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하게 책을 넘기다 ‘투어’가 강이에게 투영되는 순간부터 서글퍼졌다. 우리는, 사람은 ‘원래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살인미수 끝에도 무엇인가 하나라도 개선되는 건 없었다. 우리는 그냥 투어처럼 누군가와 혹은 자기 자신과 끝없이, 혹은 살인과 죽음이라는 비참한 최후에 가 닿는 순간까지 적의를 두고 살아야 하는가보다.

성장소설을 바라보는 ‘어른’의 입장은 ‘나는 이제 이런 시기는 지났다’인가.
중학생이 화자로 등장하지만 ‘어른’들도 성장을 완성하지 못하고 소설속 인물들 처럼 어리숙함을 유지하며 산다는 생각만 들었다.
불신과 음모와 배신의 도가니. 약점을 쥐어 잡은 강자의 거침없는 폭력. 대세에 편승하기 위해 약자의 상처를 정당하게 외면하는 야비함.

어느 평론가의 성장소설이라는 평은 너무나 자신들의 민낯과 다를 바 없는 어른들의 모습을 성장소설이라는 범주에 넣어 놓고 자신들에게 면죄부를 주며 안주하려는 비겁한 일인 것 같다.
하다못해 최진영작가의 ‘당신 곁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의 소녀는 더이상 성장이 필요없을 정도로 성장을 완성하지 않았나.

우리의 부끄러움에 관한 소설이다.

아이들은 아이들을 구분할 줄 알았지만 구분짓지는 않았다. 전민동 외부인과, 외부인처럼 보이는 내부인과, 내부인, 내부인은 실은 내부인 행세를 할 뿐 가장 먼 곳에서 온 외부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람과 아람의 친구들은 학교 안에서 또다른 외부인 취급을 받았다. 혼자 외부인이었던 나는 이 아이들을 만나면서부터 함께 외부인이 될 수 있었다. - P24

어떤 질문도 우리가 궁금해서 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를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 P31

‘고양이가 사나워지는 건, 화가 났을 때가 아니야. 겁을 먹었을때야’ - P78

"아람이하고 소영이하고 싸우면 누구를 선택할 거야?"
나는 대답을 회피했다.
"엄마가 좋아, 노는 게 좋아?"
엄마가 던지는 질문에 대답을 해본 적이 없었다. 선택을 요구하는 질문은 대부분 유치했고, 지혜로운 대답은 대부분 비겁했다. - P87

아이들과의 싸움은 물론이고 어른들이나 선생과의 문제에도, 소영이 개입하면 최선의 결과를 낳았다. 주먹질은 정당방위가 되었고 이 주일의 징계는 일주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최선의 결과만을 원하는 아이는 우리 중 소영뿐이었다. 우리는 다만 최악의 결과가 두려울 뿐이었다. - P88

우리는 저마다의 불행을 한자리에모아놓고서는 어이없는 교집합을 발견하고 즐거워했다. - P90

싸움을 좋아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싸울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있을 뿐이었다. 소영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보호는 치열한 공격이 될 때가 많았다. 치열한 보호가 비열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 P92

투어는 아람을 대신해 나와 살았다. 나는 투어를 강이라고 불렀다. 강이는 평소에는 잘 헤엄치지 않았다. 플라스틱 물풀 뒤에보라색 몸을 숨기고 있었다. 아침을 먹을 때에도 점심을 먹을 때에도 강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강이는 혼자서 살았다. 다른 물고기와 함께 있게 된다면,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온전치 못할것이다. 상대방이 사라지거나, 자신이 사라지거나, 그것이 투어의 운명이었다. 살기 위해서 강이는 혼자서 살았다.
손거울 하나를 어항 옆에 두었다. 손거울을 강이에게 보여주었다. 물풀 뒤에 숨어 있던 강이는 거울을 향해 달려들었다. 굵은 핏줄이 팔뚝 위로 튀어나오는 것처럼 붉은 지느러미가 강이의 몸에서 튀어나왔다. 강이는 지느러미를 흔들어대며 유리에 머리를 박았다. 다시 뒤로 물러나 입을 크게 벌렸다. 강이는 거울 속의 자신과 남인 것처럼 싸웠다. 싸울 때면 지느러미가 부채처럼 활짝 펼쳐졌다.
강이가 들어 있는 어항에 다른 물고기를 넣는 상상을 했다. 강이는 운명처럼 싸우고야 말 것이다. 강이가 죽거나, 다른 물고기가 죽거나, 둘 중 하나는 없어져야 할 것이다. 강이에게 거울을 보여주지 않는 상상도 했다. 자신을 볼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강이는 높아갈 것이다. 곪아가고 곪아가다가 어느 날 물위로 떠오를 것이다. 강이가 원하는 것이 그것일지도 몰랐다. 어항 속에서 혼자 살도록, 평생 거울과 함께 살도록,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정해진것은 아니다. 투어로 태어난 강이는 원래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야 했던 걸까.
강이는 물풀 뒤에 숨은 채로 나를 밤새도록 보았다.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던 소영이나 아무 말 없이 사라져버린 아람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이불에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텅 빈 방으로부터 나를 숨기려 했다. 그러다 이불을 박차고 화장실에 들어가 찬물로 세수를 하기도 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내 얼굴을 거울 속에서 발견할 때마다, 이마에 핏대가 서고 숨이 거칠어졌다. 나는강이에게 다가가 손거울을 보여주었다.
살아야만 한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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