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시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2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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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스 캐럴 오츠의 작품은 처음 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로랑 캉테 감독의 영화 폭스파이어의 원작자였다. 폭스파이어를 봤을 땐 주인공들의 심리를, 특히 렉스의 심리상태에 감정이입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대의를 잃은 반항에 명분은 없다 정도랄까?) 그런데 카시지를 읽고 나니 폭스파이어 원작을 보게 된다면 당시 영화를 봤을 땐 황당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던 인물들의 심리상태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반부 등장인물들의 성향이나 그들이 처한 상황은 다소 평이해 보였다. 시장을 지낸 성공한 백인 가장 제노 메이필드와 성향이 다른 제노의 두 딸 줄레엣과 크레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부인 아를렛.
제노의 두 딸 중 아름다운 미모의 줄리엣은 이라크전에 참전했다 불구가 된 약혼자 브렛과 파혼을 한다. 개성이 강하고 자유분방하나 예민하기도 한 크레시다는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대학교를 다니다 우울증을 겪고, 어느 날 갑자기 친구 마시의 집을 방문한 후 로벅인에서 브렛과 함께 있는 것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후 실종이 된다.
크레시다는 미국식 언론과 사회가 실종된 여성을 다루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소비된다. 가족들은 크레시다의 과거를 회상하며 회한에 잠기고, 제노는 딸이 실종된 상실감을 브렛에 대한 분노로 표출한다. 브렛의 엄마 에설은 참전용사와 전쟁 영웅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변호사를 고용해 제노에게 맞선다.
인물의 심리나 상황적 배경이 모두 보편적이며 진부한 미국식 현대사회의 정수를 보여주려는 것마냥 흘러가는 듯 보였지만 서사가 브렛에게 초점을 맞추는 순간 선과 악에 대해 복잡한 화두를 던져주었다.

‘그거 알아? 인류는 나름의 법과 도덕을 만들어. 예수그리스도가 있었지만 그도 ’인간‘이었어-알지? 사람들보다 조금만 생각이 앞서도 법과 도덕이란 것이 얼마나 변할 수 있는 건지 알게 돼. 예전 사람들은 신념을 위해-예를 들면 신을 위해, 조국을 위해-죽음도 불사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러지 않아.’(429p.)

강에 유기되어 유랑하던 크레시다를 구해준 헤일리의 말에서 우리는 도덕과 법의 기준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으며, 그런 굳건한 잣대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의 판단 역시 모호할 뿐이라는, 이 책의 큰 주제를 알게 해준다.
브렛은 이라크 참전 중 민간인 학살에 대한 증언을 시도하다 동료 장병들에게 제거당할 뻔한 위기에 처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기억상실과 정신적 공황에 빠져 명예제대를 하지만 그의 인생은 예전과는 많은 것이 변한다. 자신이 입은 장애로 인한 자신감의 상실은 약혼자 줄리엣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파혼으로 이끌었으며, 민간인 학살에 대한 토막난 기억, 그리고 협박과 목숨을 위협받았던 동료들의 배신은 어느 날 로벅인에서 자신을 찾아와 접근을 시도하는 크레시다를 거부하며 몸싸움을 벌이던 도중 갑자기 찾아온 트라우마로 크레시다를 공격해 호수에 유기한다. 크레시다의 시체를 찾지도 못한 채 진실 공방 중에 벌어진 브렛의 자백 역시 이라크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억과 혼재돼 횡설수설한다. 이라크 전쟁 피해자가 크레시다를 폭행하고 유기한 가해자가 되어 인물의 선과 악을 규정지을 수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장 복잡한 심리상태를 보여주는 인물은 크레시다이다.

‘착하고 예쁜 언니가 나오는 동화가 있어요. 자매 중 하나는 축복을 받았어요. 다른 하나는 저주를 받았고요.
나는 동생이에요. 저주받은 동생. 그래도 나는 여전히 살아 있어요-잘못을 했고 아직 바로잡지 못했지만.’(451p.)

크레시다는 자신보다 아름다운 언니 줄리엣에게 유년시절 내내 열등감을 가지고 지내왔다. 평범하게 아름다울 수 있는 언니를 넘어서려 남들과는 다르게 사고하고 돌발적인 행동을 보이지만 매번 좌절감을 맛보았다. 크레시다에게 사랑과 관심은 언니에 대한 질투와 열등감을 치유할 수 있는 약이 될 수 있었지만 주변 인물들은 쉽게 크레시다가 원하는 것을 주려하지 않았다. 빈민 학생들에게 자원봉사활동으로 수학을 가르쳤지만 학생들의 험담에 상처받고, 에스허르의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며 교사에게 조롱을 받는다. 혼신을 다해 준비한 기말 리포트에서 교수의 칭찬을 절실하게 기대했지만 마감일을 지키지 않았다며 낮은 성적을 받는다.
자신은 못난이고 실패자라는 좌절감은 전쟁에서 불구가 되어 언니에게 파혼을 당한 브렛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해 브렛에게 다가가지만, 역시나 심리적으로 불안했던 브렛은 크레시다를 강하게 거부하며 마음을 주지 않는다.
브렛에게 유기된 크레시다는 헤일리에게 구출이 되지만 크레시다는 카시지로 돌아가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실패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라 여긴 것이다. 역시나 참전용사 출신인 헤일리와 함께 헤일리의 동생으로 신분을 위조해 마이애미에서 유랑하는 생활을 보낸다. 몇몇 일자리를 전전하던 중 까탈스러운 심리학 박사 힌턴교수의 인턴으로 들어가며 역시 그의 관심과 믿음을 구하려 한다. 하지만 힌턴교수와 사형수 교도소 참관에서 힌턴교수의 미션을 달성하는데 실패하고 자신은 변할 수 없다는 체념이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는 마음으로 바뀌어 카시지로 돌아온다.

브렛과 크레시다의 충돌은 둘의 과거 경험을 비추어 보면 상처받은 영혼들의 난투극이고, 우리 사회가 브렛에게 가한 폭력과 크레시다에게 가한 편견으로 빚어진 비극의 초상이다. 폭력적인 사건이 발생하지만 이를 단순히 폭력성에만 초점을 맞춰 심판할 수 없다. 자기혐오로 빚어진 크레시다와 정치적으로 이용된 브렛의 구조적인 희생에 주목해야 한다.

“브렛은 아파, 그 역시 피해자야. 두 젊은 인생이 모두 망가졌어. 우리는 그를 용서하려고 노력해야 해.”(589p.)
‘크레시다는 동정받아야 할 사람인데 왜 나는 그녀를 동정할 수 없을까. 그녀가 여러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도 자신을 구하지는 못했는데.’(640p.)

하지만 우리는 결국 단편적인 면에 국한된 판단을 하게 된다. 악에 서사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악이 발생하게 만든 우리 사회의 구조를 거시적으로 바라보고 사회구성원들의 편견이 가하게 되는 집단적인 폭력을 예방하려 노력해야 한다.

‘선을 알면 선한 일을 하고 싶어진다. 선을 모르면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한다.’(465p.)

독서가 단순히 독해력을 높여주는 것뿐만 아니라 삶의 지평을 넓혀주는 것은 사건의 단편적인 부분만 보여주는 기사와는 달리 사건 당사자들의 심리나 감정을 서사함으로써 현상 이면에 숨은 복잡한 과정을 바탕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복잡한 이해관계나 꼬여버린 상황들은 결국 ‘인생은 조금 앞뒤가 안 맞는 꿈’(609p.)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줄리엣가 아를렛처럼 이러한 혼란스러움을 딛고 인간은 ‘선을 알면 선한 일을 하고 싶어진다’(465p.)라 믿으며 ‘온전한 인간’에 대한 기대를 잃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확고한 제노는 딸이 실종된 지 사십여 일이 지난 후에도 딸이 살아있다는 믿음과 브렛이 딸과 관련된 범죄로 곧 체포되리라는 믿음이 상충한다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아를렛은 이 논리적 모순을 알고 있었다. 메이필드 가족의 완고한 믿음을 아는 사람들이 그들을 동정한다는 것을 말았다. - P164

브렛의 친구들은 그에게 줄리엣 메이필드에 대해 묻지 않았다. 고등학교 동창들, 그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된 핼리팩스, 와이스백, 스텀프.
그들은 자신에게 의미 있는 여자애나 여자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어휘를 몰랐다. 그래서 여자에 대해 말할 때는 가장 천박한 어휘 외에 다른 말을 쓰지 않았다. 거시기, 젖퉁이, 궁둥짝. 끝내주게 화끈해, 걸레야.
그러니 그가 어떻게 그들에게 줄리엣에 대해 말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말할 수 없었다. - P202

AIDS, HIV에 감염되는 것처럼, 접촉하는 사람들을 감염시키지 않을수가 없다. 그게 악의 본성이다. - P257

그는 그녀를 실망시키기보다 죽이는 편이 더 자비로운 일임을 깨달았다.
자신을 사랑해주거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법이다. 그들을 죽이는 편이 언제나 더 쉽다. 불만을 터뜨려 나를엿 먹이는 민간인을 죽이는 편이 더 쉬운 것처럼, 협상보다는 살인이더 쉽다. 일단 상대가 죽으면 더이상 대화의 양측 같은 건 없어지니까.
이것이 섀버 하사의 충고였다. 모든 병사가 그 말을 반복했다. 매번말할 때마다 더 우스워지는 농담이라도 반복하는 듯이. - P258

여기, 아무도 그녀를 아는 사람이 없고 신경쓰지도 않는 이곳에서그녀는 일말이나마 희망을 느꼈다. 친구 비슷한 사람들이 있었고, 혼자사는 것이 더 좋아서 그들과 헤어졌다. 대학에서 그녀가 이루는 ‘발전‘은 암벽등반가의 움직임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벽에 바싹 붙어인치씩 오르느라 등뒤의 장관을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 P285

운전중에 무릎 사이에 캔맥주를 끼워두고 마시며 헤일리가 말했다.
"그거 알아? 인류는 나름의 법과 도덕을 만들어. 예수그리스도가 있었지만 그도 ‘인간‘이었어 - 알지? 사람들보다 조금만 생각이 앞서도 법과 도덕이란 것이 얼마나 변할 수 있는 건지 알게 돼. 예전 사람들은 신념을 위해 - 예를 들면 신을 위해, 조국을 위해 죽음도 불사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러지 않아." - P429

조롱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여기 지상에 있다. 하지만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여기 왜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 P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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