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실직 도시
방준호 지음 / 부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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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도시 군산의 최근 20-30년간의 상황을 현장 정규직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지역공무원, 자영업자 등의 진술을 토대로 기록했다. 한국에서 자리 잡은 ‘노동‘이라는 개념을 통해 산업도시의 흥망성쇠가 각각의 주체들에게 어떤 파급효과를 낳았는지를 정리해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결과적으로 안타까운 점은 우리의 현실이 민첩한 유연성을 갖춘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는 보상은 적고, 안일함에 주저 앉아버린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누리는 기득권은 점점 두터워진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직업 전문성과는 무관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을 관리자로 뽑아놓고 ‘아무나 쉽게 제대로 할 수 없는 능력을 갖춘 전문 인력들을 관리한다. 이런 것이 공정하고 바람직하다.
는 광적인 믿음이 있다. 이는 충분히 비윤리적으로 보이나, 기득권층(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은이런 선입견이 만들어내는 차별과 멸시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왔다. 하지만 이들이 시대 흐름에 대응하지 못해 산업구조개편으로 순식간에 무너져버리고, 노동의 존엄성을 빙자해 인간 존엄성(결국 이기심)을 주장하는 것이 반복되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시스템을 만든 권력자들은 본 경기에 빠져있고 하위 그룹들이 아귀다툼하는 꼴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떤 노동자들이건 우리 안의 차별을 없애고 연대해야 진정한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실은 2000년대 이후 모든 정부가 일자리 정부를 결심했다. 일자리는 지표가 흔들릴 때마다 부단히 대책을 내놓는 대표적인 과제가 되어 있다. ‘노동은 인간 삶의 본질‘ 따위 고색창연한 당위 때문은 아닌 것 같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일자리의 맥락은 일종의 나랏돈 들지 않는, 노력한 만큼 주어지는 ‘공정한 분배 정책에 가깝다. (무려 시장이 완벽히 승리한 21세기에) 기업에 조금이나마 임금을 통해 분배 책임을 지우는 방법으로 여겼다. 노력한(?) 자에게만 떡이주어져야 한다는 공통 감각(?)에 바탕한 분배처럼도 보였다. 보수든 진보든 다른 의견이 끼어들 틈이 없다. 모두가 ‘중요하다‘고 했다.

그런데도 제조업을 말하고 생각하는 일은 드물었다. 좀 시대에 뒤처진 것처럼 느꼈다. 1980년대 후반 수도권에서 태어나 2000년대 이후 서울에 살며 작은 공장이나마 제대로 본 기억이 없다. 주변 대부분은 컴퓨터 화면을 일터삼았다. 공장과 삶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반짝이는 것 같았다. 2010년대를 지내면서 공식처럼 외운 문장(제조업 중요해!)을 실감하는 일은 점점 드물었다.

대우와 정부가 공장 건설 비용 문제를 두고 씨름을 했던 듯도 보이지만, 결국 대우는 군산을 새 자동차 공장 자리로 정했다.
당시 부평이나 창원 대우차 공장이 옮겨 올 계획까지 세운다는 소문이 돌았다는데, 그 정도까지는 안됐다. 대우는 바다를 메워주고 돈 대신 땅을 받았다. 그 자리에 공장을 지었다. 120만 평 규모다. 군산 국가 산업 단지의 절반을 넘는다.

국가 산업 단지가 생겨난 이후에도 바다를 메워 공장 부지를 짓는 일은 멎지 않았다. 오식도부터 비응도까지를 메운 군산제2국가 산업 단지가 만들어진 건 2000년대다. 군산 제2국가 산업 단지 대표 기업이 현대중공업 군산 조선소다.

위기는 많은 것에 새로운 정당성을 부여한다.

한국은 그사이 어디쯤, 중간재 생산 국가로 운 좋게 자리 잡았다. 세계 생산에 강하게 얽혔고 구조적인 무역 흑자국으로 불렸다. 세계 경기가 좋으면 수출이 늘어서, 세계 경기가 좋지 않으면 생산에 필요한 자재 수입이 줄어서 늘경상 수지는 흑자였다. 쉽게 휩쓸리고 변동성이 늘었지만, 아무튼 흑자였다. 국가 경제 전체로 보면 성공적인 2000년대를 났다고 자부할 만하다. 1990년대 꿈꿨던 모습이다. 생산과 소비의 무대가 세계화되었다.

대기업은 "역시준비성부터 달랐다." 당시 현대중공업 회장이 군산 출신이기도 했다. 백일성과 동료들은 조선소가 들어서야 할 땅을 차지하고 있던 기업과 협상을 중재해 현대중공업에 땅을 넘겼다. 보조금 200억 원을 시와 도가 나뉘 지원했다. 도로와 주차장을 새로 지었다.
이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백일성은 군산대학교에 가서 조선업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 과정을 준비해 달라고 요구했다. 군산대학교에는 조선공학과가 설립됐다. 심지어 유서 깊은 지역 고등학교 장항공고는 충남조선공업고등학교로 이름까지 바꿔 달았다.

저성장과 변동성은 한국 사회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산업 단지만 놓고 보자면 IMF에 이은 두 번째 비정규직 붐을 이루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유연하게 인력을 구성해야 한다고 여겼다.
조선업은 그 가운데서도 유연화가 가장 적나라한 산업이 됐다. 조선 3사(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의 기능 인력(생산직) 비정규직은 2010년 8만 6810명에서 2015년 13만 5785명까지 늘었다(비정규직 중심으로 꾸린 해양 플랜트 산업 확장의 영향도컸다). 정규직은 1990년 이후 6만 명 수준을 유지할 뿐이다. 현대중공업 군산 조선소는 이런 시점 만들어졌다. 울산이나 거제에서 조선업이 가지는 의미와 군산에서 조선업이 가지는 의미는 그러므로, 꽤 다를 터였다.
군산에서 현대중공업은 산업 단지와 도시에 비정규직 노동자가 유입되는 것을 주로 의미했다. 울산이나 거제도 같은 변화를 겪었으나, 그나마 긴 역사 속에 형성된 중산층 조선업 가족도 도시를 이루는 한 축으로 남아 있기는 했다.

현대중공업 군산 조선소는 2017년 6월 가동을 완전히 중단했다. 8년, 짧은 역사였다. 현대중공업 사람들은 사라지고, 현대중공업을 바라보고 꿈꿨던 사람들만 남았다.

2018년 2월 13일, 그날, 한국지엠 군산 공장은 3개월 보름여 뒤6319) 공정을 폐쇄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현대중공업 군산 조선소의 가동 중단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이유는, 덜 고통스러웠다기보다 통곡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의 목소리는 터져 나오지 않았다.
노동조합과 현대중공업 군산 조선소 하청 노동자의 관계는 느슨했다. 하청 노동자 문제는 조선업 노동조합의 묵은 숙제다.
사내 하청 노동자 문제를 둘러싸고 민주노총 금속산업연맹은 2004년부터 10년 가까이 현대중공업 노조를 제명하기도 했다. 현대중공업 사내 하청 노동자 박일수 열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현대중공업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과 연대에 나서기는커녕, 장례식장을 때려 부수고, 탄압했던 일이 결정적이다(<프레시안), 박점규의 동행, ‘정몽준 왕국‘ 현대중공업 ‘어용 노조‘ 12년 만에 몰락), 정규직의 이해와 기업의 이해가 맞물려 그 바깥의 이들은 들어설 수 없는 해자를 쳤다. 노동 운동은 정규직 조합원 처우 개선에 머물렀다.
조합이 하청 노동자를 품지 않은 시기는 더군다나 조선소에 비정규직이 급격하게 늘던 시기와 겹친다. 군산 조선소는 노동자 80퍼센트를 비정규직으로 채웠다. 조선업이 비정규직으로 한창 재편되던 시점(2009년) 지어졌으므로 당연한 결과다.
2013년 현대중공업에도 민주노조가 다시 들어섰다. 돌아온 민주노조도 비정규직을 포괄해 노동조합을 재건하지는 못했다.
여전히 정규직 중심이었다. 정규직은 군산 조선소가 가동을 멈춰도, 울산 조선소로 자리를 옮기면 될 일이었다. "조합과 현대중공업 노동자 사이에 연결 지점이 많지 않았어요. 조선소가 가동을 중단하기 6개월쯤 전에야 소식을 알게 됐어요. 그나마 정규직인 조합원 500명 정도는 울산으로 가게 됐으니까 큰 반발이 있지는 않았죠. 하청 노동자는 조합원이 아닌 채 뿔뿔이 흩어져 버렸고요."(최재춘, 민주노총 군산지부장)

그렇다면 답은 재취업 혹은, 자영업뿐이다. 재취업이라고 해 봐야 이전 같은 일자리는 사라졌으므로, 다른 직업을 찾아야한다.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머뭇댄다. 정규직은 한층 그렇다.
여론은, 머뭇거림을 조롱했다. 인정, 그들은 누군가 보기에 고임금에다 안정적인 삶을 보장받으며 일했다. 귀하게 일한 탓에 스스로 제일 하나 찾지 못한다. 대체 왜 그들을 보듬어야 하는가.

다만 한국 사회에서 일이 지닌 사회적 인식은 엄연히 계층화돼 있다. 상대적으로 열악한사회 복지 일자리의 처우와 환경이 문제가 된다. 또한 일에 대한 젠더 구분이나 고정 관념을 깨기가 쉽지 않다.

이 일, ‘하고자 한다면 누구나 할 수 있어도 제대로 하려면 아무나 할 수 없는 프로의 세계‘다.

한국지엠의 비정규직, 특히 30~40대 젊은 축에 속하는 노동자들은 정부와 고용 기관에 모범적인 케이스‘로 불린다. 독려하고 관리하지 않아도 알아서들 새 일자리를 구했다. "2019년 초까지만 해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아 애태웠던 정규직 노동자와는 확실히 결이 다르다." (김정화, 군산 고용위기지원센터 팀장) 비정규직으로 살아 왔기에 임금과 처우에 까다롭지 않고, 희망퇴직금을 받지 못해 다급했으며, 무엇보다 옮겨지는 것에 익숙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뒤따른다.

공장이 떠난 이후,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민첩함을 부러워한다. 동시에 어떤 세상의 이치가 실직 이후 이들과스스로의 차이를 갈라놓은 것은 아니었을지 되새긴다. 기억에는 미안함도 꽤 섞여 든다. "세상에 나와 보니 정규직들이 완전 뒤쳐져 있지. 공장 안에서도 정규직이 등한시하는 힘든 일을 비정규직들이 더 많이 했으니까 능력 면에서도 낫다고 봐. 생존 능력 자체가 강한 것도 사실이고." (박철수)

10퍼센트도 되지 않는 제조업 사업체가 많게는 절반 넘는(울산 동구나 거제 같은 조선업 도시가 특히 두드러진다) 고용을 흡수한다. 일부 대기업이 해당 지역의 제조업 전체를 견인해 가는 상황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지역의 제조업 대기업의 위기가 곧 지역 경제 위기로 파급될 가능성이 큰 것을 의미한다‘ (고용노동부 · 한국노동연구원, 지역산업 및 고용 위기 지역 지원 대책의 고용 효과‘).

산업과 일자리는 들고 나길 반복한다. 도시를 쓰다듬고 할퀴고 지나간다. 들고 나는 산업과 일자리에 따라 모습은 바뀐대도.
아무튼 도시는 그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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