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협하지만 속시원한 돌직구에 감사하다.
그래도 너무 억지스럽게 갖다 붙여버린 ‘누구의 행운인가?‘에서 성추행범의 관용을 배푼 리더에게 성추행범이 충성을 다했다는 일화는 좀 아니지 않은가.


재벌가 오너들과 소상공인을 같은 사장으로 분류해서 공격하기엔 소상공인 사장들은 너무 체급이 작은 사회적 약자들 중 하나이다. 물론 약자라고 도덕적으로 청렴한건 아니지만 우리는 이들을 오너나 리더와는 좀 다른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존 롤스는 "누군가 노력해서 어떤 보상을 받았다고 해서 그가 그 보상을 당연히 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능력 있는 사람의 성공에는 공동체의 몫이 반드시 들어 있다"고 못박는다.

연예인 주신부자 5위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 해도 이 세상에서 단 하나는 가지지 못했다고. 그것은 바로 ‘없는 자의 마음‘이다.

우리나라의 명문 사학은 서양 선교사들이 헌금으로 세웠다. 그들은 자기 나라로 돌아갈 때 땡전 한 푼 받지않고 고스란히 한국민에게 학교를 기부했다. 가난하지만 배우려는 젊은이들에게 기거이 공부할 수 있는 터전을 내주라는 게 그들의 뜻이었다.

우리가 사장이 되고 대표가 되고 CEO가 되려는 이유는 일을 덜하기 위해서다. 특히 더럽고 욕된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다.

모 항공사 대표 가족은 사원들에게 욕되고 더러운 일을 시키는 게 아니라 사원들을 욕되고 더럽게 대한다. 강압과 폭력 혐의로 구속된 IT기업 대표는 욕되고 더러운 일을 시키는 것도 모자라 아랫사람을 욕하고 더럽게 취급한다.

부자아빠는 너때문에 부자가 되어야겠다라고 말하고 가난한 아빠는 너때문에 가난해졌다고 말한다.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서 간호조무사 김 모 씨와 재벌가 3세녀의 발언은 동등한 무게를 갖지 않는다.

내가 지독한 반기업 정서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반인간 정서를 가진 기업에 반대할 뿐이다. 우리가 가진 기업에 대한 이미지는 1960년대 이래로 형성된 친기업 정서뿐이다. 마치 기울어진 운동장과도 같다. 기업은 위에서 아래로 볼을 차고 사원은 아래에서 위로 볼을 찬다.

청년은 생물학적 나이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유연성 정도로 정의되어야 한다. 다라서 스무 살 노인이 있고 예순 살 청년도 있다. 정신이 말랑말랑한 젊은이는 마음이 열려있고 우애가 넘치며 편견이 없다.

빨갱이, 좌익, 계급이란 말을 하면 우루루 몰려오는 표들이 아직 있기 대문이다. 최상위 부유층과 역사공부를 할 시간이 없는 빈곤층, 역사 공부를 할 생각이 없는 중산층이 가진 표다. 보수파 의원들은 이들 중 부유층을 위해 봉사한다. 속아선 안 된다.

당신이 아무리 고상한 취미를 갖고 있고 아무리 드 높은 명예를 얻었다 한들 "당신 영봉은 얼만가?"란 물음 앞에서는 좌절하게 된다. 훌륭한 일을 해서 나라에서 훈장을 받았다 해도 그들의 "상금은 주나요?"라는 반응에 할 말을 잃게 되고 수십 권의 책을 슨다 한들 "부동산을 모르세요?"라는 구박 앞에서 쪼그라든다.

준다고 다 받으면 안된다. 나중에 탈이 난다. 애인이든 남친이든 여친이든 마찬가지다. 준다고 넙죽넙죽 다 받는 짓은 노예나 하는 거다. 누군가 나를 좋아해서 주는 것도 무조건 받으면 안 된다. 거지 근성이다. 무조건적 증여에 대한 무조건적 수취는 무조건적 종속을 낳는다.

정체성이란 뭔가? 스스로 깨닫기까지는 타인의 부름에 의해 규정되는 게 정체성이기도 하다. 장정일<생각>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 3루타를 친 줄 알고 살아간다."

세상의 가난은 개인의 태만 탓이 아니다. 부자들이 만들어 놓은 공고한 거미줄 때문이다.

"해외 출장을 자주 가니 좋겠다"같은 멘트는 해외에 나가는 게 평생소원이었던 불쌍한 중년들의 머리에서 나온다.

편안하고 이로운 데로 가고자 하고, 위험하고 해로운 것을 멀리하고 싶은 것은 사람의 평범한 감정이다. 지금 신하된 자가 힘을 다해 공을 이루고 지혜를 다해 충성하려 해도, 자신은 괴로운 처지에 놓여있고 집안은 가난에 허덕이며 아비와 자식은 모두 해를 입고 있다. 그런데 간사한 계략을 써서 이익을 차지하고 군주를 현혹하며, 뇌물을 바쳐 고관을 섬기는 신하들은 벼슬도 높아지고 집안도 부유해지고 아비와 자식이 모두 그 혜택을 누리고 있다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편안하고 이로운 방법을 버리고 위태롭고 해로운 길로 나아가려 하겠는가? -한비자

욕해야 포언이고 때려야 폭행이냐? 제멋대로 지껄이는 말이 폭언이고 집에 갈 시간이 되어도 못가게 하면 폭행이지.

역설적으로 21세기 한국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 끔을 이룰 수 있는 터전 자체를 제공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공평함은 분노와 배고픔만큼이나 오래된 본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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