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기 전 이미 대략적인 내용을 알고 있었다. 왠지 요즘 시대에 작가들이 앞다투어 너도 나도 퀴어문학을 한편씩 발표하는 분위기 인 듯 한데 또 대세에 편승한 장르문학같은 소설이 출간되었나 싶기도 했다. 과연 유행처럼 범람하는 퀴어 문학들 사이에서 신선함을 느낄 수 있는 지점을 찾을 수 있을까 싶은 걱정도 있었다. 동성애자와 그들의 가족이 겪는 진부한 갈등관계, 기승전결이 뻔한 커밍아웃과정의 고군분투를 다루는 소설 등등을 예상했다. 또, 김봉곤과 박상영작가(물론 이들도 신예작가이지만)에 비해 새로 접하는 김병운이라는 작가의 필력은 어떨지, 80년대 초중반의 비슷한 시기를 겪고 자라나 활동하는 작가들 사이에서 남다른 면모를 보여줄 수 있을지 기대반 걱정(??)반의 마음으로 구입을 하고 독서를 시작했다.
결과는 예상을 크게 벗어나 버렸고 다른 작가들의 퀴어소설에서는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져버린 젊은 작가의 패기에 감동하게 되었다. 새롭게 봐달라는 동성연애의 서사도 아니었고, 역경을 파해치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성장해 나가는 동성애자 인간승리 드라마도 아니었다. 일반 독자들이 상상 가능한 퀴어스토리가 아닌, 이미 성숙해서 앞서 나아가버린 성소수자들의 다음 이야기, 자신의 확고한 정체성을 외부로 드러내는 용기를 얻어가는 과정을 쓴 소설이었다. 간혹 몇몇 책 소개에 지난 애인이 혐오범죄인 이태원 방화사건으로 희생되어 복수심에 불타올라 커밍아웃을 결정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지만 내가 본 소설의 주인공 공상표에게는 타인을 향한 원망과 복수심이 커밍아웃 과정에서 결정적 동기부여가 되기는 했지만 주목해야할 부분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 소설의 주목해야할 부분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거짓된 자신의 모습에 집착하고 보호하려는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에 염증을 느끼는 성소수자의 자기반성이다. 위장된 현실에서 자기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부정하고 서로 상처입히는 일이 반복되면서, 현실에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유약함에 대해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껴 커밍아웃을 감행한다. 공상표의 커밍아웃은 전 애인에대한 죄책감에 보답이라도 하기 위한 커밍아웃도 아니고, 게이라는 것이 부끄럽고 수치스럽지 않다는 걸 증명하기 위함도 아닌 자기 스스로 ‘탈출구를 찾고’, ‘자신을 증오하지 않’으며, ‘떠밀린 게 아니라 딛고 일어서’기 위한, 자기 완성을 위한 것이다.

마지막 최은영작가의 추천사를 보며 눈물이 핑 돌았다. ‘한 번뿐인 삶을 살면서 우리는 왜 진짜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려는 시도만으로도 상처받아야 하는’ 것인지. 있는 대로 모습을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험난한 시련을 이겨내야 하는 완성의 과정이라는 것이 참 서글프다.

한때 양병진은 남들의 인정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사랑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자신하며 이 세상에 단둘이 고립된 것만 같은 애틋한 상황을 즐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비밀 연애에서 비롯된 불안과 불신을 애써 못본 척하는 사이 그는 마흔이 되었다. 마흔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어딘가에 간신히 균형을 잡고 있던 저울이 돌연 현실 쪽으로 급격히 기울어지는 나이였다. 그냥 마흔이 되었을 뿐인데, 달라진 건 고작 그것 하나뿐인데, 그는 마치 주술에 걸린것처럼 안정과 확신을 원하게 됐다. 그녀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 관계를 인정받고 싶었고, 남들처럼보란듯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려서 자신들에게도 미래가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P73

당신은 은성이한태 줘야 할 사랑이 너무 많잖아. 그건 주고 또 줘도 바닥나지를 않잖아. 가진 게 너무 많은 사람은 원래쉽게 떠날 수가 없거든.- P129

그냥 네 친구들만 알면 안 돼? 네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 너를 아껴 주는 사람들, 너를 응원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한테만 진실하면 되잖아. 그래도 되는 거잖아. 다들 그렇게 살아. 너보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 부자인 사람들, 배우들, 가수들, 모델들, 운동선수들, 정치인들…… 다들 쉬쉬하면서 산다고, 누가 봐도 게이 같은 애들도, 게이가 아니라면 말이 안 되는 애들도 절대로 인정은 안 하잖아. 그러든지 말든지 하면서, 좋을 대로 생각하라지 하면서 그렇게 살잖아. 정 못 참겠으면 너도 티 내면서 살아.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 대신 인정만 하지 마. 공표만 하지 말라고,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이야? 세상에 거짓말 안 하고 사는 사람이 어딨어? 가면 안 쓰고 사는 사람이 어딨어?- P136

아니, 강은성이 왜? 그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너를? 새로운 종류의 사회 환원인가? 아니면 신개념 불우 이웃 돕기?- P156

서른 해 가까이 살면서 그가 분명히 알게 된 것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아무리 밝고 긍정적인 것처럼 보이는사람도 제 몫의 어둠과 그늘이 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랫동안 꼭꼭 숨겨 두어서 자신조차도 그 모양과 깊이를가늠할 수 없는 마음의 우물을 누군가에게 열어 보인다는 건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었다.- P170

강은성이 엄마에게 꼼짝 못 하거나 휘둘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싫은 티를 냈고, 너는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면서 경멸의 시선을 던졌다. 강은성은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는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고 한 번도 그렇지않은 적이 없었는데 그는 강은성이 갑자기 그렇게 변하기라도한 것처럼 새삼스레 실망했다.- P188

아, 맞다. 너는 내가 부끄러운 게 아니라 너 자신이 부끄러운 거지. 내가 깜빡할 뻔했네, 네가 게이라는 걸 끔찍하게도 수치스러워한다는 걸, 밤에는 나랑 할 짓 못 할 짓 다 하면서 낮에는 나는 남자를 좋아한다기보다 사람을 좋아하는 거라는개소리나 지껄여 대는 비겁한 새끼라는 걸 내가 잊고 있었네.- P236

그들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어쩜 이렇게 다들 그대로일 수 있는 건지 의아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머리 모양도 옷차림도 그때와 비슷해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온몸으로 표현한 것만 같았다. 그들은 예상대로 그날의 아웃팅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했는데, 그건 게이인 너를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영영 안보고 살 수는 없으니 그냥 묻지도 말하지도 말자는 암묵적인강요였다.- P247

용진 씨가 이 프로젝트의 의의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단순히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싶은 게 아니라고, 추모를넘어 우리에 대해 쓰고 말하고 싶은 거라고. 자꾸 쓰고 말해서 우리가 우리를 수치스러워하는 일을 그만두고 싶은 거라고, 결국 내가 문제고 내가 잘못됐고 나만 사라지면 된다고결론짓는 일을 끝내고 싶은 거라고, 그 말이 저에게 절실히 와닿았던 것 같아요. 간절히 필요했던 거 같아요. 저 또한 용진 씨처럼 그 모든 것들을 멈추고 싶었으니까요. 나를 가두고 가로막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으니까요. 다행히 저는 기적적으로 그 방의 탈출구를 찾은 거예요. 그 남자는 끝내 찾지 못했지만, 저는 찾은 거예요.-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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