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화가 김홍도 - 붓으로 세상을 흔들다
이충렬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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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우리나라에서 풍류의 커다란 축을 읊어보자면 가장 으뜸이 바로 시(詩)이고 그다음이 서예(書)이며, 말미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미술(畵)이다. 그렇기에 지식인 층 가운데에 풍류를 아는 사람들은 이 세 가지에 두루 능통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세 가지 영역 중 가장 대우받는 것은 바로 시(詩)다. 중화문명의 영향이 짙은 동북아시아 국가에서는 유학의 아버지 공자가 시를 유난히 좋아하고 많이 읊었기에, 옳은 사대부가 아니더라도 즉석으로 시문을 짓지 못한다면 주변의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지도층은 풍류가 아닌 체면치레를 위해서라도 시문을 짓고 읊는 것에 공력을 다했다. 서예 역시 마찬가지다. 유학과 성리학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글씨란 글쓴이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사회의 기득권층은 태어나고 자라면서부터 글씨 연습을 시작으로 글공부에 물꼬를 트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시와 서예의 공통점은 바로 문자(文)와 관련이 있다는 것인데, 근대 이전에 시대에서는 문자란 지배층만이 향유할 수 있는 문화였으므로, 미술(畵)보다는 훨씬 격조 있는 대우를 받았다. 풍류의 말미를 차지하는 미술은 지배층이 좋아하고 향유하는 문화였지만, 글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기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두고 속된 말로 천박하는 등의 비하를 서슴지 않았다. 이런 시각이 무비판적으로 투영된 것인지, 예스러운 문화를 좋아하는 나에게 고문과 시문을 읽는 것은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그 외의 서예나 그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최근 이름난 절집들을 답사하면서 명필들이 남긴 편액을 읽고 분석하면서 서예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다. 편액과 주련을 읽어나가면서 풍류의 나머지 한 영역인 그림에도 호기심이 일어났는데, 서예는 그래도 사찰의 스님들이 자상하게 설명을 해주셔서 기본 지식을 습득하는데 크게 도움을 받았지만, 그림 쪽은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지 속 시원하게 알려주는 이가 없어서 답답했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그림 영역을 정복하기로 결심했다. 그 방식은 다음과 같다. 나는 모르는 분야를 새롭게 배울 경우, 그 분야의 역사를 우선으로 공부하는 습관이 있다. 가령 예를 들어보면 의학에 대한 지식을 배우고자 한다면, 의학에 대한 역사를 먼저 공부한다. 이럴 경우 고대 이래로 현대까지 의학이라는 분야가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거시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된다. 미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나는 미술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들기 전에 도서관에 들려 우리나라의 미술사를 개략적으로 설명한 책을 한 권 선별해서 차분하게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선 후기에 다다랐을 때,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겸재 정선과 민화에 있어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휘하는 단원 김홍도에 흥미가 갔다. 그래서 거시적인 미술사적을 잠시 뒤로하고 겸재와 단원에 대한 책을 검색해봤는데, 최근에 김홍도의 전기가 발간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얼른 구해 읽어나갔다.


나를 비롯한 미술에 문외한인 일반 사람들은 그저 교과서에서 민화의 대표작을 통하여 김홍도를 만난 것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김홍도는 많은 그림을 남겼지만, 오늘날 그가 남긴 자필은 전하지 않기에 그의 삶을 복원한다는 것은 어려움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시중에 파는 책들 가운데에서 김홍도의 삶에 대해서 디테일하게 기술한 서적은 의외로 찾기가 힘들다. 도서사이트에서 검색 결과 그림 작품에 집중한 책이 대부분이던데, 앞서 강조했지만 나는 배움에 있어 역사성을 우위에 두고 있기에 그림에 대한 자세한 설명보다는 화가의 삶에 대한 기록을 읽고 싶었다. 화가의 작품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화가의 삶을 먼저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김홍도의 삶을 서사적으로, 역사적으로 풀어낸 이번 신작에 기대가 컸다.


처음 책을 펼치면서 미술에 대한 지식이 없기에 너무 어렵게 쓰여 있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초반부를 읽어보니 배경지식이 없더라도 무난하게 읽히는 것으로 봐서 대중적인 눈높이를 적절하게 설정한 것 같다. 책은 평전이 아닌 전기이기에 김홍도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인 평가는 결여되어 있다. 그저 주어진 사료를 적절하게 분석한 뒤, 이를 토대로 김홍도의 삶을 풀어내고 있는데, 전통적인 문인들의 전기의 경우 그들이 남긴 수많은 기록을 통하여 그들의 삶을 해석하여 재구성한다면, 김홍도의 경우 그가 남긴 수많은 그림을 분석하여 작가(김홍도)의 심경을 풀어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자가 쓴 김홍도의 모습은 자의적인 해석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읽는 내내 공감을 하면서 읽어서 그런지 큰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책을 통해서 김홍도라는 인물에 대해 더욱 깊이 있게 알 수 있었다. 양반이 아닌 중인 출신, 그림을 그리는 능력은 출중했지만 상류층 양반들의 눈초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생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에는 표암 강세황과 심사정이라는 스승을 필두로 이인문, 강희언, 김응환 등등의 벗이 있었으며, 장사를 크게 했던 지인들로부터 커다란 후원을 받았다는 점 등등... 그는 중인이었지만 그림을 잘 그리는 능력 하나로 신분의 한계를 넘은 벼슬을 제수 받았으며, 결과적으로 당시의 평범한 중인들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았다.


물론 그의 인생도 굴곡이 많았다. 임금의 어전을 그린 공으로 벼슬을 얻은 그였기에, 벼슬길에 있어서는 괄시를 받기도 했으며, 녹봉이 없이 일을 한 경우도 꽤 있었다. 신분제 사회에서의 괄시, 그림을 그리는 직업에 대한 천대, 경제적인 곤궁함, 조정에서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녹봉은 나오지 않는 열정페이의 현실 등등...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김홍도는 현실의 난제한 어려움을 그림에 대한 예술혼으로 승화시켰다. 물론 세간에서 유명세를 치른 이후에는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보냈으며, 벗들과 나름의 풍류를 즐기기도 했지만 '치란무상'이라는 고사처럼 김홍도의 삶 역시 영화와 쇠락의 시기가 롤러코스터처럼 반복됐다.


김홍도의 일생을 보면서 생각한다. 그래도 이 사람은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보통 일반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에 재능이 있는지 알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김홍도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 그리고 자기가 가장 잘하는 일이 일치하며, 그 일에 몰두하며 한평생을 살다가 갔으니 그의 삶이 개인적으로 너무도 부러웠다. 또한 그의 주변에는 그를 도와줬던 많은 인맥들이 있었다. 양반이었지만 중인을 차별하지 않았던 스승 표암 강세황과의 인연, 평생지기라고 할 수 있었던 이인문과의 우정, 함께 산수를 거닐며 그림을 그렸던 김응환,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곁을 지켜줬던 수제자 박유정, 그리고 곤궁하고 어려웠던 시기에 경제적인 지원을 해줬던 거상들 인맥까지... 사람의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그 재능을 세상에 꽃피울 수 없는데, 김홍도의 경우 출중한 재능과 더불어 좋은 인맥들과의 만남이 절묘하게 어우러졌기에 붓으로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다르게 생각을 해 보자면 김홍도와 같이 출중한 재능과 인맥을 가진 사람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어려움을 겪었는데 아무런 인맥이 없이 평범하게 살다 간 일반적인 민초들의 경우는 어땠을까. 그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편이 저려온다.


보통 김홍도의 작품을 이야기할 때 민화를 주로 이야기하지만, 그는 생각 외로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겸재 정선과 마찬가지로 산수화도 그렸으며, 양반들이 좋아할 만한 유교 경전에 나오는 그림, 산신도, 그리고 왕실의 그림과 임금의 어전, 그리고 동물을 묘사한 그림도 그렸다. 전기를 쓴 저자의 상세한 묘사와 설명이 있었기에 다양한 장르의 그림을 자세하게 감상할 수 있었지만 역시 기본 지식이 없이 관찰하기에는 민화 만한 것이 없었다. 민초들의 굴곡진 삶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묘사, 역동성, 그리고 해학성 등등... 특별한 설명이 없더라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장르가 바로 민화였으니까. 김홍도의 민화 속에는 양반층에게 속되다고 폄하된 조선의 모습이 그대로 그려져 있었으며 민화 속에서 외면받은 민초들을 향한 작가의 애정을 물씬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책에서 그의 다양한 작품들을 살펴봤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장르는 민화였다. 이토록 시대를 초월한 울림을 준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김홍도를 '민화의 으뜸'으로 손꼽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책은 최신의 학계 내용을 반영하여 김홍도의 삶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다. 그의 출생지를 비롯하여 위작에 대한 부분, 그리고 정조와의 관계에 대한 이견 등등은 최근의 연구결과를 적극 반영한 것이라 더더욱 흥미가 갔다. 저자가 설명하는 그림의 해설도 거북하지 않고 부드럽게 다가왔으며, 김홍도의 대표작들을 한 권으로 만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소장 가치가 충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두께에 비해 책장도 술술 넘어갈 정도로 평이한 서술이 주를 이루지만, 수록된 그림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천천히 읽기를 조심스럽게 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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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이야기 1 - 전쟁과 바다 일본인 이야기 1
김시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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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인기를 끌었던 역사책 중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가 있었다. 최근에는 이 책을 두고 편향된 사관으로 기록된 책이라고 논평하는 시각이 일반적이지만, 출간 당시에는 대중으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받은 작품이었다. 영웅주의 사관, 제국주의적 논리를 합리화하는 책이었기에 지성인들에게는 비판의 도마에 올랐지만, 작가인 시오노 나나미의 생동감 있는 묘사와 표현 덕분에 로마사에 친숙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이 책을 통하여 로마에 대해, 나아가 서양사에 대해 접근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의 인기 이후, 한동안 역사 장르 도서계에서는 'xx인 이야기'라는 유사 제목을 가진 책이 다수 출간되었는데, 그중 눈에 끄는 작품은 김명호 교수의 《중국인 이야기》 시리즈다. 이 책은 다방면으로 중국을 해석하고 있지만 역사보다 문화적인 시각을 우선하고 있기에 역사적 시각을 기대했던 나에게는 다소 아쉬움을 준 작품이었지만 주관적인 취향을 배제하고 판단하자면 명작이라고 생각한다.


두 시리즈를 접하고 읽으면서 일본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밀도 있게 분석한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김시덕 교수가 《일본인 이야기》 시리즈를 출간한다고 하니, 내심 속으로 '드디어 올 것이 왔다.'라며 쾌재를 불렀다. 김시덕 교수라면 일본을 감정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객관성을 확보하며 냉정하게 분석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나는 김시덕 교수가 번역한 《교감 완역 징비록》을 읽었는데, 풍부한 자료와 주석이 돋보였으며 우리나라의 사료뿐만 아니라 중국, 그리고 적군인 일본의 사료까지 동원하여 입체적으로 《징비록》을 해석한 점도 돋보였다. 특히 《징비록》의 저자 류성룡과 《난중일기》의 저자 이순신을 묶어서 '동인 중심의 역사 서술 시각'이 오늘날 한반도의 임진전쟁을 바라보는 일반적 시각으로 전환되었다고 주장한 것과 동인의 시각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대세의 시각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바로 '필력 있는 기록'에 있다고 꼬집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주장은 자칫 성웅으로 신격화된 이순신과 류성룡의 위업을 깎아내리는 것으로 볼 수 있기에 국수주의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혹은 주입된 역사관을 그대로 배운 대다수의 사람들로부터 불편함을 줄 수 있는 주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주장을 대담하게 전개한 저자의 용기와 객관성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일본이란 나라는 우리에게 있어 감정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두 번에 걸친 침략전쟁, 식민지, 그리고 아직도 풀리지 않는 역사적인 문제 등등... 그렇기에 국내에서 일본을 다루는 대중 도서의 대다수는 대체로 감성적인 부분에 기인하고 있다. 그러나 이토록 감정의 골을 유발하는 나라일수록 냉정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교감 완역 징비록》의 역자 김시덕 교수가 《일본인 이야기》 시리즈를 낸다고 하니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객관성을 확보하는 측면'에서 기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특이하게도 《일본인 이야기》 시리즈는 고대와 중세는 거치지 않고 16세기인 근세부터 시작하여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일본을 집중적으로 조망하는데, 내가 지금 리뷰하고 있는 책이자 시리즈의 첫 권은 바로 가장 흥미진진한 시대라고 할 수 있는 16세기 - 일본의 군웅할거 시대와 조선과의 전쟁, 그리고 통일의 과정까지 - 를 다루고 있다. 기존의 역사책이 권력자와 정치적 흐름을 으로 설정하여 주된 포인트로 전개한다면 이 책은 하층민의 움직임과 문화가 상류층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저자는 거시적인 정치사를 해석하는 데 있어 하층민들의 생활과 문화를 키워드로 내세우고 있는데, 그중 핵심적인 부분이 바로 가톨릭이었다.


전통적인 동아시아 역사서에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영향력을 언급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저자는 이 부분을 냉철하게 바라보며 근세와 근대를 넘어서는 시대에 동아시아 국가에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중요성을 굉장히 강조한다. 근세 시대에 일본에서 가톨릭은 하층민에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이 주장하는 평등사상은 신분제로 규정된 왕조 체계의 질서를 뒤흔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였기에 지도층에게 경각심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물론 국가가 분열되고 통일전쟁이 완성되지 않았던 시기, 노부나가와 히데요시는 이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이익을 챙기려고 노력하지만, 국가가 안정화되고 대외적인 팽창정책이 실패로 돌아가자(임진 정유전쟁의 실패) 이에야스는 서양의 종교 세력을 탄압하여 지배층의 기득권을 수호하는데 노력하였다. 특기할 만한 점은 에도 막부가 서양의 가톨릭 사상은 탄압하더라도 교역이나 무역에 있어서는 관심을 가진 것인데, 이를 통해서도 동시대 일본의 지배층이 조선과는 다르게 좀 더 개방적이고 실익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16세기 일본사를 바라볼 때 수많은 다이묘들이 할거하는 상황과,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로 이어지는 영웅주의적 관점에 주로 집중하는 것 같다. 이 시대를 다루고 있는 일본 저자들의 책(국내에 번역된 책)을 살펴보자면, 전국시대 다이묘들의 처세와 정치력, 그리고 개인적인 영웅담을 칭송하고 찬양하는 내용이 대다수인데, 이런 시각의 도서들은 대체로 얄팍한 처세나, 흥미 위주의 신변잡기에 집중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런 책으로 일본의 근세를 정확하게 파악한다는 것은 가히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면 《일본인 이야기》는 일본 내부의 상황뿐 아니라 일본 외부의 세계를 포함하여 거시적인 관점으로 16세기 일본을 조망하고 있는데, 이렇다 보니 일본 자국의 정치 동향에만 집중하여 분석한 영웅론과는 내용이 상이할 수밖에 없다. 기존의 대중 역사서는 일본을 다룰 때 기껏해야 동아시아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는데, 《일본인 이야기》는 동아시아를 넘어 식민지 경쟁이 진행 중인 유럽 열강들이라는 플레이어를 끌어들여 일본사와 결부하여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는데, 세계사의 흐름에서 일본을 조망하고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특기할 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책을 통해 한층 더 거시적인 시각으로 일본의 역사를 조망할 수 있었는데, 이런 저자의 관점은 글로벌 시대의 역사관에 걸맞은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책에서 아쉬운 점을 두 가지 꼽아보자면 첫 번째로 제한된 분량에 너무 많은 내용을 담고 있기에 다소 산만한 느낌도 들었다. 나의 경우에는 저자의 부연 설명이 참 좋았지만, 주 논제에 집중하는 독자들이라면 다소 산만하게 볼 여지도 있는 것 같다. 두 번째로는 서두에서 가톨릭과 조선과의 관계 그리고 일본 내부의 통일전쟁 흐름에 대해서 일관성 있게 다루고자 노력했다고 했지만, 주관적으로 느끼기에 가톨릭에 대한 내용이 뒤에 두 내용보다 훨씬 많이 할애된 것 같다. 저자의 주장대로 근세 일본, 그리고 동아시아에 있어서 가톨릭 세력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충분히 공감하지만, 이를 너무 부각하다 보니 조선과의 관계와 일본 정치사의 흐름의 서술에서는 다소 아쉬운 부분을 느꼈던 것 같다. 조선과의 관계는 둘째로 두더라도 일본사의 흐름에 대해서는 좀 더 디테일하게 설명을 해줬으면 어땠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근세 일본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이 시대의 흐름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어 책에서 언급하는 사건들을 바로바로 쫓아갈 수 있었지만, 일본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경우는 시대 흐름을 이해하는 데 있어 다소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며 생각한 점과 느낀 점은 일본의 실용주의적인 관점이다. 당시 조선과 중국, 그리고 일본은 각각 서양 세력과 조우했는데 중국과 일본은 서구 세력에 호기심을 보인 반면 조선의 경우는 가장 단호하게 대처했다. 일본은 중국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서구 문물에 대한 관심을 보였는데, 지배체계를 뒤흔드는 가톨릭 사상은 탄압하는 반면, 서구 나라와의 교역은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또한 일본은 네덜란드와 교역을 통해 세계 각국의 정세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다는 점도 주목할 만했다. 또한 저자가 지속적으로 언급하는 것처럼 역사에 있어서 우연이라는 요소가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 지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뛰어난 위인은 두 가지를 두루 갖춰야 하는데, 첫 번째는 행운이며, 두 번째는 바로 그 행운을 받아먹을 수 있는 능력이다. 16세기 서구세력은 동아시아 3국에 러브콜을 날렸지만 이를 적절하게 이용한 나라는 결과적으로 일본밖에 없었다. 중국 역시 관심을 가졌지만 중화사상이라는 자문화 중심주의에 빠져서 서구사회를 적극적으로 탐구하려 하지 않았고 조선은 아예 그 기회조차 스스로 차단해버렸다. 이렇듯 역사에 있어 탁월한 능력은 결국 자신에게 오는 행운을 좋은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일본과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요즘. 최근 발간되는 일본과 관련된 도서들은 대체로 반일감정을 고조하는 내용이 대다수인데, 이 책은 냉정한 태세를 유지하며 역사적인 관점으로 일본을 차분하게 분석하고 있다.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는 반일감정도 좋지만, 무엇보다 제대로 아는 것이 우선이다. 동서고금의 다양한 역사를 통해 뛰어난 인물이나 국가를 분석해 본 결과, 발전하는 인물과 국가는 적군 아군을 가리지 않고 좋은 점은 배우고 나쁜 점은 배척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발전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에 대해 심도 있게 분석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일본인 이야기》는 일본을 객관적으로 알기 위한 최적의 도서라고 생각한다. 일본에 대해 색다른 시각으로 심도 있게 알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 연말 책을 손에 잡았던 3일 동안 지적으로 충만한 여행을 떠났던 것 같아서 굉장히 행복했다. 다음권이 기다려지는 시리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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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태종실록 : 재위 12년 -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이한우의 태종실록 12
이한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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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을 수식하는 단어는 많다. 철혈군주, 조선의 초석을 다진 군주, 군사 식견이 높은 군주 등등. 여기에 건축왕이라는 수식어도 빠트릴 수 없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청계천은 태종이 인공적으로 만든 수로였다. 이성계는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기까지 많은 명당들을 두루 둘러봤다. 우리나라의 토지는 산지가 대부분이기에 산세가 좋은 곳은 많지만 반대로 물의 지세가 좋은 곳은 드물었다. 그런 점에서 한양은 앞에 거대한 한강을 끼고 있으며 뒤에는 산자락이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니 명당 중에 명당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문제는 한양 도성과 한강의 거리는 떨어져 있어 한양 도성 백성들이 실제로 한강물을 활용하기는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의 한양도성은 지금의 종로구 일대인데, 지금은 청계천이 흐르고 있지만 조선이 건국할 당시에는 하천이 없었다. 이를 걱정한 태종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인 공조판서 박자청을 필두로 하여 청계천 공사를 감행한다. 이렇게 규모가 큰 공사의 경우 다른 왕이었더라면 신료들과 탁상공론식 토론을 거치며 미적지근 처리하는 게 일반적이었을 텐데 태종은 특유의 뚝심을 발휘하여 공사를 속전속결로 감행한다.

 

하천 공사를 마친 뒤 태종은 내친김에 경복궁의 메인 누각이라고 할 수 있는 경회루를 이어 건설한다. 이렇게 태종과 박자청은 1년에 거대한 공사 두 가지를 끝내는데, 리더인 태종의 뚝심과 실무자인 박자청의 탁월한 능력이 빚어낸 결과였다. 이외에도 태종의 건축적 업적은 여럿 있는데 창덕궁 건설, 종묘 증축 등등을 꼽을 수 있다. 종묘의 경우 이성계가 집권할 당시 지어졌는데 당시의 모습은 길쭉한 일자 형태의 전각이 전부였다. 태종은 심심하게 보이는 일 자(一) 형 종묘 전각 양 끝에 월랑을 설치하여 종묘의 구조적, 미학적 아름다움을 더했으며, 종묘 안에 공신전과 영녕전 등의 전각을 건설했다. 또한 종묘 앞 구역에 가산(假山)이라는 인공 숲을 조성하여, 건축의 자연미와 인공미를 조화하는 식견을 보여줬다.

 

물론 이 모든 건축적 업적은 실무자 박자청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아무리 박자청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역대 임금의 사당인 종묘와 임금이 머무는 궁궐의 공사를 자기 멋대로 처리할 순 없을 것이다. 아마 실무적인 능력이 탁월한 박자청이기에 공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디자인을 태종에게 보여주고 태종의 결제를 받은 것을 바탕으로 공사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을 해봐도 결국 건축의 최종 디자인은 태종이 결정하는 꼴이니 태종의 건축 안목이 탁월하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실록에서는 박자청에 대하여 굉장히 부정적으로 기록한다. 박자청은 글을 배우지 않았지만 공사 현장에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6조의 수장인 공조판서에 오른 인물이다. 베타적인 사대부들 입장에서는 학식이 없는 박자청이 변변치 않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래서 실록을 작성하는 사관들도 박자청에 대해 굉장히 비관적으로 기록하고, 대간들도 수시로 박자청을 탄핵하지만 태종은 허울 좋은 학식보단 '능력'을 우선시하는 실용주의 군주라 사대부들의 집중포화 속에서 박자청을 지켜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마도 태종의 건축철학을 실제로 구현할 인물은 당시 박자청 외에는 전무했기 때문이리라. (비슷한 예로 태종은 무인이지만 우의정에 오른 조영무의 탄핵도 적극 막아서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런 모습에서 사대부들의 베타적인 모습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아무튼 요점을 추려보면 태종이 기획한 건축은 실용과 심미, 그리고 인공과 자연이 한데 어우러졌다는 특징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건축에 있어 이토록 탁월한 안목을 지닌 지도자는 거의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종이 골격을 잡아 완성한 창덕궁과 종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는데 그의 뛰어난 건축적 안목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오늘날, 전 세계에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이번 권에서는 전체적으로 나라가 안정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중앙 제도 정비, 지방제도 정비, 군사제도 정비, 예법 정비, 그리고 왕실 종친들의 서열 정리, 청계천과 경회루를 중건하는 모습 등등... 태종 하면 그저 처남을 때려잡고 아버지를 압박해서 왕이 되어서 권력을 사유화했다는 시각이 많은데, 실제로 태종은 정쟁을 하면서도 실질적인 조선의 발전에 대해서 늘 고민했던 리더였다. 정쟁과 정치는 양립할 수 없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오늘날 정치판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정쟁에 몰두하는 정치인은 많은 반면, 실질적인 정치를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태종은 이 두 가지, 정쟁과 치국을 동시에 행했다. 태종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정치 이념을 이루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 그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정쟁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렇기에 그는 사사건건 트집 잡는 대간들과 척을 지고, 정권을 위협할만한 세력들을 제거하는 정쟁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태종이 위대한 점은 이런 정쟁을 통해 획득하고 유지한 권력을 철저하게 치국을 위해 사용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정쟁 속에서도 국가 제도를 정비할 수 있었으며, 창고를 부유하게 만들고, 예법을 정리했으며, 국가의 백년대계를 내다본 청계천 공사 등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일련의 정쟁 활동 속에서도 태종은 중심을 잘 잡았다. 자신을 압박하는 대간들을 억누르면서도, 연산군처럼 극단적으로 대간들을 없애버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간들의 언로 행동은 바람직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치의 기본은 소통이니까.

 

그래서 태종의 정쟁은 나름의 기품을 가지고 있다. 정치적인 입장은 다르더라도 최소한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느껴졌다. 이런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태종의 모습이 아니라 더욱 신선했다. 물론 정도전을 비롯한 특정 인물들에 대해서는 어마어마한 뒤끝을 보여줬지만, 태종에게 있어 이런 증오의 대상은 극소수였다. 선조나 숙종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환국을 도모하여 쓸데없는 대규모 희생을 불렀다. 그러나 태종은 문제의 주모자만 처리하고 그 외의 사람들은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다. 신하들은 태종에게 '살려준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태종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꺾인 세력인데 무엇을 더 무서워하는가?, 설사 반란이 일어난다 한들 진압할 자신감이 있으니 걱정 마라.' 이런 태종의 모습에서 다른 군왕들이 가지지 않은 자신감이 느껴졌다. 아무튼 노련한 정치력을 과시하는 태종과 안정된 정권을 확인하면서 난세가 치세로 바뀌고 있음을 물씬 느낄 수 있다.

 

국가와 통치에 대해서는 성과가 보이기 시작하지만 문제는 내부에서 터진다. 바로 세자 양녕. 이 시기를 기점으로 양녕의 일탈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가속화된다. 재위 11년에서도 양녕은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는 기록이 종종 있었는데 12년에는 더욱 많아졌다. 세자의 사부인 이래의 완곡한 주청 밑에 사관이 '세자가 잡인들과 어울려 논다.'라고 써놨는데, 이를 통해 양녕의 일탈이 꾸준하게 이뤄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태종의 조치다. 다른 일은 칼같이 처리하는데 반해 양녕에 일 앞에서는 미적지근하고 감싸주려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그래서일까. 날이 갈수록 국가의 기틀은 튼튼해져 가는 반면, 미래 권력을 이어받을 세자의 일탈 역시 깊어진다. 태종의 모토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가장 좋다.'인데, 그런 점에 비춰봐도 너무 안일하게 보여서 안타까웠다.

 

아무튼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태종의 안일한 대처 덕분에 조선은 대한민국의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을 맞이하게 된다. 물론 세종의 집권 배경에는 양녕을 버리고 충녕을 선택한 태종의 결단력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런 선택은 태종이기에 가능했으니까. 태종이 양녕을 꾸중하지 않은 것은 안타깝지만, 만약 꾸중한 결과 정신 차려서 양녕이 왕으로 등극했다면, 세종이란 존재는 조선에 없었을 것이며, 내가 쓰는 이 서평도 한자로 기록했을 것이다. 변수가 많은 역사에 있어서 상상은 부질없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해본다. 미적지근한 태종의 태도가 세종의 집권으로 이어졌으니 맏이의 일탈을 지켜보며 노심초사한 태종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지나온 역사를 알고 있는 후세인의 입장에서는 태종답지 않은 미적지근한 처리가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게 느껴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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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태종실록 : 재위 11년 -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이한우의 태종실록 11
이한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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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게 흘러간 한 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에 조정을 가장 시끄럽게 만든 사건을 꼽으라면 당연 '이색비문사건'이다. 이색비문사건은 여말선초 유림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목은 이색의 저서와 행장이 중국인 사대부에게 전해졌는데, 대륙의 사대부는 목은을 사모한 나머지 비문을 써서 이색의 친인척에게 내준 것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동방의 선비를 대륙에서 열렬히 추모하는 모습은 표면상으로 볼 때에는 국위를 선양한 공으로 추앙할 수 있겠지만, 논란의 주인공이 이색이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이색은 고려조에 충성을 유지했던 인물로,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와 정치적으로 꾸준히 대립했다. 그렇다 보니 이색의 행장과 저서는 필연적으로 신생국 조선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나라를 개국한 아버지 태조, 그리고 신생국 조선의 입장이 있다 보니 태종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대륙 명나라에 눈치를 보는 신생국 조선 입장에서 개국에 대한 부정적인 글이 퍼지기 시작하면 외교에 있어서도 좋을 것이 없으니 민감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문제는 이색의 행장을 쓴 사람이 바로 태종대에 문신으로 활약했던 '권근'과 태종 정권의 핵심 중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하륜'이었다는 점이다. 이 두 사람은 이색이 살아있을 당시에는 이색을 스승으로 모셨기에, 그와 정치적인 행보를 함께했다. 그렇다 보니 이색이 죽은 뒤 이들이 남긴 행장에는 조선과 태조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글을 남겼다. 훗날 두 사람은 조선의 태조, 태종 정권에서 고관 대작으로 활약하는데, 젊은 날에 썼던 글이 그들의 발목을 뒤늦게 잡은 셈이다. (물론 이 시기 권근은 죽고 살아있는 사람은 하륜뿐이었다.) 권근과 하륜은 이색을 기린 글에서 '이색이 권력을 가진 사람의 농간으로 인해 배척받았다.'라는 내용을 썼는데, 핵심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삼척동자가 봐도 이는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태조 이성계를 지칭하는 것임을 쉽게 유추할 수 있는데, 이를 태종이 꼬집고 나선 것이다.

 

여기서 흘러가는 구도가 참 흥미롭다. 태종은 이색이 죽은 뒤 이런 글이 세간에서는 널리 통용되고 있는데 아무도 이런 문제를 알려주지 않다가, 명나라에 의해서 문제가 제기되니, 그제서야 신하들이 권근과 하륜를 벌주라고 하는 부화뇌동한 행위에 대해 강렬하게 서운함을 내비쳤다. 태종 입장에서는 이색의 글이 널리 유포될 경우 아버지이자 나라의 건국자인 태조의 악덕을 강조하는 꼴이므로, 당연히 이를 저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하륜 역시 자신을 변명하는 글을 무려 네 차례나 올리며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하륜의 말로는 권력자를 지칭한 것은 태조가 아니라 정도전과 조준과 같은 무리였다고 했는데, 영명한 태종은 이런 하륜의 변명을 보고 '권력자는 분명 태조를 지칭한 것이며, 만약 태조가 나라를 얻지 못했을 정도전과 조준의 무리처럼 같이 비유됐을 것이다.'라며 사안을 확실히 분별해낸다. 이렇게 태종의 마음이 선 것을 확인하자 공신과 의정부, 그리고 대간의 신료들은 한목소리로, '하륜'을 지목하여 강도 높은 탄핵을 시도한다. 문제는 태종이 하륜을 처벌할 마음이 없었다는 점.

 

덕분에 하륜은 엄청난 정치공세의 탄핵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안이 이렇게 흘러가자 신료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나뉘는데, 언론 비판을 담당하는 대간들은 하륜과 권근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고, 조선 개국에 깊이 있게 관여했던 의정부의 고관들은 국초 혼란한 시기 빚어진 일이므로, 좋게 좋게 넘어가며, 정도전 역시 나름의 공이 있으니 태종도 아량을 베풀 것을 간접적으로 요구했다. 이런 의견 차이는 의정부와 대간들의 정쟁으로 이어갔고, 태종은 글에 표현된 권신은 정도전이었다고 결론지으며, 사퇴한 하륜을 다시 등용하는 것으로 사건의 마무리를 지었다. 태종은 왜 이런 소동을 일으킨 것일까.

 

두 가지 정치적 의도였을 것이다. 첫 번째는 소동을 통해 조선 건국에 대한 정통성을 대내적으로 다시금 세우려고 했을 것이고, 두 번째는 바로 하륜에 대한 경고가 아닐까. 태종은 하륜을 신임하고 다른 신하에게 보이지 않은 특혜를 베풀었지만, 특혜가 많은 만큼, 정치적 견제가 필요했다. 하륜이 아무리 눈치가 빠르고 태종의 마음을 잘 읽는 노련한 정치인이라지만 태종 입장에서도 너무 한쪽에만 의존하기보다는 이렇게 긴장감을 조성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정치적 긴장과 이완을 반복함에도 불구하고 고관 대작 중 하륜만큼은 목숨을 끝까지 보존할 수 있었으니, 태종 시대의 중앙 권신 중에서는 드문 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이번 권도 두툼했는데 대체적으로 나라가 안정돼가는 모습이 잘 나타났다. 특히나 예조의 상서가 많은 것으로 봐서, 국가의 정신과 예의 규범을 집중적으로 정리하는 데 노고를 쏟았는데, 나라가 이런 정신적인 영역에 공을 들인다는 것은, 기본적인 물적 토대를 어느 정도 구축한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하기에, 국초의 어수선한 나라의 분위기를 나름 안정화시킨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별다른 큰 사건은 없었던 평탄한 한 해지만, 그래서인지 유독 이번 권을 보면서 태종 주변의 인물들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먼저 태종의 복심 중 복심이라 할 수 있는 하륜!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벌써 죽어도 남았을 정도의 탄핵을 받고도 여러 번 살아남은 하륜의 장수 비결은 무엇일까. 첫 번째로 유능함이다. 미우던 곱던 태종에게 있어 신하 평가 대상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능력인데, 하륜은 나름의 비리와 문제가 있더라도 독보적인 일처리 능력을 보여줬다. 그래서 이색비문사건을 통해 집중적인 탄핵을 받는 하륜을 두고 태종은 '그를 대신할 사람이 없다.'라고 이야기하며, 더 이상 그를 건들지 말 것을 이야기했다. 정도전이 태조 시대의 상징적인 관료라면 하륜은 태종 시대를 대표하는 관료다. 이렇듯 태종은 자신의 정권을 대표하는 상징성을 지닌 하륜을 쉽게 내치지 않았지만, 일말의 견제의 필요성은 느꼈기에 물밑에서 신료들을 움직여 대규모 탄핵의 움직임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는 하륜의 권력에 대한 무욕이다. 하륜은 사소한 재물에 대해서는 욕심을 부리곤 하였지만 임금의 권력에 대해서는 탐한 적이 없다. 그는 태종에게 무리한 정치적 요구를 하지도 않았고 정치적으로 눈밖에 나는 짓 역시 최대한 자제하려고 노력했다. 게다가 그는 태종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다. 태종은 늘 자신의 사후 권신들이 권력을 좌지우지할 것을 걱정했는데, 최소한 이런 면에서는 하륜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하륜 외에도 정권 후반기에 자주 거론된 신하는 우의정 조영무와 박자청이다. 이번 책에서 이 둘은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되는데, 공통점으로는 선비 출신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영무는 무인 출신으로 글을 모르는 사람이었으며, 공조판서 박자청 역시 신분도 별 볼일 없는 데다 학문에 대한 교양은 없지만 공사에 관해서는 최고의 전문가였기에 고관 벼슬에 이르렀다. 기본적으로 실록을 쓰는 사관은 선비, 유림 출신이다. 그렇다 보니 이들은 글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을 은연히 깔보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두 사람을 비판하는 글에서도 선비 특유의 오만한 뉘앙스를 느낄 수 있었다. 다행히도 태종은 조영무와 박자청을 두둔하며, 두 사람이 교양은 떨어지더라도 실무에 능한 인물들이니 학식을 가지고 그들의 자존심을 건들지 말 것을 명하기도 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태종은 매우 탁월한 군주였다. 능력이 있으면 설사 교양이 모자라더라도 그 재능을 귀하게 여겨서 등용했는데, 아마 이 두 사람이 고관 대작에 이르게 된 것도 좋은 인군을 만난 결과라고 볼 수 있겠다.

 

사형당한 민무구 민무질과 대척점에 있던 이숙번 역시 부정적으로 기록된 사례가 나오는데, 아들에 대한 청탁 때문이었다. 이숙번은 자신의 장인이 중국에서 죽었기에 어디 있는지 찾고 싶어서 사신단에 자신의 아들을 넣어주길 부탁했다. 태종은 이를 수락하고 사신단의 가장 낮은 직급이자 사신단의 물건을 감수하는 '타각부'에 이숙번의 아들을 보냈다. 이에 이숙번은 태종을 만나 번거로운 자리니 타각부보다 더 편한 자리로 배정해 줄 것을 원했지만 태종은 '집안 어른의 유골을 거두러 가는데 사신단에 참여시켜주는 것만 해도 고맙다고 할 것이지, 큰 자리를 요구한다.'라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이숙번이 이런 무리한(?) 요구를 한 배경은 무엇일까. 아마도 경쟁자였던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몰락했으니, 권력이 축이 이숙번 쪽으로 많이 기울었고 그에 막강한 권력을 가졌기에 이런 요구를 한 것은 아닐까. 이런 안하무인한 태도를 태종 역시 잊지 않고 있었으니, 이숙번이 훗날 권력에서 실각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실 이번 권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인물은 세자다. 세자가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에 나서기 시작했지만, 그와 더불어 태종 집권 말년기까지 뼈아프게 발목 잡는 '양녕의 일탈' 역시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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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태종실록 : 재위 10년 -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이한우의 태종실록 10
이한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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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해 나오는 《태종실록》 원전 완역 번역본을 읽을 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무슨 재미로, 조선왕조실록 원전을 읽느냐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첫 번째 이유는 역사를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인문학 장르를 크게 나누면 문학, 역사, 철학으로 나눌 수 있는데, 내가 가장 매력을 느끼는 분야는 역사가 첫 번째고, 철학이 두 번째며, 문학이 마지막을 차지한다. 그렇기에 《조선왕조실록》을 원전 번역본으로 읽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역사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역사 고전의 90%는 정치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순수 인문학을 떠나, 사회과학 중에서 가장 흥미를 느끼는 부분은 정치인데, 공교롭게도 과거의 역사 기록은 정치사를 다루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당대 최고 권력자들이 벌이는 리얼 '왕좌의 게임'에 대한 기록이 바로 '정치사 고전'이며, 《조선왕조실록》 역시 이를 대표하는 텍스트다.

 

아무튼 권력에 대한 탐구, 인간에 대한 욕망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나이기에, 그런 인간들의 흔적이 가득한 역사 정치 고전을 매우 애정 하며, 《조선왕조실록》 역시 이러한 이유로 애독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중 내가 주로 보고 있는 《태종실록》은 조선 임금 중 가장 정치력이 뛰어난 태종 집권기를 다루고 있다. 고루한 내용도 많지만, 그럼에도 정치력 9단의 태종의 처세를 해석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처음 《조선왕조실록》을 읽을 때에는 실록이라는 형식이 익숙하지 않아서, 읽는데 애를 먹었지만, 태종 재위 10년까지 읽으니 실록에 대한 기술 형식이 익숙해졌고, 어느 사안이 중요하며, 어느 사안이 중요하지 않은지, 그리고 태종이라는 임금이 어떤 취향을 가지고 어떤 패턴으로 신료들을 제압하는지 대략적으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실록의 기록은 늘 이런 식이다. 큰일, 전쟁, 사형이 일어나기 전에 날씨나 별의 움직임을 통하여, 혹은 중요한 요직에 인사교체 등등을 통하여 큰 사건이 일어날 것을 예고한다. 우리나라 정치사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정치사 고전도 대체로 이런 식이다. 그렇기에 정치사를 다룬 역사서를 읽을 때에는 주어진 텍스트를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안의 맥락을 잘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달달 암기하고 외우는 것은 역사 수업 시간이나 수험에나 어울릴 법 하지, 효용적인 역사 고전 독법과는 거리가 멀다.

 

역사 고전에 기록된 글들은 사소한 것들이더라도 '정치적 의미'를 내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나는 역사 고전을 읽으며 코멘트 속에 내포된 정치적 의미를 탐구하는데 주력했다. 그렇게 역사 고전을 읽다 보면 억지로 외우지 않아도 중요한 사건들은 저절로 알게 되며, 기록이라는 암호 속에 숨겨진 집권자의 심리와 당대의 정황에 더욱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물론 처음에는 내용 자체만으로도 따라가기 힘들고 어렵겠지만, 경험이 쌓이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접하는 것도 좋지만, 사고하는 과정 자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정치사 고전은 그런 사고력과 추론력을 키워주는데 정말 유용한 장르다. 게다가 이런 사고 훈련을 통해 얻은 추론력은 다른 장르의 독서 독해에도 적용할 수 있으며, 실질적인 사회생활에서도 '눈치'라는 덕목으로 전환하여, 처세에 있어서도 실용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물론 정치사 고전은 친절하지 않다. 과거 시대에 언어와 사고, 환경으로 기록된 문헌이기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나름의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이런 노력을 역사에 대한, 정치에 대한 '애정'으로 극복하고 받아들였다. 남들에게 나처럼 어려움을 '애정으로 극복하라고' 강권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진득하게 역사 고전을 파다 보면, 들인 노력 이상의 결과를 얻게 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게 강조하고 싶다.

 

책을 읽기 전 두께를 봤는데 이번 권도 두꺼운 편이었다. 실록의 두꺼운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신하들의 상소'가 대부분이다. 특히 이 해에는 내부적으로도 대외적으로도 커다란 사건이 많았고, 그랬기에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신하들의 상소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아무래도 처남인 민무구, 민무질 사건이다. 태종이 가장 많은 악평을 들은 이유는 처남인 민씨 형제들을 죽인 사건 때문이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처족을 죽일 수 있냐'라는 시각이 전통적이라면, 최근에는 그런 태종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재해석하는 사학자들도 많아졌다. 아무튼 그런 논란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처남인 민씨 형제들의 자진이 이번 권에 자세히 나와있다.

 

실록을 자세히 들여다본 사람은 알겠지만 태종은 공신들을 '쉽게' 죽이지 않으며, 웬만한 일탈 행동은 눈감아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재위 1년부터 10년까지 읽으면서 태종이 거물급 공신들을 쳐 낸 사례는 크게 세 가지인데 첫 번째 이거이와 이저 부자의 귀양, 두 번째 이무 일당의 사형, 세 번째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자진 명령이다. 이 외에도 숱한 일탈이 있었지만, 웬만한 일들은 눈감아주거나 '솜방망이'처방으로 경고를 준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나 태종은 공신 중에서도 인척 관계, 혈족 관계의 가족들에게는 권력의 노른자인 군권과 인사권을 겸한 자리에 배정하는 등, 파격적인 혜택을 줬다. 많은 공신들이 있지만, 왕도 사람이라서, 피와 혈연으로 맺어진 친족들을 우대하고 기대는 것이 당연했다. 태종도 예외일 순 없었다. 따라서 외척인 민씨 형제들 역시 마찬가지로 이런 혜택을 받았다. 그런데 왜 그들은 역적이 되어 자진으로 생을 마감해야만 했을까.

 

표면적으로 태종은 처남인 민무구, 민무질에 대한 귀양 원인을 '세자를 끼고 정권을 전횡하려고 했다.'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처남 처벌을 목적에 둔 정치적 명분에 불과하다. 내가 주목한 것은 민무질이 군부의 수장을 맡고 있을 때, 군인들이 왕명보다 민무질의 명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이다. 당시 태종은 이런 군부의 움직임에 '공가(公家)를 받쳐야 할 군인들이 특정 세력을 지지하고 있다.'라고 표현하며, 노골적으로 화를 냈다. 전근대 왕조시대의 역사를 살펴보면 왕조가 흥하느냐 망하느냐에 대한 기준은 개국 직후 3대(3代)에 달렸다. 보통 태조나 고조는 신생국을 개국한 것으로 생을 마치는 경우가 많고, 이후의 내부적인 정비는 태조 이후의 군주가 맡게 되는데, 이 국가 정비에 따라 나라가 장수 왕조가 될지 단명하는 왕조가 될지 결정된다. 태종은 자신의 사명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당시 조선은 개국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다, 왕자의 난 등으로 내외부적으로 어수선한 상태였다. 그래서 태종은 강력한 군권을 바탕으로 국가 제도를 하나하나 안정화시키기 시작했는데, 이런 권력의 원동력은 압도적인 우위의 군권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당시 군권은 권력의 핵심 중에 핵심이었다. 그런 권력의 핵심을 처남들에게 맡겼는데, 군부의 수장들이 왕가에 충성하기보단 민무질에 충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태종이 거사를 할 때, 앞장서서 칼을 휘둘렀던 공신 중에 공신이었다. 그렇기에 태종의 입장에서는 군권을 그들에게 맡긴 것은 그만큼 민씨 처가를 믿고 예우하고 대우해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결과 군부의 세력들이 민씨 일가들만을 생각하니, 태종의 입장에서는 처남들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실록을 보면 민무구, 민무질 형제들은 태종의 눈밖에 나지 않으려고 나름 조심한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정작 중요하게 조심해야 할 부분에서는 욕심을 부리고, 사소한 일탈만을 단속했으니, 민씨 형제의 좁은 정치적 시야가 결국 그들의 명을 단축한 셈이다. 만약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군권을 잡았을 때 사유화하지 않았더라면, 이숙번의 말로처럼 귀양 선에서 노후를 보장받았을지도 모른다.

 

태종은 재위 10년 상반기에 민씨 형제들을 주살하고, 하반기에 또 다른 인척인 이저를 다시 불러 등용할 것을 예고했다. 태종은 왜 갑자기 공신들에게 본보기로 내친 이거이의 아들, 이저를 재등용하려고 했을까. 아마 두 가지 목적이었을 것이다. 첫 번째는 민씨 일가의 주살을 통해 경직된 일가 종친들의 경계를 완화하려고 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아마 민씨 일가 처리에 대한 고통 때문이 아니었을까. 실록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처남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중전 민씨와의 불화가 크게 있었을 것이다. 민씨는 조선 중후기의 순종적인 여인이 아닌,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적극적인 성격의 여걸'이었으므로, 아마 드라마 '용의 눈물'의 장면처럼, 동생들이 죽어가는 과정에서 태종과 심하게 다퉜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태종이 이저를 다시 등용하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이다. 태종의 정치적 결단은 사적인 감정에 치우치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냉정한 분위기를 대체적으로 풍기는데, 이번 이저의 등용은 급조적이고, 감정적인 모습이 묻어났다. 그래서 신료들 역시 '태종답지' 않은 번복 결정을 두고 비판의 수위를 높였다. 이런 태종답지 않은 번복 결정을 한 결정적인 동기는 처남들의 숙청에 대한 아픔이 때문이 아닐까. 믿었던 처남들을 쳐내는 과정은 어쩔 수 없었지만, 태종도 인간이기에 슬픔을 칼로 무 자르듯 제거할 순 없었다. 처남의 빈자리는 또 다른 인척으로 채워야 했고, 그랬기에 감정적으로 이저를 등용하려고 무리수를 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책의 말미에서 태종은 자진한 민무구, 민무질의 동생이자 또 다른 처남들인 민무휼, 민무회를 봉군(封君)하여, 처가에 대한 기대와 애정이 식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표명하기도 했다.

 

아무튼 후대의 사람들은 이런 태종의 모습과 심리를 자세하게 알 순 없다. 그랬기에 처남을 죽인 결과만 보고 태종을 쉽게 냉혈안이라고 단정하는데, 전해오는 기록을 면밀하게 읽어보면 이 시기 태종도 알게 모르게 마음고생을 많이 했음을 느낄 수 있다. 책을 보면서 권력의 중심에는 아무나 가면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권력의 사유화를 방지하기 위해 처남을 쳐내는 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 아픔을 홀로 감내하며, 국가의 초석을 다졌기에 태종은 세종이라는 꽃을 활짝 피울 수 있었고, 조선을 장수 왕조로 만드는 기틀을 완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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