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태종실록 : 재위 10년 -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이한우의 태종실록 10
이한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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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해 나오는 《태종실록》 원전 완역 번역본을 읽을 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무슨 재미로, 조선왕조실록 원전을 읽느냐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첫 번째 이유는 역사를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인문학 장르를 크게 나누면 문학, 역사, 철학으로 나눌 수 있는데, 내가 가장 매력을 느끼는 분야는 역사가 첫 번째고, 철학이 두 번째며, 문학이 마지막을 차지한다. 그렇기에 《조선왕조실록》을 원전 번역본으로 읽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역사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역사 고전의 90%는 정치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순수 인문학을 떠나, 사회과학 중에서 가장 흥미를 느끼는 부분은 정치인데, 공교롭게도 과거의 역사 기록은 정치사를 다루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당대 최고 권력자들이 벌이는 리얼 '왕좌의 게임'에 대한 기록이 바로 '정치사 고전'이며, 《조선왕조실록》 역시 이를 대표하는 텍스트다.

 

아무튼 권력에 대한 탐구, 인간에 대한 욕망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나이기에, 그런 인간들의 흔적이 가득한 역사 정치 고전을 매우 애정 하며, 《조선왕조실록》 역시 이러한 이유로 애독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중 내가 주로 보고 있는 《태종실록》은 조선 임금 중 가장 정치력이 뛰어난 태종 집권기를 다루고 있다. 고루한 내용도 많지만, 그럼에도 정치력 9단의 태종의 처세를 해석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처음 《조선왕조실록》을 읽을 때에는 실록이라는 형식이 익숙하지 않아서, 읽는데 애를 먹었지만, 태종 재위 10년까지 읽으니 실록에 대한 기술 형식이 익숙해졌고, 어느 사안이 중요하며, 어느 사안이 중요하지 않은지, 그리고 태종이라는 임금이 어떤 취향을 가지고 어떤 패턴으로 신료들을 제압하는지 대략적으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실록의 기록은 늘 이런 식이다. 큰일, 전쟁, 사형이 일어나기 전에 날씨나 별의 움직임을 통하여, 혹은 중요한 요직에 인사교체 등등을 통하여 큰 사건이 일어날 것을 예고한다. 우리나라 정치사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정치사 고전도 대체로 이런 식이다. 그렇기에 정치사를 다룬 역사서를 읽을 때에는 주어진 텍스트를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안의 맥락을 잘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달달 암기하고 외우는 것은 역사 수업 시간이나 수험에나 어울릴 법 하지, 효용적인 역사 고전 독법과는 거리가 멀다.

 

역사 고전에 기록된 글들은 사소한 것들이더라도 '정치적 의미'를 내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나는 역사 고전을 읽으며 코멘트 속에 내포된 정치적 의미를 탐구하는데 주력했다. 그렇게 역사 고전을 읽다 보면 억지로 외우지 않아도 중요한 사건들은 저절로 알게 되며, 기록이라는 암호 속에 숨겨진 집권자의 심리와 당대의 정황에 더욱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물론 처음에는 내용 자체만으로도 따라가기 힘들고 어렵겠지만, 경험이 쌓이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접하는 것도 좋지만, 사고하는 과정 자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정치사 고전은 그런 사고력과 추론력을 키워주는데 정말 유용한 장르다. 게다가 이런 사고 훈련을 통해 얻은 추론력은 다른 장르의 독서 독해에도 적용할 수 있으며, 실질적인 사회생활에서도 '눈치'라는 덕목으로 전환하여, 처세에 있어서도 실용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물론 정치사 고전은 친절하지 않다. 과거 시대에 언어와 사고, 환경으로 기록된 문헌이기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나름의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이런 노력을 역사에 대한, 정치에 대한 '애정'으로 극복하고 받아들였다. 남들에게 나처럼 어려움을 '애정으로 극복하라고' 강권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진득하게 역사 고전을 파다 보면, 들인 노력 이상의 결과를 얻게 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게 강조하고 싶다.

 

책을 읽기 전 두께를 봤는데 이번 권도 두꺼운 편이었다. 실록의 두꺼운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신하들의 상소'가 대부분이다. 특히 이 해에는 내부적으로도 대외적으로도 커다란 사건이 많았고, 그랬기에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신하들의 상소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아무래도 처남인 민무구, 민무질 사건이다. 태종이 가장 많은 악평을 들은 이유는 처남인 민씨 형제들을 죽인 사건 때문이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처족을 죽일 수 있냐'라는 시각이 전통적이라면, 최근에는 그런 태종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재해석하는 사학자들도 많아졌다. 아무튼 그런 논란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처남인 민씨 형제들의 자진이 이번 권에 자세히 나와있다.

 

실록을 자세히 들여다본 사람은 알겠지만 태종은 공신들을 '쉽게' 죽이지 않으며, 웬만한 일탈 행동은 눈감아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재위 1년부터 10년까지 읽으면서 태종이 거물급 공신들을 쳐 낸 사례는 크게 세 가지인데 첫 번째 이거이와 이저 부자의 귀양, 두 번째 이무 일당의 사형, 세 번째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자진 명령이다. 이 외에도 숱한 일탈이 있었지만, 웬만한 일들은 눈감아주거나 '솜방망이'처방으로 경고를 준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나 태종은 공신 중에서도 인척 관계, 혈족 관계의 가족들에게는 권력의 노른자인 군권과 인사권을 겸한 자리에 배정하는 등, 파격적인 혜택을 줬다. 많은 공신들이 있지만, 왕도 사람이라서, 피와 혈연으로 맺어진 친족들을 우대하고 기대는 것이 당연했다. 태종도 예외일 순 없었다. 따라서 외척인 민씨 형제들 역시 마찬가지로 이런 혜택을 받았다. 그런데 왜 그들은 역적이 되어 자진으로 생을 마감해야만 했을까.

 

표면적으로 태종은 처남인 민무구, 민무질에 대한 귀양 원인을 '세자를 끼고 정권을 전횡하려고 했다.'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처남 처벌을 목적에 둔 정치적 명분에 불과하다. 내가 주목한 것은 민무질이 군부의 수장을 맡고 있을 때, 군인들이 왕명보다 민무질의 명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이다. 당시 태종은 이런 군부의 움직임에 '공가(公家)를 받쳐야 할 군인들이 특정 세력을 지지하고 있다.'라고 표현하며, 노골적으로 화를 냈다. 전근대 왕조시대의 역사를 살펴보면 왕조가 흥하느냐 망하느냐에 대한 기준은 개국 직후 3대(3代)에 달렸다. 보통 태조나 고조는 신생국을 개국한 것으로 생을 마치는 경우가 많고, 이후의 내부적인 정비는 태조 이후의 군주가 맡게 되는데, 이 국가 정비에 따라 나라가 장수 왕조가 될지 단명하는 왕조가 될지 결정된다. 태종은 자신의 사명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당시 조선은 개국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다, 왕자의 난 등으로 내외부적으로 어수선한 상태였다. 그래서 태종은 강력한 군권을 바탕으로 국가 제도를 하나하나 안정화시키기 시작했는데, 이런 권력의 원동력은 압도적인 우위의 군권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당시 군권은 권력의 핵심 중에 핵심이었다. 그런 권력의 핵심을 처남들에게 맡겼는데, 군부의 수장들이 왕가에 충성하기보단 민무질에 충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태종이 거사를 할 때, 앞장서서 칼을 휘둘렀던 공신 중에 공신이었다. 그렇기에 태종의 입장에서는 군권을 그들에게 맡긴 것은 그만큼 민씨 처가를 믿고 예우하고 대우해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결과 군부의 세력들이 민씨 일가들만을 생각하니, 태종의 입장에서는 처남들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실록을 보면 민무구, 민무질 형제들은 태종의 눈밖에 나지 않으려고 나름 조심한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정작 중요하게 조심해야 할 부분에서는 욕심을 부리고, 사소한 일탈만을 단속했으니, 민씨 형제의 좁은 정치적 시야가 결국 그들의 명을 단축한 셈이다. 만약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군권을 잡았을 때 사유화하지 않았더라면, 이숙번의 말로처럼 귀양 선에서 노후를 보장받았을지도 모른다.

 

태종은 재위 10년 상반기에 민씨 형제들을 주살하고, 하반기에 또 다른 인척인 이저를 다시 불러 등용할 것을 예고했다. 태종은 왜 갑자기 공신들에게 본보기로 내친 이거이의 아들, 이저를 재등용하려고 했을까. 아마 두 가지 목적이었을 것이다. 첫 번째는 민씨 일가의 주살을 통해 경직된 일가 종친들의 경계를 완화하려고 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아마 민씨 일가 처리에 대한 고통 때문이 아니었을까. 실록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처남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중전 민씨와의 불화가 크게 있었을 것이다. 민씨는 조선 중후기의 순종적인 여인이 아닌,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적극적인 성격의 여걸'이었으므로, 아마 드라마 '용의 눈물'의 장면처럼, 동생들이 죽어가는 과정에서 태종과 심하게 다퉜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태종이 이저를 다시 등용하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이다. 태종의 정치적 결단은 사적인 감정에 치우치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냉정한 분위기를 대체적으로 풍기는데, 이번 이저의 등용은 급조적이고, 감정적인 모습이 묻어났다. 그래서 신료들 역시 '태종답지' 않은 번복 결정을 두고 비판의 수위를 높였다. 이런 태종답지 않은 번복 결정을 한 결정적인 동기는 처남들의 숙청에 대한 아픔이 때문이 아닐까. 믿었던 처남들을 쳐내는 과정은 어쩔 수 없었지만, 태종도 인간이기에 슬픔을 칼로 무 자르듯 제거할 순 없었다. 처남의 빈자리는 또 다른 인척으로 채워야 했고, 그랬기에 감정적으로 이저를 등용하려고 무리수를 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책의 말미에서 태종은 자진한 민무구, 민무질의 동생이자 또 다른 처남들인 민무휼, 민무회를 봉군(封君)하여, 처가에 대한 기대와 애정이 식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표명하기도 했다.

 

아무튼 후대의 사람들은 이런 태종의 모습과 심리를 자세하게 알 순 없다. 그랬기에 처남을 죽인 결과만 보고 태종을 쉽게 냉혈안이라고 단정하는데, 전해오는 기록을 면밀하게 읽어보면 이 시기 태종도 알게 모르게 마음고생을 많이 했음을 느낄 수 있다. 책을 보면서 권력의 중심에는 아무나 가면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권력의 사유화를 방지하기 위해 처남을 쳐내는 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 아픔을 홀로 감내하며, 국가의 초석을 다졌기에 태종은 세종이라는 꽃을 활짝 피울 수 있었고, 조선을 장수 왕조로 만드는 기틀을 완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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