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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나 도쿄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한정현 지음 / 스위밍꿀 / 2019년 1월
평점 :
책장을 얼마나 많이 덮었는가.
전개를 이어서 받아들이기엔 조금은 긴 텀이 필요한 구간이 많았다.
‘선택’이라는 명사에는 능동형의 의미가 담겨있지만 ‘선택지’는 수동적으로 주어진다. 이미 전제가 책임을 물을 수 없는데 그걸 강요한다. 폭력이 다양하게 변형되어 산재해있다.
쉽게 뱉어서는 안되는 단어와 문장이 많다는 걸 살면서 체감하게 된다.
그녀는 눈을 감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참 이상했다. 상처는 완전히 잊혀진 듯했다가, 가장 용기가 필요한 순간에 그 존재를 다시 드러내니 말이다. - P23
매춘이 자신을 망가뜨리는 일인가? 그녀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거기서 자랐으니까. 그래서 매춘이 나쁘다고 말하면 마음 한구석에 걸리는 게 있었다. 하지만 그걸 두고 선택이라고 하는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끄덕이는 건, 불가능했다. 캬바쿠라는 궁지에 내몰린 여성들이 혼자 힘으로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찾아온곳이었다. 무엇보다 강간당한 경험이 있는 여성들은 결심하듯 말했다. "내가 이겨낼 수 있다는 걸, 내게 일어난 일이 아무것도아니라는 걸 나는 보고 싶어." 그들 대부분은 더이상 갈 곳이 없었다. ‘난 이곳이 좋아‘ 하고 말하지만 사실은 좋아해야만 하는 것. 그녀는고 그름에 대해 판단해야 할 때면 늘 혼란스러워졌다. - P92
줄리아나 도쿄의 화장실엔 별의별 것들이 다 버려져있었다. 한쪽엔 값비싼 것들로 치장한 사람들이 오르는화려한 무대가 있고, 또다른 한쪽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쓰레기들이 모인 더러운 무대가 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것들이 밟고 선 게 무엇인지 그녀는 그때 똑똑히 보았다. - P98
"한주 씨,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삶은 얼마나 행복한삶입니까." 눈은 쌓여가면서 녹고 있었다. 반짝이는 결정체들이나타났다 사라졌다. "분명하게 고르거나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삶에는 훨씬 많습니다.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이 인생에는 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 P103
‘이 사람, 스스로를 벌줬구나.‘ - P122
사람들은 유키노에게 혐오를 격렬하게 드러내진 않았다. 대신 소란 없이 쥐를 죽이기 위해 아주 조금씩 비소를 뿌리는 것처럼 진심 어린 걱정이라는 표현으로, 좋은 의도라는 명목으로 유키노를 재단하고 판단했다. - P131
어머니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떨어져 있던 칼의 손잡이를 감싸쥐었다. 유키노는 그 모습을 보며 어머니가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불행을 감당하며 살아왔다는 걸 실감했다. 누구든 경험이 많은 일에는 당황하지 않고 능숙하기까지 한 법이니 말이다. - P160
유키노의 이야기를 들으며 의사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떠올리고 있었다.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반에 꼭 한 명쯤은 있었던 미혼모의 아이들, 함께 어울려 지내다가도 미혼모의 아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어김없이 따돌림을 당했다. 그저 지우개를 숨기고 연필심을 부러뜨린 정도라고 누군가는 회상할지도 모른다. 가해자들에게 그런 것은 그저 지나간 유년의 추억거리일 뿐이니까. - P161
유키노는 그녀가 자신에게 지긋지긋하다고 말한 것이아닌데도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그때까지불평을 달고 사는 것이 크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때리거나 욕하는 게 아니니까. 불만을 중얼거리는 걸 누군가 듣는다 해도, 자기 자신만 저급한 인간이라고 여겨지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주가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지겹다고 말하는 순간, 이제껏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겁이 났다. - P164
그는 볼에 바람을 집어넣었다가 후 하고 길게 뱉었다. 긴장에 아쉬움까지 섞여 어떤 것에도 차분하게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사실 추는 불가항력이라고 생각되는 일에는우울함을 잘 느끼지 않는 타입이었다. 눈이 오는 걸 막을 수도 없었고, 폭설을 예견하고 매해 이 시기에 진행되는학회 일정을 옮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P195
어머니는 추가 알지 못하는 부분에서까지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했던 것이다. 누구의 아이인지, 남편은 어떤 사람인지, 왜 낳지도 않은 아이를 혼자서 키우는지와 같은쓸데없는 호기심들, 사람들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도 아니면서, 다정한 음성을 가장해 자신의 궁금증만을 채우려고 한다. 채워지면 금방 잊고 그 자리를 떠난다. 채워지지 않으면, 어두운 욕망으로 지어낸 이야기를 여기저기 옮기고 다닌다. 학교에 들어가면서 추는 그런 인간의 속성을일찌감치 파악할 수 있었다. ...... 누군가 그랬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는것이라고. - P206
"나 그때 무작정 선생님 앞에 서서 울기만 했지. 아무것도 고를 수 없는데 뭐든 고르라고 하는 선생님 앞에서. 이제 그건 유키노가 고른 거예요, 하는 선생님 앞에서." - P247
"아버지와 오빠는 결국 제 의사를 존중하겠다고 하셨어요, 네 ‘선택‘ 이니까, 하면서요. 물론 책임도 제 몫이라고 하셨죠." ...... "그럼 이건 제 선택일까요, 아니면 그들의 오해일까요?" - P285
내내 슬픔에만 젖어 있고 싶지는 않았다. 슬프지 않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원래 흘러가던 대로 내버려두고 싶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유품도 한꺼번에 정리하지 않기로 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삶을 살다가 떠난 것이지 이 세상에애초부터 없었던 사람이 된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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