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두 번
김멜라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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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몬을 춰줘요>는 인터섹스라는 태생의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성을 ‘이태원’에서 찾아 나가는 소설이다.
뇌에도 성기가 있다라는 말처럼 생물학적 성보다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후천적으로 찾아가는 주인공의 은유가 돋보인다.

<적어도 두 번>은 여성의 성적 억압을 해학적으로 풍자(이 소설에 이런 고전적인 평을 하다니)한다. ‘지위’를 ‘자위’로 읽은‘여성의 자위에 대한 평가는 객관적으로 합의할 수 없는 문제이며 여성의 신체적 자유에 관한 의견 또한 신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라는 기사의 문장이 이 소설의 시발점이 되지 않았을까 예상해 본다.(특히 이 기사는 여성에 대한 억압이 가장 심각한 이슬람 문화에 대한 기사이다.) ‘클레이우투스’를 자극하는 방법을 교육하겠다는 의지로 아동 성추행범이 된 주인공의 변론은 사실 상당히 상식적으로 함의 돼야 할 정의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자전적 소설이라고 밝힌 <물질계>에서는 지적으로 자신감이 과하게 충만했던 대학원 시절의 주인공이 논문을 포기하고 과학적 사고에서 미신적 사고로 인생을 전환하다 만난 연인과의 이야기이다. 같은 연구실 조교를 따라 논문통과운을 봐준다는 ‘은하수’라는 철학관을 찾아간 주인공은 그날 본 사주대로 인생을 29에 말아먹는다. 주인공은 어린 시절 할머니가 자신의 사주를 ‘집안 말아먹을 년’이라고 풀이해 온 날을 상기하며, 사주라는 철학의 과학적 진리를 수긍하고는 다시 ‘은하수’를 찾아가지만 만나지 못하고 급한 생리적 현상에 들어간 굴다리에서 레즈비언 사주 ‘레사’를 찾아간다. 레사에게 사주를 보며 사이가 가까워진 둘은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어 간다.


작가가 등단을 하기 위해서는 안전하고 평이한 작품을 써서 등단을 해야한다던데, 과연 초창기의 작품은 안정적이고 전형적인 단편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후 서서히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는 독특한 작품들이 재밌고 인상적이었다. 점점 더 개성이 드러날 것 같으니 더 큰 재미를 선사해 주리라 믿는다.

나는 조직을 원했고 조직 문화를 신뢰했다. 누군가는 조직이 개인의 자유와 창조성을 억압한다지만 나는조직이야말로 타인의 무분별한 망상과 폭력으로부터 개인을 지켜주는 보호막이라 믿었다. - P164

조금만 더 하면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완전한 탈락보다 아쉬운 탈락이 더 나쁘다는 것을 모르던 시절이었다. - P174

흔히 길을 잃었다고 하지만 길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다.
찾아야 할 것은 길이 아니라 지금 그가 서 있는 위치였다. - P190

내가 어린왕자를 좋아하는 건 어린왕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린왕자를 왕자라 부르는 건 남자라서가 아니라 자기의 왕국을 갖고 있어서다. - P21

만약 이테가 앞을 볼 수 있었다면 그 애는 스스로 클리토리우스와 만나는 법을 터득했겠죠. 어쩌면 세상의수많은 맹인들이 스스로 그 만남을 이어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혹은 이테처럼 어떤 유파고가 그 만남을 인도해주는지도.
유파고, 저는 압니다. 사람에겐 저마다 각자의 클리토리우스가 있고 그것은 신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요. 숨기고감춰야 할 부끄러움도 아니고 참과 거짓의 방정식도 아닙니다. 저마다 열심히 문질러야 할 콩알일 뿐입니다. 만약 인류가 콩알을 숨기거나 학대하지 않고 자유롭게 문질렀다면 그것은 제크의 콩나무처럼 싹이 트고 줄기가 자라 하늘로 치솟을 만큼 그 지위(‘이 지위는 보이는 그대로의 지위‘)가 높아졌을지 모릅니다. 혹은 식물의 그것처럼 색과 향기를 뿜으며 피어올랐을지도 모르죠. 식물이 저마다의 개성으로 꽃을 피우듯 여자들은 자기만의 클리토리우스를 밖으로 피워 올렸을겁니다.
유파고, 이것이 저의 고백입니다. 저는 수천수만 개의 클리토리우스가 겨울나무의 눈처럼 봄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알았습니다. 이테가 제게 알려주었고 유파고의 죽음이란 생각이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 P83

레사는 사주팔자 명리학은 자기에게 적용하는 성찰이고수양이지, 남에게 악담을 퍼붓는 게 아니라고 했다.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면, 그게 모여 사주팔자가 된다고.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지고, 봄에는 꽃이 피고 겨울에는 눈이오고, 눈이 내려 땅에 이불을 덮어주듯 사람은 조용히 1년을되돌아보며 음기를 모으고, 봄이 오면 그 음기를 양기로 쓰는거라고, 그렇게 음과 양, 빛과 어둠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고,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운이 좋고 싶으면 밥 잘먹고 잠 잘 자고, 어디 가서 신발 벗으면 뒤축을 가지런히 모아놓고, 귀찮아도 양치질하고 자고, 무엇보다 남이 나에게 해주길 바라는 것을 내가 남에게 해주고. - P125

죽음은 어떤 공간이어서 계속 걸으면 나오는 길이다. 나는쉬지 않고 그 길을 걸었다. 그 길을 산책하고 때론 다람쥐를만나며 레사와 호흡했다. 어느 날은 내가 레사에게 물었다.
레즈비언이 되는 사주팔자도 타고나는 것이냐고, 레사는 말했다. 사주로 찾으면 찾을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러지 않겠다.
고, 설명하면 할 수야 있겠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고, 나는 레사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레사는 드라이어로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듯 내 마음속 빙하를 녹여주었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내가 잠들 때까지 내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렇게10년 동안 레사와 나는 변함없이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 - P127

스프링클러의 목적은 불을 끄는게 아니라 불을 제어해 대피할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세방은 스프링클러를 설치할 때 용수량과 면적을 계산했지만 그수식에 ‘불운‘을 넣을 순 없었다. - P200

세방이 엄마를 사랑했기에, 엄마는 그 사랑을 불쏘시개 삼아 그의 가슴에 불을 놓은 것이다. 세방도 똑같이 해주고 싶었다. 아버지의 비겁함과 어머니의 횡포에 불을 지르고싶었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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