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 에리히 프롬 진짜 삶을 말하다
에리히 프롬 지음, 라이너 풍크 엮음, 장혜경 옮김 / 나무생각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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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현대사회에 사물을 소유하려는 욕망 때문에 자기 자신을 착취하고, 자발적인 행위를 하지 못한다. 우리는 최종적으로 얻는 물질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그 결과를 얻는 과정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 사물을 숭배하는 병을 벗어나면 삶의 권태와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사물을, 우리 자신의 손으로 만든 결과물을 숭배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
하지만 인간은 사물이 아니다. 스스로 사물이 된다면 자각하건 못 하건 병이 들고 말 것이다.
……
우리는 이 질병을 권태, 삶이 무의미하다는 느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느낌이라 부른다.…..우리는 이 질병을 신경증‘이라 부른다.’ (27-28p.)

2장에서는 인간의 본성과 이성을 진화심리학이나 칸트의 이성을 예시로 들어 대조한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속성을 ‘자연의 변덕‘으로 정의하는데, 이는 절대적인 본질을 찾아 어느 한쪽에 치우친 정의보다는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비유를 통해 ‘균형‘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3장에서는 자유를 실존하는 사실이 아니라 행위로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정의하며, 열정과 노력을 통해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한다. 이로써 첫 장에서 언급했듯이 ‘존재‘가 아닌 ‘소유‘를 추구함으로써 ‘인격으로서의 자신이 되기를 중단‘ (63p.)하였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즉 중요한 것은 ‘자발성‘이다. 다만 이러한 자발성에 대해서 우리가 과연 진정한 의미의 자발성을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던진다.

‘우리는 생각과 느낌, 소망은 물론 심지어 감각적 느낌까지도 주관적으로 우리 것이라고 느끼지만, 사실은 외부에서 주입된 것이고, 우리가 실제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남의 것일 수 있다’(119p.)
‘스스로 결심을 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그저 관습을 지키거나 의무감에서 혹은 아주 단순히 압박감에서 해동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깨닫고 깜짝 놀랄 것이다.’ (135p.)

존재보다는 소유에 집착하는 삶과 자발적인 결정이 결여된 삶은 무력감을 만든다. 그럼 무력감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우리의 또 다른 무력감의 원인은 ‘기대‘ 이다.

˝그게 무엇이더라도 외부 상황의 어떤 변화가 급변을 몰고 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160p.)

또한 ‘가짜 활력‘에 대한 주의도 준다.

‘만약 학술 논문을 써야 한다면 이들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대신 도서관에서 십여 권의 책을 주문하고 중대한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 전문가들과 면담을 하면서 온갖 시도를 다한다. 그런 행동으로 기대하는 성과를 올리기에는 자신이 무력하다는 통찰을 회피한다. 과도한 단체 활동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쉼 없는 걱정, 카드게임이나 단골 술집에서 장시간 환담을 나누는 것 또한 다른 형태의 가짜 활력이다’(163-164p.)

사실 전체적인 내용을 되새겨 보아도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명확하거나 간단해 보이진 않는다. 스스로 존재에 대한 확신과 자발적인 활력으로 인간성의 완성을 이루기 위해 타인과의 소통과 사랑까지 언급하지만,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답은 없다. 생각보다는 행동이 먼저 선행돼야 할 것 같은데 이 행동이 과연 주체적인 자발성인가를 또 의심해 봐야하지 않나.
진화심리학을 잠깐 언급하기는 했지만 인간의 무리지어 다니는 습성으로 축적되어진 본능이 지금 집단에 동조하지 않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현대사회에서 그 지위가 퇴색되었다는 점을 짚어 줬으면 한다. 특히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존재‘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 현대인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삶의 자세라는 점. 그리고 가짜 활력으로 회피하기 보다는 본질적인 활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 에리히 프롬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사실 가짜 활력도 인생의 도움이 되기도 한다. 가짜 활력이라도 살아야 그 과정 속에서 진짜 활력의 실마리를 건질 수도 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활동 그 자체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문화에서는 무게중심이 정확히 거꾸로 되어 있다. 우리는 구체적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생산하는 대신 상품을 팔겠다는 추상적 목적을 위해 생산한다.
모든 유형, 무형의 사물을 돈을 주고 살 수 있고, 돈만 주면다 우리의 소유가 된다고 여긴다. 우리 개인의 특성과 노력의 성공 또한 돈과 명성, 권력을 위해서 팔 수 있는 상품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무게중심이 창의적 활동이 주는 순간적 만족에서 완제품의 가치로 옮겨간다.
인간은 진정으로 행복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만족 - 활동의 순간 체험하는 것 - 을 잃고서 잡았다고 믿는 순간 실망을 안겨주는 환영과 성공이라는 이름의 가짜 행복의 뒤를 쫓아다닌다. - P83

우리의 느낌과 감정 못지않게 독창적 사고 역시 왜곡된다.
처음부터 우리의 교육은 아이의 독자적 사고를 막고 아이의머리에 완성된 생각을 심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방법이 어린아이에게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아주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아이는 세상을 향한 호기심이 가득한 손으로, 이성으로세상을 파악하고자 한다. 아이들은 진리를 알고 싶어 한다.
그것이 낯설고 거대한 세상에서 방향을 잡는 가장 확실한 길이기 때문이다. - P93

독자적 사고를 할 용기를 내지 못하게 만드는 오늘날의 교육과정 몇 가지를 더 살피고 넘어가기로 하자. 예를 들면 오늘날에는 사실 - 더 정확히 말해 정보 - 의 습득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한다. 점점 더 많은 사실들만 기억하면 결국에는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라는 비장한 미신을 섬긴다. 상호 연관 없이 이리저리 흩어진 수많은 개별 지식들을 학생들에게주입시킨다. 학생들의 시간과 에너지가 점점 더 많은 사실을 배우는 데 쓰이기 때문에 정작 사고를 할 시간은 거의 남지 않는다. 물론 사실의 습득이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허구일 뿐이다. 하지만 ‘정보‘만으로는 너무 적은 정보와 마찬가지로 사고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 P95

이 모두는 진리의 관념이 모호하다는 증거이다. 현대인은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지만 실제로는 타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가 원하는 게 마땅한 것만 원한다. 그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자신이 실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가 ㅡ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한다. 이는 인간이해결해야 할 가장 까다로운 문제 중 하나이다. 완제품으로제공된 목표를 우리의 것처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악착같이 회피하려는 바로 그 과제인 것이다. - P101

또 가짜 사고가 완벽하게 논리적이고 합리적일 수도 있다. 사고의허위성이 반드시 비논리적 사실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 P125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결심이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며, 외부의 힘이 강요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무언가를 원할 경우 그것은 자신의 의지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 확신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품는 큰 착각이다. 우리가 결심하는 것의 대다수는 실제 우리의 결심이 아니라 외부에서 암시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결심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있지만 실제로는 타인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대로 행동한다.
그 이유는 고립이 두렵기 때문이며 우리의 삶, 우리의 자유와안락이 직접적인 위험에 처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 P133

환자는 변하고 싶고 변할수 있다고 느끼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세상모든 것을 기대하면서도 오직 한 가지, 스스로 변화를 위해무언가 할 수 있다는 기대만은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있다. 그는 의사가 정신분석을 통해 반드시 그에게 결정적인일을 해줄 것이며, 그는 수동적으로 이 과정을 참고 견딜 수있다고 기대한다. 실제로 그 어떤 변화도 믿지 않지만, 위에서 설명한 위안의 합리화로 불신을 은폐한다. - P169

일련의 철학자들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생산한다는 사실, 인간이 자기 역사의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 P43

확정된 인간 본성, 인간 본질의 존재를 부인하는 데 일조한 한 가지 요인이 더 있다. 인간 본질이라는 개념이 자주 악용되었고 최악의 부정을 행하는 핑계로도 이용되었던 것이다. 인간 본질의 개념을 언급할 때면 그것의 도덕적 가치를 심각하게 의심하는, 심지어 그 개념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발생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 18세기의 철학자들까지인간의 본질을 들먹이면서 노예제도를 변호했다. (인간의 평등을 확신한 그리스 스토아학파와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 토마스모루스, 후안 루이스 비베스 같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예외였다.) 국수주의와 인종주의 역시 ‘인간 본성‘을 들먹이면서 탄생했다. 국가 사회주의는 특정 민족의 본질이 우월하다는 주장으로 6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았다. 특정한 추상적 인간본성의 개념을 들먹이며 백인은 유색인에게, 권력 있는 자는권력 없는 자에게, 강자는 약자에게 우월감을 느낀다. 지금까지도 ‘인간 본성‘의 개념은 국가와 사회의 목적에 자주 이용당하고 있다. - P39

우리는 존재를 추구하지 않고 소유를 추구한다.
많은 경우에서 소유가 존재보다 더 강한 현실성을 갖는다.
자신을 소유자로 소외시키는 우리는 우리의 소유물일 뿐 인간 인격으로서의 자신이 되기를 중단하였다. - P63

일단 우리는 자발성을 갖춘 혹은 갖추었던 사람들을 알고있다. 그들의 사고, 감정, 행동은 자동인형의 표현이 아니라자아의 표현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예술가이다. 실제로 예술가는 자발적으로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런 정의를 인정한다면 - 발자크의 예술가 정의가 그랬다 — 몇몇 철학자와 학자들 역시 예술가라 불러야할 것이다. 그들은 다른 철학자 및 학자들과 구식 사진사와-
창조적인 화가만큼이나 다르다.
예술가만큼 객관적인 수단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은부족하지만 - 혹은 좀 더 훈련할 필요가 있지만 - 예술가와 같은 자발성을 갖춘 사람들도 물론 있다. 그런데 예술가들의 처지는 정말 곤란하다. 성공한 예술가의 개성이나 자발성만 존중을 받기 때문이다. 작품을 파는 데 성공하지 못한 예술가는 동시대인들에게 ‘미친놈 아니면 신경증 환자‘ 취급을 받는다. 이때의 예술가는 혁명가와 비슷한 처지이다.
성공한 혁명가는 정치인이 되지만 성공하지 못한 혁명가는 범죄자다. - P79

이 메커니즘의 사례로 재능이 매우 뛰어난 어떤 작가를들 수 있다. 그는 세계문학 역사에 남을 만한 책을 쓰고 싶지만, 쓰고 싶은 내용에 대해 일련의 생각들을 하고 자신의 책이 얼마나 획기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까 상상하며 친구에게거의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다. 벌써 7년 동안이나 책 ‘작업‘을 했지만 실제로는 아직 한줄도 못 썼다. 그런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성사시킬 것이라는 상상에 발작하듯 매달릴 수밖에 없다. 많은 경우 일정한 연령 - 평균적으로 40대 초반 - 에 도달하면 각성하여 상상을 포기하고 자력을 활용하려 노력하거나, 아니면 위안을 주는 시간의 착각 없이는 견딜 수 없기에 신경증으로 무너진다. - P162

만약 학술 논문을 써야 한다면 이들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대신 도서관에서 십여 권의 책을 주문하고 중대한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 전문가들과 면담을 하면서 온갖 시도를 다한다. 그런 행동으로 기대하는 성과를 올리기에는 자신이 무력하다는 통찰을 회피한다. 과도한 단체 활동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쉼 없는 걱정, 카드게임이나 단골 술집에서 장시간 환담을 나누는 것 또한 다른 형태의 가짜 활력이다 - P163

하지만 자신의 자기와 자아를 진정으로 느끼는 사람은 스스로를 자기 세계의 중심으로, 자기 행동의 진짜 장본인으로경험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독창성이다. 내가 말하는 독창성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기원을 두는경험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반드시 자기 자신의 감정, 즉 정체감이필요하다. 이 ‘자아‘ 감정이 없다면 우리는 미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정체감은 우리가 사는 문화에 따라 다르다. 개인이 아직 개체가 아닌 원시 사회의 ‘자기‘ 감정은 ‘나는 우리’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정체감은 내가 나를집단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진화의 과정이 진척되고 스스로를 개체로 인식하는 정도에 따라 정체감이 집단과 분리된다. 독자적 개체인 그는 이제 스스로를 ‘나‘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자아‘ 감정과 관련하여서는 수많은 오해가 존재한다. 심리학자들 중에는 이 감정을 자신에게 할당된 사회적 역할의 반영에 불과하다고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타인이 그에게 거는 기대에 대한 반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경험상 그것이 우리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자아의 방식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짙은 불안과 공포, 강박적인 순응의 욕망을 초래하는 병리학적 현상이다. 이런 공포와 순응의 강박은 나 자신을 창의적인 내 행위의 장본인으로 느끼는
‘자아‘ 감정을 키워야만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이 결코 자기중심적이거나 이기적이 되라는 의미는 아니다. 정반대로 나는 나를 타인과의 관계의 과정에서만 ‘나‘로 느낄 수있다. - P197

타인과 아무런 관계도 없이 고립될 경우에는 나의 정체성과 나의 자아라는 감정을 전혀 키울 수 없다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나는 정체감 대신 내 인격을 소유한다는 감정을 느낀다. 그러면 나는 나의 소유물이 된다. 나의 지식, 신체, 기억을 포함하여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이 나를 구성한다. 하지만 이는 앞에서 설명한 자아의 경험이 아니다. 그럴 때 나의자아는 사물로서의, 소유물로서의 나의 인격에 집착하는 ‘자아‘이다. 이런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자기 자신의포로다. 감금당했기에 어쩔 수 없이 불행하고 공포에 사로잡힌 포로다. 진정한 자아감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인격을 부수어야 한다. 사물로서의 자기 자신에게 더 이상 집착해서는 안 된다. 창조적 응답의 과정에 있는 자기 자신을경험하도록 배워야 한다. 여기서의 역설은 그가 이렇게 자기 자신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인격의 경계를 초월하며, 나다‘라고 느끼는순간 나는 너다‘ ‘나는 온 세상과 하나다‘ 라고도 느낀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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