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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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과 가족들이 마치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의 할머니도 어느 누구의 할머니만큼 특별하고 소중하다. 그분의 이야기가 시선의 이야기처럼 남아있다면 그 후손인 나의 가족들의 이야기는 어느 지점에 수렴해 있을까 상상하니 문득 할머니가 더 보고 싶고 애틋해졌다.
시선이 깔아주는 멍석에 가족들의 삶의 이야기가 놓이는 소설인데 가족이라 그런지 인물들이 좀 비슷비슷하고 평면적이라 아쉬움이 있었지만, 워낙 독보적인 시선을 강조하려 한 의도라고 생각한다.

찻잔을 앞에 두고 허벅지가 불편할 때까지 앉아 있었더니, 액자에 햇빛이 들어 반사가 심해졌다. 화수는 액자 유리에 비친 자신을 보았고 관자놀이와 턱, 목 아래로 이어지는 흉터를 살폈다.
분노로 겨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테이블을 손바닥으로밀며, 한 발을 딛고 또 한 발을 디뎠다. 무릎과 어깨가 어색하게움직였지만 무시하고 벽을 짚었다. 숨을 고르고 욕실로 걸었다.
분노를 연료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비웃어주고싶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나와 내 할머니만 알고다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 P18

"아이구, 무서워라. 하지만 무서우면 잘 만든 거겠지. 근데 원래 예술보다 예술 조금 옆이 더 재밌다. 나도 그랬었다." - P67

명준은 난정이 직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어쩐지 자기 탓인 것도 같았다. 아이가 아팠고, 돈이 급했다는 흔해 빠진 이유로 저 특별한 여자를 주저앉힌 것이 세상인지자신인지 헷갈렸다. - P90

현장에서 순순히 자수하여 삼 개월간 구금 생활을 한 기민철은초범이며, 반성하고 있고, 희석한 염산을 사용했다는 점이 참작되어 징역 이 년에 집행유예 삼 년을 받았다. 그리고 피해자들이 민사를 막 시작하려고 할 때 자살했다. 염산을 쓰지는 않았고, 욕실수건걸이에 목을 매달았다.
죗값을 치르지 않고 도망쳤다. 그건 도망이었다. 화수는 잊을수 없었고 늘 화가 나 있었고 이제 그 화는 화수만을 해쳤고…… - P110

입지가 애매하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예술 애호가였다. - P113

요제프를 데리고 다니면일종의 인증을 받을 수 있으면서 과시도 가능했던 게 아닌가 짐작한다. 그는 터키인으로도 인도인으로도 중국인으로도 보였고, 특히 마티아스의 제자였던 젊은 축들은 자신들이 히틀러 유겐트처럼 보일까봐 늘 신경썼으므로 그를 끼우는 편이 나았다. 세계시민처럼 보이려는, 그림의 문제였다. 요제프도 나처럼 장식품이었다.
나보다야 지위가 나았지만, - P114

"할머니는 할머니의 싸움을 했어. 효율적이지 못했고 이기지못했을지 몰라도, 어찌되었든 사람은 시대가 보여주는 데까지만볼 수 있으니까." - P182

특별히 어느 지역 사람들이 더 잔인한 건 아닌 것 같아.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에겐 기본적으로 잔인함이 내재되어 있어. 함부로 굴어도 되겠다 싶으면 바로 튀어나오는 거야. 그걸 인정할 줄아는지 모르는지에 따라 한 집단의 역겨움 농도가 정해지는 거고. - P235

"응, 당신은 괜찮은 벽이야. 내가 생각을 던지면 재밌게 튀어돌아와."
"나는 우리가 라켓 운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쪽은 벽이었어?" - P237

빛나는 재능들을 바로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누군가는 유전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을, 또는 그 모든 걸 넘어서는 노력을 재능이라 부르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같은 주제에 수백수천 번씩 비슷한 듯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
사실 그들은 계속 같은 일을 했다. 그리고 조각하고 빚고 찍고……… 아득할 정도의 반복이었다. 예외는 있지만 주제도 한둘이었다. 각자에게 주어진 질문 하나에 온 평생으로 대답하는 것은 질리기 쉬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대가들일수록 질려하지 않았다. 즐거워했다는 게 아니다. 즐거워하면서 일하는 사람은 드물다. 질리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하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어떤 일에 뛰어난 것 같은데 얼마 동안해보니 질린다면, 그 일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당장 뛰어난 것같지는 않지만 하고 하고 또 해도 질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도해볼 만하다. - P289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손맛이 생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무것도 당연히 솟아나진 않는구나 싶고 나는 나대로 젊은이들에게 할 몫을 한 것이면 좋겠다. 낙과 같은 나의 실패와 방황을 양분 삼아다음 세대가 덜 헤맨다면 그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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