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으로 피곤한 퇴근길이다. 지수 씨는 기적적으로 버스 좌석을 차지하고 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본다. 비 록 쭈그려 앉다시피 해야 하는 바퀴석이지만 퇴근 시간대에 앉을 자리를 찾는 건 보통 운이 아니며 제시간에 퇴 근하는 것 또한 흔치 않은 일이다. 기대도 하지 않은 요행 두 가지가 마침 한꺼번에 찾아온 셈. 그러고 보면 오 늘은 생각만큼 나쁘지는 않았던 거야, 지수 씨는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이라고 하고 보면, 버스가 제 대신 움 직여주는 건 또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몸을 실을 수만 있어도 감사한 버스에 마침 자리가 있었다는 사실은 또, 또 얼마나 감사한·•·••. 나는 어느새 이런 사소한 일에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된 걸까. 지수 씨는 외투 를 입고 구두를 신은 사람이 앉기에는 영 비좁은 바퀴석 위에서 몸을 한껏 응송그린다. 두세 정류장마다 한 번 씩 좋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지수 씨는 자꾸 창문에 머리를 박는다. - P40

피곤한 것과 화나는 것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어린애는 조카만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원래가 다 피로를 분노로 표현하게 되어 있는지, 아니면 어른이 되면서 우리가 까먹었을 뿐 그 두 가지는 사실 같은 것인지 알고 싶은 마 음이 들었다. - P87

이 사람을 좋아할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게 하고 싶다는 마음은 들었다. 이 사 람이 달달 외우고 있는 공룡들을 내가 모두 이길 수 있을까, 이긴다면 어떨까, 그런 호기심이 자꾸자꾸 돋았다. - P92

현대인이 인간관계에 회의감을 느끼는 이유에 대하여 설문조사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로는 회의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어머, 그래요? 이유가 뭘까요?" 인간이 싫어서 인간관계에 회의를 느낄 필요도 없다고 하려 는 찰나 베가 왔다. - P94

실상 묘하게도 곰신 문화에 적응해갈수록 선물이, 편지가, 기다림이 간절한 만큼 오히려 기다림의 대상인 꾸나 는 뒷전이 되고 있었다. 나의 반응은 누나 고마워요, 잘 쓸게, 다들 부러워하고 있어, 사랑해 정도로 어차피 고정되어 있는 반면, 아기자기 카페의 자기님들은 내가 편지와 선물에 어떤 정성을 쏟았는지를 낱날이 알아주 었기 때문이다. - P107

그렇지만 이 사실을 의식하게 되자 기다림 자체보다 이 기다림을 전시하는 일에 내가 중독되고 있음을 인정하 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이 깨달음이 꾸나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바뀌었으며, 미안한 마음을 보상하느라 더욱 선물에 공을 들이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더더욱 정성스러운 후기 글을 쓰게 되는, 오묘하고 완벽한 순환이 이 루어지게 되었다. - P108

이게 우유병이야. 우유 파는 여자애가 우유 팔면서 머릿속에선 소 한 마리 벌써 장만한 얘기. 왜 인터넷에 보면 어떤 사람들은 좀 맘에 드는 사람하고 손끝만 스쳐도 헉·•••• 영어유치원 알아봐야 하나? 이런다고 하잖아.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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