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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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슬픈 현실을 그로테스크하게 발랑 까발리고는, 글은 또 너무 잘썼다. 중간중간 식욕을 없애는 역겨움이 난무하지만 너무 재밌다. 파과나 아가미같은 장편을 쓰는 중에도 이런 주옥같은 단편을 계속 쓰고 있었구나.
기분이 심난하지만 오늘 이 책을 본 덕에 하루를 잘 보냈다.

그러나 선배에게 처자식이 있다면 내게도부모와 누이가 있었다. 타인의 삶의 무게를 측정하기란 불가능하지만 사람들은 그 행위를 너무나 쉽게 했고, 종종 재단에까지 이르렀다. 타인의 절실함을 허명에 대한 갈망으로단정 짓기도 쉬웠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이 허명이라면나는 기꺼이 그것을 좇을 것이었다. - P11

솔직한 심정으론, 부단한 생산과 소비 활동으로 사회를 굴리는 일과 전혀 인연이 없는 이들에게까지, 단지 그들이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설 자리를 끊임없이 만들어 바쳐야 한다는 현실에 지쳤어. 너는 전혀 그럴 때가 없어? - P187

불행은 줄곧 부당하게 수면 아래 가라앉았다가 어떤 극단적 상황에서 피치 못할 방식으로 타의에 의해 공개될 때 비로소 가치와 무게를 획득하는 모양으로, 양선의 밝고 명랑하며 때론화려하기까지 한 표정은 그녀가 겪은 과거의 고생을 생각보다 아프지 않은 가격으로 책정하는 데에 일조했다. - P189

다른 응시자들에 비해 내가 떨어지는 게 도대체 뭘까, 스카이가 아니어서 그런가 생각도 해봤는데, 뭔가 근본적인 이유가 따로 있다 쳐도, 거듭된 열상의 자리에 손가락을 넣어 벌리고 그것의 정체를 확인할 엄두는 안 났어요. 무엇보다 안다고 해서 내가 그것을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선명한 예감이 들수록, 죄 없는 출신 대학에 화살을 돌리는 게 차라리 간편했어요. 어쨌거나 뒤늦게 스카이를 목표로 편입 시험을 볼 엄두도 안 날뿐더러 설령 편입에 성공했다 해도 학비와 생활비는 다시 또 어쩌겠어요. 천신만고끝에 스스로 만족할 만한 타이틀을 딴다고 해도 이미 또래들보다 몇 발자국을 더 뒤처진 다음이고요. 그 모든 일을 감내한 뒤에도 원하는 성과를 내지 못했을 때의 절망을 견디기보다는 모험을 포기하는 쪽이 생산적이었어요. 물을 준 자리에 틔운 싹이 누렇게 말라비틀어졌다고 해서 그 열패감을오래 누리며 방황하는 호강도 할 처지가 못 되었어요. - P258

정작 괜찮냐고 한마디라도 물어보고 돌아봐준 이는 그러지못했으니까요. 그런 분들을 더 잘 모시고 챙겨드렸어야 하는데 우리는 인간인데 어째서 오랜 지배와 구속에 길들여진 짐승처럼 어느새 나를 때리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반응하고 꼬리를 흔들거나 내리게 되었을까. 그러니 너희들은 더더욱 짐승 취급을 당해도 된다며 누군가들은 의기양양하게 돌을 던질 텐데.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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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1-07-11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까지 제일 좋았고 이 작가님은 이후로 더 못쓰게 된 기분이에요…그러면서도 꾸역꾸역 전작 ㅋㅋㅋ신작은 아직 안 봤어요.

ider427 2021-07-25 23:10   좋아요 1 | URL
아 그렇군요. ㅎㅎ 그래도 자신만의 문장스타일도 있어서 기대되는 작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