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PD를 형이라 부르고, 회계 팀 신유리 대리를 누나라고 부르는 조연출의 태도만은 나날이 더욱 거슬렸다. 친구처럼 지내라는 PD의 말에도 불구하고 호재가 꾸준히 조연출을연출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가 이제 겨우 입사 1년 차 새내기인 탓도 적지 않았다. 호재는 자꾸 일이 꼬이는 게 조연출 탓인 것 같아 그를 앉혀 두고 조직의 말단으로 사는 데 유용한 충고와 유의미한 지적을 조목조목 일러주고 싶었다.
알량한 인정에 기댔다가 배신당하고 상처 입는 쪽은 계약직인 너일 거라고, 월말에 메일로 지출 경비 내역을 주고받는게 고작인 신유리 대리에게 누나라고 부르는 건 공적 영역을무시하는 자만한 태도로 비칠 수도 있다고, 아니면 그저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고. - P57

호재가 그들의 처지를 몰라서 빈정거리는 건 아니었다. 정규직 전환으로 통하는 기회는 요원하고 기회의 유무조차 회사의 대내외적 사정에 따라 임의로 주어졌다. 인내와 끈기를장점으로 부각하는 이력보다 임기응변과 변통에 능한 이력이훨씬 나았다. 정규직에게 바라는 게 충성을 드러내는 인내라면 계약직에게 바라는 건 야망 없는 열정이었다. 회사는 그들이 남아 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다 자란 아들처럼 마땅히 떠나 주길 바랐다. - P58

호재는 자신이 혼자나 다름없고, 누구나 어른이 되면 다 혼자가 될 텐데, 그렇게 보자면 나는 미래를 앞당겨 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했다. - P27

"재수 없는 날에는 자꾸 옛날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호재가 말머리를 돌렸다. 왜 그럴까 곰곰 생각해 본 적도있었는데 거듭 이유를 찾아봐도 답은 명백했다.
"이유를 알고 싶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우연히 불행한 건지, 당연히 불행한 건지." - P69

저마다 감내해야 하는 부당함과감수해야 하는 위기가 달랐다. PD는 그 부당함을 호재를 통해서 실감했고, 조연출을 통해서 위기감을 잊었다. 조연출은그 모든 불안을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로 잠재우는 듯했다. 미래에 거는 기대가 없는 호재는 그 모든 불안과 부당함과 위태로움을 무심하게 견뎠다. 이대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 P62

예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지만 호재는 고모부에 대해선 몇 가지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세상의 호의를 부끄러워서 거절하고 두 번째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 거절은 겸허한 자세에서 비롯하는 예의이니 그에 대한 치하로 주어지는두 번째 기회는 사뭇 거창할 거라는 기대 때문에 스스로 자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사람, 삶의 호시절을 꿈꾸다가 주말마다 로또에 낙첨하길 반복하면서 첫 번째 기회가 언제였는지 울분에 차서 되짚는 사람, 절망과 비관에 빠진 자신이 부끄러워 술에 취해 낙관과 호언을 내지르다 지쳐 잠드는 사람.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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