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글자도서] 아버지의 해방일지 큰글자도서라이브러리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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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이나 4.3사건은 내가 국민공통교과과정을 배우던 시절에 국사책에서 언급되지 않던 역사이다. 자랑스런 대한민국 설립의 정당성을 주입해야 했던 교육목표에 감히 등판해선 안되는 오점이기에, 본인들의 정치사상을 자랑스러워하던 전교조 출신의 국사선생한테도 들어보지 못했다.
다만 이 역사가 요즘 다뤄지는 이유가 성찰의 목적인지, 정치적 이권을 위한 도구인지는 모르겠다.

사람의 장례식엔 그 사람의 인생이 함축되어 있는 듯하다. 최근 상을 치른 뒤라 그런지 장례식의 풍경이, 조문객을 마주하며 과거를 연상하는 화자의 모습이 익숙했다.
조문객들은 고이미 세상에 없는 고인과 인연으로 방문해 각자의 방식으로 고인을 애도한다.
반란군의 지휘자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 것이 자신의 형을 밀고한 격이 되어버렸던 작은아빠는, 자신의 발언으로 엄마가 처참하게 죽어가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평생 형을 빨갱이라며 원망했다. 그렇게 남탓만 하고 살아온 작은아빠가 탓할 사람이 없어져 허무할지 속이 시원할지 가늠해 보고 있는 상황이 이상하게 가슴이 아팠다. 역사의 풍랑을 헤쳐온 사람들에게 비극이 또다른 해일이 되어 평생을 비참하게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연좌제로 육사에 불합격한 사촌 오빠는 화자와 같이 큰엄마의 혐오 짙은 욕설을 들은 이후 연락을 피하고 살았다. 결국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지만 시간이 흘러 부군수 승진을 앞두고 말기암 판정을 받는다. 거동이 불편한 상황에도 사촌오빠는 조문을 왔다 별다른 말 없이 간다. 사촌오빠가 화자의 아버지를 원망하고 살았을 것 같진 않았다. 개인적인 삶은 소시민이었지만 대의를 위한 행위에 시대적 억압을 받았던 자들끼리 서로 원망한다고 나아질 것은 없다는 걸 늦게라도 알았을 것이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권력에 맞서는 것이 누구에게나 부여된 의무는 아니다. 그럴 힘이 없다고 원망보다는 잊고 체념하고 사는 것을 비겁하다고 볼 수는 없다. 물론 진한 패배감은 자신의 체념과 이념과의 괴리감에서 오는 고통이겠지만, 자신이 성찰할 일이지 남에게 비난받을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선일보를 보는 박한우선생과 친구로 지내는 것이 이미 아버지는 이념과 인정을 다른 선상에서 보았던 것이다. 용서라는 거추장한 과정도 건너뛰고 신념에 목메지 않고 그저 덮어놓고 인간으로 관계 맺고 사는 게 이상한 건 아니다.
너무 신파이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사실 후반부로 갈수록 조금 지루해졌다. 이념이 죄가 되지 않는다는데 이 나라는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나. 투표도 인스타용으로 하는 시대에 이런 책도 정치병자들이 숟가락을 얹으려 하는 게 영 못마땅해서 피하고 있었는데. 지루했지만 그래도 여순사건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작은아버지는 늘 이런 식이었다. 신문을 열심히 읽지만 뭔가를 잘못 읽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꼭 낭패를 보았 고, 그 낭패를 다 아버지의 탓으로 돌렸다. 탓을 하는 인 생은 이미 루저다, 라고 아버지 닮아 냉정한 고등학생쯤의 나는 판단했고, 그 이후 작은아버지를 소 닭 보듯 보았다. 피를 나눈 사이지만 나에게는 그저 허구한 날 남 탓이나 하는 루저, 남보다도 못한 루저였을 뿐이다. 게다가 작은 아버지는 허구한 날 술에도 취해 있었다. - P40

그러게, 아버지의 사정은 아 버지의 사정이고, 작은아버지의 사정은 작은아버지의 사 정이지, 그러나 사람이란 누군가의 알 수 없는 사정을 들 여다보려 애쓰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아버지는 그렇게 모르쇠로 딴 데만 보고 있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뭐 그 런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 P42

변죽 좋고 오지랖 넓은 사람이 귀찮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아버지 장례에서는 나보다 동식씨가 더 유용할 듯싶었다. - P83

또 그놈의 오죽하면 타령이었다. 사람이 오죽하면 그 러겠느냐,는 아버지의 십팔번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달 리 오죽해서 아버지를 찾는 마음을 믿지 않았다. 사람은 힘들 때 가장 믿거나 가장 만만한 사람을 찾는다. 어느 쪽 이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힘들 때 도움받은 그 마음을 평 생 간직하는 사람은 열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 대개는 도 움을 준 사람보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먼저 잊 어버린다. 굳이 뭘 바라고 도운 것은 아니나 잊어버린 그 마음이 서운해서 도움 준 사람들은 상처를 받는다. 대다 수의 사람은 그렇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그렇다 한들 상처받지 않았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사 회의 구조적 모순 탓이고, 그래서 더더욱 혁명이 필요하 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 P102

"민족이고 사상이고, 인심만 안 잃으먼 난세에도 목심 은 부지허는 것이여." - P137

들을 수 없는 답이지만 나는 아버지의 대답을 알 것 같았다. 긍 게 사람이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목소리 를 높일 때마다 아버지는 말했다. 긍게 사람이제. 사람이 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 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달 리 실수투성이인 인간이 싫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관계 를 맺지 않았다. 사람에게 늘 뒤통수 맞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탓인지도 몰랐다. - P138

설령 자수를 했다 하더라도 나는 아버지든 누구든 비난 할 생각이 없었다. 살기 위해 자수한 것이 무슨 죄가 된단 말인가.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전향을 하고 안 하고, 자수를 하고 안 하고가 한 사람의 생 전체를 판단할 좌표 와 같은 모양이었다. - P153

구레라는 곳은 어쩌면 저런 기이하고 오랜 인연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위인 작은 감옥일지도 모른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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