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이 아닌 모든 것
이장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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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재밌고 문장도 흡입력이 좋은게 이장욱 소설인데, 갈피를 쉽게 잡을 수 없는 상징과 은유가 너무 남발한다고 해야하나. 재밌게 읽고나서 결국 ‘이게 뭔가요’ 하다가 결국엔 ‘이게 인생이라는 아이러니군요’ 정도만 깨닫게 되는?

물론 난 이장욱작가가 좋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에서 보는 미친듯이 걷잡을 수 없는 조소라던지, 이해할 수 없는 인물들의 기괴한 서사라던지. 소설이 줄 수 있는 유희 중 여러가지 종목들이 포장되어 있으니까.

인간이라는 종의 생명만큼 가치가 과대포장된 게 있을까? 공부깨나 한 인간일수록,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인간일수록, 마치 인간의가치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처럼 말하지.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게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어이없는 거짓말인지는 금방 알수 있을 텐데, 그들 자신이 이 우주의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그저 우연한 존재라는 걸 모르는 걸까? 종족을 보존하려는 본능을 휴머니즘이라는 알량한 가치로 포장하는 게 얼마나 우스운일인지 모르는 걸까? 설마. 거짓임을 알면서도, 또는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무의식중에 그걸 진실이라고 믿어버리는 게 인간들의 특기니까.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야. 집단적인 믿음에 의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게 바로 포유류 - 영장목 - 유인원과 - 인간종에 속한 생물들이니까. 다르게도 말할 수 있지. 믿음의 체계에자신을 의탁하는 순간 모든 게 가능한 존재, 그게 또 인간이라고, 안 그런가? - P50

아, 당신은 내가 꼬일 대로 꼬인 이혼녀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그럼 그렇게 생각하도록 해. 당신 마음이 편해진다면말야.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지구의 운명을 걱정하는 부류의인간은 아니야. 어느 작가였지? 하루 종일 지구의 운명을 걱정한 뒤 집에 가서 마누라를 패는 게 바로 인간 수컷이라고 말했던게? 물론 지구나 인류 사회야 걱정하면 할수록 좋지. 그것으로죄의 사함을 받을 수 있으니까. 죄를 짓기 위해 정기적으로 고해성사를 하는 이들은 어디에나 넘쳐나잖아. 새로운 마음으로 패기 위해 아내 앞에 무릎을 꿇고 참회하는 강박증자처럼. - P52

‘나는 거짓말쟁이다‘ 라고 선언한 사람의 이야기를 알고 계시겠지요? ‘나는 거짓말쟁이다‘ 라니. 참 이상한 말입니다. 그 사람이 정말 거짓말쟁이라면, 그는 진실을 말한 것이므로 거짓말쟁이가 아니게 됩니다. 그가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면, 그는 자신이거짓말쟁이라고 거짓말을 한 셈이 됩니다. 그는 자신이 거짓말쟁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에, 더 이상 거짓말쟁이가 될 수도 없고거짓말쟁이가 안 될 수도 없는 이상한 상황에.. - P124

물론 내가 일하는 박물관은 소규모 대학 박물관이기 때문에소장품들이 많지는 않습니다. 급여도 형편없습니다. 그래도 나는 불평 없이 관리인 일을 해왔습니다. 벌써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말이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입니다.
관람객 수를 다 합해봐야 하루 열 명이 안 되니까요. 초등학생들이 단체관람 올 때를 빼면 적막한 공기가 내내 고여 있습니다.
어둡고 은은한 조명, 청결한 실내, 푹신한 소파… 시간은 그런 곳에 머무는 법입니다. 시간이 거처하는 유일한 곳, 시간이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는 유일한 장소, 그게 박물관이니까요. - P125

안녕. 아름다운 동화에서 한 페이지를 찢어냈는데도 이야기가 연결되는 느낌으로, 그렇게 살아갈게. - P153

처음에는 자네 역시 그 두 사건을 연결시키지 않았다네. 이런우연이 있나, 그렇게 생각했을 뿐.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지않은가. 우연이라는 건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사건에 붙이는 이름이라는 것을. - P199

의혹이란, 부정하면 부정하는 만큼 죄인의 살을 파고드는 아라비아의 동아줄과 같다네. 부인하면 할수록 자신도 모르게 긍정을 향해 나아가지. 자네의 의혹은 점점 더 완강해졌고, 자네의 부정은 점점 더 자네의 긍정을 의미하게 되었네. 동아줄은 영혼의 연약한 살갗을 긁어대면서 점점 더 깊이, 점점 더 잔인하게 파고 들었지. 이미 필연적인 결론이 예정돼 있다는 듯이.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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