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화자의 찌질함에 정말 읽는 내내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주제파악(흔히 요즘 순화해서 표현하는 자기객관화)은 하는데, 그것만으로 근거 없는 자만심과 세상에 대한 교만함에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마냥 구는 태도에다가, 자신의 실패를 숙주로 삼고 있는 여자친구에게 돌려버리는 비열함까지 갖추고 있어 요즘 (작가를 포함하여)30-40대 남자들의 공통적인 저급함을 보여주겠다는 게 목표인 것처럼 보였다.

자살을 세상 논리의 부조리를 입증하려는 행위라고 착각하는 꼴도 볼성사납다. 거기에 허세는 포기할 수 없었는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업적을 성취한 후에만 자살할 수 있는 자격을 서로 부여하는 것도 기가 막혔다.

청년들의 좌절에 ‘노오력’이 부족하다라거나, 자살옹호에 대한 비판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좌절에 공감하고 ‘자유죽음’을 옹호하는 나같은 사람에게도 불쾌감을 불러 일으키는 게 신기하다.

물론 다행히 재미없는 수준의 글은 아니다.

자기들의 행위에 조잡하나마 어떤 주장을 담으려고 했기 때문일 거야. - P6

단지 정상인이라면 감히 넘을 생각조차 못하는 어떤 선을 살짝 넘기만 하면 돼. - P7

우리는 위대한 좌절의 시대를 세연의 표현을 빌리면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를 살고 있다고.
그런 열패감을 극복하기 위해 붉은 티셔츠를 입고 국가 대표 축구 선수들을 응원하거나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모였던 게 아닌가. - P8

재수 학원에 가긴 했는데 그 건물 전체에 어린 패배의 기운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 - P16

몇 푼 더 벌고 몇 점 더 얻기 위한 싸움은 다른 머저리 같은 녀석들이나 하라고 해. 그런 보잘것없는 싸움은 처음부터 항복해버리는 거야. 밥벌이로 저녁 6시까지만 일하고, 그다음에는 네 할 일을 하는 거야. - P26

자신의 기대 수명이 스물여섯 살이나 스물여덟 살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삶은 얼마나… 숙제 걱정 없이 알찰 것인가. - P26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고 매사에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바보였다. - P28

모르는 사람이게 반말을 하고 젊은 남자들에게서 대접을 받는 것이 몸에 밴 듯한 태도였다. - P29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품고 있던 질문들을 재빨리 정답으로 대체하는 거야. 누가 빨리 책 에서 정답을 읽어서 체화하느냐의 싸움이지. 나는 그 과정을 ‘ 표백‘이라고 불러." - P39

한국 여고생들의 계급을 결정하는 요인이 뭔지 알아? 외모와 학업 성적, 성깔이지. 그리고 세연은 그 세 가지 를 완벽하게 다 갖춘 여왕이었지." - P55

그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일종의 패배였다. 그 자리에 있는 어떤 사람도 다른 이로부터 존중과 존경을 받지 못하며, 설사 원하는 시험에 합격한다 해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을 터였다. - P67

그것도 나 같은 이유로 공무원이 되겠다고 생각한 놈들일 거야. 나를 포함해 이런 싹수 노란 녀석들이 정말로 시험에 합격해 대한민국 중앙과 지방 정부를 이끌어가는 공무원이 될 것을 생각하니 나라의 장래가 근심스러 웠다. - P69

어떤 일이 위대해지려면 그 시대의 시대정신과 맞닿아 있어야 해. 그러니까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이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그건 내가 시대정신을 꿰뚫어봤다는 뜻이 되는 거야. 링컨이 게티즈버그 연설을 할 때 그 동기가 그저 순수하기만 했을까, 아무런 정치적 득실을 고려하지 않고? 도스토옙 스키가 도박 빚을 갚으려고 (죄와 벌>을 썼다고 해서 그 책의 가치가 달라져?" - P72

물론 자살은 공동체에 해가 된다. 자살은 그 공동체가 믿고 있는 신화에 의문을 제기해 결속을 무너뜨린다. 바 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자살 선언을 하는 것이다. 공동체는 그러므로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그걸 범죄로 규정한다. 자살 선언에 동참하든 하지 않든, 그런 규정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지는 여러분 마음이다. - P86

완성된 사회에도 근본적인 불의와 부조리는 있으나, 완성된 사회는 한 가지 답을 고집하지 않음으로써 그 부 조리를 피해간다.
이 시스템에서는 어떤 모순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지만, 또 어떤 모순도 혁명이 일어날 정도로는 쌓이지 못한다. 고작해야 ‘선거 혁명‘이다. 즉 오늘날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사이의 논쟁은 적당한 온도의 온수를 놓고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도관과 차가운 물이 나오는 관 사이에 레버를 어느 위치에 놓느냐를 두고 벌이는 싸움에 불과하다. - P94

이는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의 결합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결과다. 자유민주주의는 교리에 따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근본적으로 우월할 수 없고 모든 사람이 가치 면에서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수정자본주의는 시장 가치를 바탕으로 하는 평가 적도 한 가지만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두 이데올로기가 결합한 가치 체계에서 한 인간의 가치를 재는 방법은 ‘그 사람이 자유민주주의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 있는가(독재자나 범죄자가 아닌가>‘와 ‘그 사람이 얼마나 높은 시장 가치를 갖고 있는 가‘가 된다. - P97

표백 세대들은 아주 적은 양의 부를 차지하기 위해 이전 세대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경쟁을 치러야 하며, 그들 에게 열린 가능성은 사회가 완성되기 전 패기 있는 구성원들이 기대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아주 하찮은 것 에 불과하다. 가장 똑똑하다는 젊은이들조차 엘리트 조직의 끄트머리가 되기 위해 몇 년을 골방에 처박혀야 하고, 그런 노력이 결실을 얻은 뒤에도 조직의 말단에서 다시 경쟁을 시작해야 한다. - P98

박탈감과 좌절감은 뿌리 깊이 박혀 있지만 이런 좌절감은 집단적인 분노로 발전하지 못한다. 투쟁은 손해 보 는 일이라는 것을 모두 다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선배와 상사, 기성세대를 찢어 죽일 것처럼 성토하다가도 면접 시험장에서는 한없이 고분고분해지고 공손해진다.
패배를 자연스러운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이들 중 몇몇은 정면 승부를 벌이고 작은 이득을 위해 아득바득 싸우 는 태도를 촌스럽다고 여기게 된다. 기왕에 지는 것, 한발 물러난 자세로 "나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와 같은 태 도를 보이거나 아예 싸움을 피하는 것이 그나마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다. 그것이 ‘쿨한 모습‘으로 받아들여진 다.
진정으로 새로운 주장이나 사상이 없는 상태에서 조롱과 비아냥거림, 의미 없는 장난이 이 세대의 트레이드마 크가 된다. - P99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생의 가판 장사가 망해버려 그나마 내 면목이 상대적으로 아주 떨어지지는 않았다는 데 마음의 위안을 얻기도 했다. - P100

공무원 연금과 고용 안정성의 대가로 미래가 없다는 사실 정도는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아, 내가 그러기로 했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때부터. - P108

직장과 직업이 한 사람의 사회적 신분을 결정짓고, 사회적 신분이 그 사람의 내면과 성격을 좌우하는 것 같았으며, 나는 하급 공무원이라는 신분과 하급 공무원의 성격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 P111

세연은 세상을 바구고 사람들의 존경을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무가치한 것처럼 예기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잖아. - P150

7급 공무원으로서 나는 재미없고 불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이런 괴로움을 참고 견된다고 해서 누 군가가 나를 기억해주거나 세상을 바꿀 업적이 생길 것 같지도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내가 자살 선언을 허황 된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었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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