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
윤고은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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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고은 작가의 단편집이고 표제작이 <부루마블에 평양이 있다면>이라니, 이번에도 작가가 가지고 있는 재치 넘치는 상상력이 가득할 것이란 기대가 부풀었고, 결과도 역시 대만족이었다. <양말들>은 죽은 연지가 영혼이 되어 나타난 자신의 장례식장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다소 코믹하게 그린 소설이다. 삼 년 전 들었던 강좌에서 과제로 녹음한, 시기적으로 논리적으로 전혀 납득될 수 없는 유서를 친구 윤과 슬은 연지의 언니가 진지하게 남겨놓은 유서라고 받아들이게 하고 만다. 결국 연지의 언니는 동생이 파혼 후 단지 두세 번 만났던 결혼식 축가 담당 후를 연지가 마지막으로 품었던 연인이라 믿게되는 헤프닝이 벌어진다.

‘그는 규칙 없이 찾아오는 이명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심리적인 이유가 큰 것 같다고 하기에 나는 한 가지 방법을 알려줬다. 이명을 이명이라고 부르지 말고, 다른 이름을 붙여보라고 말이다. 더 편안하고 만만한 이름 말이다. 이건 학생들을 상담할 때 많이 쓰던 방식이었다.
후는 ’양말‘을 골랐다. 후의 이명은 양말이 되었다.
......
나는 얕은 비명을 질렀다. “앞에 저게 뭐예요?” 후는 고라니라고 대답했다. 새라고도 대답했다. “다음부터는 무조건 양말이라고 대답하세요.”’(22-26p.)

믿음과 진실 사이는 재미있다. 믿음으로서 진실이 되기도 하고 진실이기 때문에 믿기도 하므로. 믿음으로 진실이 괴로워지는 상황에선 믿음을 변경시키면 진실은 좀 더 견딜 수 있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기도 하는 것이다.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도 믿음을 앞세워 평양에 부동산투자를 종용하며 마음의 안식을 찾아 나서는 상황을 그린다. 하와이에서 도일이 선영의 이름을 빌려 북한사람이라 사칭하고 숙박집 호스트 알리를 만나는 것부터도 믿음에 대한 종용을 재밌게 비튼다. 물론 도일과 선영이 존재할 것이라 믿는 공간에 찾아갔다 허탕을 치며 되돌아오는 시점까지 그 허황된 믿음에 의지하지만, 모델하우스에서 직원의 신혼부부냐는 물음에 결국 진실에 가까운 현실로 돌아오지만.

연경과 신입직원 우준과의 갈등과 화해의 과정을 담은 <오믈렛이 달리는 밤>이나 프리미엄 통근 버스 안에서 엿보게 되는 직장 내 생리와, 통근 버스 같은 자리를 이용하는 다른 회사 여직원과의 에피소드를 다룬 <우리의 공진>, 전 남자친구 표고영과 친구 민아의 영상을 표고영의 오피스텔에서 같이 보게 되는 다소 19금 소설이라 할 수 있는 <평범해진 처제>, 부잣집 친구 재석과 평범하지만 우등생이었던 화자와 권력 관계가 엎치락뒤치락 전복하며 지난 순간의 ‘잔열’을 약혼자 선영과 감지하는 <물의 터널>까지, 그동안 윤리적인 상상력과 결말을 전복시키는 소설들에 비해 유쾌하게 읽을 수 있었다.

"남자들이 특히 궁금해하는 부분이지. 아냐, 정정할게. 두려워하는 부분이지. 이 여자가 지금 쇼하는 건가 아닌가."
내가 그렇게 말한 건 표고영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슷할 거라는 전제에서 출발한 거였다. 에로 비디오에서, 그러니까 야동에서 ‘진짜‘와 ‘가짜‘를 논할 때는 한 가지 관점만 있는 것이다. 저들이 진짜로 하는 건가, 아니면 그저 연기를 하는 건가. 일상생활에 적용해볼 때도 비슷한 거다. 저 여자가 진짜로 느끼는 건가, 아니면 그저 오르가슴을 연기하는 건가. 보통 남자들이 궁금해하는 건그런 진짜와 가짜다. 그러나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표고영이 조금 다른 지점에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보다 감정적인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좋아하는 감정이 섹스에 드러날 수 있느냐 없느냐 그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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