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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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이 작가가 노벨상을 수상하였고 이 작품이 부커상을 수상하였다고 이 책에 높은 평점을 주는 것은 기만이다.
태고의 시간들을 재미있게 읽었고 같은 번역가가 옮겨왔기 때문에 번역의 문제도 아닐 것이다. 여행으로 책의 서두를 열었는데 이 책은 방랑자들이다. 초반에 ‘야만인들은 여행을 하지 않는다. 그저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거나 침략할 뿐이다’(하, 야만과 문명을 구분짓고 문명인이라는 명분으로 침략과 약탈을 자행했던 자신의 조상들을 우회적으로 비꼬았나?)라고 하는데 크게 동의할 수 없으며, 작가는 여행과 방랑을 혼용하여 사용하는 듯하다. (혹시 폴란드어는 그 둘을 유사하게 사용하나?) 책의 흐름도 제목과 같이 방황하는 것처럼.
‘이 책에서 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겪는 경험들이 빚어내는 온갖 불협화음, 단일화의 불가능성, 혼돈, 산산이 쪼개졌다가 다시금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 내는 그 본질에 충실’하고자 했다면 그 목적만큼은 성취한 듯하다. ‘다양한 에피소드를 엮어낸 시적인 장편소설’이라는데 사이에 어느 다른 작가들의 수기를 끼어 넣는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일관성 없는 에피소드들의 불협화음, 절대 단일하게 엮이지 않는 주제의식, 정말 말그대로 혼란,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아닌 무질서한 이 세상이라는 형상이 이 두꺼운 600페이지의 책 속에 담아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태고의 시간들을 보고 꽤 인상 깊었던 작가라 계속 시도하였는데 다른 작품들은 어떨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확신없이 시도하기엔 분량이 너무 과하고 괴롭다.

나는 귀 기울이는 법을 잘 몰랐다. 경계선을 보지 못하고 슬그머니 끼어들곤 했다. 이론의 입증이나 통계를 믿지 않았다. 한 사람에게 하나의 인성이 있다는 가설은 지나치게 축소 지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당연함을 모호함으로 만들고, 반박할 수없는 논거에 끊임없이 의심을 품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습관, 두뇌의 비뚤어진 요가, 내면의 움직임을 자각하는 데서 오는 미묘한 희열 같은 것이었다. 나는 모든 판결을 의심의 눈으로 보고 혀로 직접 맛보면서 궁극적으로 내가 예상한 결론에 이르곤 했다. 진짜는 하나도 없고 죄다 가짜일 뿐이며 복제품에 불과하다는 결론, 나는 일관된 견해를 갖고 싶지 않았다. 그건 그저 불필요한 짐 가방이나 마찬가지니까. - P28

유동성과 기동성, 환상성은 문명화된 사람들의 특성이다. 야만인들은 여행을 하지 않는다. 그저목적지를 향해 움직이거나 침략할 뿐이다. - P82

원본과 마주했을 때만큼 만족스러운 순간은 없다고, 세상에복사본이 많아질수록 원본의 위력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으며,
때로 그 위력은 거룩한 성유물에 버금간다고도 했다. 그에 따르면, 세상에 하나뿐인 것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며, 그로 인해 늘 파손에 대한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 P94

하지만 이렇게 표면적인 다양성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여서는안 돼요. 그건 그저 피상적인 것이니까요. - P104

나는 무기를 꺼내 들듯 리모컨을 앞으로 내밀고 화면 정중앙을 겨냥했다. 한 번씩 쏠 때마다 채널이 하나씩 죽음을 맞았지만 곧바로 다른 채널이 생성되었다. 내 게임의 목적은 밤을 좇아가는 것이고 밤의 지배를 받는 세상에서 송출된 채널들만을 골라내는 것이다. - P152

인간의 신체에서 가장 강한 근육은 혓바닥이다. - P158

하지만 나는 알고있다. 사람들이 봉투 따위에 뭔가를 적는다는 건, 불안감이나 불신을 표출하기 위해서라는 걸. 실패 혹은 대단한 성공은 글쓰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 P543

그녀는 자주 그에게 화가 났다. 이 사람은 자기에게 모든 걸 전적으로 의지하면서도 그러지 않는 듯이,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인듯이 행동한다. 남자들, 아니면 적어도 그들 가운데서 똑똑한 부류는 자기 보존 본능이 발동해서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보다 아주 젊은 여자에게 집착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매우 필사적인 감정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하지만 그 이유는사회 생물학자들이 추측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렇다. 그건 시간의 흐름 속에 자신의 DNA를 채워 넣으려는 욕망이나 번식에대한 욕구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보다는 삶의 순간순간마다 인간이 느끼는 어떤 직감, 애써 감추며 침묵으로 일관해 온 불길한 예감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너무 조용하고 따분한 시간의 흐름 속에 던져지면 남보다 빨리 늙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그런 예감 말이다. 그들은 자신이 처음부터 짧고 강렬한순간을 위해 태어난 존재인 것처럼 착각한다. 위험천만한 경주와승리, 그리고 탈진, 그러므로 그들을 살아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흥분과 전율이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값비싼 삶의 전략이라고할 수 있다. 그렇게 비축된 에너지가 소진되고 나면 그때부터는마이너스 통장으로 살아가야 하므로. - P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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