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고다이 獨 GO DIE - 이기호 한 뼘 에세이
이기호 지음, 강지만 그림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이기호작가 마니아로서 지금은 서점에서 구입 할 수 없는 책을 중고서점을 통해 구입하고 탐독하였다. 이 시대의 최고의 묵직한 유머리스트답게 짧고 굵은 메시지나 유쾌한 웃음이 만선하여 정박한 느낌이다.
하지만 에세이답게 몇가지 반론하거나 대변해 주고 싶은 부분이 없지는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은’으로 불리는 원로 작가의 설화는 풀지 않겠지만, 장애체험의 의의와 목적이 체험당사자들에게 미치는 인식의 변화, 인권감수성의 변화를 설명해주고 싶지만, 그래도 이기호작가의 의도만 순수하게 받아들이면 될 일인 것 같다.

2천5백 원담배 한갑에 세금이 천백 원, 아내에게 받은 돈으로 나는 성실하게 납세의 의무를 다한다. 내가 낸 세금으로 보건복지가족부 에선 출산 장려 정책을 세우고, 그에 필요한 예산을 확보한다. 담배 피우면 일찍 죽는다고, 건강 해친다고 잔뜩 겁을 주면서, 다른 한편으론 그 담배를 팔아 출산 장려 정책을 세우는 것은, 마치 흡연자들로 하여금 어떤 부당한 식민 통치를 당하고 있다라는 자괴감을 갖게 해준다. - P23

모두 흡족한 얼굴들이다. 통과를 허락받은 자의 얼굴엔 남모를 자부심 같은 것도 엿보인다.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주차차단기라는 것은, 타인을 통과시키지 못하게 하는 장치가 아니라, 그 사람의 상태를드러내주기 위한 장치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대기업사원들이 점심시간마다 목에 전자칩이 내장된 사원증을 자랑스럽게내걸고 밥을 먹으러 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 사원증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는 백수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사원증이 명함이 되고, 주차차단기가 아파트 시세를 좌우하는 세상이다. - P33

"어느 시대나 좌파로 살 수 있는 인간적 소양을 가진 사람은아주 적다.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35

작가란 마치적십자 회원과도 같은 것이어서, 언어에는 국경이 있지만, 세계관에는 국경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 문학은 본질적으로 날것의 인간을다루는 장르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국경은 무의미하다. 문학에서 국경을 의식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상품과 정치의 시각으로 예단하려는 분들뿐이다. - P53

자식 낳고 제일 조심해야 할 게 뭔지 알아? 자식핑계로 욕심 늘리는 거래. 그게 바로 자기를 잃어버리는 첫걸음이래. - P135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모든 렌즈들은 관찰이 아닌, 감시로 그 역할들을 바꿔나갔다. 사실, 그건 렌즈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의눈이 관찰이 아닌 감시 쪽으로 변해갔기 때문에, 자연스레 렌즈 또한그 시선을 따라온 것이다. - P155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대는 어쩔 수 없는 필연의 세계이자, 결정론의 세계이다. 모든 것이이미 태어날 때 결정되어 있다는 인식. 그러나 많은 생물학자들은 아무리 좋은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다 하더라도, 유전자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더 많고, 그것들을 좌우하는 것이 바로 환경이라고 주장한다. 즉,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초파리라 할지라도, 주어진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모양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말씀. 그것은 나름 우리에게 힘이 되는 말이기도 하지만, 웬일인지 그리 위로가 되진 않는다.
자꾸 우리 환경 또한 필연적으로, 결정론적으로 굳어져만 가고 있다는 생각, 재단사 아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노벨상 수상자가 되기 어려워졌다는, 조금 씁쓸한 생각. - P223

지나고 생각해보니, 내가 몸담았던 조직은 노동의 질보다는, 노동의 충성심을 더 높이 샀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땅의 많은 조직들 또한 그것을 더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거대한 병영국가에서 살고 있다는 뜻이다. - P226

내 청춘의 대부분을 흘려보낸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부끄러웠다. 등록금과 세월을 바친 만큼, 내 지식이, 내 의식이 한 뼘쯤이라도 성장했는가, 자문해보면 고개가 절로 숙여지고 만다. 내 공부라는 것이, 학문에 온전히 바쳐진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아둔한 머리로 대학원에 진학한 것 역시 돌아보니, 어떤 두려움 때문이었다. 남들에 비해 뒤처진다는 두려움과, 사회에 안정적으로 연착륙하길 바라는 욕망, 그 마음이 늘 학문보다앞섰다. 그러니 근래 말이 많이 나오는 학력 위조에 대해서도 나는그리 할 말이 없다. 졸업장을 갖는다 해서 학력 위조에서 자유로운가? 너는 그래 대학을 나온 사람으로서, 얼마나 대학을 나온 사람처럼 행동했는가? 대학에선 과연 무엇을 배웠는가? 그 질문들에 대해나는 묵묵부답, 그저 고개를 떨굴 뿐이다. 결과의 위조 못지않게, 과정의 위조 역시 우리가 함께 생각해봐야 할 사항이다. - P228

독서는 하나의 읽는 행위이지만, 그것은 또한 누군가와의 대화 행위이기도 하다. 지은이가 16세기 사람이든, 19세기인물이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밀담을 나누는 것, 그래서 그 안에서작자와 나 사이의 차이와 합일을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독서 경험이다. 한데, 그 책들을 누군가 골라주면, 대부분의 경우 대화가 아닌, 강요가 되고 만다. 그러니 우리는 책을 고를 때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실패 또한 하나의 대화이니, 그것이 타인의 강요보다는 훨씬 낫다. 실패들 많이 하시길. - P268

장애인 체험 학습이란 것이 있다. 아이들에게 안대와 지팡이를 주고 몇백 미터쯤 걸어보게 하거나, 짝을 이뤄 휠체어를 타고 이동하는것이 주종을 이루는 프로그램이다(때가 되면 정치인들까지 우르르 몰려와 함께 체험한다). 행사를 주관하는 단체에서는, 이런 체험 학습을통해 현재 장애인들이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그들의 이동권이 얼마나 열악한지, 일깨워줄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주장하는 것은 그들 자유이지만, 최소한의 예의를 갖췄으면 좋겠다. 실제 장애인들이 그런 행사를 어떤 기분으로 바라볼까, 한번쯤 깊이 생각해봤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몇백 미터나, 반나절로 이해할 수 있는 타인의 고통 따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부분 자기 자신의 현재를 되돌아보고, 정체성을 확인하는 기회가 될 뿐이다. 체험의 속성이란 것이 그렇다. 타인에게 다가가는 듯한 포즈이지만, 최종 기착지는 결국 자기 자신이 되고 마는 것. 아이들에게안대를 주고, 결국 자기 두 눈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체험학습. 이것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농활 한번 다녀와서 농민의 현실을 다 이해했다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다. 그러니 체험 학습이란, 어쩌면 포즈 학습인지도 모르겠다. 하긴, 요즘 시대에 그것보다 더 훌륭한 가르침 또한없으니. - P286

내가 저 영화 원작 소설을 얼마나 좋아했는데, 영활 보고 내가 상상한 거하고 다르면 어떡해. 친구의 반응은 좀 예민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전혀 수긍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활자를 보면서 우리가 마음속으로 품었던 상상과 전혀판이한 방식으로 제작된 영화들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
사실, 그것은 영화 제작자의 잘못은 아니다. 그것은어찌 보면 활자가 불러일으키는 보이지 않는 상상이, 시각화라는 편협하고 왜소화된 감각으로 재편될 때 벌어지는, 별수 없는 현상이기도 하다. - P87

아버님은 입이 짧은 탓에 어머님이 하신 음식외엔 결코 수저를 대지 않는 분이시다. 어머님이 주말마다 내려가서국이다 찌개다 이것저것 해놓고 온다지만 여름이다 보니 채 이틀도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후엔 주로 라면을 끓여 어머니가 담근치와 함께 드신다고 했다. 글쎄 큰일이구나, 식당에 나가 이것저것사드시라고 해도 맛없다는 말만 하니, 어머님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나는, 그건 다 어머니 잘못이라고, 어머니가 아버지 식성을 그렇게 만든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이 싫진 않았는지 어머니는 내게 이런말을 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이 나이까지 살아보니 아무것도 남긴 게 없는 거야. 나 죽으면 그저 먼저처럼 끝날 거 같고, 그래, 내 한사람만은 나를 기억하게 해야지, 한 사람만은 내가 해준 밥을 기억하게 해줘야지, 하는 마음으로 음식을 만들었더니, 그게 그렇게 됐네..
나는 괜스레 마음이 조금 울컥해졌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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