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50페이지도 안 봤는데 눈물을 자극하면 남은 300페이지를 어떻게 완독하라고 이런 소설을 썼을까.

소설 중 증조부가 하는 짓이 꼭 우리 아빠를 빼닮아서 그런지 작품에 너무 쉽게 나 자신이 투영됐다.

그리고 그냥… 다 읽고 나니 기분이 좋다.

지우는 개새끼라는 말은 개의 새끼라는 뜻이 아니라고 했다. 여기서 개는 가짜라는 뜻이라고, 그러니까 정상 가족‘이라는 테두리 밖의 ‘가짜‘ 자식을 뜻하는 멸칭이라고 했다. 지우는 거기까지 설명하더니나쁜 말이네, 라고 말하고는 앞으로는 그 단어를 쓰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러더니 개새끼, 미친놈, 씨발놈 어느 것 하나 쓸 만한 말이 없다면서, 인간은 왜 이렇게 치졸하냐고, 왜 꼭 약한 사람을 짓밟는 식으로밖에 욕을 못 만드느냐고 했다.
"참신한 욕이 필요해. 분이 풀리는 욕이 필요해."
그것이 지우의 결론이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개새끼라는 단어를 종이에 펜으로 써보았다. 개새끼. 어원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로그 말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강아지를 떠올렸다. 자기에게 관심도 없는 사람의 바짓자락에 붙어서 꼬리를 흔드는 모습을.
왜 개새끼라고 하나. 개가 사람한테 너무 잘해줘서 그런 거 아닌가. 아무 조건도 없이 잘해주니까, 때려도 피하지 않고 꼬리를 흔드니까, 복종하니까, 좋아하니까 그걸 도리어 우습게 보고 경멸하는 게 아닐까. 그런 게 사람 아닐까. 나는 그 생각을 하며 개새끼라는 단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나 자신이 개새끼 같았다. - P13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 P14

사람들은 나를 부정 탄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런 식으로, 일어난 일을 평가하지 말고 저항하지 말고 그대로아들이라고 했다. 그게 사는 법이라고.
그녀는 댓돌에 앉은 채 엄마가 알려준 방법으로 생각해보려고 노력했다.
나는 아픈 엄마를 버렸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엄마를 땅에 묻어주지 못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개성 사람들은 내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래, 그런 일이 있다. 그건 항상 그랬던 일이다.
엄마의 말대로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그런 식의 생각은 오히려 그녀를 더 화나게 할 뿐이었다. 그녀에게는 그런 재능이 있었다. 어떤경우에도 자신을 속이지 않는 재능, 부당한 일은 부당한 일로, 슬픈일은 슬픈 일로, 외로운 마음은 외로운 마음으로 느끼는 재능.
그래, 개성 사람들은 내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런 일이 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그녀는 두 눈을 꼭 감고 주먹을 쥐었다. - P55

허영심의 힘이 얼마나 센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는 순교자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사람이었다. 가진 모든 것을, 목숨까지도 버려 천주에 대한 사랑을 지키려 했던 그들의 이야기에 감화를 받았다. 그는 증조모를 알게 되면서, 그녀가 사는 모습을 보고서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준비를 했다. 너를 구하기 위해 내 인생을 희생하겠다는 마음이었다.
그 결과로 그는 평생을 억울함과 울화와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했다. 자기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부모를 떠날 때만 해도몰랐던 것이다. 아니, 그는 평생을 몰랐다. 자기가 얼마나 작은 손해에도 예민하고 속이 좁은 사람인지. 자신은 부모를 떠날 만큼 용기가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저 충동일 뿐이었다. 떠나고 싶은 충동, 그는 그가 누릴 수 있는 인생을 그녀가 빼앗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개성으로 오고 나서 그는 향수병에 시달렸다. 형과 누나들도 보고싶고 엄마 아버지도 보고 싶고 두고 온 벗들도 생각났다. 건너 들었을땐 꿈처럼 느껴지던 개성의 거리도 온통 시끄럽고 번잡스러울 뿐 마음을 둘 장소가 아니었다. 겨우 얻은 셋방도 가축우리처럼 느껴졌다.
버젓한 마당과 우물이 있는 고향집이 그리워 자다가도 몇 번이나 했다. 부모가 정해준 여자와 결혼했다면 여전히 그 집에서 그 좋은 것들을 누리며 살았을 텐데. 자신이 잃은 그만큼을 아내는 보상해야 했다. 그런데 아내는 자신의 기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감사하는 마음은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무슨 여자가 저렇게 뻣뻣하지? 그는 생각했다.
아내에 대한 애정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자신과 달리 당당하고 강인한 그녀를 동경하면서도 두려워했다. 남편으로서의 일말의 권위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예감했고, 아내가 속으로 자신을 비웃고 있지는 않을까 염려했다. 나는 너를 돕기 위해 모든 걸 버렸는데,
왜 그만큼의 대접을 안 해주고 내 기분을 맞춰주지 않는 거지? - P61

자식은 엄마가 전시할 기념품이 아니야. - P136

엄마는 나를 보며 무안한 듯 웃어 보였다. 그런 엄마가 예전처럼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보는 엄마의 표정에서 엄마 또한 내게 거리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예전처럼 며칠씩 서로 말도 붙이지 않을 정도로 신경전을 벌일 만한 일이 우리에게는 더이상없었다. 큰불이 나기 전에 꺼버렸고, 상대에게 작은 불씨를 던졌다는것에 문득 무안해지기도 하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 그건 우리가 그만큼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서로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가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우리는 눈빛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이상 끝까지 싸울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정말 끝이 날까봐 끝까지 싸울 수 없는 사이가. 우리는 싱거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산을 내려왔다. - P137

하지만 할머니는 그날 그 자리에서 불안을 느꼈다. 경계하지 않을때, 긴장하지 않을 때, 아무 일도 없으리라고 생각할 때, 비관적인 생각에서 자유로울 때, 어떤 순간을 즐길 때 다시 어려운 일이 닥치리라는 불안이었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전전긍긍할 때는 별다른 일이 없다가도 조금이라도 안심하면 뒤통수를치는 것이 삶이라고 할머니는 생각했다. 불행은 그런 환경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겨우 한숨 돌렸을 때, 이제는 좀 살아볼 만한가보다 생각할 때.
그런 생각은 증조모로부터 온 것이기도 했다. 할머니가 조금이라도 좋다, 행복하다, 만족스럽다, 같은 표현을 하면 증조모는 부정 탄다고 경고했다. 자식이 예쁠수록 못났다고 말하고, 행복할수록 행복하다는 말을 삼가야 악귀가 질투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돌이켜보면살면서 후회되는 일은 늘 그런 것이었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함께 웃고 즐거워하고 따뜻함을 나누는 시간을 그대로 누리지 못하고 불안에 떨었던 것 말이다.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일이 세상에는 있었으니까. 아무리 불안에 떤다고 해도, 좋은 순간을 그대로 누리지 않으려해도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으니까. - P199

그는 세상 사람들이 덜 고통받고 더 잘사는세상을 꿈꾼다는 말을 하면서도 할머니의 발이 얼마나 부어 있는지, 가끔씩 배가 뭉칠 때마다 할머니가 얼마나 큰 두려움을 느끼는지에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말하면서 할머니가 벌어온 돈은 아무렇지 않게 앗아갔다. 그런 그를 볼 때면 할머니의 마음깊숙한 곳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분노가 서린 웃음이었다.
스무 살 이후의 할머니를 만난 이들은 할머니를 냉소적인 사람이라고 평했다.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화를 내거나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기보다는 비웃거나 차갑게 평가했으니까. 그 냉소적인 가면 뒤에상처받고 싶지 않고, 더는 울고 싶지 않은 할머니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몇 없었다. - P221

할머니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때만 해도 세상이 그랬어. 딸 가진 죄인이라는 말이 괜한 말이아니었다. 시댁에 책잡혀서 좋을 게 뭐가 있니. 아버지 문제로 이미책잡힌 딸이 나 때문에 공연히 더 난감해지는 걸 바라지 않았지. 지는게 이기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면 된다고 생각했지. 그게 미선이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어."
‘맞서다 두 대, 세 대 맞을 거, 이기지도 못할 거, 그냥 한 대 맞고 끝내면 되는 거야. 나는 그 말을 하던 엄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는게 이기는 거다. 너를 괴롭힌다고 똑같이 굴면 너도 똑같은 사람 되는 거야.‘ ‘그냥 너 하나 죽이고 살면 돼.‘ 패배감에 젖은 그 말들, 어차피 맞서 싸워봤자 승산도 없을 거라고 미리 접어버리는 마음. 나는그런 마음을 얼마나 경멸했었나. 그런 마음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발버둥쳐야 했었나. 그런 생각을 강요하는 엄마가 나는 미웠다.
그런 식의 굴욕적인 삶을 원하지 않는다고 저항했다. 하지만 왜 분노의 방향은 늘 엄마를 향해 있었을까. 엄마가 그런 굴종을 선택하도록만든 사람들에게로는 왜 향하지 않았을까. 내가 엄마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났다면, 나는 정말 엄마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내 생각처럼 당당할 수 있었을까. 나는 엄마의 자리에 나를 놓아봤고 그 질문에 분명히 답할 수 없었다. - P3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