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수수밭 대산세계문학총서 65
모옌 지음, 심혜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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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긴 마라톤을 달려온 기분이다. 고전의 분량은 원래 어마어마한 쓰나미를 마주하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데, 심지어 중국의 근현대사가 배경인 모옌의 작품이라 시작하는 마음을 잡는 것부터가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노벨문학상의 타이틀을 쥔 작가들의 작품은 항상 재미와는 거리가 멀었으니 힘든 마라톤을 모래주머니까지 쥐고 뛰는 일 아닌가.
몇몇 중국작가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고 도전해보는 소설이었지만 작가의 사관이 현시대의 정신에 부응하지 않는 듯한 평도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인권 감수성과 정치적 현실 사이의 괴리를 문학성이 얼마나 메워줄 수 있는 지도 궁금했다. 사실 붉은 수수밭에서 작가의 정치편향적인 작법은 보이지 않는 듯하다. 괴뢰군, 일본군, 공산당, 국민당 모든 특정 집단을 영웅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며 화자는 주요 등장 인물들에게 애정은 담아 묘사하지만 정당한 정의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짧은 리뷰 하나 쓰기도 어려운데 장대하고 유려한 문장들을 길고 길게 서술해나가는 작가의 필력에 감동하며 보았다. 잔인하기도 하고 구역질나기도 하면서도 휴머니즘적이고 전체적으로 담담하다. 감정의 온도는 낮게 유지하면서 그 많은 역경과 풍파를 그려내는데 표지 뒤의 작가 사진이 푸근하면서도 차가운 이미지처럼 느껴지는 것과 동일한 선상에서 오는 기시감이랄까.

다시 한번 모옌의 소설을 찾아볼 이유가 있다면, 좀 더 다양한 작품을 섭렵하여 정치적인 지점을 구분할 수 있는지 알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많은 중국의 의식있는 지식인들이 비난해야할 이유가 있었는지가 참으로 궁금했는데 뭔가 답을 찾지 못하고 싱겁게 끝나버린 것 같았으니....

할머니는 너무나 피로하다고 느꼈다. 그 미끌미끌한 현재의 손잡이가, 인간 세상의 손잡이가 그녀의 손을 막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인가? 내가 죽어가고 있는 건가? 이 하늘과 이 땅, 이 수수와 나의 아들을, 지금 사람들을 데리고 전투를 벌이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는 것인가? 총소리가 너무나 멀게 들렸고, 모든 것이 두꺼운 안개 뒤에 가려져 있는 것 같았다. 더우관! 더우관! 내아들아, 엄마를 도와주렴. 어미를 꼭 잡아라. 어미는 죽고 싶지 않다, 하늘이시여! 하늘…… 하늘이 내게 사랑하는 이를 주셨고, 하늘이 내게 아들을 주셨고, 하늘이 내게 재물을 주셨고, 하늘이 내게 붉은 수수 같은 30년의 충실한 인생을 주셨습니다. 하늘이시여, 당신이 이왕 나에게 준것이니, 도로 거두어가지 마소서. 나를 용서하소서, 나를 놓아주소서! 하늘이시여, 당신은 내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나요? 당신은 내가 문둥병자와 동침을 해서 살이 썩어 문드러지는 괴물을 낳아 이 아름다운 세상을형편없이 더럽혔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하늘이시여, 무엇이 정조고, 무엇이 정도(正道)입니까? 무엇이 선량한 것이고 무엇이 사악한 것입니까? 당신은 한 번도 말해준 적이 없고, 난 단지 나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왔습니다. 난 행복을 사랑했고, 힘을 사랑했고, 아름다움을 사랑했습니다. 내 몸은 나의 것이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난 죄도 벌도 두렵지 않고 당신의 열여덟 층 지옥에 들어가는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난 해야 할 일을 다 했으니 어떤 것도 겁날 게 없습니다. 하지만 난죽고 싶지 않습니다. 난 살아야겠습니다. 살아서 이 세상을 더 보아야겠습니다. 아 나의 하늘이시여…….… - P128

할아버지는 나중에 다시 할머니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할머니에 대한감정은 이미 색과 맛을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혼탁해져 있었다. - P302

사랑이라는 게 뭔가? 저마다의 대답이 있겠지만, 이 요상한 일이 무수한 영웅호걸과 요조숙녀를 시달려 죽게 했다. 할아버지의 연애 역사와아버지의 애정의 광란, 그리고 사막처럼 창백했던 나 자신의 연애 경험에근거해서, 나는 우리 집안 3대의 사랑에 부합되는 철칙을 도출해냈다. 열광적인 사랑의 첫번째 요소는 가슴을 찌르는 고통이다. 찔린 심장에서는송진 같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사랑의 고통으로 인해 흘려야 하는 붉은 피는 위장에서부터 흘러나와 소장과 대장을 지나면서 오동나무 기름같은 대변으로 바뀌어 체외로 배출된다. 잔혹한 사랑을 이루는 사랑의 두번째 요소는 가차 없는 비난이다. 사랑하는 쌍방 모두 산 채로 상대방의가죽을 벗기지 못해 안달한다. 생리적인 가죽과 심리적인 가죽, 정신적인가죽과 물질적인 가죽을 벗기고, 혈관과 근육과 퉁퉁 움직이는 내장과 검붉은 심장을 벗긴다. 그러고 난 뒤에 둘은 상대방을 향해 서로의 마음을던지고, 두 마음은 공중에서 부딪쳐 박살이 난다. 얼음처럼 싸늘한 사랑을 이루는 사랑의 세번째 요소는 지속적인 침묵이다. 싸늘한 감정은 사랑하는 사람을 얼려 얼음과자로 만들어버린다. 우선은 차가운 바람 속에서얼고 그다음에는 눈 속에서 얼다가 다시 꽁꽁 얼어붙은 강물 속으로 던져지고 마지막에는 현대 문명이 낳은 냉동고 안이나, 돼지고기나 조기를 보관하는 냉장실 속에 언 채로 걸려 있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사랑을하는 사람은 얼굴이 서리처럼 하얘지고 체온은 25도로 내려가, 입만 움찔거릴 수 있을 뿐 절대로 말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미 말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인데 사람들은 그들이 짐짓 벙어리 노릇을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 P464

할아버지가 롄얼과 몰래 정을 통했을때는 부끄럽고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 호되게 욕을 먹고 얻어맞고 나니 그런 감정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원래 있었던 자기비판의 양심은 강렬한 복수심으로 대체되었다. - P491

난 가끔씩 인종의 퇴화가, 갈수록 더 부유하고 편리해지는 생활 조건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한다. 부유하고 편안한 생활은 인류가 분투노력하는 목표이고 또한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목표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또한 불가피하게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심각한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인간은바로 자신의 노력으로 인간의 우수한 품성을 소멸시켜가고 있는 것이다. - P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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