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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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작가의 책을 마지막으로 읽은 것이 벌써 10년도 지난 때의 일이니, 그동안 왜 이 작가의 책을 꾸준히 챙겨보지 않았나 후회스럽다.
우리가 나쁘다고만 할 수 없는, 본능적으로 우리 내면에 심어진 방어기제를 통찰하여 비꼬는 작가의 냉철한 시각이 얼마나 유쾌햇는지 모른다. 그 풍자가 가득한 조소를 통해 얻는 건 냉소라기 보다는 유대감과 공존이라는 점이 더 매력적이다.
그동안 출간했던 작가의 다른 작품도 천천히 찾아서 읽어보아야 겠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사람을 대할 때 미묘한 권력관계를 만드는 습성이 있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관계의 자장磁場을 만들어내고 우월감과 피해 의식을 번갈아 써가며 그것을 정당화했다. 거기에는 증인이 필요했다. 결국 나로 하여금 위성처럼 그녀의 궤도를 따라 돌며 그녀라는 일방적이고 변덕스러운 광원을 반사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나는 나대로 소심함과 자기 합리화의 조합인 어정쩡한 온건함 뒤에 숨어 그녀의 그런 태도를 순순히 받아들이곤 했다. 열정은 단호한 구석이 있어서 금세 꺾이지만 친근함은 어느 정도 안이한 감정이라서 사소한 기억의 공유만으로도 쉽게 환기되었다. 그리고 내가 동의하지 않는 채로도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스스로의 유연함에 대한 자기만족이 어느 정도 그것을 도왔을지도 모른다. - P12

오랜만의 낮술이었다. 나는 페일 에일을 주문했고 그녀는 그동안 수많은 맥주를 순례한 끝에 다시 라거로 돌아왔다며 필스너를 골랐다. 한 모금 마시더니 자신의 취향은 역시 클래식한 쪽이 맞다며 흡족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향이 강한술은 초심자들이나 좋아할 뿐 금방 질리게 돼 있다는 논평을 덧붙인 뒤 턱 끝으로 내 잔을 가리키는 그녀에게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기를 드러내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남과 비교해서 우위를 차지해야 하는 패턴에는 이미 익숙했다.
한때 그녀는 헤이즐넛 커피만 마시다가 그것이 오래된 원두의 산패를 감추기 위해 향을 첨가한 데에서 시작된 걸 알고 그때부터 향 커피 애호가를 깔보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입맛이 아니라 정보와 평판에 따라 선택을 바꾸었다. 자신은 클래식한 취향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취향 있게 보이기위해서 트렌드에 민감한 것뿐이었다. 말투도 ‘이거 좋아‘가 아니라 늘 나 이거 좋아하잖아‘ 처럼 주어를 강조했다. - P17

나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다지 상상력이 없던 시기였다. 주어진 대로 수긍해야 하는 미성년으로서 ‘다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었으며, 세상은 정답의 문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그것을 알아낸 사람이 주도한다고만 알고 있었다. - P25

그리고 그 개별적인 ‘다름‘은 필연적으로 ‘섞임‘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거기에는 비극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서투름과 욕망의 서사가 개입될 수밖에 없었다. 다름은 개인성의 독립이지만 섞임이 그 종합은 아니기 때문이다. - P28

내 분위기를 알아차렸다. ‘노력‘은 고등학교 교훈에나 있는것이었다. 이제 성인이 되어 수도 서울에 살기 시작한 사람에게는 시급히 벗어야 할 촌티이자 제도 교육에 훈련된 미성년자의 ‘타율신경’ 이었다. - P35

며칠 사이 깨친 사실이지만 공동생활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고립이었다. 정보를 얻지 못하면 뒤처지고 다수에 끼지못하면 손해를 봤다. 이곳은 숨을 곳이 없는 공동 공간이었다. 그런 점에서 고립은 차별보다 더 눈에 띄었다. - P47

고등학교 때의 가방 검사가 떠올랐다. 대피 훈련이라며불시에 학생들을 모두 운동장에 집합시킨 뒤 교사들이 빈교실을 돌면서 여고생들의 가방을 뒤지곤 했었다. 소지품검사라는 명목으로 학생들을 학교의 감시 체제 아래 굴복시키려는 폭력적 이벤트였다. - P71

그날 이후 그녀는 볼품없고 말 많은 골초 남학생과 특별히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평소에 남자의 외모와 조건을 유난히 따지던 그녀로서는 뜻밖의 일이었는데 그녀는 그런 비논리적인 일에 갖다 붙이는 ‘운명‘이라는 말을 기꺼이 사용했다. - P80

결국 여자의 지성은 남자를 보필할 때에만 인정받을수 있고 여자가 남자를 능가할 만큼 눈치가 없으면 진정으로 똑똑한 게 아니라는 뜻 아닌가. 똑똑한 걸 드러내지 않고, 그 똑똑함으로 남자에게 헌신하는 태도를 제멋대로 현명함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경혜는 수업 시간에 발표한 대로사랑에 대해서뿐 아니라 남자친구와 관련된 모든 일에 논리를 적용하지 않기로 한 것 같았다. - P82

혼자라는 건 어떤 공간을 혼자 차지하는게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익명으로 존재하는 시간을 뜻하는 거였다. - P84

그렇다고 멀리 떠나온 것 같지도 않았다. 여전히 나는 무력하고 방어적인 회색 지대에 갇혀 있었다. 나 자신이 실망스럽고 그러다 보니 의욕이 없어 방치하게 되고, 결국 해야할 것을 제대로 못 해 무력감에 빠지고, 무력감은 쫓김과 불안을 낳고 그래서 자신감을 잃은 끝에 제풀에 외로워지고, 그 외로움 위에 생존 의지인 자존심이 더해지니 남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고, 그러자 곧바로 소외감이 찾아오고, 그것이 또 부당하게 느껴지고, 이 모든 감정이 시간 낭비인것 같아 회의와 비관에 빠지는 것, 그 궤도를 통과하지 않을수는 없었다. 이른바 청춘의 방황만이 아니었다.
지난 두 달 동안 나는 내 앞의 문을 열지 못하고 번번이 과거의 나로 굴러떨어지곤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세계의 부당한 규율에 복종했던 미성년 그대로였다. - P86

파트너와 정장과 티켓은 인기와 경제력을 의미했고 축제는 그것을 과시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다수에 끼지 않는것이 열등함을 의미하는 단체 생활 분위기에서, 소수의 개인은 일방적인 평가와 그것의 부산물인 오해의 대상이었다. - P108

약점이 있는 사람은 세상을 감지하는 더듬이 하나를 더가진다. 약점은 연약한 부분이라 당연히 상처 입기 쉽다. 상처받는 부위가 예민해지고 거기에서 방어를 위한 촉수가 뻗어 나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약점이 어떻게 취급당하는가를 통해 세상을 읽는 영역이 있다. 약점이 세상을 정찰하기 위한 레이더가 되는 셈이다.
그들은 자주 위축되고 두려움과 자괴감에 빠지지만 그런 태도를 되도록 감춰야 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약점이 있다는 걸 공유하면 편해지긴 하지만 무시당하는 걸 감수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약점을 숨기고 방어하고 또 상처받았을 때 태연하게 보이는 법을 연구하면서 타인을 알아간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약점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나를 조종하고 휘두를 힘을 가진다. 우리는 장점의 도움으로 성취를 얻지만 약점의 만류로 인해 진정 원하던 것을 포기하거나 빼앗긴다. 어쩔 수 없이 약점은 삶의 결핍과 박탈을 관장한다. - P112

절름발이라고 놀림을 받는 설정이 말더듬이였던 작가 자신의 처지를 반영하고 있다는 해설을 어쩌다 먼저 읽고는 전혀흥미가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같은 처지끼리 공감을 느끼고 거기에서 위로와 격려를 얻는다는 건 허튼소리다.
약자는 위로받기보다 차별이 없는 존중을 원한다. 결점이있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특별한 배려를 받는 게 아니라, 다수와는 다른 조건을 가졌을 뿐 동등한 존재로서의 권리를 누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맞은편 대열에서 응원을 보내기보다는 내 곁으로 와서 서는 것. 하지만 내가 자란 시절은 약점을 개인이 가진 하나의 조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분위기가 결코 아니었다. - P115

모범생들은 눈치를 본다. 문제를 낸 사람과 점수를 매기는 사람의 기준, 즉 자기를 어디에 맞춰야 할지 알아야 하기때문이다. 정답을 맞히려는 것은 문제를 내고 점수를 매기는 권력에 따르는 일인 것이다. 그렇게 그저 권력에 순종했을 뿐이면서 스스로의 의지로 올바른 길을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모범생의 착각이다. 그 착각 속에서 스스로를 점점 더 완강한 틀에 맞춰가는 것이다. 다행히 나는 진짜모범생은 아니었다. - P117

문제는 곽주아의 참견이었다. 곽주아는 만만한 상대에게 사사건건 자기 방식의 기준을 들이대며 잔소리를 했다. 상대를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어 동정하고 잘못한 사람으로 만든 다음 용서해주는 식이었다. 진심으로 상대를 위해서라기보다 남을 교정하면서 우월감을 느끼는 태도가 몸에 밴 것같았다. - P127

오지은이 왜 음악 얘기를 꺼내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남자가 나랑 잘 맞는다고 생각하기 위해 그냥 갖다붙이는 말 같았다. 그때에도 나는 그녀가 상냥한 성품이라고 생각했을 뿐 그것이 타인을 몇 개의 묶음으로 분류해놓고 천편일률적 교양으로 응대하는 무례한 태도라는 건 깨닫지 못했다. - P141

원하는 게 새로 생겼을 때는 그 변심을 정당화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이미 갖고 있는 것의 흠을 찾아내는 데에 적극적이 되기 마련이었다. - P146

이따금 나는 책을 내려놓고 이층침대의 사다리에 걸쳐놓았던 눅눅한 수건을 눈으로 가져갔다. 몇 번인가는 두 손으로 수건을 움켜쥔 채 흑흑 소리 내서 흐느끼고 말았는데 물론 책에 감동해서는 아니었다. 낭만적 사랑‘ 이라든가 ‘정서적 조작‘ 이란 말들이 미묘하게 나를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눈물은 그 말들에 대한 수긍과 부인 사이의 혼란스러움을잠재우는 격한 세리머니 같은 것이었다. - P163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세번째 공주였다. 모종의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는 아니면 오해를 풀든 간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설명을 요구해야 했다. 그 상황에서 왜 비련의 여주인공월감을 확인하는 것이다. 공주 중에서도 내가 제일 싫어하을 흉내 내며 제풀에 도망을 치는 것일까. 피해자임을 과장하는 제스처가 동정심을 유발해서 남자를 뒤따라오게 만들거라고 기대한 것일까. 아니면 현장에서 멀어지는 것이 그나마 남은 자존심을 수습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마음에 없는 교양 연기를 피할 수 있는 탈출구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어쨌든 피해자인 주제에 제 쪽에서 자리를 피해주는 것만봐도 그녀가 얼마나 자기도취적이며 위선에 익숙한지 알 수있다. 회피야말로 가장 비겁한 악이다. 애매함과 유보와 방관은 전 세계의 소통에 폐를 끼친다. 게다가 그녀는 적에게조차 좋은 점수를 받으려고 한다. 모두에게 맞춰주면서 우는 세번째 공주 타입이다. - P171

나는 아직 심각한 연애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목표를이루려면 일단은 학교 공부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아르바이트가 우선이었다. 데이트는 틈틈이 가볍게 즐기면 되었다. 언니 친구들만 봐도 남자를 일찍 만나 잘된 경우를 보지못했다. 때 이른 임신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여자들은, 게으르고 무능하고 겉멋과 헛바람이 든 남자들을 먹여 살릴 값싸고 힘들고 모욕적인 일자리를 손쉽게 구할 수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 P174

그 시절 우리에게는 수많은 벽이 있었다. 그 벽에 드리워지는 빛과 그림자의 명암도 뚜렷했다. 하지만 각기 다른 바시간은 여울을 이루며 함께 흘러갔다. 어딘가에 도달하기위에 부딪쳐 다른 지점에서 구부러지는 계곡물처럼 모두의위해서 말이다. 그때 우리 모두는 막연하나마 앞으로 다가올 시대는 지금과 다를 거라고 믿었다. - P193

나는 그 시간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난 것일까. 오로지 내게 주어진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것과 성적을 올리는 것, 두가지에만 의미를 두던 고등학교 시절 훈육의 틀과 그리고내가 동의할 수 없었던 세상의 모범생이라는 모순된 자리.
거기에서 시스템의 눈치를 보며 적응한 척했던 것이 단지임시방편이었을까. 혹시 그대로 내 삶의 태도가 되어버린것은 아닐까.
훈육과 세뇌에는 탈출구가 없다.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뀔 수도 없으며, 끝없이 반복되는 그 틀의 궤적에 부딪히고 상처입고 위축되며 계속해서 눈치껏 나를 속이며 살아야 하는걸까. - P245

편지의 어느 대목에서 내가 울었는지는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김희진이 소설에 쓴 대로 그때의 나는 허위의식과 자기방어의 성채에 갇혀 있었고 둘 중 어떤 것을 건드리든 비관적으로 변하게 돼 있었다.
비관은 가장 손쉬운 선택이다. 나쁘게 돌아가는 세상을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적게 소모되므로 심신이 약한 사람일수록 쉽게 빠져든다. 신체의운동이 중력을 거스르는 일인 것처럼, 낙관적이고 능동적인생각에도 힘이 필요하다. 힘내라고 할 때 그 말은 낙관적이되라는 뜻인 것이다.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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