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의 시대를 읽다 - 격변기의 혁명과 개혁 그리고 진보와 보수
김진섭 지음 / 지성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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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숭숭했던 총선이 끝나고, 보름달이 만개했다. 이번 보름달은 그냥 보름달이 아닌 슈퍼문이다. 의석의 과반 이상이 푸른 물결로 가득했다. 유례없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한편으로는 안도감을, 그리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안도감은 준비가 되지 않았던 보수진영의 패배에서 비롯한 것이고, 안타까움은 이번 선거 결과가 지역주의 이념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더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각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노선을 위해 필사적이었고 그 결과, 뜨거운 투표율로 표출됐다.


식자들 가운데에선 이런 말도 한다. '민주주의 제도에서 선거란 최선이 아닌 최악을 면하는 선택을 강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전적으로 공감했다. 나 역시 선거를 하면서 최선보다는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여 투표를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래서 투표를 마치고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기본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됐다. 우리는 왜 선거를 하면서 후보 개인의 활동과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후보의 소속감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여 투표를 하는 걸까. 후보의 소속, 즉 당적은 그 후보의 방향성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고려할 대상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후보의 능력과 비전 등등도 동등하게 고려해야만 한다. 그러나 동서로 극명하게 나뉜 지지도는 여전히 우리 정치가 이념과 이데올로기, 지역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반증한다.


총선 이후, 한국 정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면서, 불현듯 '정도전'이라는 인물이 다시 떠올랐다. 혹시나 싶어서 최근 새롭게 나온 책이 없나 생각하여 검색을 했는데, 공교롭게도 2020년 4월에 정도전을 다룬 신간이 나온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자는 과거에도 정도전과 관련된 책을 썼는데, 제목은 《정도전의 선택, 백성의 길, 군왕의 길》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신간이자 리뷰의 주인공은 《정도전의 시대를 읽다》인데, 이 책은 전작을 토대로 하여 대폭 수정하고 편제를 바꾼 책으로 보인다. 저자의 전작은 과거에 읽은 기억이 있는데, 드라마 '정도전' 인기 이후 쏟아지는 정도전 도서 가운데 균형 잡힌 서술이 인상적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정도전을 통해 저자와 다시 재회하게 되니 오래도록 만나지 못했던 지인을 보는 것 같아 새삼 반가웠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나는 한국 정치를 생각하면서 왜 정도전이라는 인물이 떠오른 것일까. 여말선초 조선 초와 2020년의 대한민국은 단순하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이하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모든 부분에서 조선과 대한민국은 이질적임에도 불구하고 왜 불현듯 정도전이 떠오른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정도전이 이상적인 정치인의 모습을 현실에서 가장 생생하게 구현했기 때문이다. 정치인은 국가 공동체를 대표하고, 피지배층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대변해야 한다. 이는 조선시대에도 그랬고, 오늘날 민주주의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원론적이고 교과서적이며, 이상적인 담론일지라도, 시민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정치의 근본이다. 그렇기에 정치인들은 시민의 이익과 시민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정치인이 존재하는 이유다. 그러나 현재의 정치인들은 어떤가? 지역구나 민생을 돌보기에 앞서, 자신의 파벌과 세력을 중요시하고 이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한다. 선거 철마다 부르짖는 민생이라는 구호는 이미 빈 껍데기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그럼 삼봉 정도전은 어땠는가? 그는 어떤 정치인이었나? 이 책으로 정도전을 다시금 접한 결과, 크게 두 가지가 인상 깊게 다가왔다. 첫 번째 그는 민생을 해결하는 능력도 탁월했고, 권력을 유지하려는 정쟁술도 탁월했다. 현실 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권력이 있어야 자신이 생각하는 정책과 이념을 현실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 파벌과 당적을 수호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도 크게 보자면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명석한 정도전 역시 이를 정확하게 깨닫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자신의 힘이 될 수 있는 이성계를 찾아갔으며, 자신의 주군을 권력의 정점에 세웠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오늘날의 정치인들은 권력을 유지하거나 탈환하는 것만 집중한다. 그러나 정도전은 나아가 권력을 어떻게 휘둘러야 할지를 통찰했다. 왕조의 설계자라는 별명답게 정도전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시스템을 대부분 설계했는데 법률, 군사, 행정, 도시계획, 민생, 종교, 토지제도 등등 거대하고 굵직한 사업들을 총괄한 것이다. 가장 의미 있는 점은 정도전이 설정한 국가 제도 시스템 안에는 민본, 즉 당시 백성들을 우선한다는 관념이 담겨 있었던 점이다. 그렇기에 그가 시행한 제도는 고려시대의 모순을 대폭 해소함과 동시에, 민생 안정까지 실현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정도전의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바람직한 보수와 진보에 대한 가치다. 기존 대부분의 저서에서는 정도전을 진보의 아이콘으로 내세우는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우리는 흔히 그 사람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사고를 토대로 단정적으로 '보수적이다.' , '진보적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평생 동안 보수나 진보적인 마인드로 사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런 사람들은 아마도 오늘날 특정 정당에 소속된 직업 정치인 외에는 없을 것이다. 사실 특정 정당에 소속된 정치인들도 언론이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자신의 정당과는 전혀 상이한 생각이 나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 보통의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수와 진보적 마인드를 두루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특정 성향을 앞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점은 정치가 정도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진보적인 입장에서 정도전의 삶을 바라보자. 알다시피 정도전은 고려시대의 낡은 틀을 깨부수고, 조선을 건국하는데 앞장선 급진적 신진사대부다. 그렇기에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한 정몽주나 이색에 비해 훨씬 진보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유배를 통해 백성들의 밑바닥 삶, 제도의 모순을 몸소 체험했고, 그 경험을 잊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의 진보적 마인드는 관념으로 그치지 않았고 현실 속에서 구현되었다. 진보의 가장 큰 맹점은 바로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을 꼽을 수 있는데, 이런 점에서 정도전은 자신의 이상을 현실 속에서 절묘하게 녹아낸 정치인으로, 몇 안 되는 성공한 진보주의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대로 보수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보자면, 정도전 역시 정권을 잡고 공고히 하는 시기에서 자신의 권력을 놓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의 진보적 관념이 구체화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가 철저한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이다. 항간에서는 정도전을 두고 관념적 이상론자로 평가하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그는 이상론자이기 앞서 철저하게 현실론자였다. 그렇기에 현실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보수적인 관점으로도 탁월하다고 볼 수 있다. 보수의 가장 큰 문제는 기득권으로 인한 타락인데, 정도전은 부와 명예를 누리는 입장에서도, 권력을 사유화하지 않고, 공적인 일에 사용했다. 그렇다 보니 정도전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술한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개인적 비리나 착복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다. 즉 그는 현실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며 휘두르는 데에도 모범을 보였기에, 보수 정치인의 바람직한 표상으로도 볼 수 있다.


《정도전의 시대를 읽다》는 전작보다 훨씬 깔끔하고 명료했다. 나에게는 새삼스레 새로울 것도 없는 삼봉의 족적이지만, 명료하게 정리된 저서 덕분에 빠른 시간에 정도전에 대하여 복기할 수 있었다. 책에서는 정도전의 삶만 다룬 것이 아니라, 시대의 배경과 정도전과 관련된 인물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여말선초에 대해서 기본적인 지식이 없는 분들도 부담 없이 접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도전에 관련된 저서 중 본서를 제외하고 볼 만한 책을 열거하자면 한영우 교수의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조유식의 《정도전을 위한 변명》 정도인데, 한영우 교수의 책은 교수 특유의 논문 스타일이라서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진입장벽이 있을 것 같고, 조유식의 책은 대중성으로 볼 때에는 가장 탁월하지만 균형적인 서술에서 볼 때에는 다소 아쉽다. 그렇기에 일반인을 대상으로 정도전과 관련된 책을 한 권 꼽으라고 추천한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책을 덮고 서평을 완료하는 시점, 우리나라에서도 민생안정에 실질적인 족적을 남길 수 있는 정치인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이번 총선에서 초선 의원들이 많았던 배경도 새로운 정치를 희망하는 시민들의 염원으로 보이는데, 정도전처럼 다방면적인 부분이 아니더라도, 작은 부분이지만 피부로 와닿을 수 있는, 나의 삶과 우리의 삶이 개선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정치인이 많아지길 진심으로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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