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방의 빛 : 시인이 말하는 호퍼 (리커버)
마크 스트랜드 지음, 박상미 옮김 / 한길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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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퍼의 그림은 고독과 우울, 그러면서 평안한 분위기가 주는 위로와 안식이었다. 그런 감상에 더해 기하학적인 요소에 눈 뜨게 해준 책이었다.

우리는 원인도 결과도 알 수 없는 어떤 현상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그늘 속에서 보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림과 우리 사이에 놓인 무언의 장벽을 바라보며 숙고하는 일뿐이다. - P53

내면으로 몰두하고 있는 모습이 그림의 주된 방향과 엇갈리고 있어서, 기차간의 갇힌 속성에서 자유로워 보이는지도 모른다. 안에서밖으로 나갈 수 없는 동시에 밖에서도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듯한느낌은 「나이트호크」에서 경험했던 그 느낌,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다가는 머무르게 하는 느낌과 유사하다. 이것은 호퍼의 그림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양식으로, 서사성의 의도에 회화적인 기하학적 요소가 반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 P71

호퍼의 빈 공간
호퍼의 그림은 짧고 고립된 순간의 표현이다. 이 순간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위기를 전달하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암시한다. 내용보다는 분위기를 보여주고 증거보다는 실마리를 제시한다. 호퍼의 그림은 암시로 가득 차 있다. 그림이 연극적일수록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지고, 그림이 현실에 가까울수록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여행에 대한 생각이 마음속에서떠나지 않을 때, 그림은 우리를 더욱 끌어들인다. 어차피 우리는 캔버스를 향해 다가가거나, 아니면 거기서 멀어지는 존재가 아닌가.
우리는 그의 그림을 볼 때 우리 자신을 자각하고 있다면 그림이 드러내는 연속성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호퍼의 그림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의 사건들로 채워질 장소로서의 빈 공간vacancy이 아니다. 즉 실제의 삶을 그린 것이 아닌 삶의 전과 후의 시간을 그린 빈 공간이다. 그 위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그 어두움은 우리가 그림을 보며 생각해낸 이야기들이 지나치게 감상적이거나 요점을 벗어나 있다고 말해준다. - P50

나는 앞에서 호퍼의 빛은 이상하게도 공기를 채우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했다. 대신 그의 빛은 벽이나 물건에 달라붙어 있는 듯하다. 마치 그곳에서 조심스럽게 잉태되어 고른 색조로 우러나오는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다(여기서 색조란 명암을 포함한 색의 효과를 의미한다). 화가인 내 친구 베일리William Bailey가 언젠가 호퍼의 형태는 빛의 감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난 그 말에 동감한다. 호퍼의 그림에서 빛은 형태에 드리워지지 않는다. 그보다 그의그림은 형태를 가장한 빛으로 구성된다. 그의 빛, 특히 실내의 빛은그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데도 신빙성이 있다. 모네의 빛과는 정반대다. 모네의 빛은 사방으로 맹렬하게 퍼지면서 모든 것을 비물질적으로 만든다. 그의 그림 속에서 루앙 성당의 장엄한 파사드는 웨딩 케이크처럼 부서질 듯하고, 견고한 석교인 워털루 다리는 푸르스름한보라빛의 안개 같은지 생각해보면 된다. - P58

호퍼의 그림은 즉흥적이라기보다는 조심스럽고 꼼꼼하게 계획된 것이고, 그의 빛은 축하의 빛이라기보다는 기념의 빛이다. 그의빛이 기하학적인 견고성을 갖추게 된 것은 빛이 흩어지지 않도록빛에 어떤 생명을 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빛은오히려 빛이 저항하고 있는 대상을 떠올리게 한다. 그에게 빚은 결국 어둠이라는 더욱 강한 세력의 휴지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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