 탐한 적이 없다. 그는 태종에게 무리한 정치적 요구를 하지도 않았고 정치적으로 눈밖에 나는 짓 역시 최대한 자제하려고 노력했다. 게다가 그는 태종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다. 태종은 늘 자신의 사후 권신들이 권력을 좌지우지할 것을 걱정했는데, 최소한 이런 면에서는 하륜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하륜 외에도 정권 후반기에 자주 거론된 신하는 우의정 조영무와 박자청이다. 이번 책에서 이 둘은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되는데, 공통점으로는 선비 출신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영무는 무인 출신으로 글을 모르는 사람이었으며, 공조판서 박자청 역시 신분도 별 볼일 없는 데다 학문에 대한 교양은 없지만 공사에 관해서는 최고의 전문가였기에 고관 벼슬에 이르렀다. 기본적으로 실록을 쓰는 사관은 선비, 유림 출신이다. 그렇다 보니 이들은 글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을 은연히 깔보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두 사람을 비판하는 글에서도 선비 특유의 오만한 뉘앙스를 느낄 수 있었다. 다행히도 태종은 조영무와 박자청을 두둔하며, 두 사람이 교양은 떨어지더라도 실무에 능한 인물들이니 학식을 가지고 그들의 자존심을 건들지 말 것을 명하기도 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태종은 매우 탁월한 군주였다. 능력이 있으면 설사 교양이 모자라더라도 그 재능을 귀하게 여겨서 등용했는데, 아마 이 두 사람이 고관 대작에 이르게 된 것도 좋은 인군을 만난 결과라고 볼 수 있겠다.

 

사형당한 민무구 민무질과 대척점에 있던 이숙번 역시 부정적으로 기록된 사례가 나오는데, 아들에 대한 청탁 때문이었다. 이숙번은 자신의 장인이 중국에서 죽었기에 어디 있는지 찾고 싶어서 사신단에 자신의 아들을 넣어주길 부탁했다. 태종은 이를 수락하고 사신단의 가장 낮은 직급이자 사신단의 물건을 감수하는 '타각부'에 이숙번의 아들을 보냈다. 이에 이숙번은 태종을 만나 번거로운 자리니 타각부보다 더 편한 자리로 배정해 줄 것을 원했지만 태종은 '집안 어른의 유골을 거두러 가는데 사신단에 참여시켜주는 것만 해도 고맙다고 할 것이지, 큰 자리를 요구한다.'라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이숙번이 이런 무리한(?) 요구를 한 배경은 무엇일까. 아마도 경쟁자였던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몰락했으니, 권력이 축이 이숙번 쪽으로 많이 기울었고 그에 막강한 권력을 가졌기에 이런 요구를 한 것은 아닐까. 이런 안하무인한 태도를 태종 역시 잊지 않고 있었으니, 이숙번이 훗날 권력에서 실각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실 이번 권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인물은 세자다. 세자가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에 나서기 시작했지만, 그와 더불어 태종 집권 말년기까지 뼈아프게 발목 잡는 '양녕의 일탈' 역시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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