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들 오늘의 젊은 작가 32
이혁진 지음 / 민음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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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명확하게 구분짓고 악을 응징하는 것은 카타르시스를 주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악의 평범성‘이라고 생각한다. 선과 악의 대립은 일반 독자들에게 자신을 선의 편에 서게 하고 내가 아닌 타인이 가진 악의 습성을 지적하고 비난하려 하지 자신을 반성하게 하진 않는다. 악한 자가 패하면 정의가 바로 선 것 같고 선의 입장에 섰던 내가 승리하고 고결해진 것 같은 느낌. 이런 느낌이 싫다. (그래서 나는 류승완 감독의 영화가 늘 불편하다.)

소장은 누가 봐도 악한 존재이다.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해 최대한의 이득을 취하고 갈취한다. 폐사된 가축으로 선심 쓰듯이 회식을 해 공치사를 떨고, 사건과 사고의 본질을 흐려 책임을 남에게 뒤집어씌운다. 선길은 약한 존재이다. 직장을 잃고 아들은 아픈데다가 기술도 없이 노가다판에 뛰어들어 적응도 힘들어하는 불행한 인물이다. 약함이 선함이 되는 단순성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현경은 정의의 사도로 그려진다. 선길의불행에 공감하며 비닐하우스에 해자를 두르는 선의를 베풀고 마지막에 소장에게 통쾌한 응징을 하는 영웅적인 인물이다. 각자의 캐릭터나 인물간의 갈등관계 명확한 권선징악의 교훈적인소설이다.

그래도 소설에서 악을 표현하는 데 현실의 잔인함을 고발하는 탁월함이 돋보인다. 특히 소장의 감정이나 행동에서 이 인물이 사회적인 문제로 표상된다면 단체, 기업, 사회라는 주체가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성이 얼마나 잔인 한지를 실감할 수 있다.

누구의 잘못도 죄도 아니었다. 세상은 여기저기 함수가 틀린 엑셀표 같은 것이었다. 어떤 칸에서는 아무리 올바른 숫자를 넣어도 에러라고 뜰 수밖에없는,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자꾸 움츠러들고 소심해졌다. - P28

목 씨는 시선을 피했다. "나일 먹을수록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아. 어쨌거나 반장이고, 잡부가 아니잖아." 들키기 싫은 것이었다. 아쉬운 소리를 할 만큼 가진 게 없는 처지와 능력을, 나이를 먹고 자리가 생기면 그렇게 됐다. 그럴수록 허울 같은 체면밖에 남는 것이 없었지만. - P42

"인마, 해 줄 거 다 해 주고 챙겨 줄 거 다 챙겨 주는 게, 그게 관리야? 그게 시중드는 거지, 관리야? 해 줄 거 다 해 주고챙겨 줄 거 다 챙겨 줘야 일하겠다는 놈은 아무 일도 안 하겠다는 놈이야. 관리는 그런 놈들부터 제일 먼저 녹아 내는 게관리고, 걔네들은 관리가 안 되니까! 황 반장도 그런 놈이니까 내 진즉 솎아 낸 거야. 알겠어? 그런 놈들은 해 주고 챙겨줄수록 지가 상전인 줄 안다고. 아쉬운 게 있어야, 뭐 하나 빠지고 부족한 데가 있어야, 그걸 내가 쥐고 흔들 수 있어야 관리가 되는 거야." - P45

"봐라, 너부터 당장 그러고 있잖냐. 책임은 지는 게 아니야.
지우는 거지. 세상에 책임질 수 있는 일은 없거든, 어디에서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멍청한 것들이나 어설프게 책임을 지네 마네, 그런 소릴 하는 거야. 그러면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자기 짐까지 떠넘기고 책임지라고 대가리부터 치켜들기나 하거든. 텔레비전에서 정치인들이 하는 게 다 그거야.
책임을 지는 게 아니라 지우는 거, 자기 책임이라는 걸 아예 안 만드는 거. 걔들도 관리자거든. 뭘 좀 아는."
소장은 흡족하게 웃었다. 즉흥적으로 한 말이었지만 퍽 마음에 들었다. 멧돼지를 떠올렸던 그때처럼. - P46

"뭘 저렇게들 떠들까요. 아는 것도 없으면서, 남의 일에."
현경은 윤 씨 주변에 둘러앉아 떠들고 있는 인부들을 보며 말했다. 들리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이 갔다. 선길이 도망갔나 안갔나, 그것 때문에 반장이 소장에게 얼마나 곤란할지 말지 하는 그런 이야기. 윤 씨는 반장과 있을 때는 반장의 비위를 맞췄지만 인부들과 있을 때는 인부들 구미에 맞게 이야기했다. 그렇게 주목받고 주도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남의 일이니까, 다 가진 게 없으니까 그런 거지. 겸손이니뭐니 해도 자기 자랑하는 게, 남 부러움 받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 다 없으니까, 남 일이니까 자기 얘긴 안 하고 못 하는거야. 남 없을수록 자기 없는 게 덜 없어 보이고 남 못날수록자기 못난 것도 덜 못나 보이니까." - P56

그렇게 일은 다시 소장의 뜻대로 흘러갔다. 반장들이 갈라서는 한 필승은 소장의 것이었고 사실 이제 소장은 좀 따분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저렇게들 뻔하고 뭘 모를까. 역시나 관리자에게 필요한 것은 갈라 세우고 갈라 세우고 오로지 어떻게든 갈라 세우는 일이었다. 줄을 세우고 편을 갈라서 저희끼리 알아서 치고받도록, 그러느라 뭐가 중요하고 누가 이득을 보는지 생각도 못 하도록, 인간이란 고작 그런 것이다. 서로 믿지 못하고 지기 싫어한다. 그 속성마저 남들만 그렇고 자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란 그래서 싸우고, 그렇게 싸우기 때문에 싸울수록 더 편향되고 나약해질 수밖에 없다. 스스로 그 불신을 극복하지도, 서로 이기거나 져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진흙탕 밑바닥까지 서로 끌고 들어가기만 한다. 그러다 결국 자신들을 끄집어 올려 줄 관리자를 찾게 되는 것이다. 싸움은 끝나야 하고 누군가는 개처럼 물불 못 가리게 된, 자신들이 아니라 저것들을 따로 가둬야 하니까. - P94

현경은 고개를 파묻었다. 아무리 움직여 보려고 해도 그럴수록 더 친친 감겨드는 덫에 걸린 것 같았다. 어떻게 소장을만나야 할지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국자기 역시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살아 있고 계속 살아야 하는 사람의 숙명인 것 같았다. 잔인하고 비겁하게 거짓말하거나 침묵하면서, 자신의 잘못과 죄를죽은 사람에게 떠넘기면서. 그것이 산 사람의 몫, 생존의 대가 같았다. - P141

그것이 중요했다. 이거 먹고 제발 입 좀 다물어 달라는 식이면 나중에 더 내놓으랄 수도, 또 어느 순간 죄책감에 혼자미쳐 날뛸 수도 있다. 하지만 믿음의 힘은 늘 위대하다. 자신이 착한 사람이라는 믿음은 모든 믿음 중에서 가장 위대하다. 세상에서 제일 참혹한 일을 벌였던 사람들이 가진 공통점이 바로 자신은 착하고 항상 착하다는 믿음이었다. 그 사람들은 양민을 칼로 총으로 베고 쏴 죽이면서도 생각했다. 해방시켜 주는 것이라고, 오로지 선행을 베푸는 것뿐이라고. 오, 세상에 정말!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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