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싱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9
넬라 라슨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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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린 레드필드는 시카고의 호텔에서 옛 친구인 클레어 캔드리를 우연히 만난다. 클레어는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백인 외모에 가까운 혼혈이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디선가 나타난 백인 고모들에 의해 시카고를 떠난 클레어는 백인 행세를 하는 흑인, 소위 말하는 패싱‘을 하는 흑인으로 살아왔다. 클레어는 아이린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고, 아이린은 ‘패싱‘을 하는 클레어의 행동이 마땅치 않아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클레어의 성화에 못 이겨 그녀의 집을 방문한다. 클레어의 집에서 만난 백인 남편 존 벨루는 인종차별주의자였고, 흑인을 조롱하거나 차별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그렇게 아이린과 클레어의 만남은 불쾌한 기억만 남김 채 2년의 시간이 흐른다.
2년 뒤 아이린이 사는 뉴욕으로 찾아온 클레어는 다시 아이린과의 만남을 시도한다. 완벽한백인 행세를 함으로써 자기 자신(흑인)에 대한 신의를 지키지 못한 내적 갈등과 가식적인 삶으로 빌어진 고립감이 클레어의 마음속에 자리해 아이린과의 인연을 계속해서 갈망했던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반드시 얻고야 마는 클레어의 성격 탓에 아이린은 클레어를 자신이 속한 흑인사회에 소개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아이린의 남편 브라이언과 클레어의 묘한 분위기를 감지한다. 아이린은 클레어의 인생을 망칠 수 있는 카드를 쥐고 있었지만, 클레어가 남편 존 벨루에게 흑인임이 들통나 이혼을 하게 되면 브라이언과의 관계가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갈등만 깊어진다. 그러던 중 아이린이 흑인 친구와 동행하는 길에 존 벨루를 우연히 마주치게 되고 존 벨루로부터 자신이 ‘패싱‘을 했다는 오해를 받고 조롱을 당하면서 아이린은 존 벨루에게 넌지시 클레어의 정체성을 암시하는 말을 남긴다. 이후 아이린, 클레어, 브라이언이 함께 한 흑인들의 사교 파티에서 존 벨루가 들이닥쳐 클레어를 위협하며 궁지로 몰아가는 중 클레어는 건물 창 밖으로 몸을 던져 자살해 버린다.

‘패싱‘이라는 단어에 대한 이해도 없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백인 외모처럼 보이는 흑인이라면 ‘머라이어 캐리‘정도만 알고 있었다. 백인처럼 보이는 본인의 외모를 부정하고 까맣게 태닝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흑인이라고 말하는 그 가수를 보며, 혼혈들은 전부 흑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이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산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보면서 인종차별이나 흑인 인권에 대한 심오한 분석을 하는 건 좀 과할 듯하다. ’패싱‘이 만연하던 시절, 흑인이나 혼혈들이 가졌던 복잡한 심리상태, 스스로 느꼈던 자기모순에 대한 자괴감을 묘사하는 심리소설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불행한 삶으로 인해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 아쉽다. 복잡한 심리를 표현한 대부분의 외국어 소설들이 그렇듯이 번역에도 꽤 많은 어려움이 보인 것도 아쉬웠다.

"클레어, 너 그런 생각 해본 적 있니?" 아이린이 물었다. "주님의 사랑이 의과 자비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불행과 지독한 학대가 용인되는지?
그것도 늘 가장 열렬한 신자들에 의해서 말이야."
"생각해본 적이 있냐고?" 클레어가 외쳤다. "그것이, 그들이 오늘의나를 만들었어. 왜냐하면, 당연히 난 도망가기로, 자비의 대상이나 골칫거리, 심지어는 경솔한 함의 딸이 아닌,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으니까. 게다가 난 욕심이 없지 않았어. 나는 내가 못생기지 않았고, 백인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도 알았지. 린, 너는 모를 거야, 사우스사이드에갈 때면 내가 얼마나 너희 모두를 미워하다시피 했는지. 너희들은 내가갖고 싶었지만 결코 가질 수 없던 것들을 다 가지고 있었어. 나는 그것들을 다 가지고 그보다 더 많은 것들까지 갖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점럼 굳혀갔지. 내 심정을 이해하겠니, 이해할 수 있겠어?" - P37

그리고 그녀의 분노와 의구심에는 또다른 감정, 다른 질문이 섞여있었다. 왜 자신은 그날 얘기하지 않았을까? 벨루의 맹목적인 증오와 혐오 앞에서 왜 자신의 혈통을 숨겼을까? 그가 자기주장을 펼치고 그릇된 생각을 맘껏 떠들도록 왜 내버려두었나? 어째서 자신을 그런 고통에 방치한 클레어 켄드리 한 사람 때문에 자신의 인종을 방어할 기회를 놓쳤을까?
아이린은 이런 질문들을 던지며 통감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녀도잘 알 듯 수사修辭에 불과했다. 그녀는 모든 대답을 알고 있었고,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기막힌 노릇이었다! 그녀는 클레어를 배신할 수 없었고, 모욕당한 사람들을 대변하듯 보이는 위험마저 감수할 수 없었다.
그들을 대변함으로써 결국 클레어의 비밀을 폭로할 수 있다는 두려움때문이었다. 그녀는 클레어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그녀는 클레어가버렸으나 완전히 끊어내지 못한, 그 인종이라는 끈에 묶여 있었다. - P71

"당신 그 여자를 만나려는 건 아니겠지?" 그가 물었다.
그의 말이 사실상 질문이라기보다 경고에 가깝다는 걸 아이린은 알아차렸다.
그녀는 앞니를 지그시 물었다. 잇새로 흘러나오는 그녀의 말투에는약간의 빈정거림이 묻어 있었다. "브라이언, 나도 그 정도 바보는 아니야. 어떤 남자가 처음 본 자리에서 날 깜둥이라고 불렀다면 그건 그 사람 잘못이지만, 그에게 다시 기회를 준다면 그건 내 잘못이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아."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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