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같은 곳에서
박선우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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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흐름보다 감정의 선을 따라가는 소설들. 소재가 조금씩 가미된 퀴어소설. 남자가 쓰는 아주 가느다랗고 여리여리한 문장들.

무릇 관계란 오래될수록 견고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르고 허술해지기 마련이다. 영지는 어쩌면 우리도 이런 식으로 느슨해지다가 한순간에 툭 끊어져버리고 말겠지, 별것 아닌 일을 계기로 영영 볼 수 없게 되겠지,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오늘 같은 일을 계기로 말이다.
그건 무서워, 이쪽으로 와줘, 라고 부탁하는 상대에게 음, 시간이 애매한데, 멀기도 하고, 그게 그렇게 무섭나, 라고 퉁명스레 대꾸하는 순간에 벌어지는 일 같은 것. 이 세계에서 단두 사람만이 감지하게 될 무한한 거리의 확장을 의미할 터였다. 그러므로 조금 전에 걸려온 영지의 전화를 외면한다는건, 아니 외면한다기보다 그것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 않는다는 건 사전에 주어진 경고를 무시하는 처사가 될 것이었다. - P61

그건 그 상황에서 충분히 할 수 있을 법한 말이었으나, 결코 그 상황만을 평가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자격지심인지 뭔지 나는 엄마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오랜 시간 품어온 환멸 같은 것을 감지했다. 기분 전환은 핑계였을 뿐이고 엄마가그 한마디 너는 뭐 제대로 하는 게 없냐 - 를 받기 위해 나를 백화점에 데려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P111

난생처음으로 자살이라는 단어가 그리 멀리 있지 않음을 느꼈다. 언제든 자살해버리면 그만, 이라는 각오가 아니면 대학원 동기들의 말버릇이기도 했다. 그토록 누추하고 암담한 학생 신분을 견뎌낼 수도, 자신이 어느 정도에 이르렀고 얼마만큼 더 수행해야 할지 도통 측정이란 걸 할 수 없는 학문의 심연을 버텨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나중에서야 이경은 깨달았다. 그토록 죽음과 곤궁함을 가까이에서 느끼던 시절만이 가장 사는 것처럼 살던 시절로 기억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 P203

인턴으로서 이경이 맡은 업무는 간단했다. 이제는 아무도거들떠보지 않을 만큼 오래된 책자의 내용을 그대로 타이핑하거나, 계간지를 일일이 스캔하여 파일로 저장해두거나, 폐이스북과 블로그에 게시할 신간 홍보 문안을 작성하는 일이었다. 누가 해도 상관없지만 누구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고, 열과 성을 다할수록 본인만 초라해지는 잡무들이었다. 한나절을 쏟아부은 결과물에서 일말의 성취감도 돌려받을 수 없다는 걸 확인했을 즈음, 이경은 회사 직원들이 나이 어린 여자 인턴에게 바라는 특유의 명랑함이랄까 애교스러운 태도를 자신이 전혀 수행하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런 감정적인 서비스야말로 인턴의 주요한 업무였다는 걸 뒤늦게야알아차린 것이다. 그렇게 억지로라도 사교성을 꾸며낼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다소 어눌하고 까칠한 이미지로만 평가받던 이경에게 선뜻 먼저 다가와준 사람이 지수였다. - P201

일순 이경의 마음속에서 뒤틀린 희열이 차올랐다. 그녀는 임신 소식보다 자신의 그런 감정이 낯설고 놀라워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어쩌면 부지불식간에 지수를 질투했는지도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동갑의 그녀가 자기보다 행복해지는데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자기만큼 불행해져야 한다고는몇 번이나 생각해본 적 있기 때문이다. 파탄, 지수의 고백을듣고 이경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문구는 바로 ‘사랑의파탄‘ 이었다. 수업 중에 그런 문장을 읽은 적이 있었다. 사랑이 지닌 특성 중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자기파괴성이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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