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이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3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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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너무 오랜만에 읽은 책이다. 그동안 다시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를 바랐는데 이제서야 그 여유가 생겼다. 그냥 기쁘다. 그것도 최진영의 소설이니까.

사람들은 왜 나이를 먹는다고 표현할까? 먹어봤자 소화도 안되고 똥으로도 안 나오고, 그저 버겁기만 한 그것을. 나는 나이 소화불량에 걸렸다. 소화되지 않은 채 내 안에 들어차기만 하는 그것때문에 자꾸 더부룩하다. 나는 어린 것도 싫고 나이 많은 것도 싫다. 어리면 어리다고 무시하고 늙으면 늙은이라고 무시하니까. 세상엔 어린이나 늙은이만 있지 젊은이는 없는 것 같다. - P124

똥을 더럽다고 생각하는건 인간뿐이다. 동물은 똥을 더러워하지 않는다. 엘리를 보면 알 수있다. 엘리는 똥을 몸에 막 묻히고 다니니까. 어릴 때 키웠던 강아지는 자기 똥을 먹기도 했다. 인간은 언제부터 똥을 더럽다고 생각했을까? 인간이 동물보다 불행한 이유 중엔 분명, 더럽다고 생각하는 게 너무 많은 까닭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엘리의 똥은 더럽다. 더럽게 많다. - P127

애인을 사귀기 전에는, 진짜 이 여자애가 날 사랑해주면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할 것 같았다. 근데 사실, 그것을 이루면 행복하겠지 하고 상상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꿈을 이루는 것보다 꿈을 품는 게 더 행복했다는 말이다. 어쨌든 내 꿈은 행복해지는 거다. - P133

나도 안다. 보고 듣고 배운 게 있으니까. 하지만 세상은 만만치않고, 사랑은 밥 안 먹여주고, 젊을 때 바짝 돈 안 벌고 뜬구름만 잡다보면 늙어서 고생하고, 가진 게 없는 사람은 침묵해야만 하고, 일등이 아니라면 시도조차 금지되는 게 세상의 룰이라면 나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왜냐. 나는 꿈꿀 때가 더 행복한 인간이라니까! 불행을 피하겠다는 게 아니다. 진짜로 불행해지는 그때 그 순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면 되지 않나. 하지만 언제 올지도 모를 불행때문에 현재를 망치고 싶진 않다. 형이 정말 어른이라면, 나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가족이라면, 내게 미리 불행을 주입하는 대신 내가진짜 불행해지는 바로 그날 나를 위로하고 쓰다듬어줘야 한다. 위로와 걱정은 일이 일어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 P134

신은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다. 이거, 중요하다. 소원을 이뤄주는 게 아니라 들어주는 거다. 듣는 건 나도 할 수 있다. 그럼 나도 신이다. 아니다. 소원을 듣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대부분의 소원은 불행한 이야기 다음에 따라오니까. 우리 엄마 소원은 내가 얼른 정신 차리고 취직해서 안정적인 돈벌이를 하는 거다. 그런 소원이 생긴 이유는 내가 지금 개차반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이건 엄마 표현이다. 형 표현에 따르면 실패자고). 엄마의 소원을 들으려면 엄마가생각하는 불행과 불만도 같이 들어야 한다. 지독한 일이다. 역시 신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연민도 자존심도 없어야 신을 할 수 있다. - P139

그래서 나는 화가 난다. 사람들이 내가 다니는 직장을 얕잡아서가 아니라, 자기들이 얕잡아보는 그 일마저 뺏으려 해서. - P75

소문은 의심을 만들고 의심은 진실을 만든다. 의심이 먼저든 소문이 먼저든 진실의 자리는 언제나 맨 끝이다. 사람들은 의심과 소문을 함부로 버무려 진실을 만들고 있다. 나는 그를 믿는다. 내가 믿는 것은 그의 무엇일까. 그가 내 남편이 아니었다면 나역시 그를 의심했을 것이다. 나는 그라는 인간이 아니라 내 남편인그를 믿는다. 이것은 정당한 믿음일까. - P54

무슨 일이든 꾸준히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성수가 불성실하거나 나약해서라기보다, 일회용품처럼 사람을 잠깐 쓰고 버리기 좋아하는 사람들 탓이 컸다. 날이 갈수록 건강은 안 좋아지고 체력은 달리고, 임금은 줄어들고 인력은 많아지고, 노동은 점점 우습고 하찮은 것이 되어갔다. 에누리 없이 정직하게 쌓여가는 건 나이뿐이었다. 제대 후부터 살 섞고 살아온 아내는 집을 나가 다른남자의 아내가 되어버렸고, 하나 있는 자식은 아비를 투명인간 취급하다 성인이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입대해버렸다. 사정이 안좋아질수록 성수는 형제들과 연락하는 일에 점점 인색해졌다. 잘사는 큰형과 건실한 작은형을 볼 때마다 열패감에 휩싸여 의도치않게 말과 행동이 삐딱해졌다. - P20

그 침묵과 무례가 자신에게 들이미는 칼날처럼 느껴졌다. - P34

요즘은 종교가 유행인가. 듣도 보도 못한 신의 이름이 섞여 들리는데, 그들이 하는 말은모두 똑같다. 곧 종말이 온단다. 아니, 지금이 바로 종말이란다. 신을 믿고 사죄하면 신세계에 갈 수 있다. 모두 그런 말이다. 신의 취향대로 이 세계가 만들어진 거라면, 정말 그런 거라면, 악마도 신이다. 사람들은 악마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중이다. 정말 좋은, 사랑으로 가득한 완전무결한 신이라면 왜 종말이란 단어로 인간을 겁주겠나. 괴물처럼, 비겁하고 치사하게. - P161

가슴이 아프다. 선인장을 삼킨 것처럼 따끔거린다. - P207

아버지와 엄마의 사랑이 너무나도 철저하고 완벽해서 나는 외로웠다. 솔직히 나라고 하느님이나 돈과 연적이 되고 싶겠나, 자존심구겨지게, 외로움에서 탈출하기 위해 나는 별짓을 다 했다. 반항도해보고 착한 척도 해보고 아픈 척도 해보고 성숙한 척도 해봤다. 하지만 그 모든 ‘척‘은 나를 ‘성격은 지랄 같고 변덕은 죽 끓듯 하는 애’로 만들어버렸다. 절망과 오기로 똘똘 뭉친 한 시절을 보낸후에야 나는, 사랑받으려면 일단 무엇이든 사랑하고 봐야 한다는간명한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나는 부모님과 달리 살아 있는 것을사랑하기로 했다.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할수록 더 외로워졌다. 그저 외로울 뿐이라면 어떻게든 꾹 참아보겠는데, 사랑과 함께 오는 외로움은 꼭 경멸이나 굴욕감의 손을잡고 왔다. 상대가 바람을 피우거나 거짓말을 할 때도, 약속을 안지키거나 이기적으로 굴 때도, 혹은 그럴듯한 데이트를 마친 뒤 평온한 상태로 잠들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감정의 끝물에서는 외로움의 맛이 났다. 무생물을 사랑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부모님도 외로웠던 거고, 외로운 것이 싫어 무생물을 사랑했던 거다. 무생물은 나를 배신하지 않고, 항상 내곁에 있으며, 그저 믿고 사랑하기만 하면 되니까.
옛 애인 중엔 사랑한다는 말보다 헤어지자는 말을 먼저 한 사람도 있다. 지긋지긋하니까 이제 그만 헤어지자는 사람 앞에서 나는, 헤어지려면 우선 사랑한다는 말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절대 헤어질 수 없다고 길길이 날뛰자 그 사람은 적선하듯, 그래, 그거 했다. 됐냐? 라는 말을 던지고는 바로 자리를 떴다. 나는 그를 쫓아가 그의 입에서 끝내 ‘사랑‘이란 단어를 뽑아내고야 말았다. 그런 식으로 복수했다. 그는 아마 ‘사랑‘이란 단어에 알레르기가 생겼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마다 사랑한다고 말하라며 표독하게쫓아다니던 내가 떠오르겠지. 젠장, 나라고 사랑을 그렇게 푸대접하고 싶겠나. 애태우고 주저하고 가슴을 부여잡으며 ‘사랑‘이란 말은 아끼고 아꼈다가 일기장에나 간신히 쓰던 때가 내게도 분명 있었다. 그리 오래전 일도 아니다. 겨우 십년, 십년 전 일이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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