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여행 1 자전거여행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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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의 진수.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속으로 흘러들어온다. 강물이 지나간 시간의 흐름을 버리면서 거느리듯이, 자전거를 저어갈 때 25,000분의 1 지도 위에 머리카락처럼 표기된 지방도 · 우마차로 · 소로·임도 · 등산로들은 몸속으로 흘러들어오고 몸 밖으로 흘러나간다. - P11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몸은 세상의 길 위로 흘러나간다. 구르는바퀴 위에서 몸과 길은 순결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연결되는데, 몸과길 사이에 엔진이 없는 것은 자전거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자전거는몸이 확인할 수 없는 길을 가지 못하고, 몸이 갈 수 없는 길을 갈 수 없지만, 엔진이 갈 수 없는 모든 길을 간다. - P12

갈 때의 오르막이 올 때는 내리막이다. 모든 오르막과 모든 내리막은 땅 위의 길에서 정확하게 비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비기면서, 다가고 나서 돌아보면 길은 결국 평탄하다. 그래서 자전거는 내리막을그리워하지 않으면서도 오르막을 오를 수 있다. - P12

강운구의 카메라 뷰파인더 속에는 먼 산과 가까운 산이 잡히는 것이 아니라 먼빛과 가까운 빛이 잡히는 것 같았다. - P41

강은 인간의 것이 아니어서 흘러가면 돌아올 수 없지만, 길은 인간의 것이므로 마을에서 마을로 되돌아올 수 있었고, 모든 길은 그 위를가는 자가 주인인 것이어서 이 강가마을 사람들의 사랑과 결혼과 친인척과 이웃은 흔히 상류와 하류 사이의 물가 길을 오가며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이 늙은 길은 가街가 아니고 로路도 아니며 삶의 원리로서의 도道이다. 자전거는 이 우마찻길을 따라서 강물을 바짝 끼고 달렸다.
겨울 섬진강은 적막하다. 돌길에 자전거가 덜커덕거리자 졸던 물새들 놀라서 날아오른다. 겨울의 강은 흐름이 아니라 이음이었다. 강은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인간의 표정으로 깊이 가라앉아 있었고, 물은 속으로만 깊게 흘렀다. 가파른 산굽이를 여울져 흐르는 젊은 여름 강의 휘모리장단이나, 이윽고 하구에 이르러 아득한 산야를 느리게 휘돌아나가는 늙은 강의 진양조장단도 들리지 않았다.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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