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라는 생활
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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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단편은 타인을 통해 나를 돌아보게 만들기도 하고, 또 다른 단편들은 관계에 대한 염증이 곪아 버릴 정도로 타인을 혐오하게 만들기도 한다.
‘너’라는 타인은 대체 나에게 어떤 존재이고,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를 계속 고민하게 만든다.

특히 편견과 추측으로 얼룩진 사람들의 무례한 호기심과 관심의 극단을 보여주는 ‘자정 무렵’과 ‘아는 언니’는 이 소설집의 진미라고 생각하는데, 누군가는 ‘너’처럼 저런 의견들이 힘과 위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세상의 모든 일이 그냥 몽글몽글해지는 느낌이다…

생각해 보니 김혜진의 소설은 중장편만 봤지, 단편집은 처음이었다. 몇몇 수상작품집에서 시커먼 먹지같은 소설을 봤고, 보고 나면 이상하게 그 먹지가 점점 밝아져 마음이 따듯해졌다. 그런 느낌은 작가의 글에서 느껴지는 동질감에서 오는 공감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조수석에 앉은 채 차창을열었고 차가운 바람을 들이마셨다. 어떤 의도 같은 게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네가 한 말의 의미를 자꾸 요리조리 돌려보게 됐다. - P28

서른 중반이 다 되도록 아무 요령도, 준비도 없이 살아왔다는생각은 차츰 잦아들었다. 네 눈엔 틀림없이 내가 무능하고 한심하게 보였을 거라는 생각도 점점 옅어졌다. 끝까지 남은 건, 멀쩡한동네에 재개발이니 재건축이니 하는 기대감을 전염시키고 십 년이 넘도록 그곳 사람들을 끙끙 앓게 만드는 게 바로 너 같은 사람들이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 P29

너는 길고양이를 끔찍이 생각하는 사람이고 요령 있게 집을 사고팔며 차익을 남길 줄 아는 사람이고 내게 아무런 경계심 없이 사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이고, 누구나 관심 있어 하고 궁금해할 정보를 대가 없이 공유하는 사람이고 낡고 오래된 것들은 말끔히 부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고, 몇날 며칠씩 오지 않는 고양이를 기다리는 사람이고.
그러므로 결코 내가 다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P35

누군가 취업이 됐다는 소식을 들으면몸과 마음이 한없이 위축되던 시기였다. - P54

다행이다. 그지?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다행이라니. 그런 생각은 조금도 들지않는다.
그러나 한밤에 나란히 누워 잠이 들 무렵에는 이만하면 나쁘지않고, 어쨌거나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만하자, 헤어지자, 내내 벼르듯 쥐고 있었던 그런 말은 또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내일은, 모레는, 더 좋아질 거라는 말을 하게 된다. 이렇게 오 년이 지났구나, 이대로 십 년이 가고 또 십 년이 갈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에 오싹해지면서도 네가 없는 생활은 상상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수없이 놓아버리고 그만두고 포기하고 싶으면서도, 끈질기게 너를 놓으려고 하지 않는 나의 모습을 거듭 확인하는 지금의 생활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P86

고개만 끄덕거리고 있다. 나도 잠자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듣다보면 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나 싶은 이야기들이고나와 상관없는 일인 것 같은데도, 사람들은 자꾸만 나와 너의 의견을 묻고 동의를 구하고 싶은 눈치다. - P106

내 설명을 듣고서도 사람들은 그래도 대우나 조건이 비슷한 거 아니냐고 알은체를 한다. 나는 몇 차례 더 구체적인 설명을 보태다가 그만 입을 다물어버린다. 사람들의 추측과 짐작들이 내 처지와 형편을 마음대로 상상하도록 내버려둔다. - P107

어쨌든 누구든 결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여기저기서 들은 외국의 사례들을 들먹이기까지 한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모두가 흥분하면서 해야 할 이야기일까 싶은데도 도무지 그만둘 기미가 없다.
그게 뭐 중요한가요.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죠.
내 입에서 문득 그런 말이 튀어나온다. 이쯤에서 다들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한 말이지만 분위기는 묘하게 더 경직된다. - P109

사람들은 우리와 나란히 서 있다가 한꺼번에 갑자기 몇 계단 위로 뛰어올라간 뒤 우두커니 우리를 내려다보고, 또 갑자기 우르르 몇 계단 아래로 내려선 다음 멍하니 우리를 올려다본다. 그 바람에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그들보다 아래였다가 위였다가 오르락내리락한다. 이러나저러나 우리와 나란히 서 있는 건 해본 적도없고, 하고 싶지도 않고, 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 같다. - P110

나는 점점 심각해지는 분위기를 물리치듯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사무실에 들어가야 한다는 핑계를 댔지만 그곳에 앉아 네 입장이 생략된 일방적인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니, 네가 정말 그렇게 했다면 내가 다 알지 못하는어떤 사정이 있을 거라고,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 P159

이후 몇 번인가 너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지만 이 이야긴 꺼내지 못했다. 어쨌든 말을 시작하면 결국엔 내가 왜 이런 일에 휘말리고, 아무 상관 없는 사람에게 이런 원망과 비난을 들어야 하는지, 다시금 너를 탓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그러면 오래전 그랬던 것처럼 옳고 그름을 따지고 훈수를 두면서 주제넘은 이야기를쏟아내게 될지도 몰랐다. - P160

네가 신경도 쓰지 않고, 도움도 주지 않아서 내가 다 망하게 생겼다.
나는 네가 그런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서운하고 섭섭한 마음을 우회적으로 토로하고 싶은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다시금 이 모든 게 나 때문이라고, 또 나를 지목하며 원망을퍼붓고 싶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 순간 내가 확인한 건아주 가까운 사람을 탓하는 네 오랜 버릇이 여전히 너에게 남아있다는 사실이었고 그것이 말할 수 없이 실망스러웠다. - P164

너와의 관계는 왜 이렇게 계속 이어져온 것일까. 완전히 연락이 끊어지고 그래서 처음부터 모르는 사람처럼 서로의 삶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릴 몇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서로에 대해 편안한기억만을 나눠 가질 수 있었는데. 나는 왜 겁도 없이 네 연락을 받고, 안부를 듣고, 네 삶에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서는 걸 포기하지못한 것일까. - P172

내가 한 마디를 하면 언니가 두 마디, 세마디를 했다. 누구나할 법한 이야기이고 틀린 말이 아닌데도 듣다보면 묘하게 기분이상했고 뭔가 말을 하는 게 점점 더 어려워졌다. 대화는 적당한 속도로 차분하게 앞으로 나아가다가도 덜컹거리며 엉뚱한 방향으로이어졌고 매번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 P187

고개를 들면 언니의 표정과 눈빛이 마주보였다. 그게 호의든,
배려든, 친절이든, 호기심이든 뭐든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고,
모욕을 당한 것처럼 불쾌했다. 그럼에도 나는 내색하지 않으려고최선을 다했다. 그날 하루 동안의 내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 P190

그 언니가 사온 호두파이는 끔찍하게 달았다. 나는 견디듯 입에한 움큼씩 파이를 떠넣으며 계속 말했다. 도대체 이해니 격려니그런 것에 왜 목숨을 거냐고. 그런 말이 더 역겹고 짜증난다고. 너는 내 손에서 포크를 빼앗고 파이를 통째로 개수대에 처넣으며 소리쳤다.
진짜고 뭐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진짜가 아니면 뭐 어때서. 내가 좋으면 된 거지. 내가 그런 것도 모르는 바보 등신인 줄 아니? - P197

너에게 나는 연인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월세를 내는 세입자조차도 아닌 그저 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너를 좋아했고 너와 함께하고 싶었던 마음 같은건 너무나 철없고 보잘것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 P198

관광이나 휴양이 아니라 여행이었다는 것에 자부심이 있었고,
그런 여행을 통해 삶에 대해 소박하고 단순한 태도를 갖게 된 것을 너는 자랑처럼 말하곤 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여행이 아니라 고된 훈련이나 극기 체험처럼 느껴졌다. - P211

형식적으로라도 우리를 붙잡지 않던 주인에 대한 괘씸함, 보란듯 신속하게 테이블을 치우던 직원들에 대한 불쾌함, 나를 유별난사람으로 만들어버린 너에 대한 미움, 모두를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자책과 귀한 시간을 망쳐버렸다는 후회 따위의 감정들은 집에가까워져올 무렵에 잦아들었다. - P216

너와 함께 본 조감도 속의 팔복장이 완공되었더라면, 그것이너와 내 상상 속에 있던 어떤 미래라고 할 만한 것을 완벽하게 실현했더라면, 우리는 그 광장에서 어떤 봄을 마주했을까. 어떤 일상을 나누었을까. 그중엔 우리를 결코 떼어놓을 수 없게 하는 결정적인 순간도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런 순간들이 너와 나를더 힘껏 끌어안을 수 있게 하지 않았을까.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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